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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5화

작가: 남희은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0-29 19:42:56
아침을 먹고 난 뒤, 아빠와 딸은 출근길에 올랐다.

선유를 데리고 사무실에 온 배현수는 간식과 음료수를 건네주며 말했다.

“아빠는 일하러 가야 하니까 심심하면 혼자 게임 하고 있어. 이따가 아빠가 시간 될 때 선유를 데리고 회사 구경 시켜줄게.”

“네! 아빠. 가서 일해요. 난 게임 하고 있을게요.”

선유가 메고 있던 작은 가방에는 태블릿 PC며 바비인형이며 예삐까지 가득 들어있었다.

배현수는 아침 회의가 비교적 많아 사무실에만 있을 수 없었다.

선유는 밖을 내다보았다.

아빠 회사가 엄청 크구나!

...

이른 아침, 그룹의 채팅창에는 난리가 났다.

「제기랄! 배 대표님께서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다니?」

「배 대표님은 다이아몬드급 솔로가 아니었어? 언제 결혼하셨지? 왜 난 몰랐던 거지?」

「내가 이렇게 중대한 소식을 놓치다니! 헐... 배 대표님이 유부남이었던거야?」

「보아하니 애가 5, 6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던데! 아니겠지, 아마 배 대표님의 조카 정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친척 집의 아이일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여러분, 그 아이가 배 대표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걸 내가 직접 들었다고요!」

「젠장... 미쳤어, 미쳤어! 아이 엄마가 도대체 누구야!」

「궁금해 죽겠어요, 실시간으로 정답 기다립니다.」

...

강이진이 채팅창을 열어 화면 가득 채운 소식들을 보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조유진이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게 아니었어?

이미 다 죽은 마당에 이렇게까지 떠들썩하다니!

다 속셈이 있었네 애를 낳아 현수형 곁에 두고는 현수형이 그 애를 볼 때마다 그녀를 생각하도록 평생 잊지 못하게!

여기까지 생각한 강이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몸을 일으켜 휴게실로 가 커피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복도에 둘러싸여 있었다.

“와, 귀요미! 너의 이름은 뭐야?”

“너의 고양이도 통통하니 잘 컸네? 너처럼 귀엽기도 하고!”

“귀요미, 너의 엄마는 누구니?”

