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금 돈도 여자도 인간관계도 남 부럽지 않을 정도라고, 하루하루가 신선놀음이 따로 없지. 널 죽이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킬러를 보낼 수 있으니까 평생 불안에 떨며 살아가!”남도훈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아, 그때는 진심으로 고마웠어. 당시 네가 갑자기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양희지한테서 40억을 가질 기회조차 없었을 거야.”꼼꼼함과 깐깐함의 대명사인 양희지는 아무리 투자하기로 했더라도 섣불리 돈부터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며칠만 더 버티면 남씨 가문의 사건이 폭로되기 마련이니까.사실 그날 밤 스카이 레스토랑에서 양희지가 염무현 때문에 열받은 이유도 있었다.결국 다음 날 아침 일찍 조윤미에게 남씨 가문 계좌로 송금하라고 해서 이 사달이 나게 되었다.“널 찾기까지 했는데 붙잡는 게 뭐가 대수라고?”염무현은 남도훈의 도발에도 평정심을 유지한 채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네 놈을 붙잡는 건 식은 죽 먹이야.”“푸하하!”남도훈이 폭소를 터뜨리며 오만방자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그러는 거야? 염무현, 시건방 떨지 마. 네가 붙잡으러 올 때까지 여기서 딱 기다리고 있을게. 만약 네 손에 들어가잖아? 그럼 내가 장을 지져! 이왕 영상 통화까지 한 김에 시간 낭비나 하지 말고 양씨 가문에 대신 말 좀 전해줄래? 이 돈을 꼭 다 쓰도록 노력할뿐더러 단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하하하...”염무현은 능숙한 동작으로 분할 화면을 설정하더니 다른 사람한테 영상 통화를 걸었다.액정에 검은색 제복을 입은 금발의 외국인이 한 명 더 나타났다.50대로 보이는 남자는 감격하면서도 겸손함이 엿보이는 얼굴로 말했다.“무현 씨, 안녕하세요.”외국인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고진성은 그가 바로 인터폴 최고 책임자 톰슨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세상에!인터폴의 수장마저 무현 님에게 이처럼 공손한 태도를 보이다니?깜짝 놀란 고진성은 입이 떡 벌어졌다.“톰슨, 남도훈이라는 용국 사람이 있는데 돈을 챙겨서 해외로 도망쳤어요. 즉시 사람을 보내 범인
염무현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많이 웃어둬. 이따가 웃음이 안 나올 테니까.”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상 통화가 끊겼다.저 멀리 떨어진 작은 섬 해변, 남도훈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비록 그동안 염무현이 안중에도 없었지만, 상대방이 이렇게 빨리 연락을 취했다는 건 나름대로 능력이 꽤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남도훈은 유비무환이라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서 있는 선글라스 남에게 오라고 손짓했다.남자가 저벅저벅 걸어갔다.“도훈 님, 무슨 일이시죠?”남도훈의 손가락이 멀리 있는 섬을 가리켰다.“나 저기 갈 테니까 보트 불러줘.”“하지만 저 섬은 아직 개발 중이라 모든 면에서 열악한 편입니다.”선글라스 남이 솔직하게 대답했다.“현지인끼리 영역 다툼을 밥 먹듯이 하는 곳이죠. 리스크를 무시 못 합니다.”남도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외부인에게 발각만 안 된다면 조건이 열악해도 괜찮아. 내 말대로 해.”“네, 명 받았습니다.”선글라스 남은 뒤돌아서 걸어갔다.잠시 후, 요트 한 척이 바다에 하얗고 긴 궤적을 남긴 채 멀리 떠나갔다.뱃머리에 서 있는 남도훈은 점점 가까워지는 섬을 바라보며 얼굴에 음흉하면서도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아무도 날 찾을 생각하지 마.”...서해시, 양씨 가문.일가족은 하나같이 의기소침한 얼굴로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빌어먹을 남도훈! 감히 우리한테 사기를 쳐?”개인 재산 10억 넘게 회삿돈 20억까지 홀라당 날려 먹다니!“애초에 좋게 보고 미래의 사윗감으로 점찍어 뒀더니 어떻게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할 수 있지?”서아란은 애가 바질바질 탔지만 이미 후회해도 늦었다.이내 분노로 가득한 얼굴로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천벌이나 받으라고 저주할 거야! 외국에서 총 맞아 뒈져버리고 들개한테 물려 시체조차 찾아보지 못하게!”양문수가 버럭 외쳤다.“그만!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하면 뭐가 달라지냐? 그놈은 지금 우리 집 돈을 펑펑 쓰면서 밖에서 호의호식하고 있을 텐데 죽기나 하겠어?
