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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화

Author: 남희은
last update Last Updated: 2024-01-01 19:00:00
「2017년10월3일, 날씨 맑음. 곧 4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입덧이 너무 심한 탓에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다. 초윤이가 성남의 먹자골목에 가서 물만두를 사 왔는데 너무 맛있어 보였다. 요즘에는 계속 초윤이에게 부탁해 함께 산부인과에 다녀오곤 했다. 너무도 고마운 그녀에게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보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17년12월31일, 큰 눈이 내림. 오늘은 해를 넘기는 마지막 밤이다. 원래는 그를 보러 가려 했지만 배가 너무 커져 버리는 바람에 들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도 더는 나를 만나고 싶지 않을 거야.」

「2018년1월1일, 배현수, 새해 복 많이 받아. 새해 떡국을 만들어 교도관에게 들여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오랜 설득 끝에야 비로소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만든 떡국이라고 하면 당신은 아마도 버리고 말 거야.」

「2018년2월12일, 비가 내림. 너무 귀여운 딸이다. 초윤이가 아이의 양엄마가 되어주기로 했다. 그녀는 아이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줄 거냐고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선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라고 조선유라 이름 지었다. 내가 나빴지. 우리 선유는 태어나서 아빠가 없으니.」

「2018년6월6일, 날씨 맑음. 또 그날이 왔다. 미안하다는 말 빼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2018년 12월31일, 또 눈이 내린다. 선유가 10달이 되었다. 아이는 지금 옹알이를 시작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아마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2019년2월4일, 날씨 흐림. 설 전날이다. 선유가 엄마라고 불렀다. 그런데 내가 아빠라는 호칭은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아이가 아빠를 불러댔다. 만약 배현수가 들었다면 좋으련만. 그는 아직 모른다. 내가 딸이 있는지.」

「2019년7월13일, 날씨 맑음. 나는 방송국에서 실습을 시작했다. 선유에게 분유를 사주려면 내가 노력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니니까.」

「2019년8월6일, 비가 내림. 방송국에는 어떻게 꼰대 상사가 그리도 많을까? 뺨을 한 대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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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암...배현수는 손끝이 하얗게 될 정도로 일기장을 꽉 쥐었다. 조유진의 매 한 글자, 매 한 마디가 마치 그의 심장을 격하게 때려 박는 것 같아 숨 쉬는것 조차 어려웠다.그가 곁에 없었던 6년 동안 그녀는 싱글맘이기도 했고 상사에게 해코지도 당하고 우울증을 견디기까지... 무엇보다 배현수가 더욱 안타까웠던 건 그녀가 단지 일기장에만 적을 수 있다는 사실.어쩌면 그녀가 기록하지 않은 마음 쓰라린 일들이 훨씬 많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아왔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일기장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더 읽을 용기가 없었다. 그녀의 한자 한자가 칼날이 되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끊임없이 그에게 사과하고 있었고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으며 끊임없이...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이런 미안함이 한 점 한 점 그의 살을 도려내는 것 같았고 그의 마음속 가장 연약한 곳을 마구 쑤셔대는 것만 같았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인천시의 유선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배현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기에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이 유선전화번호는 분명 인천시의 병원에서 온 전화다. 한달 전, 그에게 연락한 적이 있었다.그러나 전화건너편에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끊었었다.그때 당시 조유진은 그녀에 관한 그 어떤 일도 그가 관심갖는걸 원하지 않았기에 그는 그녀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조유진 씨 가족 되시나요? 지난번에도 전화드렸었는데 끊으셔서요, 조유진 씨의 폐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저희는 큰 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받고 치료받기를 권유하는 바입니다. 조유진 씨가 폐암인 건 가족분들도 다 알고 계시죠?”배현수는 입이 바싹 마르고, 목에는 솜덩이가 막혀있는 것처럼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여보세요? 듣고 계신가요?”“...”전화에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전화 반대편에서는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그러나

    Last Updated : 2024-01-01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192화

