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준은 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벨이 울리자마자 문을 열었다. 얼마나 빠른지 여형민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혼자야? 유진 씨는?” 여형민이 목을 빼들고 방안을 들여다봤다. 거실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심유진이 보였다. “유진 씨가 있는데 난 왜 불러?””일단 들어와.” 허태준은 별다른 해석 없이 서재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왔다. 그 사이에 심유진이 여형민에게 낮은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취하셨어요. 저를 대표님이 좋아하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이젠 저랑 결혼까지 하시겠대요.” 여형민은 자초지종을 아는 사람이었다. 심유진의 설명을 들으니 허태준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예상이 갔다. 허태준이 서재에서 나오자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거실에 앉아있었다. 허태준이 종이와 펜을 여형민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는 보증서를 써, 이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앞으로 내 마음대로 할 거라는 말도 보태고.” 심유진이 더는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뭘 마음대로 해요, 혹시 위법행위면 어떡하려고.” “그럼 어떻게 고칠까?” 허태준은 심유진의 의견을 묻는 것 같았지만 그 차가운 눈빛에서 그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게 보였다. 심유진은 더 이상 반항할 수가 없었다. 여형민이 심유진의 팔을 잡았다가 그 시선에 손을 옷자락으로 가져갔다. “잠시만 기다려봐, 유진 씨랑 얘기 좀 할게.” 의외로 허태준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래, 가봐.” 여형민과 심유진은 베란다로 나갔다. 심유진은 아직도 이 급전개에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할 얘기가 뭐예요?” 여형민은 베란다의 문을 굳게 닫았다. 혹시 허태준의 귀에 이 대화가 들어갈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사실대로 얘기할게요. 허태준 씨는 술버릇이 되게 고약한 사람이에요 취하기만 하면 엄청 귀찮게 군다고요. 평소에도 강압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인데 술이 들어가면 훨씬 어린애처럼 고집을 부려요. 자신이 갖고 싶어 하
여형민의 말은 심유진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알겠어요, 서명할게요.” 여형민은 2분도 안 지나서 보증서를 써왔고 심유진도 빠르게 서명했다. 계획대로 여형민이 보증서를 주머니에 넣으려 하면서 말했다. “그럼 이건 내가 보관하고 있을게?” “줘.” 허태준이 그런 여형민을 막았다. “그래, 줄게 줄게. 고작 종이 한 장인데 뭘 그렇게까지 해.” 허태준은 보증서를 손에 꼭 쥔 채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가봐.” “이제 필요 없어졌다 이거지?” 여형민이 눈을 살짝 흘기며 밖으로 나갔다. 그는 문밖에 서서 몰래 심유진에게 손가락으로 ok를 그려 보였다. “머리는 아직도 아파요?” 심유진이 허태준에게 물었다. 사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방금 전의 모습으로 이미 아무 일도 없다는 게 증명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허태준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소파에 드러누워 인상을 찌푸렸다. “아파.” 심유진은 조금 짜증이 나면서도 웃겼다. 취한 허태준은 평소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그 모습이 또 밉지만은 않았다. “늦었으니까 그만 씻고 자요.” “안 갈 거야.” 허태준이 그녀를 째려봤다. “나 씻을 때 도망가려고 그러는 거지?” 심유진은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아니에요.” 심유진이 웃으면서 급히 해석했다. “지금 온몸에 술냄새가 풍겨요. 불편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보증서도 썼는데 제가 어딜 도망가요.” 허태준은 한참을 빤히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씻고 올게.” 욕실로 가는 허태준의 발걸음이 불안해 보였다. 휘청거리는 모습에 심유진은 급히 가서 부축했다. 분명 아까 여형민에게 문을 열어줄 때는 멀쩡해 보였는데 말이다. 심유진은 욕실까지 허태준을 부축하고 금방 자리를 떴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한마디 보탰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저 불러요. 문밖에 있을게요.” “그래.” 욕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방금 취기가 가득했던 허태준은 사라지고 평소의 차가운
