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준이 그 말을 꺼낸 탓에 심유진은 온밤 악몽을 꾸었다. 꿈에서 심유진은 방황하고 막막했던 임신 초기로 돌아가서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고통스럽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은설도 곁에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베개가 젖어있었다. 연한 파란색을 띤 베갯잇에 물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혹시 누구한테 들키기라도 할까 봐 심유진은 일부러 이불과 베개를 다 씻어서 베란다에 널어뒀다. 별이가 일어나서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엄마, 오줌 싼 거야?” 심유진은 대꾸해주지 않고 아침상을 차린 뒤 열쇠를 들고 집문을 나섰다. “삼촌 데리러 갈게.” 집에 아이가 있기에 김욱은 일부러 심유진 집에서 업무토론을 진행하기로 했다. 김욱의 차는 대문 밖에 세워져 있었다. 심유진을 보자마자 그는 트렁크에서 종이 박스 하나를 꺼내서 심유진에게 건네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챙겼다. 무거운 박스에 심유진이 물었다. “이건 뭐예요?” 김욱이 턱으로 심유진이 든 박스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파일.” 그리고 자신이 든 걸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별이한테 줄 거.” “별이건 사지 말라니까.” 심유진이 원망했다. “별이는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어. 장난감도 너무 많아서 둘 곳이 없을 정도라고.” 육윤엽과 김욱이 별이에게 사줬던 장난감들 중에는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게 가득했다. 하지만 김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박했다. “어쩌다 만나는 건데.” 심유진은 이사하면서 김욱과 육윤엽의 슬리퍼도 같이 가져왔다. 김욱은 신발을 갈아 신으며 신발장을 예의주시했다. “뭘 그렇게 봐?” 심유진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김욱은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별이 신발은 안 부족한가 싶어서.” 심유진은 화를 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안 부족해! 필요한 게 하나도 없어! 사 오면 다 버릴 줄 알아.” “알겠어.” 김욱은 대충 대꾸했다. 별이는 아침을 먹다 말고 문소리를 듣고는 얼른 달려왔다. “삼촌!”김욱은 별
한참을 봐도 허태준이 생활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심유진은 김욱에게 자신과 허태준 사이의 관계를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기에 대충 핑계를 댔다. “나랑 별이가 잠시 머무를 곳이야. 은설이가 남자친구를 사귀었는데 원래 나한테 호감을 표시하던 사람이거든. 은설이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데 혹시 들키면 상황이 난감해지잖아. 마침 태준 씨가 빈 집이 있다고 하길래 일단 이사 왔어.” 김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업무 전달은 오전 내내 진행됐고 심유진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자 직접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배달을 시켰다. 밥을 먹으며 심유진이 김욱에게 말했다. “오후에 별일 없으면 애 좀 봐줄 수 있어? Maria랑 쇼핑하고 저녁 먹기로 했거든.” 김욱은 흔쾌히 동의하고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일찍 들어와.” 심유진은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했다. Maria와 주말에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Maria는 여전히 깔끔하게 꾸몄지만 옷 스타일은 평소보다 훨씬 캐주얼했다. 심유진을 보자마자 Maria는 열정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고 싶은 곳 있어요?” Maria가 묻자 심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따라갈게요.” 하지만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심유진은 그 말을 후회했다. Maria는 지치지 않는 기계처럼 쇼핑을 했고 매장 내의 모든 가게를 돌아다녔다. 심유진은 정말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입어보고 바로 사는 스타일이었지만 Maria는 옷을 열 벌 정도 골라두고 하나하나 입어본 뒤 심유진에게 평가까지 부탁했다. 하지만 결국 한벌도 사지 않았다. 