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진은 위로의 말을 한가득 준비했으나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심유진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 “한동안 우리 집에 가서 지낼래?” 하은설이 침착해 보이긴 했지만 심유진은 그래도 하은설을 혼자 둘 수 없었다. “좋아!” 하은설은 좋아하면서 치킨도 내팽개쳤다. “짐부터 쌀게!”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하은설은 짐도 별로 안 챙겼다. “이런 대저택은 또 처음이네.” 하은설은 가는 길 내내 흥분돼 있었다. 오늘 굉장한 타격을 겪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김욱은 여전히 심유진 집에 있었다. 심유진이 아무렇지 않게 하은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 수많은 궁금증이 맴돌았지만 결국 이 한마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저녁 먹었어?” “얘는 먹었고.” 심유진이 하은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안 먹었어.” 하은설이 얼른 손을 저었다. “또 먹을 수 있어요!” 사람이 많았기에 김욱은 배달을 시켰다. 대부분 하은설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임신한 상태여서 그런지 하은설은 평소보다 두배로 더 잘 먹었다. 심유진은 놀라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하은설이 피자를 세 조각째 먹으려고 하자 얼른 말렸다 “더 먹다가는 배 찢어져.” 하은설은 아쉬워하며 손가락을 빨았다. 하지만 그사이 늘어난 뱃살을 보며 그만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하은설은 소파에 누워 별이에게 물을 가져다 달라 간식을 가져와라 하면서 심부름을 시켰고 심유진과 김욱은 함께 뒷정리를 했다. 김욱이 이 타이밍을 빌어 조용히 물었다. “남자친구랑 헤어졌대?” 예리한 질문에 심유진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당연히 예측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하은설이 그렇게 티를 냈으니 말이다. “맞아.” 심유진이 대답했다. “그래서 다친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여기에서 며칠 지낼 거야.” 김욱은 동정하는 표정으로 하은설을 쳐다보다가 또 물었다. “그럼 내일은 다른 곳에서 업무 볼까?” “아니야.
허태준은 웃으며 위로하다가 물었다. “허택양이랑은 어떻게 됐대?” “헤어졌어요. 애도 며칠 뒤에 지우겠대요.” 심유진은 점점 목소리가 낮아졌다. “조금 마음이 아파요.” 지난밤에 악몽을 꾼 탓인지 심유진은 갑자기 아이를 지우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허택양이 저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게 아니면 어떡해요? 만약 은설이한테 진심이었다면...” 허태준은 딱 잘라 말했다. “그럴 일은 없어. 네가 한 일들은 다 은설 씨를 위한 일이야.” “그렇지만...” 심유진은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이미 지난 일이니까 그만 생각해.” 허태준이 타일렀다. “옆에 있어줘.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고 사고 싶은 거 다 사. 카드는 내 거 쓰고.” 허태준은 일부러 한도가 없는 카드를 한 장 남겨두고 갔다. 하지만 심유진은 계속 지갑에 넣어두기만 하고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돈 있어요.” 어릴 때부터 독립적이었던 심유진은 다른 사람의 돈을 쓰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혹시 허태준이 다르게 생각할까 봐 심유진은 얼른 말을 고쳤다. “돈 다 쓰면 그때 그 카드 긁을게요.” 하지만 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을 잘 알았다. “그래.” 허태준이 웃으며 화제를 바꿨다. “요즘 일은 잘 돼가?” “아니요.” 심유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빠가 계속 회사 프로젝트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긴 한데 전에 하던 일이랑 달라서 그런지 잘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그리고 회사 상황도 안 좋고요. 여자 동기가 한명 있었는데 저랑 조금 다툼이 있었어서 Maria… 아니 저희 아빠 비서이자 회사에서 유일한 제 친구가 손을 써서 해고시켜 버렸어요.”“근데 그 동기가 나가고 나서 저희 회사 대표들도 여럿 나가버리고 따라서 고객들도 많이 빠졌어요. 아빠랑 오빠는 이 정도 손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지만 지난달 재정상황을 보니 낙관적이지 않더라고요.” 육윤엽과 김욱은 항상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들의 말로는 작
