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여기에 왔었던 때가 벌써 6년 전이다.당시 배현수는 피고인석에 있었고 조유진은 증인석에 서 있었다.이번에도 그녀는 증인석에 서 있었지만 피고인석에는 배현수가 아니라 조범과 조영훈이 서 있었다.“유진아, 제발 바보짓 좀 하지 마. 배현수는 너를 속이는 거야.”“누나, 제발 나 좀 도와줘. 우리야말로 가족이잖아. 배현수 따위가 뭐라고!”조범과 조영훈은 그녀가 감싸주기를 바라며 애원하고 있었다.이들처럼 너무 많은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절대 뉘우치는 일이 없기에 조유진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판사가 판사봉을 두드렸다. “증인 조유진, 2017년 6월 6일 밤 10시,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날 밤, 차로 유성진을 치어 숨지게 한 가해자가 배현수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죠?”조유진은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흰색 휴대전화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2017년 6월 6일 밤 10시, 나와 배현수는 아신 에스테이트에서 셋집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날 그곳에서 생일을 축하하고 있었고 저녁에 저는 영상을 녹화해 소셜 계정 스토리에 업로딩 했지만 전체공유를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그 영상은 여전히 그 계정에 저장되어 있어 지금 바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조유진은 소셜 계정을 열었고 그 스토리를 클릭해 법정 안에 있는 사람들 앞에 공개했다.영상 속 조유진은 생일 모자를 쓰고 케이크 앞에 앉아 소원을 빌고 있었다.배현수는 그녀의 옆에 앉아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만약 이것도 증거로 채택되지 않으면, 아신 에스테이트 8동 1단지 902호의 집주인이자 실제 소유주인 도성주 씨를 찾아가 물어보시면 됩니다. 그날 밤, 도성주 씨가 월세를 받으러 우리 집에 왔기에 저는 배현수와 함께 도성주 씨를 만났습니다. 또한, 도성주 씨는 제 생일인 것을 알고 저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해주었습니다.”배현수도 이미 조유진이 말한 증인을 찾아 놓았다.사실 그때에도 배현수가 증거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증인과 증거 모두 가지고 있
쾅!“조용히 하세요!” 조범이 억울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판사님, 저는 진짜로 이 칼자국 흉터가 있는 남자를 모릅니다. 저 사람은 무조건 배현수가 일부러 저를 골탕 먹이기 위해 데려온 사람입니다. 저들은 이미 계획을 짜고 왔습니다.”칼자국 흉터가 있는 남자는 은행 송금 기록지를 꺼내 들며 말했다.“이것은 3년 전, 조범이 배현수를 죽이라고 했을 때 받은 보수입니다. 송금인은 조범 본인이 아니지만 조범 명의로 등록된 회사에서 보낸 것이고 저에게 급여 명목으로 송금했습니다. 저같이 중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전과도 있는 건달이 어찌 한 회사에 입사해서 한 달에 4천만 원씩 버는 업무를 할 수 있겠습니까?”칼자국 흉터가 있는 그 남자는 은행 명세서를 증거로 제출했다. 조범은 죄질이 악랄하고 이런저런 사건에 너무 많이 연루된 데다 신분이 특수하고 죄를 인정하지 않아, 당분간 재판 결과를 선고할 수 없다.쾅!“오늘 1심 재판은 여기까지입니다. 제출한 모든 증거는 최대한 빨리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2심 재판 시간은 법원의 통보를 기다리세요.”곧 법정 안에 있는 직원이 조범을 데려갔다.조범은 조유진 옆을 지나가며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조유진, 잊지 마. 너는 성이 조씨야. 지금까지 조씨 집안에서 너를 키웠어. 그런데 감히 친아버지를 팔아먹어? 배신자! 너는 지옥에 가서 두 번 다시 환생을 못할 거야!”이 한마디의 저주는 악랄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조유진은 신경 쓰지 않다.6년 전, 법정에서 가짜 증언을 할 때 그녀는 이미 지옥에 있다고 생각했다.오늘 다시 법정에 서서 정확한 진술을 함으로써 그녀는 드디어 자신을 옭매어 있던 죄책감에서 벗어났다. 만약 환생이 있다면 그때는 사람이 아니라 한 줌의 모래로 태어나 바람 따라 자유롭게 이 세상을 만끽하고 싶다. 1심이 끝난 후, 조유진이 법원에서 나오자 많은 기자들이 순식간에 우르르 몰려왔다.“조유진 씨, 부잣집 딸로서 6년 전에 아버지를 도와 거짓 증언을 하고 6년 후에 진술을 번복하
