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은 시내보다 날이 더 빨리 어두워졌다.조유진이 산꼭대기에 있는 정취암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7시가 되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조유진은 부처님 앞에서 두 손 모아 합장을 하고서 염원을 담아 소원을 빌었다.조선유가 무탈하게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랐고 또 배현수가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새로운 시작을 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세 번째 소원으로는 안정희가 건강하게 말년을 보내다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딱 이 세 가지 소원만 빌었다.딸과 배현수, 그리고 엄마를 위해 기도했지만... 자신은 까맣게 잊었다.그렇게 무릎 꿇고 한참 동안 기도했다.이때 법의를 입은 한 스님이 걸어오더니 말했다.“오랫동안 여기 계신 것 같은데 무슨 고민이 있으신지요? 저희가 오늘 이곳에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부적을 하나 추첨할 기회를 드리지요.”조유진은 사실 이런 것을 별로 믿지 않았지만 죽게 된 마당에 혹시라도 부처님이 불쌍하게 여겨 소원을 이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여러 장 뒤집혀 있는 부적 중에서 한 장을 뽑아보더니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스님, 제가 운이 안 좋아서 별로 좋지 않은 부적을 뽑았나 봅니다.”스님은 부적을 확인하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했다.“나쁜 부적을 뽑았다고 해서 운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쥐구멍에도 해 뜰 날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이는 것이 마음속에 응어리가 있군요. 가끔은 내려놓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미련을 많이 가질수록 욕심이 생기게 되고 따라서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스님.”“앞으로 인생에서 갈 길도 먼데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욕심을 버리면 마음속 응어리도 없어질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많으면 오히려 많이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무소유이기 때문에 욕심을 버려주세요.”조유진은 스님 따라서 중얼거렸다.“욕심을 버리면 마음속 응어리도 없어지니라...”“맞습니다.”조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그런데 스님, 저는
한밤중, 산속은 습한 데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조유진은 두 시간 가까이 호숫가에 앉아있었다.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서서히 호수 안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수심이 점점 깊어지고, 종아리까지 잠기던 물이 무릎까지 잠기게 되고...조선유가 호수 중심에서 웃으면서 엄마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너무 보고 싶어서 가까이 가서 안아주고 싶었다.그렇게 점점 더 수심이 깊은 곳으로 빠져들면서 허벅지까지 잠기게 되었다.이때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조유진!”조유진은 순간 정신을 차리더니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한 사람이 어둠 속에서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숨이 목젖까지 차올라 헐떡이면서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조유진은 그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그 남자가 입고 있던 검은 셔츠는 어둠과 함께 점점 빗물에 적셔졌다.성큼성큼 다가가기까지 조유진은 호수 안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가까이 다가와서야 누군지 똑똑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눈이 마주치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서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배현수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혼자 여기 있어?”“혼자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몰랐어요. 관광버스가 이미 떠난 줄도 몰랐어요.”“그럼 왜 호수에 빠진 건데?”“더워서요. 제가 더위를 못 견디는 거 아시잖아요.”조유진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듯이 아주 평온하게 대답했다.배현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고 싶어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렇게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현수은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더니 조유진의 손을 꽉 잡고 호수 밖으로 걸어 나갔다.