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아직도 나은희 무서워하니?”허태준이 비웃었다. 여형민은 창피한지 얼굴이 빨개졌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일어나.”여형민이 호통을 쳤다. 허태준은 궁금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좋아하면 그냥 좋아한다고 해.”허태준이 여형민의 등을 두드렸다.“어차피 결혼도 한 사이인데 예전에 일은 그냥 잊어버려.”여형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허태준은 그가 또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나도 좋아하고 상대방도 나를 좋아하는 이런 관계는 찾기 쉽지 않아.”허태준은 여형민에게 이런 진지한 얘기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자신도 겪었던 일이니 간절히 원하는데 얻지 못하는 그 아픔을 알고 있었다. 비록 나은희의 예전 행동들은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사정에 공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은희도 벌 받을 만큼 받았어. 정말 그 사람한테 마음이 간다면 그냥 잘 지내봐. 사랑이라는 건 한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마치 그와 심유진 사이의 관계와 같았다. 만약 처음 만났을 때부터 조금 더 주동적이고 용감하게 다가갔더라면 이렇게 오래 헤매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형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씨네 집안은 경주에서 알아주는 집안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여형민네 집안과 혼담이 오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은희는 여형민과 결혼할 때 여형민 의 의견에 따라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리지 않고 집안사람들끼리 간단하게 한 끼 식사를 하는 것으로 끝냈다.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던 것은 나씨네 집안에서 계속 아쉬워하던 일이었다. 근데 이제 작은 딸이 결혼을 하니 전에 그 아쉬움을 채울 기회가 온 것이다. 그들은 큰 예식장을 빌려 한 달 전부터 설계를 시작했다. 신부의 요구로 예식장은 핑크색과 흰색을 주제로 동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로 꾸며졌다. 경비도 일반 호텔보다 훨씬 삼엄했다. 여기저기 무장한 경찰들이 깔려 있었다.오늘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니 혹여나 결례를 범할까 봐 결혼식장에
예식장에서 나은희는 최종점검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깔끔한 흰색 정장을 입고 하이힐을 신었는데 마침 어깨까지 오는 긴 생머리가 자연스럽게 나풀거리며 크고 반짝이는 귀걸이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나은희를 보자마자 여형민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허태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나은희는 한 손에 무전기를 든 채 조금 삐뚤게 설치된 조명을 가리키며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허태준이 일부러 여형민에게 물었다.“저쪽으로 갈까?”여형민이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아니, 아무 데나 앉아있자.”“나은희가 세 번이나 전화했다며. 그렇게 급히 찾은 걸 보니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닐까?”“어차피 나 보고 뭔가 도와 달라고 하는 건 아닐 거야. 우리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있어?”여형민과 알고 지낸 세월이 있는 만큼 허태준은 여형민의 생각을 단번에 읽어 냈다.“왜, 결혼식 올리고 싶어 졌어?”허태준이 살짝 눈을 흘겼다.“애초에 결혼식을 안 올리겠다고 한 사람은 나은희가 아니라 너잖아. 근데 이제 와서 기분 나빠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여형민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허태준을 째려볼 뿐이었다.“너 왜 나은희 편들어?”허태준이 손을 저었다.“아니, 난 그냥 맞는 말을 할 뿐이야.”여형민은 이를 악물었다.“꺼져.”훤칠한 남성 둘이 입구에 이렇게 오래 서 있으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나 은희는 일에 집중하다가도 직원들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보자 나은희가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하이힐을 신은 데다가 바닥은 닦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물기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은희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때 허태준은 한 사람이 신속하게 나은희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허태준은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여형민은 나은희를 품에 안았다. 드라마 한 장면 같은 상황에 주위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나은
