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현 님,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했어요.”유시인은 염무현의 결정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윤문호의 비열한 행동에 화가 난 것이다.“이 윤문호는 원래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속이 좁고 의심이 많고 통제 욕이 강해요. 전에 제 고객 중 몇 명이 모두 윤문호의 협박을 받아 곧 계약을 성사할 무렵에 그만뒀어요. 그 사람은 항상 독선적이고 억지를 부리는 타입이에요.”소정이는 옆에서 물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왜 그 사람과 약혼을 한 거예요? 이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유시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대단한 가문이니 어쩔 수가 없었지. 그때 둘째 삼촌이 말한 윤문호는 그야말로 기가 막혔지. 마침 유씨 가문이 어려움에 부딪혔던 때여서 천강종처럼 강력한 외력의 지원이 필요했어. 별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승낙했지. 알고 보니 윤문호는 좋은 놈이 아니었어.”그때 파혼하려고 한다면 조력자인 천강종은 즉시 유씨 가문과 사이가 틀어질 것이다.유씨 집안은 이런 변고를 감당할 수 없었다. 가족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혼사를 감내해야 했다.유시인은 윤문호를 멀리하기 위해 골동품을 경매하는 일을 하면서 매일 밖에서 돌아다녔다.그런데 이 녀석이 또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유시인이 염무현의 파트너가 되자마자 윤문호가 시비를 걸러 왔다.“다행히 그동안 무림의 고수들을 많이 만났어요.”유시인은 연락처를 뒤지며 말했다. “오늘 밤의 링 경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무현 님 걱정하지 마세요. 일은 저 때문에 시작되었으니 제가 끝까지 책임질게요.”염무현은 원래 이런 작은 일은 스스로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 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유시인은 이미 전화를 걸고 있었다. “여보세요, 남 어르신, 유시인입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링 경기를 하려 하는데 어르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손 어르신이랑 같이 계세요? 잘됐네요, 제가 차를 준비해서 두 분을 안성시로 모시겠습니다. 두 분
도덕용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지난해 일인걸요? 두 달 전에 제가 기록을 또 경신했어요. 지금은 열세 개의 비석입니다!”유시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도 선배님은 참으로 노익장이시네요. 존경합니다.”“별말씀을요.”도덕용은 겸손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이미 들떠 있었다.방 안에는 또 다른 두 명의 어르신이 경외스러운 표정을 하고 었다.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나 도덕용을 향해 인사를 했다.“이 두 선배는 남 어르신과 손 어르신이에요. 경기를 도우러 온 조력자예요.”유시인이 소개했다.두 사람이 인사를 했는데 도덕용은 고개만 끄덕이며 화답했다.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무림계에서는 실력으로 말을 한다.두 어르신은 마음속에 약간의 불만이 있었지만 표현하기도 애매했다.두 사람은 어색하게 웃었다. 남 어르신이 입을 열었다. “도 사형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은 우리 둘의 영광입니다.”“시인 씨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리지 않고 무사히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손 어르신이 맞장구를 쳤다.도덕용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저 링 싸움일 뿐이니 너희들은 옆에서 지켜보면 돼. 나 혼자서 상대 선수를 모두 격파하기에 충분해.”두 어르신은 즉시 안색이 변했다.너무 사람을 업신여겼다. 조금의 인정머리도 없었다. “너무 자신 있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혼자 싸움을 하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에요.”남 어르신이 호의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손 어르신도 말했다. “상대방은 천강종 출신이에요. 절대 얕보면 안 돼요. 우리 둘은 형님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꽤 경험이 있어요. 링에 올라가서 형님 못지않게 할 겁니다. 팀플레이는 호흡이 잘 맞아야 해요.”도덕용은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돌고 말했다. “호흡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실력이 없으면 함부로 얘기하지 마. 불복한다면 지금 나와 겨루어 봐도 좋아. 내가 너희 둘을 상대할게. 내 발차기를 막을 수 있다면 방금 한 말을 취소하지.”손 어르신은 더는