두 사람은 온몸이 흠뻑 젖었다.배현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매주 선유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할게.”마지막 양보와 타협에 조유진은 동공이 흔들렸다.이때,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배현수의 차가 산 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배현수는 방 카드를 들고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고 조유진이 그 뒤를 따랐다.방에 도착해서야 야릿한 분위기의 인테리어라는 것을 확인했다.조유진은 물침대를 보더니 말했다.“저는 소파에서 잘게요.”침대를 양보하기로 했다.아무 말도 하지 않던 배현수는 흠뻑 젖은 그녀의 옷을 보더니 말했다.“먼저 따뜻한 물로 샤워해.”작은 모텔이라 시설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조유진은 어지러운 느낌에 후딱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고 샤워실에서 나오려던 순간, 가슴이 아파 나면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콜록콜록...”결국, 피를 토해내고 말았다.조유진은 세면대에 묻은 피를 보더니 동공이 확장되었다.고개 들어 거울을 보았을 때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배현수는 심각한 기침 소리에 샤워실 문을 두드렸다.“일회용 수건은 밖에 있어.”“네. 알았어요.”조유진은 얼른 물을 틀어 세면대에 묻은 피를 씻어내렸다.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몇 번이고 냉수 마찰해서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그렇게 어질어질한 상태로 욕실을 벗어나자 배현수가 마른 수건을 건넸다.“머리부터 말려.”방금 샤워해서 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수건을 받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가락을 터치하게 되었다.배현수는 이상하리만큼 유난히 차가운 그녀의 손 온도에 미간을 찌푸렸다.“어디 아파?”“아니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따뜻하고 건조한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니 심각하게 뜨거웠다.“열이 나?”조유진도 이마를 짚어보더니 맥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비 맞아서 감기 걸렸나 봐요. 한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배현수가 말했다.“얼른 머리부터 말려.”그녀가 욕실에서 드라이기를 꺼내왔을 때 배현수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그렇게 5분이 지나고, 체온계와 해열제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배현수는 체온계를 건네면서 말했다.“체온 재봐.”퉁명스러운 한마디는 명령 식으로 들렸다.하지만 조유진은 그런 그에게 놀라고 말았
더는 배신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아무나 자신을 배신할 수 있었지만 유독 조유진은 그러면 안 되었다.조유진은 그의 마음의 벽을 넘어서 완전히 그의 세계로 들어간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가 직접 그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고 더이상 아무에게도 열어줄 수가 없었다.“조유진, 이거 놔.”차가운 말투였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그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고개 들어 눈물을 머금고 키스했다.“나랑 서해 보러 가기로 했는데 아직 보러 못 갔잖아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면서 그 약속 지켜야 하는 거 아니에요?”배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유진아, 나 시험하지 마.”조유진은 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을 보고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웃으면서 말했다.“제가 언제 시험했다고 그러세요. 대표님도 느끼고 있는 거 아니에요?”배현수가 미간을 찌푸린 채 반박하려고 하자 그의 옷깃을 잡아당겨 고개 들어 또 키스했다.절망스러울 정도로 강렬하게 말이다.키스를 나누던 중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수 씨, 저 아직 사랑해요?”“뻔히 알면서 왜 물어. 조유진, 주제 파악 좀 해.”조유진은 피식 웃더니 그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방안의 불빛은 어두웠고, 그의 모습을 머릿속에 영원히 남기려고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그러다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괜찮아요. 나만 사랑하면 돼요...”상대방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혼잣말을 했다.조유진은 그에게 밀어낼 기회도 주지 않고 온 힘을 다해 키스를 퍼부었다.그의 몸이 굳어버린 틈을 타 침대까지 밀고 가더니 품에 안긴 채 함께 침대에 넘어졌다.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애써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오늘 밤만 지나면 다시는 볼 일이 없었다.주말에 선유와의 만남 후 충남 법원으로 가서 6년 전의 진상을 밝히려고 했다. 조범을 도와 거짓 증언으로 배현수를 용의자로 지목한 것을 말이다.그러면 대제주 대학교 법학과 배현수는 당당하게 사람들의 앞에 설 수 있었다.사랑에 빠졌을 때만 해