심유진은 가게 안의 소파에 앉아서 직원이 준 물을 마시며 하은설에게 문자를 보냈다. “뭐 해? 얘기는 잘 끝났어?” 그때 Maria는 또 탈의실에서 나와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돌더니 기대에 찬 눈길로 심유진을 바라봤다. “어때요? 예뻐요?” 심유진은 이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아까 했던 말들을 또 한 번 반복했다. “예뻐요. 노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의도 없는 행동인지 몰라도 심유진은 마음이 좋지 않아 그 호의를 거절했다. “저한테는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냥 Maria가 입어요.” Maria는 뭔가 눈치챈 건지 표정이 바뀌었다. “혹시 기분 안 좋아요?” Maria가 긴장한 얼굴로 예리하게 문제점을 짚어냈다. “유진 씨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옷만 사서 그래요?” 심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Maria는 매우 솔직했다. “인정할게요. 일부러 그런 거 맞아요.” 심유진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왜요?” Maria가 뽀로통해서 대답했다. “화나니까요! 일주일 동안 저한테 무심하게 대했잖아요. 같이 나와서도 내내 다른 곳에 정신 팔려있고 예쁘냐고 물어봐도 대충 대답하고!” 그 말에 심유진도 뜨끔해서 얼굴을 긁적거렸다. “죄송해요.” 다행히 심유진은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번주에 김욱 씨가 넘겨준 업무가 너무 많아서 그랬어요. 업무에서는 깐깐한 거 알잖아요. 제 잘못이니까 저녁은 제가 살게요. 어때요?” “그래요. 용서해 주는 걸로 할게요.” Maria는 달래기 쉬운 사람이었다. “근데 밥 먹기 전에 먼저...” Maria가 쇼핑백을 흔들며 조금 부끄러운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이거 환불하고 올게요. 사실 저도 안 예쁘다고 생각했거든요.” Maria와 함께 모든 옷을 환불하고 나서야 심유진의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하은설에게서 온 문자인 줄 알았는데 확인해 보니 허태준이었다. 허태준은 다짜고짜 질문부터 했다. “하은설이 찾으러 온 적 있어?” 한국은 늦은 밤일 텐데 자지도 않고 하은설에 대해 묻는 걸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것 같았다. “아니요. 무슨 일 있어요?” 심유진이 물었다. “전화받을 수 있어?” 그 문자에 심유진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두려움과 당황스러운 감정이 밀려왔다. 심유진이 Maria
Maria는 당연히 매우 실망했다. “네?” 하지만 심유진을 난감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알겠어요. 일단 일 보세요.” 심유진은 내내 하은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나중에는 하은설이 짜증 나서 꺼버린 건지 아니면 배터리가 다한건지 하은설의 휴대폰 전원이 꺼졌다는 알람이 왔다. 심유진은 더욱 조급해서 액셀을 밟으며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집으로 달려갔다. 이사를 해도 원래 집 열쇠는 남겨두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굉장히 옳은 선택이었다. 심유진은 신발도 갈아 신지 못한 채 거실로 뛰여 들어갔다. 하지만 거실의 풍경은 상상과 많이 달랐다. 하은설은 멀쩡하게 소파에 앉아서 치킨을 뜯고 있었다. 입가에는 기름이 가득했고 쓰레기통에는 간식봉투와 우유갑이 쌓여있었다. 그제야 심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걱정은 이내 분노로 변했고 심유진은 순간 폭발해버리고 말았다.“전화는 왜 안 받아?”하은설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서 주위를 손으로 더듬고는 멍하니 물었다.“휴대폰 어디 갔지?”심유진은 살인충동이 들었다.“내 폰으로 전화 좀 걸어봐. 어디 있는지 찾게.”하은설의 말에 심유진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이미 꺼졌어.”그제야 하은설은 치킨을 내려놓았다.“잠시만. 방에 들어가서 찾아볼게.”“됐어.”심유진이 하은설을 붙잡았다.“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그래?”하은설은 다시 소파에 앉아 치킨을 집어 들었다.“먹을래?”“아니.”심유진은 지금 입맛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하은설은 아주 맛있게 치킨을 뜯으면서 예능을 보며 웃기까지 했다. 심유진은 혹시 너무 충격을 받아 미친 건 아닐지 잠시 고민했다.“얘기는 잘했어?”심유진이 하은설의 허벅지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하은설은 여전히 TV에 시선을 집중하며 말했다.“얘기 안 했어.”아무런 감정 기복도 없는 것처럼 담담한 말투였다. 심유진은 조금 놀랐지만 굴하지 않고 물었다.“오늘 얘기할 거라며.”“갔는데 다른 여자랑 침대에 누워있더라. 그래서 그냥 나왔