    선유가 그의 커다란 손을 잡을 때까지 배현수는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빠, 아빠 손은 왜 이렇게 차가워요?”그는 몸을 숙여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남자의 목젖이 침을 삼키며 몇 번이고 움직이더니 겨우 허스키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엄마가 아직은 나를 받아 줄 준비가 안 됐대.”선유는 작은 손을 들어 현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빠,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다음에 내가 엄마를 만나게 되면 내가 아빠 편에서 좋은 말 많이 할게요. 그렇다면 엄마도 마음이 약해져서 허락할 수도 있잖아요. 엄마는 아빠를 아직 좋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빠, 절대 포기하면 안 돼요.”배현수는 조유진의 미니 버전인 아이 얼굴을 그저 따뜻하게 바라볼 뿐이었다.그는 결국 눈시울이 붉어졌다. 참는 것도 잠시, 그는 그제야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그래.”“아빠. 왜 울어요?”“아무것도 아니야,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아, 그래요. 아빠, 저 졸려요, 내가 예삐를 안고 와 함께 자도 돼요?”“그럼.”선유는 통통한 예삐를 품에 끌어안고는 배현수에게 말했다. “아빠, 잘 자요.”“잘 자.”배현수는 거실에 서서 선유가 예삐를 안고 방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깊은 밤, 별장에는 작은 등불만이 켜져있다. 거실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그는 까만색 실크 소재의 작고 네모난 상자를 열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핑크색 다이아몬드가 그의 눈을 아프게 했다. 이 반지는 유명한 설계사인 오란드의 작품으로 이름은 ‘영원한 구속’ 이었다.디자인의 의미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히 구속되어 영원히 곁에 머물며 평생을 함께하기를 원한다는 뜻이였다.그러나 조유진은 다시는 이 반지를 낄 수 없게 되었다. 배현수의 손목이 꺾이며 손가락에 힘이 풀리자 반지는 자연스레 청아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굴러떨어졌다.그는 소파에 기대 끝없는 적막에 빠져 의기소침해하며 눈을 감고 그렇게 한참

    Last Updated : 2024-01-01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193화

    아빠와 딸은 그렇게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선유는 배현수의 무릎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배현수는 조심스레 일어나 아이를 안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선유는 그의 어깨에 기댄 채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냈다.“엄마...”그는 아이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고는 각양각색의 산호와 조개들로 꽉 채운 유리병을 아이의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이것은 조유진이 아이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현수는 서재로 향했다. 그러고는 다시 일기장을 펼쳤다.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언이 쓰여 있었는데 짧고도 간결한 단 한마디만이 적혀 있었다.“선유가 아빠와 함께 기쁘고 즐겁게 성장하기를 바랍니다.”단지 이 말 한마디뿐,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조유진이 사고가 있던 그 한 주 동안, 배현수는 매일 같이 9시에 정상 출근하고 10시까지 야근하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지냈다.너무나 안정된 정서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만 같았다. 조유진이 바다에 뛰어든 그날 밤, 수색대는 한밤중부터 다음 날 정오까지 열심히 수색했다.그 후, 배현수는 또 다른 수색 구조대를 불러 일주일간 수색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배현수가 지나친 우울감에 휩싸여 있을 걱정에 육지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저녁에 한잔하러 갈래? 이참에 이찬이까지 불러서 우리 셋도 한동안 뭉치지 못했잖아.”그는 머리도 들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 “나 야근해야 돼, 시간 없어.”“조유진의 장례식은, 언제 치르려고?”배현수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별 다른 일 없지? 없으면 나가, 나 회의 있어.”탁!육지율은 바로 배현수의 노트북을 닫아버리고는 그를 보며 말했다.“배현수. 너 언제까지 자신을 속일 거야? 네가 수색구조대까지 보내서 유진이를 찾아 나선 게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어. 그러나 지금까지도 시체를 찾지 못했잖아. 이래도 포기 못 하겠어?”배현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빤히 쳐다보며 한마디 한