그녀는 차마 이런 일까지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었다.“이자가 3배라고? 날강도가 따로 없네!”서아란이 또다시 욕설을 퍼부었다.“빌어먹을 염무현 같으니라고! 우리 집을 아주 풍비박산으로 만들어놔? 이럴 줄 알았더라면 당시 감형을 호소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감방에 처박아 둘 걸 그랬어.”안 그래도 심란한 양희지는 이 말을 듣자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염무현이랑 무슨 상관이죠?”“남도훈이 사기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말리지 않은 탓에 우리가 막대한 손실을 보았잖아. 욕먹어도 싸지!”막무가내로 우기는 서아란을 보자 양희지가 발끈했다.“무현이가 안 말렸어요? 엄마랑 아빠, 준우가 주야장천 남도훈만 치켜주다 보니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뛰어든 격이잖아요. 말린다 한들 귀에 들어가기나 하겠어요? 게다가 이미 이혼한 마당에 선심 써서 설득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야죠. 우리가 귓등으로 듣고 남의 호의를 발로 뻥 걷어차서 결국 사기당한 거잖아요. 그러고는 애먼 사람한테 책임을 떠넘기면 어떡해요? 정작 사기꾼 남도훈한테는 찍소리 못하고 왜 염무현만 죽어라 욕하는 거예요? 누굴 탓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대체 뭘 잘했다고 큰소리치죠?”말을 마친 양희지는 뒤돌아서 2층으로 올라갔다.거실에 덩그러니 남은 세 사람은 멀뚱멀뚱 쳐다보기 바빴다.쿵!양희지는 문을 세게 닫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서아란과 양문수, 양준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여보, 화내지 마. 희지도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그래.”양문수가 넉살 좋게 위로했다.서아란은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내 딸인데 화낼 일이 있겠어요? 이게 다 염무현 그 개자식 때문에 희지한테 한 소리 듣게 된 거예요.”“엄마, 나중에 기회를 봐서 염무현을 호되게 골탕 먹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대신 화풀이해줄게요.”가슴을 두드리며 떵떵거리는 양준우를 보자 서아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믿을 만한 건 우리 준우밖
양희지는 병을 조심조심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희지야, 어디가? 저녁밥 다 됐어.”부랴부랴 걸어가는 딸을 보자 양문수가 서둘러 물었다.하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저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드세요.”...우리병원, 입원 병동.복도 끝자락에 1인실 일반 병실이 있었다.“무현 씨가 곧 오신대요.”유재영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장은숙에게 정기 검진해주는 이승휘를 향해 말했다.“무현 씨한테 여쭤봤는데 옆에서 지켜봐도 된다고 하네요.”“그럼 다행이고.”이승휘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유재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살짝 엿보였다.“다만 치료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남기지 못할 뿐이에요. 만약 촬영해도 된다면 나중에 수시로 되돌려보면서 학습할 수 있을 텐데.”이승휘가 그를 대뜸 노려보았다.“욕심이 과하면 큰일 난다? 옆에서 견학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운인 줄 알아? 그런데 촬영까지 한다고? 꿈 깨! 무현 씨가 어떤 분인지 정녕 모르는 거야? 그분의 신분은 물론 의술은 무려 극비라고.”유재영이 황급히 설명을 보탰다.“저도 알고 있어요. 그냥 해 본 말인데 왜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요? 불치병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치켜볼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지다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이승휘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이제야 좀 바람직한 태도이군.”옆에 있는 이은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분께서 무현 씨라고 부르는 사람이 혹시 염무현 님인가요?”“맞아.”이승휘가 흐뭇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이은서는 화들짝 놀랐다.“지금 무현 님이 우리 엄마의 병을 치료해준다는 뜻인가요? 그분도 의사 선생님이세요?”“그건 아니고.”진지한 얼굴로 대답하는 이승휘를 보며 그녀는 당최 이해가 안 갔다.의사도 아닌 사람을 대체 왜 이렇게 극진히 떠받드냐는 말이다.“신의님이셔.”이승휘는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결국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 이은서였다.이때, 유재영이 웃으면서 한