심유진은 새벽 두 시까지 자료들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부러 하은설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보니 방안이 시커맸다. 침대에 누워있던 하은설은 인기척이 들리자 크게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심유진도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진정이 되고 나서야 심유진은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전등을 켰다. 하은설은 머리가 까치집이 된 채 전혀 피곤한 기색없이 침대에 앉아있었다. 한참 서로를 쳐다보고 나서야 심유진이 물었다. “늦었는데 왜 아직도 안자.” “내가 해야 될 질문 아니야?” 하은설이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 “몇 신데 몰래 남의 방에 들어오는 거야. 놀라서 죽는 꼴 보고 싶어?” “회사 자료 좀 봤어.”심유진은 당당했다. “근데 마침 네 방앞을 지나쳐서 한번 들여다 본거야.” 하은설은 눈을 흘겼다. “내가 서재 위치도 모르는 줄 알아? 마침 방앞을 지나기는. 거짓말도 성의 있게 해.” “그래. 솔직히 말할게.” 심유진은 방문을 닫고 침대로 다가갔다. “사실 안 좋은 생각하고 여기에서 죽어버릴까 봐 걱정했어. 태준 씨가 비싸게 산 집인데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 살지도 못하고 팔리지도 않을 거 아냐.” “꺼져!” 하은설이 씩씩거리며 베개를 던졌다. 심유진은 잽싸게 베개를 잡아채고는 당부했다. “배속에 애도 있는 사람이 그렇게 화내면 안 돼! 무리하지 마!” 하은설 역시 자기의 몸을 아끼는 사람이었기에 그만 행동을 멈췄다. 심유진은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베개를 침대에 내려놓은 뒤 침대 변두리에 앉았다. “잠이 안 와?” 심유진이 물었다. “무슨 생각해? 나한테 다 얘기해 봐.” “아무 생각도 안 했어.” 하은설은 속 깊은 얘기를 하는 걸 거부했다. “낮잠을 오래 잤나 봐.” “웃기지 마. 내가 널 몰라?” 심유진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너 원래 돼지처럼 잠만 자는 애잖아. 낮에 아무리 많이 자도 베개만 주면 3초 안에 잠들면서.
“전화받아서 설명해 줘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전화받아요.” 심유진은 한참 채팅창을 올리고 나서야 하은설이 보낸 문자를 볼 수 있었다. “저희 이제 그만해요.” 보낸 시간은 오전 9시 6분이었다.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이 문자를 보내고 그다음부터는 무시했어. 진짜 웃긴 사람 아냐?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는 건가? 꼭 내가 말해줘야 알아?” 하은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그동안 참아왔던 말들을 다 쏟아냈다. “원래 그냥 가볍게 만나는 사이로 지내기로 했었어. 어느 한쪽이 그만하자고 하면 절대 매달리지 않기로. 근데 이게 뭐야? 유진아 명심해. 남자 말은 믿으면 안 된다. 날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저쪽이고 나랑 잘해보고 싶다고 한 것도 저쪽이야. 근데 다른 여자랑 잔 것도 저 사람이고. 진짜 나 미쳤나 봐. 어제까지만 해도 결혼해서 애를 낳겠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하은설은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심유진은 얼른 다가가서 하은설을 안아줬다. “네 잘못이 아니야.” 심유진이 위로하자 하은설은 심유진을 밀어내고 몸을 돌려 눈물을 닦아냈다. 궁상 맞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슴도 아프고 미안한 마음까지 들어 심유진은 뭐라고 해야 할지 망설였다. 나중에 혹시라도 진실을 알게 된다면 이 우정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었다. “됐어. 이제 이 얘기는 그만하자.” 하은설은 금방 상태를 회복했다. “너도 울상 짓지 마.” 별이한테 하던 것처럼 심유진의 볼을 꼬집으며 하은설이 말했다. “별로 큰일도 아닌데 속상해하지 마.” “자, 웃어봐.” 하은설이 심유진을 보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심유진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고 했지만 어느새 눈앞이 흐릿해졌다. “어?” 하은설이 다급히 말했다. “울지 마! 왜 울어!” 심유진은 더 심하게 울었다. 굵은 눈물방울 하은설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유진아 울지 마.” 하은설이 일부러 정색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경고했다.
