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아래, 모텔 밖에는 비와 바람이 불고 있었다.커다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고 창문에는 습기가 차 있어 방안은 어둡고 습했다.작고 좁은 침대가 움직이고 있었다.배현수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가냘픈 손목을 침대에 누르고 있었다.두 사람은 깍지를 낀 채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조유진의 눈시울은 붉어 있었고 배현수를 등지고 있어 그의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힘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끝났을 때는 이미 새벽이라 밖은 점점 날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비도 멈추었다.조유진은 그의 옆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피곤한 몸을 이끌고 살금살금 침대에서 일어나 젖은 옷을 다시 입기 시작했다.배현수는 웃옷을 입고 있지 않았고 하체는 이불에 가려져 있었다.감옥에 있을 때 생긴 왼쪽 가슴에 남은 칼자국을 보더니 살며시 손으로 그 상처를 어루만졌다.투박한 상처가 이미 나았다고 해도 그 흉터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조유진은 고개 숙여 그 상처에 키스했다.아무리 미안하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 잘못인 것만 같았다.그리고는 또다시 배현수의 입술에 이별의 키스를 하더니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말았다.은반지가 걸려있는 목걸이를 벗었다.지난번 인천에서 대신 칼을 맞아 마음이 약해졌는지 반지를 다시 조유진에게 돌려주었다.하지만 그녀는 이 반지를 소유할 자격이 없었다.그 반지를 원래의 주인인 배현수의 베개 머리맡에 살며시 내려놓았다.이 반지로부터 시작된 인연을 이 반지로 끝내고 싶었다.더는 배현수, 그리고 조선유와 함께할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 동안 침대 옆에서 배현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떠나기 직전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문을 연 채로 뒤돌아 거의 흐릿한 마지막 모습을 기억에 남겼다.“현수 씨, 안녕.”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면서 조유진은 눈물을 닦아내고 모텔을 떠났다.영원함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고 잠깐이라도 행복했으면 되었다....다음 날 아침.배현수는 눈을 감은 상태로 무의식적으로
온정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내가 네 엄만데 모를까 봐? 너는 네가 고생해도 선유를 고생시키지 않는 애야. 아빠한테 가서 편하다고? 난 하나도 안 편해 보이는데? 유진아, 네가 무슨 결정을 하든 난 네 편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네가 손해 보는 일은 하지 마.”조유진은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애써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엄마 최고.”“얘는. 내가 모를까 봐? 너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느라고 맨날 자신은 뒷전이지. 몇 년동안 나도 돌보고 선유도 키우느라고 힘들었지?”“안 힘들었어. 엄마랑 선유만 행복하다면 난 그거면 충분해.”온정희도 눈시울이 붉어졌다.“선유는 안 울었어? 너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떨어졌대?”“엄마가 곁에 없어서 울고불고하는 것이 정상이에요. 며칠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현수 씨도 잘해주고, 선유도 현수 씨를 좋아해서 조금만 있으면 그렇게 슬퍼하지 않을 거예요.”“그러면 현수 씨랑은... 더는 가능성이 없는 거야? 그렇게 사랑했으면서. 유진아, 만약 말 꺼내기 어려우면 엄마가 대신 가서 빌어볼까? 그때도 나 때문에...”조유진이 말을 끊었다.“엄마,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거예요. 말 꺼내기 어려워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더는 저한테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 빌어봤자 소용없어요.”“어떻게 너한테 감정이 없을 수 있어? 너는?”조유진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도 별로 감정 없어요.”“또 거짓말. 분명 잊지 못했으면서.”조유진이 화제를 돌렸다.“엄마, 현수 씨는 이제 잊고, 요즘 건강은 어때요?”“난 괜찮아. 여기 있다 보면 외로울 때도 있지만 평온해서 좋아. 유진아, 자주 보러와야 해. 요즘 안 좋은 꿈을 꾸고 있는데 건강 조심하고 너무 무리하지 마.”온정희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당부했다.조유진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방에서 은행카드 하나를 꺼내 온정희 손에 쥐여주었다.“엄마, 이 카드 받아요. 얼마 들어있지도 않아요. 1400만 원 정도 있는데 전에 선유 삽입 수술 위해 모아
