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문에 그녀는 일출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그런 힘든 시간 속에서 조유진은 수많은 생을 마감하려는 시도했다.조유진은 남초윤을 호텔까지 부축하면서 반사적으로 한마디 했다.“초윤아, 이제는 좀 신중해져 봐. 이혼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다니지 말고.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난 다 알아. 자꾸 그런 얘기를 꺼내면 지율 씨가 진짜로 오해할 수도 있잖아.”“음... 이혼이라. 이혼하면 얼마나 홀가분할까.”“그리고 마음에 없는 소리 좀 그만해. 지율 씨도 그런 얘기 자꾸 듣다 보면 상처받는다고.”“상처를 받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유진아, 너는 무슨 유언처럼 말을 남기냐. 이젠 그 얘기는 그만, 쉿...”조유진은 그녀를 이끌고 호텔 방으로 갔다.남초윤은 푹신한 침대 위에 털썩 쓰러지다시피 누우면서 이불을 끌어안았다.조유진이 옆에서 허리 숙여 신발을 벗기자 남초윤은 가벼워진 발을 보고는 이불속에 파묻혀 웃었다.“히히, 그래도 조유진 네가 최고야! 유진아, 나 화장도 지워줄래? 사랑해...”조유진은 가방에서 클렌징 워터와 화장 솜을 찾아 남초윤의 화장을 지워 주었다. 그리고 티슈로 얼굴을 깨끗하게 닦아 주었다.예약한 더블룸 덕분에 초윤은 누워서 자고 있었고 유진도 왼쪽에 누워 있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감싸고 있던 초윤의 팔에서 벗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이 오션뷰가 보이는 호텔 방은 끝자락에 위치한 데다 바닥까지 내려온 창문 덕분에 서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서해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바닷가 주변의 도로와 가파른 낭떠러지가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낭떠러지 위의 커다란 초원에는 여러 가지 알록달록한 꽃들이 피어 있었다.조유진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호텔을 나섰다....조유진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초윤의 휴대폰이 울렸지만 그녀는 깊은 잠에 빠진 나머지 처음에는 받지 못했다.전화벨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자 초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흐리멍덩한 채로 전화를 받아서 들었다.“여보세요? 누구야, 밤에
“초윤아, 네가 내 친구여서 너무 행운인 것 같아. 지금까지 내 옆에 있어 줘서 너무 고마워.”“그런 말 좀 하지 마! 네가 어디 있는지나 빨리 말해! 내가 찾아갈게! 배 대표님도 전화와 네가 어디 있는지 물었어. 분명 너에게 사과하려는 걸 거야. 지금 여기로 오고 있어!”남초윤은 뛰쳐나가면서 바다가 쪽으로 달려갔다.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달리다가 벼랑 끝 언저리에 하얗고 가녀린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유진아! 절대로 뛰어내리지 마! 내, 내가 널 봤어! 금방 갈게!”“이전에는 현수 씨가 용서해 주기를 바랬지만, 지금은 상관없어... 현수씨 와는 알게 된 순간부터가 실수였어. 처음부터 아빠 말대로 모르는 사람과 혼인하게 되었다면 비록 사랑하지는 않아도 지금처럼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아빠 말이 맞았어. 아빠 말대로 하지 않으면 대가가 따를 거라고.”“선유는! 너에게 아직 선유가 있잖아! 배 대표님을 포기해도, 나를 포기하더라도 선유는! 아직 그렇게 어린데 어떻게 엄마 없는 아이로 만드냐고!”조선유를 떠올리더니, 조유진도 몇초 동안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다시 웃으며 말했다.“선유야... 선유에게 미안하지. 하지만 이제 방법이 없어. 초윤아,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 한 번만 이기적이고 싶어. 미안해...”뚜... 뚜...유진은 전화를 끊어버렸고 초윤은 울면서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조유진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저녁의 바닷바람은 그녀의 치맛자락과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다.따스한 불빛이 비치는 바다 한가운데의 작은 섬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추억에 젖어 있었다.전에는 그녀도 엄마와 선유를 충남과 대제주를 떠나 세상과 동떨어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아마도 찾은 것 같다. 그녀는 휴대폰의 사진첩을 열어 대관람차에서 선유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풀밭에 내려놓았다.서해의 야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바로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그녀는 뒤돌아 저 멀리서 익숙한 그림자를 본