    Last Updated : 202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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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사무실을 나서자 남초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대표님께서 유진이 장례식은 언제 치른대요?”“안 한답니다.”“뭐라고요?”전화에서 남초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지율은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현수는 지금 이미 미친놈이나 다름없어요. 유진이의 죽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거든요. 현수는 유진이가 죽지 않았는데 장례식을 왜 하냐고 하던데요?”“...”남초윤은 말이 없었다. 그래도 화가 났다. “대표님은 유진이 가는 길조차도 편히 못 가게 할 거래요? 장례식을 치르지 않으면, 무덤도 못 만들고 유진이는 평생 외롭게 살아왔는데 갈 때마저도 쓸쓸하게 허공에서 떠다녀야겠어요?”“나도 현수가 나쁜 생각 할까 봐 무서워요. 지금 현수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사람 같아요. 하지만 현수가 평온해질수록 그만큼 위험성도 높아지겠죠.”요 며칠 남초윤은 계속해서 조유진의 꿈을 꾸었다. 조선유가 진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슬퍼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배현수가 산성 별장에 도착한 건 밤 열 시 반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아직 잠에 들지 않은 선유는 치마 두 벌을 골라 몸에 갖다 대며 말했다. “아빠, 내가 내일 엄마 만나러 갈 때 어떤 치마를 입으면 좋을까요? ”조선유의 손에는 레몬색 노란 치마와 하얀색 치마가 들려져 있었다. 배현수는 선유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노란색 치마가 좋겠어.”“좋아요. 아마도 내일은 맛있는 것도 엄청 많이 먹을 텐데 하얀색을 입으면 쉽게 더러워지겠죠. 아빠, 아빠도 내일 저희랑 함께 갈 거죠?”배현수는 잠깐 망설이고는 대답했다. “선유야, 엄마가 내일 시간이 안 된대.”“하지만 엄마가 저랑 약속했어요! 저를 데리고 원숭이 보러 동물원에 간댔어요!”“엄마가 새로운 직장에 가서 요즘은 엄청 바쁠 거야. 윗분들께서 엄마더러 야근하래.”배현수의 얼굴에는 특별한 감정선이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평소에도 있을 법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조선유는 아직 어려 어른들의 깊은 속을 들여다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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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을 먹고 난 뒤, 아빠와 딸은 출근길에 올랐다.선유를 데리고 사무실에 온 배현수는 간식과 음료수를 건네주며 말했다. “아빠는 일하러 가야 하니까 심심하면 혼자 게임 하고 있어. 이따가 아빠가 시간 될 때 선유를 데리고 회사 구경 시켜줄게.”“네! 아빠. 가서 일해요. 난 게임 하고 있을게요.”선유가 메고 있던 작은 가방에는 태블릿 PC며 바비인형이며 예삐까지 가득 들어있었다.배현수는 아침 회의가 비교적 많아 사무실에만 있을 수 없었다. 선유는 밖을 내다보았다. 아빠 회사가 엄청 크구나!...이른 아침, 그룹의 채팅창에는 난리가 났다.「제기랄! 배 대표님께서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다니?」「배 대표님은 다이아몬드급 솔로가 아니었어? 언제 결혼하셨지? 왜 난 몰랐던 거지?」「내가 이렇게 중대한 소식을 놓치다니! 헐... 배 대표님이 유부남이었던거야?」「보아하니 애가 5, 6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던데! 아니겠지, 아마 배 대표님의 조카 정도?」「나도 그렇게 생각해. 친척 집의 아이일 가능성이 높아.」「하지만! 여러분, 그 아이가 배 대표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걸 내가 직접 들었다고요!」「젠장... 미쳤어, 미쳤어! 아이 엄마가 도대체 누구야!」「궁금해 죽겠어요, 실시간으로 정답 기다립니다.」...강이진이 채팅창을 열어 화면 가득 채운 소식들을 보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조유진이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게 아니었어?이미 다 죽은 마당에 이렇게까지 떠들썩하다니! 다 속셈이 있었네 애를 낳아 현수형 곁에 두고는 현수형이 그 애를 볼 때마다 그녀를 생각하도록 평생 잊지 못하게!여기까지 생각한 강이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그가 몸을 일으켜 휴게실로 가 커피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복도에 둘러싸여 있었다. “와, 귀요미! 너의 이름은 뭐야?”“너의 고양이도 통통하니 잘 컸네? 너처럼 귀엽기도 하고!”“귀요미, 너의 엄마는 누구니?”“내가 듣기로 대표님께서는 꿈에 그리던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너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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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깜짝 놀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배 대표님 같은 다이아몬드 싱글을 거부하는 여자가 다 있어요?”“혹시 너의 엄마가 엄청 미인이야? 세상에 둘도 없는?”“도대체 어떤 여자가 대표님 같은 보석을 거부할 수 있을지 상상이 안 가네요.”강이진은 잔을 들고 옆에 서서 입꼬리를 올린 채 비웃었다. “거짓말은 나쁜 거야. 어려서부터 거짓말하면 안 돼.”“거짓말 아니에요.”선유는 고개를 돌려 강이진을 보며 말했다.강이진은 조롱하는 듯한 얼굴로... 선유를 바라보며 말했다.“너희 엄마는 죽었는데 현수 오빠가 어떻게 청혼해? 누구와 결혼할까? 귀신이랑 할까?”“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우리 엄마가 왜 죽어요? 저 이제 알 것 같아요. 이모는 우리 아빠를 좋아하지만 우리 아빠는 엄마만 좋아하고 이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엄마를 질투하는 거죠. 맞죠?”“하... 내가 죽은 사람을 왜 질투하겠니?”“이모 나빠. 우리 엄마 저주하지 마! 우리 엄마 안 죽었어!”어린 선유는 화가 나 얼굴이 상기된 채 강이진에게 소리쳤다.“이미 죽었는데 뭘 저주해. 못 믿겠으면 너의 엄마에게 전화해 봐. 받는 사람이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면 되잖아.”선유는 강이진의 앞으로 뛰어와 작은 주먹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여러 차례 때렸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강이진은 힘껏 그녀를 밀어냈다.선유는 바닥에 주저앉아 눈시울을 붉힌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그 모습에 강이진은 피식하고 비웃었다. “왜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표정을 짓고 있어. 