“배 대표님, 조유진 씨가 아직도 원망스럽습니까? 대답해 주세요.”배현수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6년 동안 그녀를 미워했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놓아주고 싶어요.”배현수의 눈빛은 깊은 바다처럼 쓸쓸하고 고독해 보였다. ...충남 법원을 떠난 후.조유진은 뒷좌석에 타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입을 열었다.“서 비서님, 버스정류장까지만 데려다주세요.”“유진 씨, 저를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 배 대표가 오늘 꼭 유진 씨를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얘기하셨어요. 1심 재판이 이제 막 끝나 충남이든 대제주시든 아직 이 일 때문에 온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요. 유진 씨도 당분간은 기자들 눈에 띄지 않도록 외출을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서정호는 백미러로 조유진을 힐끗 보더니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유진 씨, 이런 말씀 드리는 게 맞을지 모르겠는데... 유진 씨와 배 대표는 당사자이고 저는 외부인입니다. 당사자가 아니어서 제가 왈가왈부 할 수는 없지만 오래 살다 보니 경험이 많이 쌓였어요. 가끔 어떤 일들은 너무 집착하다 보면 나와 주위 사람을 다치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많은 걸 내려놓으려고 해요. 물론 어떤 일들은 당장에는 이해하기 어렵고 해결하지도 못하지만 시간이 약이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니까 저도 모르게 다 내려놓게 되었어요..”“서 비서님, 얘기해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다시 그때로 되돌릴 수는 없는 것 같아요...”조유진은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화해하고 싶어도, 시간이 가장 좋은 치료 약이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다.갑자기 가슴을 세게 한 대 맞은 듯한 통증에 조유진은 가슴을 움켜쥐었고 얼굴은 핏기없이 하얗게 질렸다.“유진 씨, 어디 불편하세요?”그녀는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조금 멀미를 하나 봐요.”“그럼 창문을 열 테니 바람을 좀 쐬세요. 그래도 힘들면 차를 세울게요.”“네
한편, 배현수는 기자들을 떨쳐내고 육지율의 차에 올라탔다.대제주로 향하는 길.육지율은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속이 다 시원하네! 마음속의 억울함을 다 씻어낸 기분이 어때? 오늘 밤 술 한잔 하면서 축하라도 해야지 않아?”배현수가 한때는 꿈에서라도 오점을 씻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라는 바를 이뤘음에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그냥 그래.”오히려 기분이 잡쳤다.그때 육지율의 휴대폰이 울렸다. 남초윤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육지율은 바로 스피커 모드로 돌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내일 유진이랑 서해로 놀러 가기로 약속했어요. 내일 저녁에는 돌아오기 어려울 것 같아요. 엄마에게 알려주세요. 그리고 다음 주 토요일에 본가로 가서 식사하려고요.”“유진이랑 서해에 놀러 간다고요?”“네, 왜요? 같이 가고 싶어요?”육지율은 배현수를 힐끗 쳐다보았다.“나야 상관없지만... 배 대표님이 가실지 모르겠네요.”“대표님? 설마요. 지금 유진이와 사이가 서먹서먹한데 배 대표님이 오면 유진이가 맘 편히 놀지 못할 것 같은데요. 요즘 기분이 별로거든요. 거기다 대표님이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이면 분위기만 망치고...”배현수는 그들의 통화를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그 순간, 갑자기 배현수가 끼어들어 말했다.“저는 안 갈게요. 다들 재미있게 놀아요.”그도 조유진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남초윤이 전화 건너편에서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아... 하하, 대표님도 계셨네요.”스피커 모드라고 귀띔이라도 해주지, 육지율 이 나쁜놈! 배현수를 무뚝뚝한 표정이라고 험담했으니...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겠지? 남초윤은 부랴부랴 전화를 끊었다.육지율이 물었다.“진짜로 안 가려고?”“가려면 너나 가,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배현수는 한껏 쌀쌀맞게 말했고 육지율이 받아쳤다.“남자는 나뿐인데 여자 두 명이나 데리고 가라고? 호텔에 가면 우리 셋이 나쁜 짓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배현수는 차에 걸터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네