”좋다.” 허태준이 낮게 말했다. 심유진은 순간 마음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눈물이 고여 앞이 흐려졌다. 왜 허태준의 마음속에 있는 여인이 자신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을 느끼게 될 줄 몰랐다. 아마 그 여자라면 집안의 압박하에 이루어진 인연일지라도 그를 버리고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자요.” 심유진이 허태준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제가 옆에 있을게요.” 허태준은 금방 잠이 들었다. 심유진은 그의 긴 속눈썹을 세어 보기도 하고 또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매만지기도 했다. 피부가 부드러웠다. 나중에 꼭 피부관리 비결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한 시였다. 그녀는 놀라서 얼른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하지만 허태준이 그녀를 꽉 껴안고 있어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혹시 그가 깨진 않을까 싶어 차마 크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때 허태준이 살짝 눈을 떴다. 그녀가 시야 안에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얼굴을 파묻었다. “진짜 옆에 있네.” 잠결에 웅얼거리며 말했지만 심유진은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금방 다시 잠든 허태준을 보며 심유진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그 품을 벗어나는 걸 포기했다. 심유진은 아침에 허태준 때문에 강제로 기상했다. 허태준은 이불을 개고 그녀를 품에 안더니 어딘가로 걸어갔다. 심유진은 잠결에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었다. 허태준이 문을 열자 찬 공기가 확 느껴졌다. 심유진은 몸이 덜덜 떨리며 재채기가 나왔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심유진이 똑바로 상황을 인지했을 때 허태준은 이미 그녀를 안고 심유진 집의 대문 앞에 서있는 상태였다. 허태준이 심유진의 손을 잡고 엄지를 지문인식구역에 가져다 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심유진은 필사적으로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괜찮아요, 저 혼자 걸어갈게요.” “가만히 있어.” 허태준이 차갑게 말했다. 심유진은 더 이상 움직일 엄두를 못 냈다. 허태준은 그대로 심유진을 품에 안은채 침실로
결국 또 원점으로 돌아왔다. 심유진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데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시잖아요. 왜 저랑 결혼을 하시겠다는 건데요?” 가짜 여자친구 역할을 하는 것까지는 이해한다고 쳐도 가짜 결혼은 말이 안 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허태준이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슬프고 우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그 표정이 굉장히 심유진을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그녀는 뭐라고 위로를 건네고 싶었지만 합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 보증서를 보는 순간 그쪽이랑 결혼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집에서는 계속 결혼하라고 재촉하고 당신은 내가 유일하게 싫어하지 않는 여자니까.” 허태준이 심유진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스킨십을 해도 불편하지 않아.” 심유진이 그 손을 뿌리쳤다. “대표님, 이렇게 충동적으로 결정하지 마세요. 혹시 이후에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어떡해요.” “그럴 일은 없어. 하지만...” 허태준이 웃으면서 보증서를 주머니에 넣었다. “나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당신이 싫다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근데 보증서는 영원히 유효하니까 혹시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찾아와.” 심유진은 이렇게 빨리 그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그녀의 기억속에 그는 늘 강압적인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당장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빠져 심유진도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혼인신고를 하러 가자는 요청을 거절당했지만 허태준은 여전히 매너 있게 심유진을 호텔까지 데려다주고 회사로 출근했다. 여형민은 사무실에서 온 오전 기다리다가 그를 보자마자 재촉했다. “빨리 혼인신고서 좀 보여줘 봐.” “없어.” 허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뭐가 없다는 거야? 혼인신고를 안 한 거야 아니면 가져오지 않은 거야?” “안 했어.” 허태준이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쳐놓고 자리에 앉
