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준은 모든 자료를 다 확인했다. 그는 두터운 자료들을 내려놓고 전화를 걸었다. “회사에 조건이라는 사람이 이력서가 온 적 없는지 확인해 봐. 상대방은 재빨리 답변을 했다. 원재금융 쪽에서 이력서를 받았다고 합니다. 원재금융은 C Y 그룹 산하의 금융 서비스 회사였다. 조건이는 금융을 전공했으니 당연히 금융 회사에 지원했을 것이다. 허태준이 책상을 톡톡 두드리면서 잠깐 생각했다.“취업시키세요.”조건이가 일자리를 얻고 싶어 하니 허태준은 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그 집안사람들이 잠깐이나마 조용해질 수 있다면 말이다. 순식간에 토요일이 됐다. 이른 아침부터 여형민이 허태준의 집문을 두드렸다. “준비 다 됐어? 떠나도 돼?”허태준은 아직도 잠옷을 입은 채로 거실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허태준은 한 손에 커피 잔을 들고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든 채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입꼬리를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형민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별이랑 얘기하고 있어?”허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이는 이제 아는 단어가 점점 많아져 허태준과 문자를 할 때도 타자를 꽤 잘했다. 하지만 아직 어리기 때문에 틀리게 쓴 글씨가 있거나 하면 허태준은 하나하나 시정해줬다. 여형민이 허태준을 가볍게 때렸다. “내일 이어서 얘기하면 안 돼? 이미 늦었어. 빨리 떠나야 돼.”허태준은 드디어 여형민을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빨리 갈 필요 있어?”청첩장에는 11시 반이라고 적혀 있었고 허태준의 집에서 식당 까지는 반 시간도 안 걸렸다. “난 일찍 가야 하잖아. 오늘 같이 가주겠다며.”여형민이 원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허태준을 바라봤다.“한 입으로 두 말하기 없기야.”나씨네 집안 큰 사위로써 여형민은 일찍 결혼식장에 도착해야 했다. 이런 자리에서는 완벽한 부부 행세를 하자고 나은희와 이미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은희와 단둘이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편했다. 그러니 여형
“너 아직도 나은희 무서워하니?”허태준이 비웃었다. 여형민은 창피한지 얼굴이 빨개졌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일어나.”여형민이 호통을 쳤다. 허태준은 궁금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좋아하면 그냥 좋아한다고 해.”허태준이 여형민의 등을 두드렸다.“어차피 결혼도 한 사이인데 예전에 일은 그냥 잊어버려.”여형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허태준은 그가 또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나도 좋아하고 상대방도 나를 좋아하는 이런 관계는 찾기 쉽지 않아.”허태준은 여형민에게 이런 진지한 얘기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자신도 겪었던 일이니 간절히 원하는데 얻지 못하는 그 아픔을 알고 있었다. 비록 나은희의 예전 행동들은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사정에 공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은희도 벌 받을 만큼 받았어. 정말 그 사람한테 마음이 간다면 그냥 잘 지내봐. 사랑이라는 건 한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마치 그와 심유진 사이의 관계와 같았다. 만약 처음 만났을 때부터 조금 더 주동적이고 용감하게 다가갔더라면 이렇게 오래 헤매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형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씨네 집안은 경주에서 알아주는 집안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여형민네 집안과 혼담이 오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은희는 여형민과 결혼할 때 여형민 의 의견에 따라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리지 않고 집안사람들끼리 간단하게 한 끼 식사를 하는 것으로 끝냈다.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던 것은 나씨네 집안에서 계속 아쉬워하던 일이었다. 근데 이제 작은 딸이 결혼을 하니 전에 그 아쉬움을 채울 기회가 온 것이다. 그들은 큰 예식장을 빌려 한 달 전부터 설계를 시작했다. 신부의 요구로 예식장은 핑크색과 흰색을 주제로 동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로 꾸며졌다. 경비도 일반 호텔보다 훨씬 삼엄했다. 여기저기 무장한 경찰들이 깔려 있었다.오늘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니 혹여나 결례를 범할까 봐 결혼식장에
예식장에서 나은희는 최종점검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깔끔한 흰색 정장을 입고 하이힐을 신었는데 마침 어깨까지 오는 긴 생머리가 자연스럽게 나풀거리며 크고 반짝이는 귀걸이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나은희를 보자마자 여형민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허태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나은희는 한 손에 무전기를 든 채 조금 삐뚤게 설치된 조명을 가리키며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허태준이 일부러 여형민에게 물었다.“저쪽으로 갈까?”여형민이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아니, 아무 데나 앉아있자.”“나은희가 세 번이나 전화했다며. 그렇게 급히 찾은 걸 보니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닐까?”“어차피 나 보고 뭔가 도와 달라고 하는 건 아닐 거야. 우리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있어?”여형민과 알고 지낸 세월이 있는 만큼 허태준은 여형민의 생각을 단번에 읽어 냈다.“왜, 결혼식 올리고 싶어 졌어?”허태준이 살짝 눈을 흘겼다.“애초에 결혼식을 안 올리겠다고 한 사람은 나은희가 아니라 너잖아. 근데 이제 와서 기분 나빠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여형민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허태준을 째려볼 뿐이었다.“너 왜 나은희 편들어?”허태준이 손을 저었다.“아니, 난 그냥 맞는 말을 할 뿐이야.”여형민은 이를 악물었다.“꺼져.”훤칠한 남성 둘이 입구에 이렇게 오래 서 있으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나 은희는 일에 집중하다가도 직원들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보자 나은희가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하이힐을 신은 데다가 바닥은 닦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물기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은희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때 허태준은 한 사람이 신속하게 나은희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허태준은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여형민은 나은희를 품에 안았다. 드라마 한 장면 같은 상황에 주위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나은