그 때문에 그녀가 뛰어내린 것은 이미 마음먹은 일이었다. 이제 더는 살고 싶지 않아서였다.배현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뻣뻣했던 등이 축 처져있었다. 언제부터 조유진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지난번 지리산 호수에 갔을 때도, 그녀가 호수 가까이 다가가더니, 그때부터 자살을 생각했던 것일까?그는 계속 자신이 선유의 부양권을 뺏은 것 때문에 그녀가 잠시 힘들어하는 거라 여겼다.하여 그는 한 주에 한 번 선유를 만날 수 있다고 그녀에게 약속했다. 그렇게 하면 다시는 나쁜 생각은 하지 않을 거라고... 배현수가 그녀를 용서해 주기를 바라서라고 생각했는데...그러나 이 모든 건 단지 그의 추측일 뿐이다. 설령 그녀가 그를 원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선유조차 버릴 생각을 했단 말인가?배현수는 두 눈이 빨개진 채로 무릎을 꿇고 온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이미 그녀를 용서한 지 오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미...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계획도 있었다.어째서, 그들은 계속해서 어긋나는것일가...배현수가 기쁨으로 가득 차 그들의 멋진 미래를 그리려 할 때, 그녀는 차갑게 돌아서며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배현수가 그녀를 미워하고 있을 때 그녀는 도리어 돌아와 용서를 구하려 했다. 원망을 내려놓고 조유진을 용서하며 갇혀 있던 자신까지도 용서하려 할때에는... 그녀가 필요치 않아 했다. ...곧이어, 육지율과 해상 수색대가 도착했다.배현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초윤이 놀라서 낮은 소리로 육지율에게 말했다. “유진이가 뛰어내릴 때 대표님도 함께 뛰어내렸어요. 유진이를 찾지 못하고 바닷가에 올라 온 뒤로부터는 계속 저곳에서 무릎을 꿇고 있어요. 지율 씨도 저 사람... 아니 대표님이 미친것 같아 보이죠?”오늘 밤, 남초윤은 두 사람이 함께 바다에 뛰어드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너무 놀란 탓에 혼이라도 가출한 것만 같았다. 육지율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초윤씨는 차에 가서 기다려요
소문을 들은 수색대 대장은 순간 멍해졌다.그러고는 육지율을 쳐다보았다...육지율이 말했다. “무조건 찾아야 해요. 살아있다면 사람을 찾고 죽었다면 시체라도 봐야겠어요.”“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수색대 대장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바다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밤바다에서는 거센 파도가 휘몰아쳤다.만약 사람이 뛰어들었다면 분명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 저만치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이미 3시간이나 지났기 때문에 그사이에 몇 번이고 휩쓸려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수색대의 수색작업은 밤늦게까지 계속 진행되었다. 새벽 4시가 넘은 시각, 바다 저편에서는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남초윤은 차에서 잠시 평정심을 유지한 후, 다시 바닷가로 갔다.그녀는 배현수의 멱살을 잡고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것이 대표님이 원하는 결과였어요? 유진이를 미워한 것도 모자라 괴롭히고 업계에서 몰살까지 당하게 하고 거기다 유진이를 나이트클럽에까지 내몰았잖아요! 대표님이 3년간 교도소에 있었다고 피해자인척하지만 유진이는요 유진이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요! 이젠 자기 목숨도 대표님에게 바쳤어요! 배현수 대표님, 이제 만족하시겠어요!”짝!남초윤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결국 손을 들어 배현수의 왼쪽 얼굴을 내리쳤다. 뺨을 맞은 배현수의 머리가 옆으로 돌아갔다.“남초윤!”육지율이 그녀를 막아섰다. 남초윤 자신도 너무 놀랐다. 그녀는 얼른 육지율의 옷소매를 붙잡고는 그의 뒤에 숨어버렸다.배현수가 설마 그녀를 죽이려고 하진 않겠지! 남초윤도 방금은...완전히 흥분한 바람에...그녀는 조심스레 배현수를 쳐다보았다...남자는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그녀에게 뺨을 맞았음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조유진이 뛰어내린 지도 벌써 6시간이 흘렀다. 수색대 대장이 다가와 말했다. “날도 밝아오는데 저와 저의 대원들도 열심히 수색해 봤지만 죄송하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그림
