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준은 두려웠다. 비록 심유진과 다시 만난 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심장이 또 빨리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조씨네 집안사람들이 심유진을 찾는 이유는 아마 돈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서 그런 대우를 받고 그들의 뻔뻔함을 겪은 심유진이 그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허태준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만약 이미 세상을 뜬 조건웅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면 심유진이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비록 심유진에 대해 다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 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녀에 대해 꽤 파악할 수 있었다. 심유진은 아무리 독한 말을 하고 차갑게 대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허태준은 심유진이 다른 사람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허태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조건웅은 이미 죽은 사람이니 더 이상 심유진을 괴롭혀서는 안 됐다. 두터운 자료들이 파일에서 쏟아져 나와 책상에 떨어졌다. 허태준은 가장 위에 놓인 이력서에 붙여진 사진을 주목했다. 사진 속의 남성은 예전에 부하가 조씨네 집안사람들에 관한 자료를 줬을 때 본 적이 있었다. 허태준은 그 사람이 조건웅의 동생 조건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예전에 그 자료를 받을 때만 해도 조건이는 대학생이었다. 성적은 계속 학년 삼등을 유지했고 매년마다 고액의 장학금까지 받으며 학생회, 동아리 등에서도 활약을 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조건이는 형보다 더 출세할 가망이 있었고 조건이의 집안도 조건이를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다. 하지만 조건이는 인성이 좋지 않았다. 대학교의 학생회는 선후배 관계가 엄격했고 조건이는 회장이라는 직책을 얻은 후에 더욱 의기양양 해졌다. 그러니 주변에 다른 친구들 중에는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사람들은 취직을 하고 나서도 큰 발전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이력서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조건이는 화려한 이력서를 등에 업고 유명한 대기업에 입사할 기회를
조씨네 집안사람들은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인맥도 없었다. 예전에는 아들 둘이 잘 나서 많은 진척들이 관계를 다지려고 찾아오긴 했으나 그들은 자기 자식이 대구에서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거나 돈을 빌려 달라고 하기도 했다. 조씨네 부부는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었으나 돈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에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돌려보냈다. 하지만 일자리를 구해 달라고 한다면 그건 돈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조건웅에게 부탁하여 대신 구해주곤 했다. 심지어는 심유진마저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진척들을 도와 로열 호텔에 일자리를 마련해 줬다.아들들이 돈을 잘 버는 것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집안이었을 것이다. 특히는 조건웅 어머니가 종종 말을 함부로 하며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기에 사실 그들 집안사람들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그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사실은 그냥 집안 사정이 어떤지 구경을 하러 오거나 사업에 관한 얘기를 하러 올뿐이었다. 조씨네 부부는 자신들을 도와줄 사람을 찾지 못 하자 결국 전 며느리를 찾아왔다. 그들은 그동안 사영은의 요구에 따라 심유진을 다시는 찾지 않았기에 심유진이 뭘 하고 지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예전처럼 대구에 로얄호텔로 찾아갔다 두 사람은 로열 호텔을 막론하고도 대구에서 유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보안인원들은 그들을 보자마자 밖으로 내쫓았다. “심 매니저님은 여기 안 계십니다. 그만 가주세요.”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 모두 심유진의 지시를 받고 자신들을 내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심유진이 호텔에 드나드는 것을 마주치지 못 하자 그들은 그제야 심유진이 정말 이곳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각종 수단을 동원하고 나서야 그들은 심유진이 경주의 로열호텔로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유진이 경주에 갔다니... 그곳은 로열호텔의 모든 고위급 간부들이 다 모
허태준은 모든 자료를 다 확인했다. 그는 두터운 자료들을 내려놓고 전화를 걸었다. “회사에 조건이라는 사람이 이력서가 온 적 없는지 확인해 봐. 상대방은 재빨리 답변을 했다. 원재금융 쪽에서 이력서를 받았다고 합니다. 원재금융은 C Y 그룹 산하의 금융 서비스 회사였다. 조건이는 금융을 전공했으니 당연히 금융 회사에 지원했을 것이다. 허태준이 책상을 톡톡 두드리면서 잠깐 생각했다.“취업시키세요.”조건이가 일자리를 얻고 싶어 하니 허태준은 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그 집안사람들이 잠깐이나마 조용해질 수 있다면 말이다. 순식간에 토요일이 됐다. 이른 아침부터 여형민이 허태준의 집문을 두드렸다. “준비 다 됐어? 떠나도 돼?”허태준은 아직도 잠옷을 입은 채로 거실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허태준은 한 손에 커피 잔을 들고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든 채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입꼬리를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형민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별이랑 얘기하고 있어?”허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이는 이제 아는 단어가 점점 많아져 허태준과 문자를 할 때도 타자를 꽤 잘했다. 하지만 아직 어리기 때문에 틀리게 쓴 글씨가 있거나 하면 허태준은 하나하나 시정해줬다. 여형민이 허태준을 가볍게 때렸다. “내일 이어서 얘기하면 안 돼? 이미 늦었어. 빨리 떠나야 돼.”허태준은 드디어 여형민을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빨리 갈 필요 있어?”청첩장에는 11시 반이라고 적혀 있었고 허태준의 집에서 식당 까지는 반 시간도 안 걸렸다. “난 일찍 가야 하잖아. 오늘 같이 가주겠다며.”여형민이 원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허태준을 바라봤다.“한 입으로 두 말하기 없기야.”나씨네 집안 큰 사위로써 여형민은 일찍 결혼식장에 도착해야 했다. 이런 자리에서는 완벽한 부부 행세를 하자고 나은희와 이미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은희와 단둘이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편했다. 그러니 여형