이승휘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왜 요즘 청년들이 돈을 이토록 중히 여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가족, 건강 혹은 다른 일들이 돈과 비겼을 때 다 중요치 않단 말인가?전에 유재영에게 장은숙 입원비를 면감해주라고 했던 게 약간 후회되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측은지심을 품는 게 아니었다.좋은 마음을 베풀었다고 해서 꼭 보답을 받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아니요, 오해하셨습니다. 절반이 아니라 전부 재산을 진료비로 내라고 해도 기꺼이 낼 수 있습니다.”이은서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그런데... 우리 집안 형편이 너무 좋지 않아요. 엄마 치료비를 위해 집도 팔고 심지어 육백만 원 되는 빚까지 있어서 재산이라곤 하나도 남은 게 없어요. 이런 상황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두 사람은 순간 멍해졌다.그들은 이런 상황일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다. 그렇다고 빚으로 진료비를 내겠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병을 보이면서 도로 돈을 벌어간다는 게 너무도 황당한 일이었다.유재영은 어깨를 들썩이더니 말했다.“날 보지 마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그래. 없던 일로 하자.”이승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두 사람의 말을 들은 이은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바로 이때, 문이 와락 열리면서 유니폼을 입은 염무현이 걸어들어왔다.장은숙을 포함한 네 사람은 동시에 깜짝 놀랐다.‘금방 퇴근하고 오신 건가?’유재영과 이승휘는 눈이 휘둥그레서 대체 어떤 회사가 어떤 조건으로 염무현을 직원으로 고용했는지 의아해했다.이은서도 리버타운에 살고 있는 염무현이 분명히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직장인 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죄송합니다. 차가 막혀서 조금 늦었네요.”염무현은 사슴 가죽 가방을 꺼내 펼쳤는데 안에는 저마다 크기가 다른 금침이 들어있었다.총 365개 금침이었는데 1년 동안의 날수에 해당했다.어느 날이든 이 금침들만 있으면 저승사자를 물리치고 죽음에 달한 사람도 구할 수 있다는 의미를
현재의 모든 것이 국내 의학의 심오함과 훌륭함을 알려주고 있다.천 년 동안 사라지지 않고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국내 의학이 그로서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재영아, 신의님이 지금 사용하시는 침술을 본 적이 있어?”유재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요. 하지만 실전한 의술 중의 한 가지인 건 확신할 수 있어요.”염무현은 마지막 침까지 다 놓고 말했다.“신농거액침이에요. 불치병을 전문 치료하는 침술이에요.”유재영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해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그는 침술의 이름을 명심해서 기억해두고 돌아가서 의학 전적을 뒤지며 관련 자료를 찾아볼 생각이었다.십여 분 후, 장은숙의 얼굴이 갑자기 검푸름 해지기 시작하면서 검은 기운이 피부 위로 솟아올랐다.이은서는 말할 것도 없었고 이승휘와 유재영도 이런 현상은 처음이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장은숙의 얼굴빛이 다시 정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병색을 띠긴 했으나 치료하기 전보다 많이 좋아 보였다.이은서는 엄마의 홍조를 띤 얼굴을 보면서 매우 기뻐했다.암 진단을 받은 후 장은숙은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짙은 병색을 띠었을 뿐만 아니라 매일 무기력해 보였었다.전과 비교했을 때 지금은 거의 하늘과 땅의 차이었다.염무현은 절주와 기법에 맞추어 침을 빼기 시작했다.침이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장은숙은 몸이 전보다 많이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몇 년 동안 암투병을 하면서 이토록 상쾌한 느낌은 처음이었다.사실 장은숙은 염무현을 보자마자 약간 의심이 들었었다.암이 말처럼 쉽게 치료되면 왜 불치병이라고 하겠는가?이외에 의사라고 하기에는 염무현이 너무 젊어 보였던 것이다. 겉으로 보아서는 서른 살도 안 되어 보였다. 많아서 스물일곱, 스물여덟 쯤밖에 되지 않은 청년 같았다.이승휘와 유재영 두 전문가가 염무현을 극진히 칭찬하지 않았더라면 장은숙은 그를 사기꾼으로 착각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염무현의 의술이 범상치 않다는 걸 제대로 깨달았다.장은숙