전화기 건너편에서 선유를 향한 배현수의 부드럽고 인내심이 넘치는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아빠는 내일 온라인 회의가 있으니 엄마랑 같이 가. 아빠가 서정호 아저씨보고 데려다 주라고 할게.”배현수의 말에 선유는 조금 실망한 듯 입을 삐죽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으나 다시금 기운을 차리고는 입을 열었다.“그래요, 아빠. 그럼 다음에 꼭 우리와 같이 가줘야 해요!”배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간단히 응하고는 더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선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계속하여 조유진과 통화를 이어갔다.“엄마, 우리 내일 몇 시에 만날까?”“음... 선유 아침에 일어날 수 있겠어?”선유는 아침에 늦잠을 자기 좋아했기에 항상 늦잠 때문에 학교에 가기 싫어했다. 그 때문에 선유의 카톡 아이디마저도 ‘학교 가기 싫어'였다.“학교에 갈 때는 못 일어나지만, 내일은 엄마와 만나는 날이기 때문에 8시에도 일어날 수 있어!”선유의 자신만만한 말에 조유진이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그러면 내일 8시에 만나자.”“오예! 내일이면 엄마 만날 수 있다! 엄마, 나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엄청 많아.”선유의 귀여운 목소리를 듣다 보니 조유진의 눈가가 점차 젖어 들기 시작했다.“엄마도 선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엄청 많아.”한참 동안 이어진 통화끝에야 전화 건너편의 녀석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겨우 전화를 끊을 수가 있었다.핸드폰 속에서 전화가 끊겼음을 알리며 울리는 ‘뚜-뚜-뚜’ 소리를 들으며 조유진은핸드폰을 손에 꼭 움켜쥐고는 오랫동안 전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조유진은 더는 이 세상에 별다른 미련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선유만큼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미련이었다.시간이 흐르고 조유진은 결국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고 계속하여 책상 앞에 앉아 유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펜을 들고나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녀에게는 더는 할 말조차 없음을 깨달았다.‘무슨 말을 하지? 배현수더러 선유 잘 부탁한다고, 선유 옆에
그들은 육개장과 떡볶이, 그리고 튀김을 주문했다.선유가 입에 기름칠을 가득 묻히고는 조유진에게 물었다.“엄마, 나 정말 아빠 친자식 맞아?”“뭐?”선유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유진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깜짝 놀라 물었다.“난 완전 수다쟁이인 데다가 떡볶이, 튀김을 좋아하는데 아빠는 집에서 종일 몇 마디 안 하신단 말이야. 엄마, 아빠 좀 비정상이지?”그 말에 조유진은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네 아빠는 성격이 줄곧 내향적이었어. 너와 아빠가 단둘이 집에 있을 때 심심하면 아빠한테 찾아가서 얘기해. 아빠가 놀아주실 거야.” “정말? 아빠는 마치 얼음장 같으셔서 아무 말 없이 혼자 앉아서 일하실 때는 엄청 무서워. 게다가 아빠는 다른 사람을 해고하기도 한다고. 엄마, 아빠가 나 해고해버리면 어떡해?”선유의 과장되고 천진난만한 얼굴을 바라보며 조유진은 푸흡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선유는 아빠 딸인데 아빠가 널 어떻게 해고하시겠어.”조선유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더니 팔짱을 끼고는 배현수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넌 이 일을 맡으면서 결과도 생각 안 해? 구체적인 방안이 어떻게 겨우 한 장짜리 계획일 수가 있어? 이 계획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을 거라고 보장할 수 있어?”녀석의 흉내는 제법 배현수의 모양새를 갖추었다.조유진이 배를 부여잡고 숨이 넘어갈세라 웃음을 터뜨렸다. 배현수가 집에서 일하는 모습이 눈앞에 훤히 그려지는 느낌에 도무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이어 선유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또 배현수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선유야, 거기 서서 뭐해? 저녁은 뭐 먹고 싶어? 잠자기 전 이야기? 난 그런 거 할 줄 몰라. 나 상대하기 싫으면 마음이 바뀔 때 다시 나한테 얘기해.”조유진은 너무 웃어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네 아빠가 너무 정직한 사람이라서 그래. 사람을 달랠 줄 모르거든.”조선유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작은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하... 아빠는 나와 이 몇 마디밖에 할 줄 몰