“내가 듣기로 대표님께서는 꿈에 그리던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너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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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깜짝 놀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배 대표님 같은 다이아몬드 싱글을 거부하는 여자가 다 있어요?”“혹시 너의 엄마가 엄청 미인이야? 세상에 둘도 없는?”“도대체 어떤 여자가 대표님 같은 보석을 거부할 수 있을지 상상이 안 가네요.”강이진은 잔을 들고 옆에 서서 입꼬리를 올린 채 비웃었다. “거짓말은 나쁜 거야. 어려서부터 거짓말하면 안 돼.”“거짓말 아니에요.”선유는 고개를 돌려 강이진을 보며 말했다.강이진은 조롱하는 듯한 얼굴로... 선유를 바라보며 말했다.“너희 엄마는 죽었는데 현수 오빠가 어떻게 청혼해? 누구와 결혼할까? 귀신이랑 할까?”“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우리 엄마가 왜 죽어요? 저 이제 알 것 같아요. 이모는 우리 아빠를 좋아하지만 우리 아빠는 엄마만 좋아하고 이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엄마를 질투하는 거죠. 맞죠?”“하... 내가 죽은 사람을 왜 질투하겠니?”“이모 나빠. 우리 엄마 저주하지 마! 우리 엄마 안 죽었어!”어린 선유는 화가 나 얼굴이 상기된 채 강이진에게 소리쳤다.“이미 죽었는데 뭘 저주해. 못 믿겠으면 너의 엄마에게 전화해 봐. 받는 사람이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면 되잖아.”선유는 강이진의 앞으로 뛰어와 작은 주먹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여러 차례 때렸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강이진은 힘껏 그녀를 밀어냈다.선유는 바닥에 주저앉아 눈시울을 붉힌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그 모습에 강이진은 피식하고 비웃었다. “왜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표정을 짓고 있어. 내 말이 다 사실이라니까?”“선유야.”갑자기 낮고 차가운 위엄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놀라서 뿔뿔이 흩어졌다.배현수는 무릎을 굽혀 선유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누가 괴롭혔어?”선유는 작은 손으로 강이진을 가리켰다. “아빠, 저 나쁜 이모요. 엄마가 죽었다면서 날 바닥에 밀쳤어요!”그 말에 배현수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옆에 있던 강이진은 입술을 깨물며 낮은 소리로 중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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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복부 첫 장에는 ‘배’자가 가득 쓰여 있었다. 이게 다른 사람이 우연히 쓴 글자라면 뒷장으로 넘겼을 때는 선유라는 두 글자가 기복부 전체를 채웠다.이 세상에 이와 같은 우연은 절대 없을 것이다.현공민도 기복부를 보고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제가 잘못 가져왔네요. 이 기복부는 이미 다 쓰여 있네요. 새것으로 다시 가져오겠습니다.”현공민이 다시 가져가려고 할 때 배현수는 손으로 그것을 꽉 잡으며 물었다.“이 기복부를 쓴 사람이 조유진 씨 맞습니까?”현공민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 기복부를 쓴 사람을 아십니까?”“네, 이것은 틀림없이 그녀가 쓴 거예요.”현공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간절히 바라는 게 이 사람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맞습니다.”“저도 그 아가씨에 대해 인상이 깊어요. 아가씨가 산에 올라온 날도 오늘처럼 날이 어둑어둑해진 후였어요. 그녀가 세상을 포기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제가 몇 마디 타일렀었죠. 그러자 아가씨가 오랫동안 이곳에서 기복부를 쓰더라고요. 혹시 이 기복부에 쓴 ‘배’자가 당신 성씨인가요?”배현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글자가 쓰인 종이 위에 손을 갖다댔다. 현공민이 낮은 소리로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아가씨가 얼굴이 선하니 모든 일도 반드시 잘 풀릴 겁니다. 젊은 친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처럼 천천히 기다려 보세요.”배현수는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그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스님의 덕담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현공민은 새 기복부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조유진의 기복부를 들고 중얼거리던 배현수가 현공민을 보며 입을 열었다.“그녀의 글씨를 좀 더 보게 해주세요.”“그래요... 여기서 보고 계세요.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현공민이 자리를 떠나고 작은 방에 배현수 한 사람만 앉아 있었다.그는 한 페이지 가득 채운 ‘배’라는 글자를 보면 볼수록 가슴이 메여져 참을 수 없었다.그는 손가락으로 장마다 있는 자신의 이름과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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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암?순간 엄준과 한 선생은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한 선생이 먼저 입을 열었다.“검사는 해 봤어요?”조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그때 제가 흉부에 심각한 외상을 입어 정밀검사는 하지 못하고 흉부 X-ray 사진만 찍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저의 폐 상태가 좋지 않다며 병원에 입원해 정밀검사를 하라고 했는데... 그때 제가 다른 일이 있어서 병원을 더 가지 못했어요.”“그럼 이렇게 해요. 사진 다시 한번 찍고 필요하면 정밀검사까지 해서 지금 상태가 어떤지 확인합시다.”조유진은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눈빛은 그의 깊은 생각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엄준은 조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 씨, 당신이 어떤 병이든 나는 최선을 다해 도울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아무도 당신을 도울 수 없어요. 폐암이 아무리 치료할 수 있는 병이라 해도 당신이 죽기를 간절히 바라면 염라대왕이라도 당신을 구할 수는 없어요.”“엄 어르신, 구해줘서 고맙지만 저는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했어요...”“살아있는 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유진 씨, 당신은 잠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을 뿐이에요. 유진 씨는 아직 젊기에 무엇이든 해 볼 수 있잖아요. 유진 씨보다 훨씬 더 오래 산 내 말을 한번 믿어봐요. 세상을 살아가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는 거, 그리고 죽음은 비겁한 자들이 하는 선택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하늘이 우연한 기회로 당신을 구하게 했으면 분명 당신더러 이 세상을 더 살아가라는 의미예요. 유진 씨, 자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봐요. 방금 유진 씨가 말했던 살아갈 의미? 그건 당신이 살아야만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엄준은 최선을 다해 그녀를 타이르고 있었다.그의 양아들인 엄창민은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있는 조유진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당신은 아직 너무 젊어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쉽게 포기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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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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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5화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4화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3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2화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1화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0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59화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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