“정말 미쳤어! 배현수, 넌 이미 여기에서 밤새 무릎 꿇고 있었잖아. 선유가 이미 엄마를 잃었는데 아빠까지 없었으면 좋겠어!”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 선유가 아직 집에 있지. 아이는 아마도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유진이를 데려가야만 해...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산성별장의 유선전화번호였다.말하지 않아도 선유임이 틀림없었다.아주 잠시, 배현수는 도망치고 싶었다.육지율도 그의 낌새를 눈치챘다.“만약 네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내가 대신 받아줄 수도 있어. 이 일에 관해 잠시는 선유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하지만 배현수는 직접 전화를 받았다.전화 저편에서 선유의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엄마에게 한 프러포즈는 성공했어요? 엄마가 허락했어요? 엄마가 엄청 기뻐하죠? 핑크빛 다이아몬드 반지가 엄청 예쁘기때문에 엄마라면 무조건 좋아했을 거예요!” 그러게... 핑크빛 다이아몬드 반지는 너무 예쁜데, 조유진은 이젠 볼 기회조차 없어졌네. “선유야.”그는 머뭇거렸다.“네? 아빠 왜요? 엄마가 아빠를 거절했어요? 아빠 목소리가 왜 슬퍼 보이죠?”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정신을 번쩍 차리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가 아직 엄마에게 프러포즈를 못 했어, 선유가 너무 빨리 전화 걸었네.”“네? 아빠, 왜 아직도 프러포즈를 안 했어요? 엄마가 거절할까 봐 두려워서 아직도 말 못 한거죠?”배현수는 아무 감정 없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맞아, 엄마가 거절할까 봐 걱정돼서.”“하하... 아빠, 아빠도 겁쟁이네요! 아빠는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줄 알았어요!”그랬다. 그도 겁쟁이였다.그는 조유진의 죽음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조유진이 정말로 죽으면 선유는 어떡하라고, 그더러 어떡하라고? 앞으로의 긴 여생이, 안 봐도 뻔했다.그는 갑자기 동력이 사라졌다. 그러고는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아빠, 언제쯤 집에 돌아와요? 내가 어제저녁 뚱이를 안고 자면서 뚱이에게 부탁했어요. 엄마
배현수는 작은 약병을 손에 들고 소파에 앉았다. 이 약은 그가 출소한 후 한동안 계속해서 복용했던 약이었다.하지만 그는 조울증인데 뒤에 적힌 이름은 탄산리 약이었다.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 무렵, 휴대폰이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남초윤이었다.그는 전화를 받았다.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전에는 유진이가 나더러 얘기하지 말라고 해서 안 했는데 나중에 내가 볼 때 유진이도 괜찮은 것으로 보여 나도 이 일을 깜빡 잊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유진이가 바다에 뛰어든 건 아마도 우울증이 재발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대표님은 유진이와 신 선생님이 어떻게 알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대표님이 교도소에 들어간 후, 유진이는 계속 불행했어요. 너무 착해 빠져서 항상 자책하고 미안해했어요. 유진이가 비록 말은 하지 않지만 저는 느낄 수 있었어요. 6년 동안 그녀는 항상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왔어요. 3년 전, 유진이가 잠에 들지 못해 수면제를 과다 섭취했는데 다행히 제때 구조되어 병원에서 위를 세척한 적이 있어요. 그때 마침 신 선생님이 응급실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고 그렇게 한번 두번 검사받으면서 알게 된 거예요. 그들은 정말 아무 사이가 아니에요. 더해봤자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만약 유진이와 신 선생님 사이에 정말 뭔가 있다면 3년이 지났을 때는 벌써 아이까지 생겼을 수도 있다고요.”“유진이는 행복을 추구할 엄두도 내지 않았어요. 자기는 죄가 있다고 새로운 삶을 추구할 자격이 없다고요. 그때 아마도 유진이가 우울증이 있다고 진단받은 시기였던 것 같아요. 유진이는 계속 3년 전, 그녀가 대량으로 수면제를 복용한 것은 의도한 게 아니라고... 고의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때 당시에는 나도 곧이곧대로 믿었죠. 내가 생각해 봐도 유진이는 아직 선유가 어리기 때문에 죽으면 안 된다고 죽을 엄두도 못 낼 거라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 3년 전부터, 그녀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지도 몰라요.”“유진이는 18세 이전에는 비록 조씨