지리산 아래, 모텔 밖에는 비와 바람이 불고 있었다.커다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고 창문에는 습기가 차 있어 방안은 어둡고 습했다.작고 좁은 침대가 움직이고 있었다.배현수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가냘픈 손목을 침대에 누르고 있었다.두 사람은 깍지를 낀 채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조유진의 눈시울은 붉어 있었고 배현수를 등지고 있어 그의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힘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끝났을 때는 이미 새벽이라 밖은 점점 날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비도 멈추었다.조유진은 그의 옆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피곤한 몸을 이끌고 살금살금 침대에서 일어나 젖은 옷을 다시 입기 시작했다.배현수는 웃옷을 입고 있지 않았고 하체는 이불에 가려져 있었다.감옥에 있을 때 생긴 왼쪽 가슴에 남은 칼자국을 보더니 살며시 손으로 그 상처를 어루만졌다.투박한 상처가 이미 나았다고 해도 그 흉터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조유진은 고개 숙여 그 상처에 키스했다.아무리 미안하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 잘못인 것만 같았다.그리고는 또다시 배현수의 입술에 이별의 키스를 하더니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말았다.은반지가 걸려있는 목걸이를 벗었다.지난번 인천에서 대신 칼을 맞아 마음이 약해졌는지 반지를 다시 조유진에게 돌려주었다.하지만 그녀는 이 반지를 소유할 자격이 없었다.그 반지를 원래의 주인인 배현수의 베개 머리맡에 살며시 내려놓았다.이 반지로부터 시작된 인연을 이 반지로 끝내고 싶었다.더는 배현수, 그리고 조선유와 함께할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 동안 침대 옆에서 배현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떠나기 직전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문을 연 채로 뒤돌아 거의 흐릿한 마지막 모습을 기억에 남겼다.“현수 씨, 안녕.”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면서 조유진은 눈물을 닦아내고 모텔을 떠났다.영원함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고 잠깐이라도 행복했으면 되었다....다음 날 아침.배현수는 눈을 감은 상태로 무의식적으로
온정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내가 네 엄만데 모를까 봐? 너는 네가 고생해도 선유를 고생시키지 않는 애야. 아빠한테 가서 편하다고? 난 하나도 안 편해 보이는데? 유진아, 네가 무슨 결정을 하든 난 네 편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네가 손해 보는 일은 하지 마.”조유진은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애써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엄마 최고.”“얘는. 내가 모를까 봐? 너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느라고 맨날 자신은 뒷전이지. 몇 년동안 나도 돌보고 선유도 키우느라고 힘들었지?”“안 힘들었어. 엄마랑 선유만 행복하다면 난 그거면 충분해.”온정희도 눈시울이 붉어졌다.“선유는 안 울었어? 너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떨어졌대?”“엄마가 곁에 없어서 울고불고하는 것이 정상이에요. 며칠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현수 씨도 잘해주고, 선유도 현수 씨를 좋아해서 조금만 있으면 그렇게 슬퍼하지 않을 거예요.”“그러면 현수 씨랑은... 더는 가능성이 없는 거야? 그렇게 사랑했으면서. 유진아, 만약 말 꺼내기 어려우면 엄마가 대신 가서 빌어볼까? 그때도 나 때문에...”조유진이 말을 끊었다.“엄마,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거예요. 말 꺼내기 어려워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더는 저한테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 빌어봤자 소용없어요.”“어떻게 너한테 감정이 없을 수 있어? 너는?”조유진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도 별로 감정 없어요.”“또 거짓말. 분명 잊지 못했으면서.”조유진이 화제를 돌렸다.“엄마, 현수 씨는 이제 잊고, 요즘 건강은 어때요?”“난 괜찮아. 여기 있다 보면 외로울 때도 있지만 평온해서 좋아. 유진아, 자주 보러와야 해. 요즘 안 좋은 꿈을 꾸고 있는데 건강 조심하고 너무 무리하지 마.”온정희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당부했다.조유진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방에서 은행카드 하나를 꺼내 온정희 손에 쥐여주었다.“엄마, 이 카드 받아요. 얼마 들어있지도 않아요. 1400만 원 정도 있는데 전에 선유 삽입 수술 위해 모아