“너 아직도 나은희 무서워하니?”허태준이 비웃었다. 여형민은 창피한지 얼굴이 빨개졌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일어나.”여형민이 호통을 쳤다. 허태준은 궁금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좋아하면 그냥 좋아한다고 해.”허태준이 여형민의 등을 두드렸다.“어차피 결혼도 한 사이인데 예전에 일은 그냥 잊어버려.”여형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허태준은 그가 또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나도 좋아하고 상대방도 나를 좋아하는 이런 관계는 찾기 쉽지 않아.”허태준은 여형민에게 이런 진지한 얘기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자신도 겪었던 일이니 간절히 원하는데 얻지 못하는 그 아픔을 알고 있었다. 비록 나은희의 예전 행동들은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사정에 공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은희도 벌 받을 만큼 받았어. 정말 그 사람한테 마음이 간다면 그냥 잘 지내봐. 사랑이라는 건 한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마치 그와 심유진 사이의 관계와 같았다. 만약 처음 만났을 때부터 조금 더 주동적이고 용감하게 다가갔더라면 이렇게 오래 헤매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형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씨네 집안은 경주에서 알아주는 집안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여형민네 집안과 혼담이 오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은희는 여형민과 결혼할 때 여형민 의 의견에 따라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리지 않고 집안사람들끼리 간단하게 한 끼 식사를 하는 것으로 끝냈다.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던 것은 나씨네 집안에서 계속 아쉬워하던 일이었다. 근데 이제 작은 딸이 결혼을 하니 전에 그 아쉬움을 채울 기회가 온 것이다. 그들은 큰 예식장을 빌려 한 달 전부터 설계를 시작했다. 신부의 요구로 예식장은 핑크색과 흰색을 주제로 동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로 꾸며졌다. 경비도 일반 호텔보다 훨씬 삼엄했다. 여기저기 무장한 경찰들이 깔려 있었다.오늘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니 혹여나 결례를 범할까 봐 결혼식장에
예식장에서 나은희는 최종점검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깔끔한 흰색 정장을 입고 하이힐을 신었는데 마침 어깨까지 오는 긴 생머리가 자연스럽게 나풀거리며 크고 반짝이는 귀걸이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나은희를 보자마자 여형민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허태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나은희는 한 손에 무전기를 든 채 조금 삐뚤게 설치된 조명을 가리키며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허태준이 일부러 여형민에게 물었다.“저쪽으로 갈까?”여형민이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아니, 아무 데나 앉아있자.”“나은희가 세 번이나 전화했다며. 그렇게 급히 찾은 걸 보니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닐까?”“어차피 나 보고 뭔가 도와 달라고 하는 건 아닐 거야. 우리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있어?”여형민과 알고 지낸 세월이 있는 만큼 허태준은 여형민의 생각을 단번에 읽어 냈다.“왜, 결혼식 올리고 싶어 졌어?”허태준이 살짝 눈을 흘겼다.“애초에 결혼식을 안 올리겠다고 한 사람은 나은희가 아니라 너잖아. 근데 이제 와서 기분 나빠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여형민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허태준을 째려볼 뿐이었다.“너 왜 나은희 편들어?”허태준이 손을 저었다.“아니, 난 그냥 맞는 말을 할 뿐이야.”여형민은 이를 악물었다.“꺼져.”훤칠한 남성 둘이 입구에 이렇게 오래 서 있으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나 은희는 일에 집중하다가도 직원들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보자 나은희가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하이힐을 신은 데다가 바닥은 닦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물기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은희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때 허태준은 한 사람이 신속하게 나은희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허태준은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여형민은 나은희를 품에 안았다. 드라마 한 장면 같은 상황에 주위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나은