이은서와 장은숙은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심지어 방관자인 이승휘와 유재영도 흥분되기 그지없었다.사람으로서 살면서 가장 무서워하는 일이 바로 병에 걸리는 것이다. 특히 장은숙처럼 평범한 집안 형편을 가진 사람은 병에 걸리기만 하면 가족 전체가 피해를 보게 된다.집도 팔고 차도 팔고 사면팔방 돈을 빌리며 사채업자한테서 대출을 받게 되는데 완쾌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대부분 남은 돈 한 푼 없이 사람도 살리지 못한 채 빈털터리가 되는 경우가 일쑤였다.죽은 사람은 생전에 고통에 시달려야 했고 살아있는 사람은 채무에 시달려야 했다.그러나 그와 달리 장은숙은 현재 완쾌되었다.심지어 앞으로 또다시 병에 걸릴 일도, 고액의 병원비를 감당할 일도 없었다. 더는 이은서의 짐이 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이은서도 엄마의 건강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어느 날 엄마를 갑자기 잃게 될까 봐 매일 전전긍긍해 할 필요도 없었다.안 좋은 일들이 이젠 다 과거형이 되었다.두 모녀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 껴안고 흐느끼며 울었다.그러다 갑자기 진료비를 떠올린 이은서는 저도 모르게 불안해졌다.“염무현 씨, 이 원장님께서 진료비 규칙에 관해 얘기해주셨는데 재산 절반을 진료비로 받으신다고 하던데...”염무현이 고개를 들고 답했다.“맞아요.”“그런데 저희 집안 형편이...”이은서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염무현은 직설적으로 물었다.“집에 재산이 얼마 있는데요?”“육백 만원 채무밖에 없어요.”이은서는 부끄러움을 참고 손가락 여섯 개를 내밀며 말했다.장은숙의 병이 나았다고 해도 금방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녀로서 이토록 많은 빚을 짧은 시간 내에 다 갚는다는 건 불가능했다.가장 중요한 건 진료비를 어떻게 결산한단 말인가?사실 재산 절반만 주어도 된다는 것으로도 그들에겐 아주 큰 혜택이었다. 이름 있는 재벌들은 그들보다 천 배, 만 배, 심지어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다른 사람들도 내는 진료비를 그들만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은서는 속으로 엄마가 리버타운에 가서 청소원을 하는 건 되지만 절대 염무현에게 고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또 평소에 시간 내어 1호 별장에 가서 도와주는 건 되지만 절대 월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혜리 그룹, 대표 사무실.섹시한 OL스커트를 입은 공혜리는 완벽한 S라인 몸매를 뽐내고 있었다.검은 스타킹을 입은 길고 가는 다리에는 군살이 하나도 없었고 발에는 검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는데 늠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아름다운 이목구비와 카리스마까지 더해지니 남자들이 그녀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다.“작은 회장님, YH그룹 양희지 대표님께서 오셨습니다.”비서가 다가와 그녀에게 보고했다.공혜리는 고개를 들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양 대표님은 정말 자신을 남으로 여기지 않는단 말이야.”염무현만 아니었다면 공혜리는 YH그룹을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것이다.경력으로 보나, 재력으로 보나, 또는 능력으로 보아도 YH그룹보다 우수한 회사가 많고도 많았다.비서는 약간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그러게 말입니다. 도를 지나친 것 같아요. 전에 계약서에 사인하자마자 투자금을 계좌에 이체해줬는데 계속 납품일을 뒤로 미루기만 하잖아요. 이렇게 뻔뻔한 협력업체는 처음이에요. 만나기 싫거든 제가 바로 가서 쫓아낼게요. 혹은 YH그룹 골드 파트너 자격을 박탈할까요?”공혜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무현 님께 설명 드리기 힘들어져.”“들어오라고 해. 양희지가 날 무슨 이유로 설득시킬지 나도 은근히 궁금해지는걸.”‘만약 설득하지 못한다면 혜리 그룹에서 YH그룹을 괴롭힌다고 탓하지 않아야 할 텐데.’공혜리는 염무현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양희지를 호되게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매운맛을 맛보게 하는 것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잠시 후,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슈트와 미니스커트를 입은 양희지가 하이힐을 신고 환하게 웃으며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정장은 그녀의 몸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