“도와 달라고 부른 거 아니었나?”여형민이 주위를 둘러봤다. 식장은 이미 배치가 완료되어 있었고 최종점검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직원들은 여전히 바빠 보였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여형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조금 짜증이 났다.“이런 저급한 방법 좀 안 쓸 수 없어?”나은희는 예전처럼 여형민을 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여형민의 차가운 말투에 나은희는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자신의 매력을 너무 높게 평가하시네.”나은희도 가시 돋친 말들을 내뱉었다.“전화를 한 건 아버님이 시켜서였어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다정한 부부여야 한다는 거 잊은 거 아니죠?”여형민과 나은희 사이의 관계가 어떤지는 두 집안사람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혼인관계로 인해 안정된 합작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을 뿐 그들의 감정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여형민과 나은희에 대한 요구는 단 하나였다. 둘 사이에 관계가 어떻든지 외부 사람에게는 들켜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여형민은 자유로워 보였으나 사실 자신의 아버지를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니 나은희와의 결혼도 동의했고 이 무례한 요구도 허락 했던 것이었다. 나은희가 아버지 얘기를 꺼내자 여형민의 태도도 금방 달라졌다. “확실히 도와줄 건 없어요.”나은희가 말했다.“그냥 편한 곳에 앉아서 휴대폰이나 하면서 시간 좀 때우고 있어요.”여형민이 비웃었다.‘당신은 이렇게 바삐 돌아 치는데 난 앉아서 휴대폰이나 보라고? 그건 안되지.”여형민이 나은희에게 다가가 오른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여보.”그 다정한 목소리에 나은희의 몸이 굳어졌다.“당신은 가서 쉬어. 내가 할게.” 주변 사람들은 방금 전까지의 그 공격적인 대화를 듣지 못하고 이 다정한 모습만 봤다. 나은희도 지지 않았다.“그래요.”나은희가 부드럽게 웃으며 무전기를 여형민에게 건넸다.“해야 할 일은 저쪽에 계신 매니저님이 알려 줄 거예요.”나은이가 방금 전까지 같이 있던 젊은
여형민과 허태준이 착석하자 신랑 측 가족들이 얼른 다가와 담배를 건네며 친한 척 했다.“대표님, 변호사님, 처음 뵙겠습니다.”허태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제 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다. 여형민이 얼른 공손하게 그 담배를 거절하며 말했다.“죄송해요. 저희가 담배를 안 펴서.”여형민은 허태준처럼 차갑지 않았기에 그 사람은 아예 아부할 상대를 바꿨다. 쉴 새 없이 아부를 떨어대는 그 사람을 보며 여형민은 그냥 그를 내쫓고 싶은 마음을 여러 번 억눌렀다. 그러다가 겨우 적절한 핑계를 대고 나서야 그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허태준이 좋은 구경 났다는 듯 웃으며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다 너 때문이야. 감히 웃어?”“내가 못 웃을 게 뭐가 있어?” 허태준이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너 때문에 온 거잖아.”여형민은 화가 났다.“근데 그냥 나한테 떠밀어 버리는 거야?”여형민 역시 C Y 그룹 창립자 중 한 명이었으나 그 명성은 허태준과 비할바가 못됐다. 둘이 함께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태준과 관계를 쌓기 위해 다가왔다.“너한테 또 밀어버리다니.”허태준이 여형민의 말을 고쳐줬다.“난 그냥 상대하지 않은 것뿐이야.”외부에서 허태준은 친절하고 예의 있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건 그저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들에 상대해서 쓰는 가면일 뿐이었다. 태하그룹은 근래에 경영상황이 좋지 못했고 여러 번 파산의 위기에까지 직면했었다. 그러니 정씨네 집안은 이제 아무런 이용가치가 없었다. 여형민은 허태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어 그저 허태준을 노려 보기만 할 뿐이었다.“근데 정말 이상해.”허태준이 입을 열었다.“낯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친절한데 왜 나은희는 그렇게 대하는 거야?”아까 여형민과 나은희의 살벌한 대화를 허태준은 다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나은희가 여형민의 말 때문에 상처를 받은 모습과 나은희가 떠난 후예 여형민이 아쉬워하는 모습도 다 봤다. “사실 들어가서 쉬라고 한 것도 시비
결혼식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하객들도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허태준과 여형민도 바빠졌다. 하객들 중 허태준을 아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다들 이 기회를 빌어 허태준과 친해지려고 담배를 건네거나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여형민과 나씨네 집안사람들의 체면을 위해서 허태준도 대충 응대했으나 그는 그렇게 인내심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결혼식에 참여하는 하객들 마다 자신에게 치근덕대는 것을 보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예식장이 매우 컸기에 허태준은 사람이 없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복도는 창문이 열려져 있었기에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는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아무런 메시지도 와있지 않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4일이나 지났는데도 심유진은 한 번도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김욱을 통해서 전한 물건을 아직 보지 못한 것일까? 허태준은 묻고 싶었으나 물을 수가 없었다. 만약 심유진이 이미 확인을 했지만 아직도 그를 원망하고 있는 거라면... 허태준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에서의 일을 모두 해결하고 미국으로 가서 그녀에게 직접 속죄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옅은 담배냄새가 코를 찔렀다. 허태준이 인상을 썼다. 몇 년 전부터 경주는 실내 흡연을 금지했기에 이런 장소라면 더더욱 엄격히 금지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싫어했다. 하지만 직접 가서 그 행동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고는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돈 좀 더 마련할 수 없어?”굉장히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였다.“애초에 그 사람들을 믿어서는 안 됐어. 그 큰돈을 다 날렸잖아.”“지금 다들 나보고 물러나라고 난리야. 됐어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정말 믿을 놈 하나 없다.