일요일 아침, 김욱은 일찍 찾아와 하은설이기 새로 상영한 판타지 영화표를 두 장 건넸다. “심심하면 별이랑 영화 보고 오세요.” 요즘 유명한 영화였기에 휴식일에는 이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로 영화관이 꽉 찼다. 하은설도 보러 가고 싶었지만 표를 구하지 못했었다. “좋아요!” 하은설이 좋아하면서 별이를 안고 입을 맞췄다. “이모랑 놀러 가자. 이모가 맛있는 거 사줄게.” 심유진은 하은설의 몸이 걱정됐지만 하은설이 바람도 좀 쐬면서 다른 일들은 잠시 잊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별이가 가방을 챙기러 방으로 들어간 틈을 타 심유진은 얼른 별이를 붙잡고 주의사항들을 읊기 시작했다. “이모가 몸이 안 좋으니까 꼭 말 잘 들어야 돼. 마음대로 뛰여 다니지 말고 절대 달려가서 안기지 마. 그리고 이모 잘 챙기고 찬 거나 매운 음식은 못 먹게 해. 단것도 많이 먹으면 안 돼. 알겠어?” 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심유진은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휴대폰을 가방에 넣어줬다. “도착하면 문자 보내고 집에 와서도 문자 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심유진의 요구대로 별이는 도착하자마자 문자로 보고하고 어디를 갔는지 뭘 샀는지 뭘 먹었는지까지 자세히 알려줬다.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몇 분마다 한 번씩 울리니 김욱도 궁금해했다. “누구야?” “별이.” 심유진은 별이가 보낸 사진을 확인하고 다시 휴대폰을 껐다. “대신 은설이 좀 감시해 달라고 했더니 엄청 잘하고 있네.” 심유진은 이 상황이 어이없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기분 좋아 보이더라.” 김욱이 말했다. “실연당한 사람 같지 않아.” 김욱은 하은설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며 영화표를 구해다 준 것이었다. 근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건 아닐까 고민할 만큼 하은설은 멀쩡해 보였다. “외강내유라고 할 수 있지. 겉보기에는 저래 보여도 속은 엄청 여려.” 심유진의 표정에서 웃음이 점차 사라졌다. 심
김욱은 일에 미친 사람이었고 심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에도 그들은 일을 내려놓지 못하고 문서들을 반찬 삼아 라면을 먹었다. 그때 심유진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별이에게서 온 전화였다. 심유진은 깜짝 놀라서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엄마…” 별이가 울면서 심유진을 불렀다. 심유진은 점점 불안해져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왜?” 심유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모가 사라졌어.” 별이가 울먹이면서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고 애썼다. 심유진은 얼른 밖으로 나갔고 김욱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 뒤를 따랐다. “일단 울지 마.” 심유진이 별이를 달랬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엄마한테 자세히 설명해 봐.” “이모랑 밥 먹다가 이모가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했어.” 별이가 밥 먹기 전에 사진을 찍어 보냈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는?” 심유진은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현관에 걸어둔 패딩을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김욱은 엘리베이터를 눌러주며 희미한 통화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밥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10분이 지나도 안 왔어. 그리고 전화해도 안받았어. 직원분한테 부탁해서 화장실에 가봤는데 이모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대. 엄마, 나 무서워.” 별이가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수화기 너머로도 느껴졌다. “이미 나왔어. 금방 도착해.” 심유진이 저도 모르게 말을 빨리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서도 문 닫는 버튼을 정신없이 눌렀다. “어디 가지 말고 거기에서 기다려. 누가 데려가려고 하면 소리치거나 주위 어른들한테 신고해 달라고 해.” “응.” 별이가 대답했다. “전화는 안 끊을게.” 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심유진은 계속 통화했다.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응.” 별이는 대답을 하긴 했지만 저도 모르게 재촉했다. “엄마 꼭 빨리 와.” 김욱은 일부러 집과 가까운 영화관의 표를 구했기에 이동시간이 짧았다. 심유진