그럼, 지금은?“선유야.” “응?”조선유는 먹고 있는 물만두를 쳐다보며 머리를 갸유뚱했다. 사실 속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걱정이 앞섰다.“아빠가 엄마와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물론이죠! 자식이라면 누구나 부모님과 같이 있고 싶어 하죠. 아빠, 왜 그렇게 당연한 말만 해요?”조선유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투덜댔지만, 배현수의 안색은 점차 어두워졌다.“그렇지만, 네 엄마가 아빠랑 같이 있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네.”조선유는 반짝이는 눈망울로 응원했다.“아빠, 그럼, 직접 물어보세요! 물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엄마 마음을 알아요?”배현수의 미간이 움찔하더니 일어서며 말했다.“먼저 밥 먹고 있어, 아빠는 올라가서 처리할 일들이 있어. 선유가 말한 건 아빠가 고민 좀 해볼게!”배현수는 서재로 와서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검은색 벨벳으로 된 작은 박스가 있었다.박스를 열어보니 안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었다. 핑크 다이아몬드였다.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는 눈부시게 영롱했고 아름다웠다.조유진의 손에 끼워주면 더 이쁠 텐데...이제 와 보니 조유진은 그에게 모든 걸 다 줬는데, 오히려 배현수가 그녀에게 턱없이 부족했다.그녀가 원한다면... 남은 생은 조유진을 위해 살아가겠노라 다짐했다....그날 밤, 조유진도 잠에 들지 못했다.불면증으로 시달린 지 며칠째, 그저 창가에 앉아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날들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그날 오후, 남초윤이 찾아왔다.남초윤은 안색이 좋지 않은 조유진을 걱정하며 말했다.“유진아, 너 요즘 밥 제대로 안 먹고 있지?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얼굴도 반쪽이 됐네.”“응, 입맛이 없어서 그래. 오늘 저녁에 서해로 가게 되면 맛있는 고깃집을 알아봐 줘.”“그래, 네가 위도 안 좋은데 고기 먹을 수 있겠어?”조유진은 웃으며 말했다.“고기는 당연히 먹어야지, 술도 먹을 수 있는걸? 걱정하지 마.”서해로 가는 동안 남초윤은 얘기가 끊이지 않게 화제를 내놓았다. 우울
그녀들은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서해에 도착했다.노을로 물든 수평선은 마치 오렌지를 머금은 바다를 방불케 했다.출렁이는 파도가 초석에 부딪히고 갈매기가 모래밭과 바다 위에서 맴돌고 있다.조유진은 신발을 벗고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모래밭을 지나 옅은 바닷가 쪽으로 향했다.차가운 바닷물이 다가와 그녀의 발과 종아리를 감싸 안았다. 남초윤은 재미있어하는 조유진에게 핸드폰을 꺼내 들며 말했다.“이쁘지? 우리 사진 한 장 남기자.”“그래.”휴대폰의 카메라 기능을 켠 남초윤은 조유진의 몸을 감싸고 머리를 맞대고 카메라를 보면서 웃었다.“찰칵.”그렇게 둘은 우정 사진을 찍었다.조유진은 맨발로 모래밭을 거닐면서 산호와 떠다니는 신기한 조개들을 줍고 있었다. 그녀의 딸, 선유에게 가져다주면 좋아할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한참이나 바닷가에서 놀던 그녀들은 이내 시내의 고깃집으로 향했다. 이쪽은 바다를 끼고 있다 보니 고깃집에서도 신선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었다. 남초윤은 엄청나게 많은 메뉴를 주문하고 맥주도 함께 주문했다.하지만 조유진은 알코올 알레르기 때문에 주스를 주문했다.남초윤이 맥주병을 따는 순간 조유진은 갑자기 컵을 들이 밀며 말했다.“나도 마실래.”“너 알코올 알레르기 때문에 안 되잖아.”“내가 항알레르기제 챙겨왔어. 맥주 한두 잔 정도는 괜찮아. 네가 마시니까, 나도 마시고 싶잖아.”남초윤이 피식하고 웃었다.“딱 두 잔이야, 그냥 분위기만 내라고!”“짠!”컵에서 맥주 거품이 넘쳐 나올 정도로 술잔을 부딪쳤다.조유진은 잔 속의 맥주를 꿀꺽꿀꺽 한 모금에 모두 마셨다.“참! 빨리 마시지 말라니까...”그녀는 말하기 바쁘게 이미 잔을 비웠다.“초윤아, 최근 몇 년 동안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이 한잔은 너를 위해. 정말 너무 공교롭게 너라는 좋은 친구를 곁에 둘 수 있어서 참 행운이야. 그동안 항상 옆에서 지켜주고 응원해 줘서 너무 고마워.”“갑자기 왜 이런 말들이야, 내가 이런 낯간지러운 말 안 들어준다고 그러
