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동, 대표 사무실.서정호는 마케팅 부문 과장의 전화를 받은 뒤 황급히 문을 박차고 사무실 내부로 달려갔다.“대표님, 아가씨께서 사직서를 내셨다고 합니다.”책상 위에 쌓인 서류에 고개를 파묻고 일에 집중하고 있던 배현수의 눈빛이 흠칫 떨렸다.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배현수는 시선을 컴퓨터 모니터에 고정한 채 미지근한 어투로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항상 제멋대로 오고 가고 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젠 놀라울 것도 없어.”“그럼... 아가씨께서 퇴사하시려는 일은...”“신경 쓰지 마.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둬.”보름 전부터 조유진은 배현수의 눈 밑에서 대놓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한 사람의 마음이 이미 이곳을 떠났는데 상대방의 몸을 붙잡아 두고 있는 건 헛수고와 다름없었다.서정호는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회사대표의 속내를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전임 마케팅 부서 과장인 진우민이 사고를 친 후 배현수가 직접 나서 새로운 과장을 뽑아 마케팅 부서에 파견했다.그러고는 당시 마케팅 부서 직원들을 달래주기 위함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했었다.하지만 고위층도 아닌 마케팅 부서의 일개 과장일뿐일 텐데 배현수가 굳이 직접 나서서 뽑았어야 했는지가 의문이었다.배현수의 선택 속에 대체 얼마나 많은 본인도 알아채지 못한 사심이 들어갔을지는 서정호도 알 리가 없었다.새로운 과장이 선임한 뒤부터 조유진의 회사생활은 말 그대로 정말 평화로워졌다.그런데 조유진이 지금 퇴사를 하려는데 배현수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하지만 이 또한 결국 배현수의 개인감정이었기에 외부인인 서정호가 곁에서 왈가왈부 할 처지는 되지 못했다. 서정호가 사무실을 나가고 컴퓨터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배현수의 시선이 점차 초점을 잃어가더니 그대로 허공에서 흩어졌다.그렇게 결국 멍하니 그 자리에서 한참 멍을 때렸다.배현수는 노트북을 덮고 책상 서랍을 열어 담배 한 갑을 잡으려 했다.그러자 서랍 안에 놓여 있던 전에 찢어놓았다가 다시 붙인 작은
조유진의 강력한 요구에 배현수는 그녀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그 후 그들은 헤어지게 되었다.조유진은 당시 배현수가 보냈던 음성 메시지들을 전부 녹음해 두어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었다.귀에 걸어놓은 이어폰 속에서 배현수의 부드럽고 인내심이 깃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아직 안 끝나서 좀 이따 데리러 갈게.”“왜 갑자기 배가 아플까? 지금 바로 갈게.”“조개구이가 먹고 싶다고? 저녁에 갈 때 사서 갈게.”“자기야, 자기가 좋아하는 밀크티 사 왔어. 잠깐 내려와 봐.”...당시 사소한 일상들이 조유진의 눈시울을 붉혔다.조유진은 한참 동안 녹음을 듣다가 마지막 음성 메시지를 클릭했다.“자기야, 나 사랑해?”“응. 사랑하지. 엄청나게 사랑해.”“유진아, 나 이제 너밖에 없어. 날 떠나지 마.”“자기야, 난 자기가 갖고 싶은 거 다 줄 수 있어. 조금만 시간을 주면 이 세상의 모든 걸 다 가져다줄게.”이건 배현수가 한 번 술에 취해 조유진을 끌어안고 그녀의 귀에 매달리며 해준 말이었다.배현수는 성격이 차갑고 내성적이었기에 이렇게 직설적으로 고백을 하는 경우가 매우 적었다.사랑이 백이라면 배현수는 줄곧 절반 정도만 표현하곤 했었다.하지만 술에 취해 감정이 통제되지 않을 때 배현수는 그녀의 이마에 맞대고 한번, 또 한 번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했다.그러나 이 또한 모두 지난 일이었다.얼마나 들었는지 버스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조유진은 이어폰을 빼고 휴대폰을 도로 가방 안에 넣고는 버스에서 내렸다....충남시 법원.“뭐라고요? 진술을 번복하시겠다고요?”법원장이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조유진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하지만 조유진은 너무나도 평온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법원장님, 6년 전 충남 법원에서 뺑소니 교통사고 사건에 관한 재판이 열렸었는데 당시 제가 증인으로 법정에 섰었습니다. 조범 시장님 권세의 압박하에 제가 어쩔 수 없이 거짓 증언을 하게 되었죠. 그 사건의 피해자는 유성진이었고 판결을