반백살이 넘는 남자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녀를 향한 불만스러운 눈빛 또한 변함이 없다. “심유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그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을때 심유진은 조건반사적으로 떨었다. ——그는 줄곧 그녀를 상대하기를 싫어했다. 매번 그녀를 부를때마다 비평하고 책망할 뿐이었다. “심아저씨.”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그를 일반손님처럼 맞이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건가요?” “먼저 들어와.” 심훈은 이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녀가 따라올것을 짐작이라도 하듯이.심유진은 따라들어갔다.다른것보다 진짜로 고소라도 한다면? 하지만 그녀는 잘못 짚었다. “니 엄마가 아프다.” 심훈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이 얘기를 들어도 심유진의 감정에는 기복이 전혀 없었다. “심아저씨와 다른분들의 관심덕분에 금방 회복하실거예요.” 그녀는 제일 표준적인 미소를 머금으면서 겉치레로 얘기했다. “암이다.” 심훈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자궁암, 발견했을 때 이미 말기란다.”심유진은 멍해졌다. 두손을 저도 모르게 움켜쥐었다. “너한테 줄곧 못되게 군것을 안다. 니가 우리를 미워하는것도.” 심훈은 냉정하게 얘기했다. 말투에는 한치의 후회도 없는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니 엄마다, 십개월동안 힘들게 임신해서 낳고 너를 키웠다. 니가 엄마를 보러 갔으면 좋겠다.” 그는 ‘가스라이팅’ 을 잘했다, 하지만 심유진은 심씨일가를 줄곧 조심스럽게 했다. 특히 얼마전 심연희가 새해에 집에 오는것을 언급했는데 그때는 사영은의 병세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사영은이 일부러 심연희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한건지 아니면 심훈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아프다고 했는데 증거 있어요?” 심유진이 물었다. “증거 없이는 못믿겠어요.” 심훈의 눈빛이 돌연 싸늘하게 변했다. 그리고는 코웃음을 쳤다. “심유진, 넌 참 양심이 없구나!” 그는 손에 들고있
심유진은 심훈에게 그녀를 납치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녀는 심훈과 억지로 밀어붙이는것은 현명한 짓이 아니라는것을 알고 있었다. 경호원들이 움직이기전에 타협을 선택했다. "따라서 돌아갈수 있어요."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전에 총지배인님한테 청가를 맡아야 해요. 손안에 업무를 다른 사람한테 넘겨야 합니다." "잔머리 굴리지 마." 심훈은 경고했다. "저녁 8시 비행기를 예약했다. 6시전까지는 여기에서 널 만나야겠다. 아니면 니 총지배인을 만날테니." 심유진은 잔머리를 굴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그녀가 일하는 곳을 알고 있었고 현재 그녀의 거처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잡는것은 쥐새끼 잡기보다도 쉬웠다. 그녀는...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심훈은 줄곧 그녀를 골칫덩어리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녀가 심씨집안에 있었을때부터 그는 그녀를 공기취급을 하였다. 필요가 없을때면 눈길 한번 주기를 꺼려했다.하지만 지금 그는 직접 그녀를 찾으러 오고 참을성 있게 많은 얘기를 했다. 심유진은 그가 진짜로 사영은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한다는것을 믿을수가 없었다. 그들의 부부감정은 남들이 보기에처럼 그렇게 좋은편은 아니었다. 심훈은 성인군자의 모습을 하였지만 실제 사적으로는 그의 회사와 계약한 연예인들과 입에 담지 못할 일을 하였다. 그녀가 이 일을 알게 된 이유는 사영은이 주기적으로 아무 이유없이 한바탕 난리를 치면서 그녀를 가둬놓고 죽도록 패면서 "천한 년이 내남편을 꼬시려고 하다니!" 하고 욕을 했기 때문이다. 심훈이 이렇게 절박하게 그녀를 경주로 데려가려고 하는데에는 꼭 다른 목적이 있을것이다.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하는것이 좋을것이다.심훈의 타산은 그녀보다 더 치밀했다."핸드폰을 내놓아라." 그는 심유진한테 손을 내밀었다. "맡겨놓은 셈 치자, 니가 달아날가봐 그러는거다." 심유진은 원래 나가자마자 여형민을 찾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계획이 심훈덕분에 완