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한 명이 다쳤다.겉으로 보기에 도덕용은 위세를 떨치고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염무현은 일이 그렇게 쉬울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단순한 실력 과시라면 상대를 한 번에 무너뜨리면 그만일 텐데, 괜히 남의 비위를 거슬릴 필요가 있겠는가.도덕용은 지금 혈기가 왕성하지 않은 나이다.손 어르신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역시나 명불허전이네. 내가 진 것에 두 손 두 발 모두 들게.”“흥, 눈치는 빠르구나!”도덕용은 누구도 안중에 없다는 기시감을 보였다.유시인은 다급하게 또 중재인이 되었다.“여러분 같은 영웅들이 서로 아끼는 모습에 이 후배들은 존경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면 잠깐 쉬었다가 30분 뒤에 출발합시다.”염무현은 먼저 일어나 어리둥절해하는 사매 소정아를 데리고 먼저 떠났다.두 사람을 슥 훑어보던 도덕용의 눈에서는 선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저녁 무렵.땅거미가 어둑어둑해지고 까만 도화지가 대지를 뒤덮었다.안성 남교에서.텅 빈 곳에 임시로 링을 하나 세웠다.윤문호와 천강종의 선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오늘 밤의 링 배틀을 알고 사면팔방에서 몰려왔다.지금의 공터에는 이미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고대 무술 능력자를 비롯한 일반인들도 구경하러 나왔다.등불이 켜지자 링 위를 환하게 비춰주었다.염무현은 소정아를 데리고 왔으며 둘은 웃고 떠들며 다가왔다.그 둘은 젊은이였기에 세 늙은이와 말이 통하지 않아서 유시인과 함께 떠나기로 한 스케줄을 거절하고 스스로 이곳에 왔다.“염 씨, 네가 왜 여기에 있어?”멀리서 8옥타브 높은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그리고 소정아 이 녀석, 왜 아직도 쟤와 함께 지내니? 여자애라면 자기를 사랑할 줄도 알아야지. 이러면 소씨 가문의 체면이 깎이는 게 두렵지 않으냐?”그 여자는 밍크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바로 소명아였다.“당신도 올 수 있는데 저희가 왜 오지 못하겠어요?”염무현이 되물었다.방금까지 좋았던
“그가 뭔데. 서해 유씨 가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정말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쟤는 오늘 링에서 유시인이 남자와 너무 가까이 지내서 약혼자가 화가 나서 일벌백계한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염 씨가 며칠 더 날뛸 수 있는지 보고 싶네. 만약 재수가 없지 않다면 난 소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박가인은 귀찮음을 마다하지 않고 어머니의 손목을 꼭 잡고 다니며 그녀가 말썽을 피우는 것을 방지했다.“어서 봐. 천강종의 사람이 왔어.”누군가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자 사람들이 잇달아 바라보았다.옷차림이 산뜻한 도련님 한 명이 고수들에게 둘러싸여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바로 윤문호였다.다만 그는 몰골이 조금 흉측했다. 코와 얼굴이 부은 데다 걸음걸이가 정상이 아니어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이것 봐. 이게 진정한 부잣집 도련님이야.”소명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어찌하여 유씨 가문의 딸을 먼저 등극시켰는가. 우리 딸도 나쁘지 않아. 만약 윤 도련님의 법안에 들어간다면 우리 박씨 가문은 더 발전할 것이야.”박가인은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이 윤문호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박가인은 일찍이 그의 행적을 들었는데 몇 달 전만 해도 그에게 짓밟힌 양씨 가문의 여인은 두 손으로 다 헤아릴 수 없었다.이 사람은 음란할 뿐만 아니라 그냥 변태와 마찬가지이다.만약 누가 그에게 시집을 간다면 정말 운이 지지리 없는 것이다.윤문호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카리스마가 강하다.그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즉시 압박감을 느꼈다.곧이어 유시인이 찾아왔다.도덕용에 손 어르신, 남 어르신 그리고 유씨 가문에서 온 경호원까지 아우르는 카리스마는 대단했다.양측의 병력이 만나자 갑자기 칼날이 날카로워졌다.“유시인, 난 정말 남자 때문에 공연히 나한테 맞서는 줄 몰랐어.”윤문호는 이를 갈았다.유시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링 배틀은 네가 제안한 거니까 각자 실력으로 하자.”“그래.”윤문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미