조범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충남 법원에 도착했다.사무실에 도착한 뒤 보이는 조유진의 모습에 조범은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유진도 눈앞에 나타난 조범의 모습에 이미 예상했다는 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현재 충남시는 조범의 담당하에 충남시의 모든 사람이 조씨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법원장이 조유진의 등장을 조범에게 알렸다는 것도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유진아, 지금 이게 무슨 짓이니? 왜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하고 그래? 충남에 돌아왔으면 집으로 올 것이지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빨리 집에 가자.”말을 이어가며 조범이 조유진을 잡아당기려 손을 뻗었다.그러나 조유진은 결코 순순히 따라주지 않았다.“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당신이 가장 잘 알겠죠.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하는 말이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당신이 가장 잘 알지 않겠어요?”이번만큼 조유진은 결코 소란을 피우려 그저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다. 방금 그녀는 이미 이 모든 일을 각종 언론사들에게 털어놓았었다.곧이어 조범의 이름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것이고 만약 정말 이 일이 모두 폭로된다면 조범의 시장 자리도 곧 위태로워지고 말 것이다.그렇다면 조씨 가문 전체가 함께 도마 위에 오를 것이고 조유진 역시 이 사건의 ‘범인’ 중의 한 명으로서 책임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조범은 법원장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먼저 나가보세요. 얘가 제 딸인데 그냥 소란 피우러 왔나 봐요. 업무를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그러자 법원장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됐습니다. 시장님, 부녀 사이에 화는 내지 마시고 잘 얘기해보시기 바랍니다.”모든 외부인이 자리를 뜨자 사무실 안에는 조유진과 조범, 두 사람만이 남겨졌다.그러자 조범은 부드러운 어투로 조유진을 달래기 시작했다.“유진아, 너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해? 이 일은 이제 6년이나 지났어. 인제 와서 소란 피우면 뭐하니? 배현수는 이미 3년 동안 감옥에 있었고 네가 지금 그를 위해 진술을 번복
그러나 조유진은 조범의 말을 믿지 않았다.“조 시장님, 시장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정말 못 하는 말이 없네요.”“정말이야! 난 널 속이지 않아! 배현수는 단 한 번도 너를 사랑한 적이 없어. 배현수는 네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딸이라고 생각하는데 배현수가 정말 너를 사랑했을 거라고 생각해?”순간 조유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배현수의 아버지 육성준이 그해 나와 함께 창업하다가 나중에 운이 나빠 그렇게 죽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육씨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내가 범인이라고 의심하고 있어. 유진아, 내가 아무리 못돼도 설마 내 친구까지 죽여버리겠어?”조유진은 그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채 무뚝뚝한 얼굴로 조범을 응시했다.“당신이 정말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인지 아닌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너... 너 이놈 자식, 소란 피우지 말고 당장 나와 집에 가. 그 배현수 아니, 육현수는 우리 집안 원수야. 앞으로 멀리하도록 해! 너만 괜찮다면 선유도 데리고 충남으로 돌아와. 요 몇 년 동안 너희 모녀 밖에서 고생 많이 했을 텐데 조씨 집안에 돌아오면 그래도 조금 편하게 살 수 있을 거야.”다른 수법이 먹히지 않자 조범은 감정 패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유진은 이미 조범의 가스라이팅에 습관이 되었는지라 조범의 카드는 조유진에게 먹히지 않았다.이들은 모두 인자하고 정의로워 보이는 조범의 가면이었다. 아무리 변명을 늘어놓아도 조범의 목적은 결국 시장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눈앞의 중년남성은 그녀의 친아버지 이다.비록 지금까지 조유진에게 사랑을 준 적이 거의 없었지만 막상 자신의 손으로 직접 친아버지를 망치려니 조유진 역시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하지만 더는 조범이 계속하여 악행을 저지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소용없어요. 제가 당신을 따라 집에 간다고 해도 이제 곧 사직당하고 조사를 받게 될 거예요.”조유진의 말에 조범이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무슨 짓을 한 거야?”조유진은 그저 담담하게 미소를 지을 뿐