심유진은 위로의 말을 한가득 준비했으나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심유진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 “한동안 우리 집에 가서 지낼래?” 하은설이 침착해 보이긴 했지만 심유진은 그래도 하은설을 혼자 둘 수 없었다. “좋아!” 하은설은 좋아하면서 치킨도 내팽개쳤다. “짐부터 쌀게!”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하은설은 짐도 별로 안 챙겼다. “이런 대저택은 또 처음이네.” 하은설은 가는 길 내내 흥분돼 있었다. 오늘 굉장한 타격을 겪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김욱은 여전히 심유진 집에 있었다. 심유진이 아무렇지 않게 하은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 수많은 궁금증이 맴돌았지만 결국 이 한마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저녁 먹었어?” “얘는 먹었고.” 심유진이 하은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안 먹었어.” 하은설이 얼른 손을 저었다. “또 먹을 수 있어요!” 사람이 많았기에 김욱은 배달을 시켰다. 대부분 하은설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임신한 상태여서 그런지 하은설은 평소보다 두배로 더 잘 먹었다. 심유진은 놀라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하은설이 피자를 세 조각째 먹으려고 하자 얼른 말렸다 “더 먹다가는 배 찢어져.” 하은설은 아쉬워하며 손가락을 빨았다. 하지만 그사이 늘어난 뱃살을 보며 그만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하은설은 소파에 누워 별이에게 물을 가져다 달라 간식을 가져와라 하면서 심부름을 시켰고 심유진과 김욱은 함께 뒷정리를 했다. 김욱이 이 타이밍을 빌어 조용히 물었다. “남자친구랑 헤어졌대?” 예리한 질문에 심유진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당연히 예측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하은설이 그렇게 티를 냈으니 말이다. “맞아.” 심유진이 대답했다. “그래서 다친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여기에서 며칠 지낼 거야.” 김욱은 동정하는 표정으로 하은설을 쳐다보다가 또 물었다. “그럼 내일은 다른 곳에서 업무 볼까?” “아니야.
허태준은 웃으며 위로하다가 물었다. “허택양이랑은 어떻게 됐대?” “헤어졌어요. 애도 며칠 뒤에 지우겠대요.” 심유진은 점점 목소리가 낮아졌다. “조금 마음이 아파요.” 지난밤에 악몽을 꾼 탓인지 심유진은 갑자기 아이를 지우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허택양이 저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게 아니면 어떡해요? 만약 은설이한테 진심이었다면...” 허태준은 딱 잘라 말했다. “그럴 일은 없어. 네가 한 일들은 다 은설 씨를 위한 일이야.” “그렇지만...” 심유진은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이미 지난 일이니까 그만 생각해.” 허태준이 타일렀다. “옆에 있어줘.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고 사고 싶은 거 다 사. 카드는 내 거 쓰고.” 허태준은 일부러 한도가 없는 카드를 한 장 남겨두고 갔다. 하지만 심유진은 계속 지갑에 넣어두기만 하고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돈 있어요.” 어릴 때부터 독립적이었던 심유진은 다른 사람의 돈을 쓰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혹시 허태준이 다르게 생각할까 봐 심유진은 얼른 말을 고쳤다. “돈 다 쓰면 그때 그 카드 긁을게요.” 하지만 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을 잘 알았다. “그래.” 허태준이 웃으며 화제를 바꿨다. “요즘 일은 잘 돼가?” “아니요.” 심유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빠가 계속 회사 프로젝트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긴 한데 전에 하던 일이랑 달라서 그런지 잘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그리고 회사 상황도 안 좋고요. 여자 동기가 한명 있었는데 저랑 조금 다툼이 있었어서 Maria… 아니 저희 아빠 비서이자 회사에서 유일한 제 친구가 손을 써서 해고시켜 버렸어요.”“근데 그 동기가 나가고 나서 저희 회사 대표들도 여럿 나가버리고 따라서 고객들도 많이 빠졌어요. 아빠랑 오빠는 이 정도 손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지만 지난달 재정상황을 보니 낙관적이지 않더라고요.” 육윤엽과 김욱은 항상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들의 말로는 작