“좋은 대우를 받았으면 그에 맡게 충실해야지.”남 어르신은 모든 정세가 도덕용에게 빼앗길까 봐 두려웠다.그와 손 어르신은 멀리서 왔는데 출전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마음 편히 사례금을 가져갈 수 있겠는가.게다가 손 어르신은 그것 때문에 다쳤다.두 사람은 일찌감치 반드시 출전해야 한다고 상의했다.도덕용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유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자, 첫판은 남 어르신에게 맡기겠습니다.”그때 염무현이 소정아를 데리고 다가왔다.“상대방의 무술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것 같으니 우리 쪽에서 조심해야 해요.”염무현이 귀띔했다.남 어르신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이놈아, 너만 눈 있어? 내가 무림을 종횡무진하며 네가 걸어온 길보다 더 많은 링을 치렀으니 네가 일깨워 줄 필요는 없어.”그는 염무현이 젊어서 그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게다가 염무현이 이렇게 끼어들어 어렵게 얻은 출전 기회를 놓칠까 봐 걱정이었다.사실 남 어르신은 염무현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그러기에 당연히 염무현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을 것이다.유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남 어르신, 염무현 씨가 이렇게 말했으니...”“괜찮아요. 저에게 다 대처할 방법이 있어요. 이번 판은 제가 이길 것입니다.”남 어르신은 급히 유시인의 입을 막고 돌아서서 링 위로 뛰어올랐다.그는 화를 내지 않고 좋은 마음으로 귀띔해 주었다.“상대 팀의 약점은 오른쪽 옆구리에 있으니 한 방에 잡을 수 있을 겁니다.”하지만 남 어르신은 이에 대해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내가 누군데 네놈이 일깨워 줄 필요가 있겠느냐?’‘만약 정말 이 방법으로 이긴다면 공로는 네 것이냐, 아니면 내 것이냐?’‘무슨 개뿔의 약점이 오른쪽 옆구리야. 내가 기어이 그의 왼쪽 몸을 공격하려 하겠다.’자신의 방법으로 승리하면 나중에 다른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을 수 있다.남 어르신은 무대에 오르자마자 안달복달하며 상대방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이리 와.”건장한 사내
“신의님,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여자 때문에 포기할 자리가 아닙니다. 신의님만 원하시면 모델이고 배우고, 설사 한 나라의 공주라고 해도 다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서해 교도소, 이곳은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거물만 가두기로 유명한 특별한 교도소이다.철창 앞에서 한 노인은 한참 젊은이에게 연신 굽신대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노인은 상업계의 선두 주자인 전태웅이었다. 그는 한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재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단호하고 매정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그런 사람이 글쎄 염무현을 위해 아무 죄명이나 쓰고 복역하러 왔다.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상황이다.전태웅의 뒤로 교도소 내의 모든 교도관과 죄수들이 줄을 지어 한 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염무현을 붙잡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죄수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을 제패했다.염라대왕. 생사부와 같은 의술을 가졌다고 하여 붙여진 염무현의 별명이다. 그의 손에는 두 개의 검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목숨을 살리는 메스이고, 다른 하나는 목숨을 앗아가는 비수이다. 어쩌면 생사검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평화로운 세상에서 그는 생의 신이 될 것이고, 전란의 불꽃이 튀는 세상에서 그는 사의 신이 될 것이다.“하아, 당신은 몰라요...”철창 앞에서 염무현은 우뚝 서 있었다.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그의 아내 양희지의 모습 말이다.4년 전의 결혼식장에서 양희지는 흑심을 품고 신부 대기실에 쳐들어간 변태 때문에 험한 일을 당할 뻔했다. 다행히 처남이 술병으로 변태의 머리를 내리친 덕분에 그녀는 무사할 수 있었다.아내를 지켜주지 못한 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염무현은 처남 대신 교도소에 들어갔다. 지난 4년 동안 비웃음으로 가득한 세상을 혼자 버텨내야 했을 양희지를 떠올리면, 아무리 신으로 숭배받는 그라고 해도 가슴이 답답한 것이 숨이 잘 올라오지 않았다.“희지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만큼 우리가 나누는 감정도 소중하죠. 명예와 권력같이 세속적인 것은 우리