“도와 달라고 부른 거 아니었나?”여형민이 주위를 둘러봤다. 식장은 이미 배치가 완료되어 있었고 최종점검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직원들은 여전히 바빠 보였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여형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조금 짜증이 났다.“이런 저급한 방법 좀 안 쓸 수 없어?”나은희는 예전처럼 여형민을 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여형민의 차가운 말투에 나은희는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자신의 매력을 너무 높게 평가하시네.”나은희도 가시 돋친 말들을 내뱉었다.“전화를 한 건 아버님이 시켜서였어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다정한 부부여야 한다는 거 잊은 거 아니죠?”여형민과 나은희 사이의 관계가 어떤지는 두 집안사람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혼인관계로 인해 안정된 합작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을 뿐 그들의 감정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여형민과 나은희에 대한 요구는 단 하나였다. 둘 사이에 관계가 어떻든지 외부 사람에게는 들켜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여형민은 자유로워 보였으나 사실 자신의 아버지를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니 나은희와의 결혼도 동의했고 이 무례한 요구도 허락 했던 것이었다. 나은희가 아버지 얘기를 꺼내자 여형민의 태도도 금방 달라졌다. “확실히 도와줄 건 없어요.”나은희가 말했다.“그냥 편한 곳에 앉아서 휴대폰이나 하면서 시간 좀 때우고 있어요.”여형민이 비웃었다.‘당신은 이렇게 바삐 돌아 치는데 난 앉아서 휴대폰이나 보라고? 그건 안되지.”여형민이 나은희에게 다가가 오른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여보.”그 다정한 목소리에 나은희의 몸이 굳어졌다.“당신은 가서 쉬어. 내가 할게.” 주변 사람들은 방금 전까지의 그 공격적인 대화를 듣지 못하고 이 다정한 모습만 봤다. 나은희도 지지 않았다.“그래요.”나은희가 부드럽게 웃으며 무전기를 여형민에게 건넸다.“해야 할 일은 저쪽에 계신 매니저님이 알려 줄 거예요.”나은이가 방금 전까지 같이 있던 젊은
여형민과 허태준이 착석하자 신랑 측 가족들이 얼른 다가와 담배를 건네며 친한 척 했다.“대표님, 변호사님, 처음 뵙겠습니다.”허태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제 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다. 여형민이 얼른 공손하게 그 담배를 거절하며 말했다.“죄송해요. 저희가 담배를 안 펴서.”여형민은 허태준처럼 차갑지 않았기에 그 사람은 아예 아부할 상대를 바꿨다. 쉴 새 없이 아부를 떨어대는 그 사람을 보며 여형민은 그냥 그를 내쫓고 싶은 마음을 여러 번 억눌렀다. 그러다가 겨우 적절한 핑계를 대고 나서야 그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허태준이 좋은 구경 났다는 듯 웃으며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다 너 때문이야. 감히 웃어?”“내가 못 웃을 게 뭐가 있어?” 허태준이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너 때문에 온 거잖아.”여형민은 화가 났다.“근데 그냥 나한테 떠밀어 버리는 거야?”여형민 역시 C Y 그룹 창립자 중 한 명이었으나 그 명성은 허태준과 비할바가 못됐다. 둘이 함께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태준과 관계를 쌓기 위해 다가왔다.“너한테 또 밀어버리다니.”허태준이 여형민의 말을 고쳐줬다.“난 그냥 상대하지 않은 것뿐이야.”외부에서 허태준은 친절하고 예의 있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건 그저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들에 상대해서 쓰는 가면일 뿐이었다. 태하그룹은 근래에 경영상황이 좋지 못했고 여러 번 파산의 위기에까지 직면했었다. 그러니 정씨네 집안은 이제 아무런 이용가치가 없었다. 여형민은 허태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어 그저 허태준을 노려 보기만 할 뿐이었다.“근데 정말 이상해.”허태준이 입을 열었다.“낯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친절한데 왜 나은희는 그렇게 대하는 거야?”아까 여형민과 나은희의 살벌한 대화를 허태준은 다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나은희가 여형민의 말 때문에 상처를 받은 모습과 나은희가 떠난 후예 여형민이 아쉬워하는 모습도 다 봤다. “사실 들어가서 쉬라고 한 것도 시비
결혼식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하객들도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허태준과 여형민도 바빠졌다. 하객들 중 허태준을 아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다들 이 기회를 빌어 허태준과 친해지려고 담배를 건네거나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여형민과 나씨네 집안사람들의 체면을 위해서 허태준도 대충 응대했으나 그는 그렇게 인내심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결혼식에 참여하는 하객들 마다 자신에게 치근덕대는 것을 보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예식장이 매우 컸기에 허태준은 사람이 없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복도는 창문이 열려져 있었기에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는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아무런 메시지도 와있지 않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4일이나 지났는데도 심유진은 한 번도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김욱을 통해서 전한 물건을 아직 보지 못한 것일까? 허태준은 묻고 싶었으나 물을 수가 없었다. 만약 심유진이 이미 확인을 했지만 아직도 그를 원망하고 있는 거라면... 허태준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에서의 일을 모두 해결하고 미국으로 가서 그녀에게 직접 속죄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옅은 담배냄새가 코를 찔렀다. 허태준이 인상을 썼다. 몇 년 전부터 경주는 실내 흡연을 금지했기에 이런 장소라면 더더욱 엄격히 금지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싫어했다. 하지만 직접 가서 그 행동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고는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돈 좀 더 마련할 수 없어?”굉장히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였다.“애초에 그 사람들을 믿어서는 안 됐어. 그 큰돈을 다 날렸잖아.”“지금 다들 나보고 물러나라고 난리야. 됐어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정말 믿을 놈 하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