저녁 8시.배현수는 사무실에 앉아 줄곧 떠나지 않았다.그때 핸드폰이 울리고 다름 아닌 산성 별장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아빠, 야근하세요? 왜 아직도 집에 안 오세요?”서랍 안에 들어있던 작은 그림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배현수의 싸늘한 눈빛이 순식간에 사르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응.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아. 저녁은 혼자 먹어.”“전 이미 저녁 먹었어요. 오늘 장 셰프님께서 제가 좋아하는 반찬 잔뜩 해주셨어요. 심지어 튀김도 해주셨다니까요!”“선유야.”배현수의 낮은 목소리가 선유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울렸다.“아빠, 왜요?”“너 전에 네 이름이 선유인 이유가 엄마가 나를 무척 그리워해서라고 했었나?”“맞아요! 엄마가 저한테 아빠를 엄청나게 사랑하신다고 하셨어요. 아빠가 곁에 계시지 않는 그 몇 년 동안 저보다도 아빠가 더 그리웠다고 하셨는걸요.”침묵이 몇 초간 이어지더니 배현수가 담담하게 답했다.“응. 알겠어.”선유와의 전화가 끊긴 뒤 배현수가 누군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육지율은 배현수의 전화를 받은 뒤 놀랍지도 않다는 듯 전화가 통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이 늦은 시간에 설마 같이 조유진을 데리러 충남에 가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난 그저 선유가 속상한 게 싫을 뿐이야.”“하, 배현수 넌 진짜... 아까 남초윤이 미친 듯이 선유한테 전화를 걸어서 선유 더러 너한테 조유진을 구해달라고 빌게 하려는 걸 겨우 막았더니 이젠 네가... 넌 정말 그냥 조유진한테 완전히 빠져버렸구나.”“15분 줄게. 그룹 건물 밑에 나 데리러 와.”“이런 젠장...”이 늦은 밤에 배현수와 함께 사람 데리러 충남 법원에 가야 한다니.전화를 끊은 육지율이 옷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남초윤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와 육지율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자 싸늘하게 물었다.“이 야밤에 그렇게 꾸미고 어딜 나간대? 여자 꼬시러 가요?”“내가 여자 꼬시러 나갈 새가 어디 있어요? 배현수도 정말 미쳤지. 이 야밤에 나더러 자기와 함께 충남에
“그러게요. 유진이가 구속당할 필요도 없고 감옥에 갈 필요도 없다면 현수 씨는 왜...”배현수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무뚝뚝한 얼굴로 해명했다.“선유가 갑자기 울며 오늘 밤 조유진이 보고 싶다고, 못 보면 절대 잠을 자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데 무슨 수가 있겠어.”그러자 육지율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조유진을 못 봐서 못 잔다는 사람이 정말 선유인 거야 아니면 너인 거야?”배현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운전이나 해. 쓸데없이 말만 많아서는.”남초윤은 뒷좌석에 기대앉아 배현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배현수, 생각보다 그렇게 차가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조유진한테만큼은 아직 감정이 남아있는 듯했다.그때 육지율이 입을 열었다.“근데... 그러고 보니 조유진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모험했네. 조범이 어떤 짓을 할지 무섭지도 않나? 조범이 충남시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패권을 차지했었는데 이번에 직무가 정지당하고 조사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충남시에서 쌓아온 두터운 인맥을 보면 얼마 안 지나 바로 풀려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도 그저 조사만 받을 뿐이겠지. 내 보기엔 이번 일로 조범 절대 안 무너져.”“조범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유진이가 앞으로 위험한 거 아니야? 유진이 친아빠, 그 인간은 원한이 있으면 무조건 갚는 인간이야. 절대 착한 인종이 아니라고!”그때 조수석에 가만히 앉아있던 배현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내가 절대 그놈에게 다시 일어날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지난달 인천 중구 월미도에 간 이유도 바로 그해 사건의 증인인 여정민을 데려오기 위함이었다.여정민은 전에 성빈 그룹에서 청소부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두 눈으로 사무실에서 육성준이 조범과 말다툼을 하는 과정에 갑자기 심장병이 발작하며 약을 가지려 하자 조범이 약병을 발로 차버린 것을 똑똑히 보았었다.이는 엄연한 고의적 살인이었다.만일 살인죄가 성립된다면 사형이거나 무기징역은 확정된 셈이다.그때 육지율이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뗐다. “그해