관람차가 천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선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관람 차를 타보는 것이었기에 기쁜 마음에 안절부절못하며 관람차 안에 앉아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한편, 조유진은 관람 차를 타자 배현수와 첫 데이트를 하던 날에도 관람 차를 탔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선유가 관람차가 가장 높은 곳에 다다랐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했다.이 말은 6년 전, 18살이었던 조유진도 굳게 믿었었다.당시 관람차가 정점에 다다랐을 때 조유진은 배현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그때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조유진은 그녀와 배현수의 연애가 반드시 결실을 보리라고 생각했었다.앞으로 그들은 결혼을 할 것이고 아이도 낳을 것이며 검은 머리가 파 뿌리 될 때까지 서로의 곁을 지키며 함께 할 것이다.와중에 웃긴 건 확실히 둘만의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바램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하지만 결혼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함께 하는 것... 곧 죽을 운명에 놓인 조유진에게 있어 여생이란 존재하지 않았기에 파 뿌리는 존재할 수가 없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관람차는 어느덧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선유가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더니 조유진의 볼에 쪽 뽀뽀를 하며 자신의 소원을 말했다.“엄마, 난 엄마가 영원히 내 곁에 있어 주셨으면 좋겠어.”영원히...선유를 바라보던 조유진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선유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동시에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조유진은 선유의 얼굴을 품에 묻고 턱을 그녀의 작은 고개 위에 기대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아가야, 앞으로 엄마가 곁에 없어도 항상 즐겁고 행복해야 해. 아빠가 조금 차갑고 말을 잘 안 하더라도 너무 미워하지는 마. 아빠도 선유 많이 사랑하니까 선유도 아빠와 잘 지내야 해. 표현하는걸 어려워할 뿐이지 아빠의 사랑도 결코 엄마보다 작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아빠한테 말하면 돼. 아빠는 엄청
조유진의 말을 듣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선유가 결국 타협했다.“그래. 내가 감자 갈비찜을 갖고 가서 아빠와 함께 먹을게.”그렇게 서정호가 선유를 데려가고 조유진은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선유가 없는 집안은 그저 쓸쓸하기만 했고 조유진의 마음 역시 텅 빈 것만 같았다....산성 별장 안. 선유가 한 손으로 러버덕을 끌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감자 갈비찜을 들고 돌아왔다.마침 배현수도 식탁 앞에 앉아있었고 그의 앞에는 풍성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아빠, 저 왔어요!”선유의 밝고 귀여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배현수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조선유는 천 주머니를 들고는 잔뜩 신이 난 모습으로 뛰어와 이 기쁜 소식을 배현수와 공유하기 시작했다.“아빠, 제가 엄청 맛있는 것을 가져왔는데 아빠 혹시 저녁 드셨어요?”“아직 안 먹었어. 너 기다리고 있었지.”음...선유는 사실 이미 저녁을 먹고 왔다.하지만 상관없었다. 야식으로 한 끼 더 먹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이건 뭐야?”“이건 엄마가 해준 감자 갈비찜이에요. 엄청 맛있어요! 아빠, 제가 특별히 아빠와 함께 먹으려고 갖고 온 거예요. 빨리 드셔보세요.”배현수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기대로 가득 찬 선유의 얼굴에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결국, 배현수는 어쩔 수 없이 젓가락을 들어 감자 하나를 집어 들 수 밖에 없었다.오랜시간 끓인 듯 감자는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아빠, 맛있어요?”“응. 맛있어.”“그럼 갈비도 하나 드셔보세요.”그렇게 배현수는 갈비도 하나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갈비 위에 붙은 고기가 매우 감칠맛이 돌았다.예삐도 고기 향을 맡고는 우아한 고양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선유가 치즈 고양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예삐야, 너도 감자가 먹고 싶어?”‘야옹.’ 예삐는 고기가 먹고 싶었다.“하지만 안돼. 이건 엄마가 아빠 드시라고 만들어 주신 거란 말이야. 넌 먹으면 안 돼.”선유의 말을 듣자 배현수의 동공이 잠깐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눈빛이 변했다.그때