때문에 그녀는 일출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그런 힘든 시간 속에서 조유진은 수많은 생을 마감하려는 시도했다.조유진은 남초윤을 호텔까지 부축하면서 반사적으로 한마디 했다.“초윤아, 이제는 좀 신중해져 봐. 이혼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다니지 말고.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난 다 알아. 자꾸 그런 얘기를 꺼내면 지율 씨가 진짜로 오해할 수도 있잖아.”“음... 이혼이라. 이혼하면 얼마나 홀가분할까.”“그리고 마음에 없는 소리 좀 그만해. 지율 씨도 그런 얘기 자꾸 듣다 보면 상처받는다고.”“상처를 받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유진아, 너는 무슨 유언처럼 말을 남기냐. 이젠 그 얘기는 그만, 쉿...”조유진은 그녀를 이끌고 호텔 방으로 갔다.남초윤은 푹신한 침대 위에 털썩 쓰러지다시피 누우면서 이불을 끌어안았다.조유진이 옆에서 허리 숙여 신발을 벗기자 남초윤은 가벼워진 발을 보고는 이불속에 파묻혀 웃었다.“히히, 그래도 조유진 네가 최고야! 유진아, 나 화장도 지워줄래? 사랑해...”조유진은 가방에서 클렌징 워터와 화장 솜을 찾아 남초윤의 화장을 지워 주었다. 그리고 티슈로 얼굴을 깨끗하게 닦아 주었다.예약한 더블룸 덕분에 초윤은 누워서 자고 있었고 유진도 왼쪽에 누워 있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감싸고 있던 초윤의 팔에서 벗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이 오션뷰가 보이는 호텔 방은 끝자락에 위치한 데다 바닥까지 내려온 창문 덕분에 서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서해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바닷가 주변의 도로와 가파른 낭떠러지가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낭떠러지 위의 커다란 초원에는 여러 가지 알록달록한 꽃들이 피어 있었다.조유진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호텔을 나섰다....조유진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초윤의 휴대폰이 울렸지만 그녀는 깊은 잠에 빠진 나머지 처음에는 받지 못했다.전화벨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자 초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흐리멍덩한 채로 전화를 받아서 들었다.“여보세요? 누구야, 밤에
“초윤아, 네가 내 친구여서 너무 행운인 것 같아. 지금까지 내 옆에 있어 줘서 너무 고마워.”“그런 말 좀 하지 마! 네가 어디 있는지나 빨리 말해! 내가 찾아갈게! 배 대표님도 전화와 네가 어디 있는지 물었어. 분명 너에게 사과하려는 걸 거야. 지금 여기로 오고 있어!”남초윤은 뛰쳐나가면서 바다가 쪽으로 달려갔다.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달리다가 벼랑 끝 언저리에 하얗고 가녀린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유진아! 절대로 뛰어내리지 마! 내, 내가 널 봤어! 금방 갈게!”“이전에는 현수 씨가 용서해 주기를 바랬지만, 지금은 상관없어... 현수씨 와는 알게 된 순간부터가 실수였어. 처음부터 아빠 말대로 모르는 사람과 혼인하게 되었다면 비록 사랑하지는 않아도 지금처럼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아빠 말이 맞았어. 아빠 말대로 하지 않으면 대가가 따를 거라고.”“선유는! 너에게 아직 선유가 있잖아! 배 대표님을 포기해도, 나를 포기하더라도 선유는! 아직 그렇게 어린데 어떻게 엄마 없는 아이로 만드냐고!”조선유를 떠올리더니, 조유진도 몇초 동안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다시 웃으며 말했다.“선유야... 선유에게 미안하지. 하지만 이제 방법이 없어. 초윤아,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 한 번만 이기적이고 싶어. 미안해...”뚜... 뚜...유진은 전화를 끊어버렸고 초윤은 울면서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조유진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저녁의 바닷바람은 그녀의 치맛자락과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다.따스한 불빛이 비치는 바다 한가운데의 작은 섬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추억에 젖어 있었다.전에는 그녀도 엄마와 선유를 충남과 대제주를 떠나 세상과 동떨어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아마도 찾은 것 같다. 그녀는 휴대폰의 사진첩을 열어 대관람차에서 선유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풀밭에 내려놓았다.서해의 야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바로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그녀는 뒤돌아 저 멀리서 익숙한 그림자를 본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