심유진은 새벽 두 시까지 자료들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부러 하은설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보니 방안이 시커맸다. 침대에 누워있던 하은설은 인기척이 들리자 크게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심유진도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진정이 되고 나서야 심유진은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전등을 켰다. 하은설은 머리가 까치집이 된 채 전혀 피곤한 기색없이 침대에 앉아있었다. 한참 서로를 쳐다보고 나서야 심유진이 물었다. “늦었는데 왜 아직도 안자.” “내가 해야 될 질문 아니야?” 하은설이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 “몇 신데 몰래 남의 방에 들어오는 거야. 놀라서 죽는 꼴 보고 싶어?” “회사 자료 좀 봤어.”심유진은 당당했다. “근데 마침 네 방앞을 지나쳐서 한번 들여다 본거야.” 하은설은 눈을 흘겼다. “내가 서재 위치도 모르는 줄 알아? 마침 방앞을 지나기는. 거짓말도 성의 있게 해.” “그래. 솔직히 말할게.” 심유진은 방문을 닫고 침대로 다가갔다. “사실 안 좋은 생각하고 여기에서 죽어버릴까 봐 걱정했어. 태준 씨가 비싸게 산 집인데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 살지도 못하고 팔리지도 않을 거 아냐.” “꺼져!” 하은설이 씩씩거리며 베개를 던졌다. 심유진은 잽싸게 베개를 잡아채고는 당부했다. “배속에 애도 있는 사람이 그렇게 화내면 안 돼! 무리하지 마!” 하은설 역시 자기의 몸을 아끼는 사람이었기에 그만 행동을 멈췄다. 심유진은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베개를 침대에 내려놓은 뒤 침대 변두리에 앉았다. “잠이 안 와?” 심유진이 물었다. “무슨 생각해? 나한테 다 얘기해 봐.” “아무 생각도 안 했어.” 하은설은 속 깊은 얘기를 하는 걸 거부했다. “낮잠을 오래 잤나 봐.” “웃기지 마. 내가 널 몰라?” 심유진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너 원래 돼지처럼 잠만 자는 애잖아. 낮에 아무리 많이 자도 베개만 주면 3초 안에 잠들면서.
“전화받아서 설명해 줘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전화받아요.” 심유진은 한참 채팅창을 올리고 나서야 하은설이 보낸 문자를 볼 수 있었다. “저희 이제 그만해요.” 보낸 시간은 오전 9시 6분이었다.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이 문자를 보내고 그다음부터는 무시했어. 진짜 웃긴 사람 아냐?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는 건가? 꼭 내가 말해줘야 알아?” 하은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그동안 참아왔던 말들을 다 쏟아냈다. “원래 그냥 가볍게 만나는 사이로 지내기로 했었어. 어느 한쪽이 그만하자고 하면 절대 매달리지 않기로. 근데 이게 뭐야? 유진아 명심해. 남자 말은 믿으면 안 된다. 날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저쪽이고 나랑 잘해보고 싶다고 한 것도 저쪽이야. 근데 다른 여자랑 잔 것도 저 사람이고. 진짜 나 미쳤나 봐. 어제까지만 해도 결혼해서 애를 낳겠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하은설은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심유진은 얼른 다가가서 하은설을 안아줬다. “네 잘못이 아니야.” 심유진이 위로하자 하은설은 심유진을 밀어내고 몸을 돌려 눈물을 닦아냈다. 궁상 맞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슴도 아프고 미안한 마음까지 들어 심유진은 뭐라고 해야 할지 망설였다. 나중에 혹시라도 진실을 알게 된다면 이 우정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었다. “됐어. 이제 이 얘기는 그만하자.” 하은설은 금방 상태를 회복했다. “너도 울상 짓지 마.” 별이한테 하던 것처럼 심유진의 볼을 꼬집으며 하은설이 말했다. “별로 큰일도 아닌데 속상해하지 마.” “자, 웃어봐.” 하은설이 심유진을 보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심유진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고 했지만 어느새 눈앞이 흐릿해졌다. “어?” 하은설이 다급히 말했다. “울지 마! 왜 울어!” 심유진은 더 심하게 울었다. 굵은 눈물방울 하은설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유진아 울지 마.” 하은설이 일부러 정색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