“도와 달라고 부른 거 아니었나?”여형민이 주위를 둘러봤다. 식장은 이미 배치가 완료되어 있었고 최종점검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직원들은 여전히 바빠 보였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여형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조금 짜증이 났다.“이런 저급한 방법 좀 안 쓸 수 없어?”나은희는 예전처럼 여형민을 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여형민의 차가운 말투에 나은희는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자신의 매력을 너무 높게 평가하시네.”나은희도 가시 돋친 말들을 내뱉었다.“전화를 한 건 아버님이 시켜서였어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다정한 부부여야 한다는 거 잊은 거 아니죠?”여형민과 나은희 사이의 관계가 어떤지는 두 집안사람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혼인관계로 인해 안정된 합작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을 뿐 그들의 감정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여형민과 나은희에 대한 요구는 단 하나였다. 둘 사이에 관계가 어떻든지 외부 사람에게는 들켜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여형민은 자유로워 보였으나 사실 자신의 아버지를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니 나은희와의 결혼도 동의했고 이 무례한 요구도 허락 했던 것이었다. 나은희가 아버지 얘기를 꺼내자 여형민의 태도도 금방 달라졌다. “확실히 도와줄 건 없어요.”나은희가 말했다.“그냥 편한 곳에 앉아서 휴대폰이나 하면서 시간 좀 때우고 있어요.”여형민이 비웃었다.‘당신은 이렇게 바삐 돌아 치는데 난 앉아서 휴대폰이나 보라고? 그건 안되지.”여형민이 나은희에게 다가가 오른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여보.”그 다정한 목소리에 나은희의 몸이 굳어졌다.“당신은 가서 쉬어. 내가 할게.” 주변 사람들은 방금 전까지의 그 공격적인 대화를 듣지 못하고 이 다정한 모습만 봤다. 나은희도 지지 않았다.“그래요.”나은희가 부드럽게 웃으며 무전기를 여형민에게 건넸다.“해야 할 일은 저쪽에 계신 매니저님이 알려 줄 거예요.”나은이가 방금 전까지 같이 있던 젊은
여형민과 허태준이 착석하자 신랑 측 가족들이 얼른 다가와 담배를 건네며 친한 척 했다.“대표님, 변호사님, 처음 뵙겠습니다.”허태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제 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다. 여형민이 얼른 공손하게 그 담배를 거절하며 말했다.“죄송해요. 저희가 담배를 안 펴서.”여형민은 허태준처럼 차갑지 않았기에 그 사람은 아예 아부할 상대를 바꿨다. 쉴 새 없이 아부를 떨어대는 그 사람을 보며 여형민은 그냥 그를 내쫓고 싶은 마음을 여러 번 억눌렀다. 그러다가 겨우 적절한 핑계를 대고 나서야 그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허태준이 좋은 구경 났다는 듯 웃으며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다 너 때문이야. 감히 웃어?”“내가 못 웃을 게 뭐가 있어?” 허태준이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너 때문에 온 거잖아.”여형민은 화가 났다.“근데 그냥 나한테 떠밀어 버리는 거야?”여형민 역시 C Y 그룹 창립자 중 한 명이었으나 그 명성은 허태준과 비할바가 못됐다. 둘이 함께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태준과 관계를 쌓기 위해 다가왔다.“너한테 또 밀어버리다니.”허태준이 여형민의 말을 고쳐줬다.“난 그냥 상대하지 않은 것뿐이야.”외부에서 허태준은 친절하고 예의 있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건 그저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들에 상대해서 쓰는 가면일 뿐이었다. 태하그룹은 근래에 경영상황이 좋지 못했고 여러 번 파산의 위기에까지 직면했었다. 그러니 정씨네 집안은 이제 아무런 이용가치가 없었다. 여형민은 허태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어 그저 허태준을 노려 보기만 할 뿐이었다.“근데 정말 이상해.”허태준이 입을 열었다.“낯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친절한데 왜 나은희는 그렇게 대하는 거야?”아까 여형민과 나은희의 살벌한 대화를 허태준은 다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나은희가 여형민의 말 때문에 상처를 받은 모습과 나은희가 떠난 후예 여형민이 아쉬워하는 모습도 다 봤다. “사실 들어가서 쉬라고 한 것도 시비
결혼식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하객들도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허태준과 여형민도 바빠졌다. 하객들 중 허태준을 아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다들 이 기회를 빌어 허태준과 친해지려고 담배를 건네거나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여형민과 나씨네 집안사람들의 체면을 위해서 허태준도 대충 응대했으나 그는 그렇게 인내심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결혼식에 참여하는 하객들 마다 자신에게 치근덕대는 것을 보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예식장이 매우 컸기에 허태준은 사람이 없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복도는 창문이 열려져 있었기에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는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아무런 메시지도 와있지 않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4일이나 지났는데도 심유진은 한 번도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김욱을 통해서 전한 물건을 아직 보지 못한 것일까? 허태준은 묻고 싶었으나 물을 수가 없었다. 만약 심유진이 이미 확인을 했지만 아직도 그를 원망하고 있는 거라면... 허태준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에서의 일을 모두 해결하고 미국으로 가서 그녀에게 직접 속죄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옅은 담배냄새가 코를 찔렀다. 허태준이 인상을 썼다. 몇 년 전부터 경주는 실내 흡연을 금지했기에 이런 장소라면 더더욱 엄격히 금지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싫어했다. 하지만 직접 가서 그 행동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고는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돈 좀 더 마련할 수 없어?”굉장히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였다.“애초에 그 사람들을 믿어서는 안 됐어. 그 큰돈을 다 날렸잖아.”“지금 다들 나보고 물러나라고 난리야. 됐어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정말 믿을 놈 하나 없다.