허태준은 들킨 줄 알고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딱 기다려. 언젠간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허태서가 허공에 대고 욕설을 퍼붓다가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 멀어져 가는 발자 국소리를 들으며 허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에 죽는 사람이 누가 될지 궁금했다.허태준이 연회장 입구에 돌아왔을 때 신랑과 신부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집안 어르신들도 그들 옆에 서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화장을 해서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못 봐서 인지 허태준은 정재하를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다. 몇 년 전에 비해 정재하는 많이 성숙해져 있었다.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비쳤다. 예전의 그 자신감 넘치고 긍정적이던 앳된 청년은 온 데 간데없었다. 태하그룹의 경영 상황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이 몇 년 동안 그는 많은 고생을 하면서 성격도 많이 달라져 버렸다. 허태준은 정재하를 동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는 허태준이 다른 사람을 별로 관심하지 않는 탓이었지 그들 사이의 불쾌한 과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러니 허태준은 정재하의 기쁜 표정을 보면서도 전혀 축복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정재하의 기쁨이 나지희 때문인지 아니면 나씨네 집안이라는 이 든든한 뒷심 때문인지 궁금했다. 허태준은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리에 나타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또다시 그를 둘러쌌다.“대표님, 한참 찾았는데 안보이시길래 가신 줄 알았어요.”“대표님, 여러 번 만나 뵙기를 청했는데 오늘에야 만나네요.”“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오늘 한잔 하셔야죠!:“대표님...”진정한 주인공들은 어느새 찬밥신세가 돼버리자 집안 어른들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정재하와 나지희는 존경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드레스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지만 않았어도 나지희는 이미 허태준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정재하는 예전부터 허태준에게 열정적이었고 나지희가 허태준을 굉장히 존경하고 있다는 것은 전에 여형민에게서 전해 들어
정재하의 진정성 있는 태도에 허태준의 마음도 많이 약해졌다. 며칠 전 부하들을 시켜서 했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정재하의 두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허태준은 예의를 차리며 대답했다.“초대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태준아, 오늘 수고 많았다.”나지희 아버님이 웃으며 말했다. 나씨네 집안과 허씨네 집안은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집안 어른들끼리도 자주 만남을 가졌었다. 허태준은 비록 이런 상황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씨네 집안사람들과는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었다.“형민이가 고생했죠.”허태준은 모든 공로를 여형민에게 돌렸다. 아버님도 맞은쪽을 쳐다봤다. 여형민은 여전히 손님을 맞이하고 축의금을 걷느라 바빴다. 나은희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이 다정한 한쌍의 부부였다. “형민이가 확실히 고생 많이 했지.” 아버님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둘이 이렇게 사이좋은 모습은 오랜만에 보네.”여형민과 나은희의 혼인은 쌍방 부모님들의 결정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두 사람이 별다른 감정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비록 자주 다정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부모님들이 어찌 그 내막을 모를 수 있을까. 허태준은 화제를 다시 이 신혼부부에게로 돌렸다.“이제 또 소원 하나 이루셨네요.”아버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허태준에게 물었다.“근데 부모님은 왜 안 오셨어?”“여행 가셨어요. 두세 달 뒤에 돌아오실 거예요.”허태준이 대답했다. 부모님의 여행 역시 허태준이 계획한 것이었다. 허태준은 삼촌들의 범죄 증거를 확보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중간에서 제지하거나 속상해서 삼촌들을 미리 다른 곳에 보내놓을까 봐 두려웠다. 근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삼촌들이 감옥에 간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나은희 아버님은 아쉬운 듯했다.“오늘 태준이 아빠랑 한잔 하려고 했는데.”허태준이 아버지 대신 대답했다.“앞으로도 기회는 많은데요 뭐.”허태준은 혼자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결혼식장은 흰색과 핑크색으로 설계되었기에 사랑스
손님들의 좌석은 미리 사전에 안배되어 있었다. 허태준은 두 번째 테이블이었고 그 테이블에는 나씨네 집안의 진척들이 있었다. 나지희의 삼촌들과 고모부 등등이었다. 다들 일찌감치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허태준이 오는 것을 보자 열정적으로 그를 맞이 했다. 허태준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계속 휴대폰을 주의 깊게 봤다. 그 순간 휴대폰 진동이 올렸다.“대표님, 연회장 입구에서 경비들에게 제지당하고 있습니다.”허태준은 그 메시지를 잠깐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주위 사람들의 대화도 이제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이 결혼식이 그저 비즈니스적인 혼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사랑으로 이루어진 결혼일 줄은 몰랐다. 허태준은 한참 고민하다가 문자를 보냈다.“못 들어오게 막아요.”그는 결국 결혼식을 망치는 행동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나서지 않았어도 이 혼례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혼식이 정식으로 시작되기 5분 전 매니저 제복을 입은 남자가 다급히 첫 번째 테이블로 달려가 나지희 아버지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전달했다. 아버지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더니 정씨네 부부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준성은 그 눈빛에 손을 떨며 컵 안의 물마저 쏟았다. 하지만 젖은 옷을 걱정할 틈도 없이 그는 불안해하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허태준은 대놓고 쳐다보지 않고 신경 쓰지 않는 척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나지희 아버지가 이를 악 물면서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이 들렸다.“당신 아들이 사라졌어요.”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은희가 그들을 진정시켰다. “화장실에 갔을 수도 있잖아요. 제가 나가 볼게요.”그녀가 몸에 일으키자 여형민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저도 같이 가볼게요.”허태준 옆을 지나면서 여형민이 허태준에게 눈치를 줬다.“따라와.”허태준도 변명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예식장밖의 직원들은 이미 난리법석이었다. 신랑이 사라지는 사건은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