조유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래 앉아있었던 탓인지 일어서자마자 다리가 저려 말썽이었다.다리가 풀린 조유진을 배현수가 다급히 부축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등을 돌리더니 허리를 굽혔다.“이리와. 내가 업어줄게.”조유진은 계단 위에 선 채 몇 초간 망설였다.배현수도 조유진의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그녀를 흘끗 바라보며 재촉했다.“빨리 선유 보고 싶지 않아? 선유 지금 울면서 보채고 있어.”이미 마음속으로 이별의 준비를 끝낸 탓인지 배현수를 다시 마주하게 된 조유진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고 한 번 더 만나게 되었으니 이득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조유진이 배현수의 등에 올라탔다.이는 배현수가 처음으로 그녀를 업어주는 것이 아니었다.조유진은 배현수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왜 충남으로 온 거예요?”“그럼 넌?”“전 속죄하러 왔죠.”“난 이제 결백한데 넌 이제 결백한 사람이 아니야.”억울함을 전부 씻어냈으니 응당 기뻐해도 모자랄 판이지만 이상하게도 배현수는 생각했던 것만큼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조유진이 입술을 달싹이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전 항상 진흙탕 속에서 뒹굴며 살아왔어요. 결백 따위는 저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아요.”결백이라, 곧 생을 마감하게 될 사람에게 있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조유진은 단 한 번도 배현수의 용서를 구걸하기 위해 이 일을 벌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살아 있는 동안 배현수에게 빚진 것을 모두 갚아주고 싶었을 뿐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충남에서 대제주시로 돌아가는 길.네 사람은 모두 말이 없었다.돌아가는 길에도 육지율이 운전을 도맡았다.하지만 조수석에 탄 사람은 남초윤이었고 배현수와 조유진이 뒷좌석에 앉았다.6년 전, 배현수가 감옥에 들어가면서부터 그는 줄곧 충남시를 혐오해왔었다.3년 전, 출소하던 날.배현수는 다시는 이 거지 같은 곳에 발을 딛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었다.하지만 조유진과 재회하고 난 뒤의 두 달 동안 배현수는 무려 두 번이나 조유진을
알프라졸람.조유진은 다급히 약병을 서랍장 밑부분의 구석에 치워두고는 서랍장 문을 닫아버렸다....약 10분 정도 지나고 배현수가 내용물이 가득 찬 큰 주머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주머니 속에서 생리대 하나를 집어 들어 조유진에게 건넸다.“일단 먼저 화장실로 가서 써.”“고마워요.”조유진이 바지와 생리대를 갈고 화장실에서 나오자 작은 주방에 꾸겨져 있는 큰 그림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배현수가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다.가까이 보니 배현수는 생리대를 사 온 것뿐만 아니라 꿀과 생강도 사 온 것이었다.다 끓인 뒤, 잘 우려진 생강차를 그릇에 담아 조유진에게 건넸다.조유진은 자신의 앞에 놓인 따뜻한 차를 바라보자니 괜히 가슴이 쓰라렸다.“제가 현수 씨 결백을 돌려드리는 건 응당 해야 할 일이었어요. 비록 당시 저도 조범한테 협박 당한 거지만 제가 당신을 지목하는 바람에 현수 씨가 감옥에서 3년 동안 고생하게 한 것도 맞아요. 그러니까 제가 조범을 적발했다고 하여도 갑자기 잘해줄 필요는 없어요.”만약 조금만, 조금만 더 일찍 잘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조유진은 이제 배현수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었고 감당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배현수는 그저 찻물을 다시금 조유진의 눈앞에 밀어주며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한 그릇의 생강차일 뿐이야. 잘해주고 못 해주고 할 것도 없어. 얼른 따뜻할 때 마셔.”조유진도 더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릇에 담겨있는 따뜻한 차를 작게 들이켰다.따뜻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위를 적시니 속이 한결 편해지는 느낌이었다.현재 조유진은 너무나 피곤하여 배현수와 밀당 할 기운이 없었다.지금, 이 순간 조유진은 그저 바깥에서 휘몰아치는 피바람을 피해 침대에 누워 길게 한잠 푹 자고 싶었다.“저 이제 졸리니까 어서 돌아가세요. 선유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조유진이 몸을 일으켜 침실로 향하려 하자 그 순간 두 팔이 그녀를 품에 가둬버렸다.배현수가 조유진의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