김욱은 다른 사람이 신고하기 전에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그리고 결제를 끝내고 별이를 안아 들고 밖으로 심유진을 끌고 나왔다.더 이상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면했지만, 레스토랑 안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차에 올라타고서야 겨우 울음이 그친 별이는 심유진을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김욱은 서둘러 출발하지 않고 티슈를 몇 장 꺼내 들어 심유진에게 건네주며 그녀와 별이가 진정하게 도왔다.두 모녀의 눈은 토끼처럼 빨갛게 충혈됐고 눈물에 젖은 손바닥만 한 얼굴은 보는 이의 마음이 쓰이게 했다.“유진아, 너 은설한테 전화해 봐.”김욱이 심유진이한테 말했다.심유진은 한 손으론 별이를 안아 들고 다른 한 손은 가방에 넣어 핸드폰을 찾았다.어제처럼 하은설의 핸드폰을 받는 이는 없었다.하지만 하은설은 오늘 핸드폰을 가지고 나갔기에 벨소리를 못 들었을 리는 없다.“우리 그냥 신고할까?”뚜…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신호음 끊김 소리는 심유진의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안 좋은 상황들이 스쳐 지나갔다.“신고해도 소용없어.”김욱은 재빨리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실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찰들이 상관하지 않을 거야.”“그럼 어떡해?”심유진은 여전히 공포에 떨었다.“너랑 별이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가서 찾아볼게”이 백화점은 규모가 커서 휴일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설령 하은설이 무슨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반드시 목격자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백화점은 잠잠했고 경찰들이 드나든 흔적 또한 없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녀는 안전한 것이다. 그러나 하은설이 별이를 혼자 레스토랑에 오랜 시간 동안 방치해 두고 전화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하은설의 자유가 제한받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하은설은 지금 백화점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안 돼.”김욱은 심유진을 가로막았다.“내가 너랑 별이를 집에 데려다줄게. 만약 하은설이 집으로 돌아가면 너희도 제일 먼저 알게 될 거야. 이후의 일은 나에게 맡겨. 너는 별이만 잘
심유진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만약 하은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한국에 계시는 그녀의 부모님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전달해야 한단 말인가.**그렇게 약 한 시간이란 시간이 흘러서야 김욱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심유진은 전화를 받아 급하게 물었다.“찾았어?”“아직.”김욱이 대답했다.그렇게 금방 돋아난 희망이라는 새싹은 깡그리 뭉개져 버렸다. 심유진은 철퍼덕 주저앉아 혼이 빠진 사람처럼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아...”“내가 백화점 안 CCTV를 찾아봤는데, 은설이 레스토랑을 나가자마자 한 남자가 은설을 따라갔어. 화장실에서 나올 때도 그 두 사람은 같이 있었어. 아마도 아는 사이로 보였어. 내가 찍은 CCTV 화면 사진을 보내줄 테니까 한번 봐봐.”김욱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유진의 카카오톡이 울렸다.심유진은 김욱이 보내온 사진을 클릭했다. CCTV 화면을 찍은 사진에는 남녀 한 쌍이 있었다. 여자는 하은설이었고 남자는...흐릿한 옆모습이었지만 신유진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허택양이야!”“허택양?”김욱은 여러 번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은데.”김욱은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심유진에게 물었다.“이 사람, YT 그룹의 허 대표님이랑은 무슨 사이야?”“허태준의 사촌 동생이야. 은설이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전 남자 친구이기도 하고.”모든 단서가 모이자, 심유진은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어디로 갔는지는 CCTV에 안 찍혔어?”허택양은 현재로선 매우 위험한 인물임이 틀림없었다.허택양이 만약 오늘 하은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면 이미 헤어진 하은설에게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백화점을 빠져나가는 것까지만 찍혔어.”김욱은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잠깐만, 내가 조금 있다가 다시 걸게.”심유진은 전화를 끊고 떨리는 손으로 허태준의 번호를 눌렀다.현재 하은설과 연락이 되지 않지만, 혹시라도 허태준을 통해 허택양과 연락이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심유진이었다.심유진은 자신에게 허택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