내 말이 다 사실이라니까?”“선유야.”갑자기 낮고 차가운 위엄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놀라서 뿔뿔이 흩어졌다.배현수는 무릎을 굽혀 선유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누가 괴롭혔어?”선유는 작은 손으로 강이진을 가리켰다. “아빠, 저 나쁜 이모요. 엄마가 죽었다면서 날 바닥에 밀쳤어요!”그 말에 배현수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옆에 있던 강이진은 입술을 깨물며 낮은 소리로 중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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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이진은 자리에 똑바로 서서는 가지 않으려 했다. 강이찬이 그녀의 팔을 겨우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계속 소란을 피울 생각이야?”배현수의 옆을 지나갈 때 강이찬이 그를 보며 사과했다.“내가 돌아가서 잘 교육할게. 유진이 일은 나도 마음이 아파.”그들 남매가 떠난 후,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 있는 선유가 배현수의 눈에 띄었다.“아빠, 저 나쁜 이모 말이 사실이에요?”“아니야. 저 이모가 엄마를 질투해서 거짓말한 거야.”“그럼, 엄마에게 전화해야겠어요. 엄마 보고 싶어요...”선유는 바로 팔목을 들어 손목에 찬 작은 손목시계로 조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선유야...”선유가 전화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전화기 너머로 이미 통화연결음이 들렸다.그리고 조유진의 핸드폰이 배현수의 정장 바지 주머니에서 울리기 시작했다.선유는 자리에 멍하니 선 채 그를 바라봤다. “아빠, 엄마에게 전화 걸었는데 왜 아빠 핸드폰이 울리는 거예요?”배현수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엄마가 정말 죽었어요?”배현수는 휴대전화가 울리도록 내버려둔 채 무릎을 굽혀 선유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는 손을 올려 선유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선유야, 저 나쁜 이모 말을 믿을 거야? 아니면 아빠를 믿을 거야?”선유는 눈이 퉁퉁 부은 채 흐느끼며 대답했다.“아빠를 믿어요.” “아마 많은 사람이 저 나쁜 이모처럼 엄마가 죽었다고 할 거야. 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빠 생각에 엄마는 아직 살아있어. 선유야, 아빠 한 번만 믿어줄래? 아빠와 같이 엄마 오기를 기다리자.”선유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아빠를 믿어요. 그런데 엄마는 언제 돌아와요? 아빠가 엄마 찾으러 가면 안 돼요?”배현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몇 초 동안 침묵했다.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배현수는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약속할게. 반드시 엄마를 찾아오기로.”“정말요? 아빠, 그럼, 우리 깎지 걸어요.” 선유는 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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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제주시의 끝 여름은 비바람이 이는 날이 많다. 날 잡아서 산 중턱까지 왔을 때 하늘도 배현수에게 벌을 내리는지 갑자기 심한 폭우가 쏟아졌다. 조유진은 그때 바로 여기서 비를 맞으며 절을 하고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가며 그에게 용서를 빌었다.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배현수는 정말로 그녀를 용서해 주었다.어쩌면 마음을 다해 한 기도가 진짜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간절한 기도는 하늘도 감동해 들어줄 수 있다.배현수의 마음도 한 걸음씩 절을 하며 올라가는 계단에 더 깊어지고 간절해졌다. ... 지리산 사찰안.한 명의 제자가 황급한 걸음으로 뛰어가다가 현공민과 부딪힐 뻔했다.“뭐가 이렇게 급해?”“사부님, 산 아래에 한 사람이 빗속에서 무념무상인 얼굴로 한 층 한층 무릎을 꿇으면서 올라오고 있어요. 열심히 타일렀는데도 전혀 돌아가려 하지 않아요. 혹시라도 저희 사찰 문 앞에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돼요...”현공민은 눈썹을 한 번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우산 갖고 와봐, 내가 내려가 볼게.”...노란색 우산이 배현수 머리 위로 가려지며 차가운 비바람을 막았다.현공민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젊은 친구, 왜 이렇게 비바람을 맞으며 무릎을 꿇고 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요?”“네, 간절히 바라는 일이 있습니다.”훤칠한 젊은이는 온몸으로 상위자의 기세를 내뿜고 있었고 흐르는 귀티로 봐서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현공민은 이런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는 것은 정말로 이루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현공민은 눈을 똑바로 뜨고 물었다.“생사와 관련된 일일까요?”“그녀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어요.”그 말에 현공민이 깜짝 놀라 물었다.“그녀가... 죽었나요?”“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젊은 친구, 당신은 혹시 불교를 믿나요?”배현수는 계속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체념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안 믿어요.”현공민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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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6화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5화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4화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3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2화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1화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0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59화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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