「2017년10월3일, 날씨 맑음. 곧 4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입덧이 너무 심한 탓에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다. 초윤이가 성남의 먹자골목에 가서 물만두를 사 왔는데 너무 맛있어 보였다. 요즘에는 계속 초윤이에게 부탁해 함께 산부인과에 다녀오곤 했다. 너무도 고마운 그녀에게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보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2017년12월31일, 큰 눈이 내림. 오늘은 해를 넘기는 마지막 밤이다. 원래는 그를 보러 가려 했지만 배가 너무 커져 버리는 바람에 들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도 더는 나를 만나고 싶지 않을 거야.」「2018년1월1일, 배현수, 새해 복 많이 받아. 새해 떡국을 만들어 교도관에게 들여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오랜 설득 끝에야 비로소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만든 떡국이라고 하면 당신은 아마도 버리고 말 거야.」「2018년2월12일, 비가 내림. 너무 귀여운 딸이다. 초윤이가 아이의 양엄마가 되어주기로 했다. 그녀는 아이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줄 거냐고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선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라고 조선유라 이름 지었다. 내가 나빴지. 우리 선유는 태어나서 아빠가 없으니.」「2018년6월6일, 날씨 맑음. 또 그날이 왔다. 미안하다는 말 빼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2018년 12월31일, 또 눈이 내린다. 선유가 10달이 되었다. 아이는 지금 옹알이를 시작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아마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다.」「2019년2월4일, 날씨 흐림. 설 전날이다. 선유가 엄마라고 불렀다. 그런데 내가 아빠라는 호칭은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아이가 아빠를 불러댔다. 만약 배현수가 들었다면 좋으련만. 그는 아직 모른다. 내가 딸이 있는지.」「2019년7월13일, 날씨 맑음. 나는 방송국에서 실습을 시작했다. 선유에게 분유를 사주려면 내가 노력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니니까.」「2019년8월6일, 비가 내림. 방송국에는 어떻게 꼰대 상사가 그리도 많을까? 뺨을 한 대 갈
폐암...배현수는 손끝이 하얗게 될 정도로 일기장을 꽉 쥐었다. 조유진의 매 한 글자, 매 한 마디가 마치 그의 심장을 격하게 때려 박는 것 같아 숨 쉬는것 조차 어려웠다.그가 곁에 없었던 6년 동안 그녀는 싱글맘이기도 했고 상사에게 해코지도 당하고 우울증을 견디기까지... 무엇보다 배현수가 더욱 안타까웠던 건 그녀가 단지 일기장에만 적을 수 있다는 사실.어쩌면 그녀가 기록하지 않은 마음 쓰라린 일들이 훨씬 많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아왔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일기장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더 읽을 용기가 없었다. 그녀의 한자 한자가 칼날이 되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끊임없이 그에게 사과하고 있었고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으며 끊임없이...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이런 미안함이 한 점 한 점 그의 살을 도려내는 것 같았고 그의 마음속 가장 연약한 곳을 마구 쑤셔대는 것만 같았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인천시의 유선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배현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기에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이 유선전화번호는 분명 인천시의 병원에서 온 전화다. 한달 전, 그에게 연락한 적이 있었다.그러나 전화건너편에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끊었었다.그때 당시 조유진은 그녀에 관한 그 어떤 일도 그가 관심갖는걸 원하지 않았기에 그는 그녀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조유진 씨 가족 되시나요? 지난번에도 전화드렸었는데 끊으셔서요, 조유진 씨의 폐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저희는 큰 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받고 치료받기를 권유하는 바입니다. 조유진 씨가 폐암인 건 가족분들도 다 알고 계시죠?”배현수는 입이 바싹 마르고, 목에는 솜덩이가 막혀있는 것처럼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여보세요? 듣고 계신가요?”“...”전화에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전화 반대편에서는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그러나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