전화기 건너편에서 선유를 향한 배현수의 부드럽고 인내심이 넘치는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아빠는 내일 온라인 회의가 있으니 엄마랑 같이 가. 아빠가 서정호 아저씨보고 데려다 주라고 할게.”배현수의 말에 선유는 조금 실망한 듯 입을 삐죽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으나 다시금 기운을 차리고는 입을 열었다.“그래요, 아빠. 그럼 다음에 꼭 우리와 같이 가줘야 해요!”배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간단히 응하고는 더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선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계속하여 조유진과 통화를 이어갔다.“엄마, 우리 내일 몇 시에 만날까?”“음... 선유 아침에 일어날 수 있겠어?”선유는 아침에 늦잠을 자기 좋아했기에 항상 늦잠 때문에 학교에 가기 싫어했다. 그 때문에 선유의 카톡 아이디마저도 ‘학교 가기 싫어'였다.“학교에 갈 때는 못 일어나지만, 내일은 엄마와 만나는 날이기 때문에 8시에도 일어날 수 있어!”선유의 자신만만한 말에 조유진이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그러면 내일 8시에 만나자.”“오예! 내일이면 엄마 만날 수 있다! 엄마, 나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엄청 많아.”선유의 귀여운 목소리를 듣다 보니 조유진의 눈가가 점차 젖어 들기 시작했다.“엄마도 선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엄청 많아.”한참 동안 이어진 통화끝에야 전화 건너편의 녀석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겨우 전화를 끊을 수가 있었다.핸드폰 속에서 전화가 끊겼음을 알리며 울리는 ‘뚜-뚜-뚜’ 소리를 들으며 조유진은핸드폰을 손에 꼭 움켜쥐고는 오랫동안 전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조유진은 더는 이 세상에 별다른 미련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선유만큼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미련이었다.시간이 흐르고 조유진은 결국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고 계속하여 책상 앞에 앉아 유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펜을 들고나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녀에게는 더는 할 말조차 없음을 깨달았다.‘무슨 말을 하지? 배현수더러 선유 잘 부탁한다고, 선유 옆에
그들은 육개장과 떡볶이, 그리고 튀김을 주문했다.선유가 입에 기름칠을 가득 묻히고는 조유진에게 물었다.“엄마, 나 정말 아빠 친자식 맞아?”“뭐?”선유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유진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깜짝 놀라 물었다.“난 완전 수다쟁이인 데다가 떡볶이, 튀김을 좋아하는데 아빠는 집에서 종일 몇 마디 안 하신단 말이야. 엄마, 아빠 좀 비정상이지?”그 말에 조유진은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네 아빠는 성격이 줄곧 내향적이었어. 너와 아빠가 단둘이 집에 있을 때 심심하면 아빠한테 찾아가서 얘기해. 아빠가 놀아주실 거야.” “정말? 아빠는 마치 얼음장 같으셔서 아무 말 없이 혼자 앉아서 일하실 때는 엄청 무서워. 게다가 아빠는 다른 사람을 해고하기도 한다고. 엄마, 아빠가 나 해고해버리면 어떡해?”선유의 과장되고 천진난만한 얼굴을 바라보며 조유진은 푸흡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선유는 아빠 딸인데 아빠가 널 어떻게 해고하시겠어.”조선유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더니 팔짱을 끼고는 배현수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넌 이 일을 맡으면서 결과도 생각 안 해? 구체적인 방안이 어떻게 겨우 한 장짜리 계획일 수가 있어? 이 계획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을 거라고 보장할 수 있어?”녀석의 흉내는 제법 배현수의 모양새를 갖추었다.조유진이 배를 부여잡고 숨이 넘어갈세라 웃음을 터뜨렸다. 배현수가 집에서 일하는 모습이 눈앞에 훤히 그려지는 느낌에 도무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이어 선유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또 배현수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선유야, 거기 서서 뭐해? 저녁은 뭐 먹고 싶어? 잠자기 전 이야기? 난 그런 거 할 줄 몰라. 나 상대하기 싫으면 마음이 바뀔 때 다시 나한테 얘기해.”조유진은 너무 웃어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네 아빠가 너무 정직한 사람이라서 그래. 사람을 달랠 줄 모르거든.”조선유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작은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하... 아빠는 나와 이 몇 마디밖에 할 줄 몰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