허태준은 들킨 줄 알고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딱 기다려. 언젠간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허태서가 허공에 대고 욕설을 퍼붓다가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 멀어져 가는 발자 국소리를 들으며 허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에 죽는 사람이 누가 될지 궁금했다.허태준이 연회장 입구에 돌아왔을 때 신랑과 신부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집안 어르신들도 그들 옆에 서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화장을 해서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못 봐서 인지 허태준은 정재하를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다. 몇 년 전에 비해 정재하는 많이 성숙해져 있었다.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비쳤다. 예전의 그 자신감 넘치고 긍정적이던 앳된 청년은 온 데 간데없었다. 태하그룹의 경영 상황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이 몇 년 동안 그는 많은 고생을 하면서 성격도 많이 달라져 버렸다. 허태준은 정재하를 동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는 허태준이 다른 사람을 별로 관심하지 않는 탓이었지 그들 사이의 불쾌한 과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러니 허태준은 정재하의 기쁜 표정을 보면서도 전혀 축복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정재하의 기쁨이 나지희 때문인지 아니면 나씨네 집안이라는 이 든든한 뒷심 때문인지 궁금했다. 허태준은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리에 나타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또다시 그를 둘러쌌다.“대표님, 한참 찾았는데 안보이시길래 가신 줄 알았어요.”“대표님, 여러 번 만나 뵙기를 청했는데 오늘에야 만나네요.”“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오늘 한잔 하셔야죠!:“대표님...”진정한 주인공들은 어느새 찬밥신세가 돼버리자 집안 어른들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정재하와 나지희는 존경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드레스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지만 않았어도 나지희는 이미 허태준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정재하는 예전부터 허태준에게 열정적이었고 나지희가 허태준을 굉장히 존경하고 있다는 것은 전에 여형민에게서 전해 들어
정재하의 진정성 있는 태도에 허태준의 마음도 많이 약해졌다. 며칠 전 부하들을 시켜서 했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정재하의 두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허태준은 예의를 차리며 대답했다.“초대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태준아, 오늘 수고 많았다.”나지희 아버님이 웃으며 말했다. 나씨네 집안과 허씨네 집안은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집안 어른들끼리도 자주 만남을 가졌었다. 허태준은 비록 이런 상황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씨네 집안사람들과는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었다.“형민이가 고생했죠.”허태준은 모든 공로를 여형민에게 돌렸다. 아버님도 맞은쪽을 쳐다봤다. 여형민은 여전히 손님을 맞이하고 축의금을 걷느라 바빴다. 나은희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이 다정한 한쌍의 부부였다. “형민이가 확실히 고생 많이 했지.” 아버님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둘이 이렇게 사이좋은 모습은 오랜만에 보네.”여형민과 나은희의 혼인은 쌍방 부모님들의 결정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두 사람이 별다른 감정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비록 자주 다정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부모님들이 어찌 그 내막을 모를 수 있을까. 허태준은 화제를 다시 이 신혼부부에게로 돌렸다.“이제 또 소원 하나 이루셨네요.”아버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허태준에게 물었다.“근데 부모님은 왜 안 오셨어?”“여행 가셨어요. 두세 달 뒤에 돌아오실 거예요.”허태준이 대답했다. 부모님의 여행 역시 허태준이 계획한 것이었다. 허태준은 삼촌들의 범죄 증거를 확보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중간에서 제지하거나 속상해서 삼촌들을 미리 다른 곳에 보내놓을까 봐 두려웠다. 근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삼촌들이 감옥에 간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나은희 아버님은 아쉬운 듯했다.“오늘 태준이 아빠랑 한잔 하려고 했는데.”허태준이 아버지 대신 대답했다.“앞으로도 기회는 많은데요 뭐.”허태준은 혼자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결혼식장은 흰색과 핑크색으로 설계되었기에 사랑스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