심유진은 지금까지 크면서 심훈과 같은 차에 처음 타본다.어릴적 매일아침 창가에 엎드려 심훈이 심연희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것을 부럽게 쳐다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녀의 제일 큰 바램은 심훈의 차에 탈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램은 너무 늦게 이루어졌다. 지금 그녀의 심경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 그녀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괴로웠다. 심훈은 그녀와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자는척을 했다. 앞에 두명의 경호원도 그녀랑 얘기할리 없었다. 심유진은 차창밖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 도로를 달리는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르기를바랬다. **심훈은 퍼스트 클래스 티켓을 끊었다. 심유진도 그 덕을 봤다.그녀는 생각했다. 이번 여행중 유일한 위안이라고.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의 그녀의 조심스러움과 당혹함은 심훈의 여러번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중간 열을 건너 심훈이 경호원과 얘기하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다. “누가 잡종 아니랄가봐. 꼬라지 하고는.” 경호원은 얘기했다. “연희아가씨와 비교할 거리가 안됩니다.” 심훈은 얘기했다. “당연한 소리를. 감히 우리 연희를 따라올자가 있는가?” **두시간의 비행은 금방 끝났다.오랜만에 돌아온건지 지금의 경주는 떠날때와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심유진은 두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여전히 변화가 없는 곳도 있었다. 예를 들면 심씨저택과 심씨네 하녀들이그녀를 대하는 태도 등 말이다. 그녀는 심훈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하인들은 심훈을 대할때 온얼굴에 미소를 띄고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굽신거렸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차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가끔 “심유진아가씨” 라는 소리도 들렸지만 대부분은 아예 그녀를 보는척도 안했다. 심유진은 낙심할것도 없었다. 저들이 굽신거리는것이 오히려 꿍꿍이가 있을지 의심해볼 여지가 있을것이다. 심훈은 사영은이 항암치료를 받기 싫어 강제출원하여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심유진은 사영은이 또 무슨 잔머리를 굴리는건지 알수가 없었다. 아무리 아파서 심훈이랑 각방을 쓴다 해도 2층에도 충분한 방들이 있기 때문에 한층 더 위인 3층에 옮겨갈 필요가 없었다. 심유진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3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를 따라 거의 끝까지 가니 덜 닫힌 문이 보였다. 문틈사이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아빠가 언니를 데려온다 했으니 걱정 마세요.”“네 언니가 고집이 세잖니...네 아빠가 나선다 해도 설득하기는 어려울거야...”“엄마가 이렇게나 아픈데...언니는 꼭 돌아올거예요!” “에휴...연희야...엄마는 후회 된단다...네 언니랑 일찍이 화해를 했더라면...이제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만약에, 만약에...” “엄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을 잘 들으면 이깟 병은 완치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컨트롤은 할수 있다고 했어요! 언니도 그렇게 쪼잔한 사람이 아니라서 엄마가 예전에 했던 잘못을 용서할 거예요!” 심유진은 벽에 기대어 반나절을 들었다. 한숨이 놓이는 동시에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영은의 병은 심훈이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생각하니 심유진은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유진아가씨, 왜 안들어가세요?” 하인은 과일을 들고 올라오는데 그녀가 문어구에서 넋을 잃고 서있는것을 보니 이상하게 느껴졌다. 심유진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멋쩍게 웃었다. “지금 들어갈려구요.” 하인은 자연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럼 이걸 들고 들어가세요. 주인님이 저한테 부인과 연희아가씨한테 주라고 시켰습니다.” 이때 방문은 안에서 세게 열렸다. 심연희는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홍아줌마, 아빠가 아줌마한테 과일을 가져다 주라고 시킨 거지 언니한테 시킨게 아니예요! 하기 싫으면 지금 당장 사직하고 나가세요!” 홍아줌마는 심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