1호동, 대표 사무실.서정호는 마케팅 부문 과장의 전화를 받은 뒤 황급히 문을 박차고 사무실 내부로 달려갔다.“대표님, 아가씨께서 사직서를 내셨다고 합니다.”책상 위에 쌓인 서류에 고개를 파묻고 일에 집중하고 있던 배현수의 눈빛이 흠칫 떨렸다.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배현수는 시선을 컴퓨터 모니터에 고정한 채 미지근한 어투로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항상 제멋대로 오고 가고 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젠 놀라울 것도 없어.”“그럼... 아가씨께서 퇴사하시려는 일은...”“신경 쓰지 마.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둬.”보름 전부터 조유진은 배현수의 눈 밑에서 대놓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한 사람의 마음이 이미 이곳을 떠났는데 상대방의 몸을 붙잡아 두고 있는 건 헛수고와 다름없었다.서정호는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회사대표의 속내를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전임 마케팅 부서 과장인 진우민이 사고를 친 후 배현수가 직접 나서 새로운 과장을 뽑아 마케팅 부서에 파견했다.그러고는 당시 마케팅 부서 직원들을 달래주기 위함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했었다.하지만 고위층도 아닌 마케팅 부서의 일개 과장일뿐일 텐데 배현수가 굳이 직접 나서서 뽑았어야 했는지가 의문이었다.배현수의 선택 속에 대체 얼마나 많은 본인도 알아채지 못한 사심이 들어갔을지는 서정호도 알 리가 없었다.새로운 과장이 선임한 뒤부터 조유진의 회사생활은 말 그대로 정말 평화로워졌다.그런데 조유진이 지금 퇴사를 하려는데 배현수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하지만 이 또한 결국 배현수의 개인감정이었기에 외부인인 서정호가 곁에서 왈가왈부 할 처지는 되지 못했다. 서정호가 사무실을 나가고 컴퓨터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배현수의 시선이 점차 초점을 잃어가더니 그대로 허공에서 흩어졌다.그렇게 결국 멍하니 그 자리에서 한참 멍을 때렸다.배현수는 노트북을 덮고 책상 서랍을 열어 담배 한 갑을 잡으려 했다.그러자 서랍 안에 놓여 있던 전에 찢어놓았다가 다시 붙인 작은
조유진의 강력한 요구에 배현수는 그녀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그 후 그들은 헤어지게 되었다.조유진은 당시 배현수가 보냈던 음성 메시지들을 전부 녹음해 두어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었다.귀에 걸어놓은 이어폰 속에서 배현수의 부드럽고 인내심이 깃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아직 안 끝나서 좀 이따 데리러 갈게.”“왜 갑자기 배가 아플까? 지금 바로 갈게.”“조개구이가 먹고 싶다고? 저녁에 갈 때 사서 갈게.”“자기야, 자기가 좋아하는 밀크티 사 왔어. 잠깐 내려와 봐.”...당시 사소한 일상들이 조유진의 눈시울을 붉혔다.조유진은 한참 동안 녹음을 듣다가 마지막 음성 메시지를 클릭했다.“자기야, 나 사랑해?”“응. 사랑하지. 엄청나게 사랑해.”“유진아, 나 이제 너밖에 없어. 날 떠나지 마.”“자기야, 난 자기가 갖고 싶은 거 다 줄 수 있어. 조금만 시간을 주면 이 세상의 모든 걸 다 가져다줄게.”이건 배현수가 한 번 술에 취해 조유진을 끌어안고 그녀의 귀에 매달리며 해준 말이었다.배현수는 성격이 차갑고 내성적이었기에 이렇게 직설적으로 고백을 하는 경우가 매우 적었다.사랑이 백이라면 배현수는 줄곧 절반 정도만 표현하곤 했었다.하지만 술에 취해 감정이 통제되지 않을 때 배현수는 그녀의 이마에 맞대고 한번, 또 한 번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했다.그러나 이 또한 모두 지난 일이었다.얼마나 들었는지 버스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조유진은 이어폰을 빼고 휴대폰을 도로 가방 안에 넣고는 버스에서 내렸다....충남시 법원.“뭐라고요? 진술을 번복하시겠다고요?”법원장이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조유진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하지만 조유진은 너무나도 평온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법원장님, 6년 전 충남 법원에서 뺑소니 교통사고 사건에 관한 재판이 열렸었는데 당시 제가 증인으로 법정에 섰었습니다. 조범 시장님 권세의 압박하에 제가 어쩔 수 없이 거짓 증언을 하게 되었죠. 그 사건의 피해자는 유성진이었고 판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