“좀 늦네...”염무현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텅 빈 주변을 둘러봤다. 그가 4년 동안 그려오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양희지도 약속처럼 그가 출소하자마자 달려와서 안아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양희지가 괜히 급하게 운전하다가 사고라도 당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기다렸다.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하늘에서는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야 차 한 대가 그의 앞으로 와서 멈춰 섰다.염무현은 빠른 걸음으로 마중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사람은 그가 기다리던 양희지가 아닌, 그녀의 친구 조윤미였다.“윤미 씨가 어떻게 왔어요? 희지는요?”조윤미는 한 손으로 우산을 든 채 차갑게 말했다.“양 대표님은 오지 않으셨어요. 저는 이제 대표님의 비서이니, 조 비서님이라고 불러줘요. 그리고 이건 대표님이 전해달라고 하신 물건이에요.”조윤미는 염무현에게 서류를 건네줬다. 이혼 합의서라는 커다란 다섯 글자는 눈이 아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염무현도 놀란 듯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금방 미소를 되찾으면서 말했다.“장난인 거 다 알아요. 희지한테 얼른 나오라고 해줘요.”조윤미의 얼굴에는 언짢은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장난 아니거든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도 있듯이, 4년도 마찬가지예요. 염무현 씨 당신은 이제 우리 대표님과 어울리지 않아요.”“그게... 무슨 말이죠?”염무현은 조윤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한결같이 냉정했다.“지금의 당신은 우리 대표님과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요. 양 대표님은 서해 최고 미녀 대표이사로 불리고 있어요. 당신의 존재는 대표님의 명성에 누가 될 뿐이에요. 대표님의 회사를 위해서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떠나줘요. 괜히 근처를 맴돌면서 걸림돌이 되지 말고요.”“내 존재가 뭐 어떻다고요?”“염무현 씨는 전과자인 반면, 양 대표님은 대기업의 대표이사예요. 차도, 집도, 쓰는 물건도 전부 최고급이죠. 대표
양희지가 남도훈과 만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이때 벤츠 한 대가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뒷좌석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걸친 아름다운 여자가 내렸다. 그녀의 쭉 뻗은 다리는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인간계를 벗어난 우아한 아우라는 여신을 연상케 했다.4년의 세월은 마치 양희지만 피해 간 것 같았다. 아니, 커리어우먼 특유의 강한 기운만 남기고 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희지야...”염무현은 환한 표정으로 양희지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무의식으로 뒤로 피하면서 시선을 돌렸다.“미안, 급한 일이 있어서 좀 늦었어. 조 비서, 일은 어떻게 됐지?”양희지의 차가운 모습은 마치 낯선 이를 대하는 것 같았다. 조윤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부랴부랴 그녀를 향해 우산을 기울이며 말했다.“염무현 씨랑 얘기하는 중이었어요. 대표님은 남도훈 씨랑 만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여기까지 와도 괜찮으신 거예요?”“괜찮아. 이쪽 일 먼저 해결할 정도의 여유는 있어.”양희지는 이제야 염무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옷이 비에 흠뻑 젖은 것을 보고 약간 복잡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금방 다시 차가워졌다.“오랜만이야, 무현아. 너도 알다시피 난 성격 급한 사람이니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네가 우리 집안을 위해 한 일은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우리가 함께 한 시간도 소중히 간직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리가 부부로서 같이 지내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양희지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 마치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남편이 아닌 협력 상대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우리 이혼하자.”이는 상의도 통보도 아닌, 그냥 명령이었다.“연애할 때도, 결혼할 때도, 너희 집안사람이 내 앞에 무릎 꿇고 처남 대신 교도소에 가달라고 할 때도, 넌 가만히 있더니...”염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결을 파고들고 있었지만, 그는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지금 와서 좀 아닌 것 같다고?”양희지는 약간 주저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