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의 이사를 돕기 위해, 퇴근하자마자 아크로빌로 돌아간 강하영이 문을 열자 캐리가 뛰쳐나왔다.“G, 애들은 어디 있어?”“애들은 지금 정유준 집에 있어. 설명하기엔 좀 복잡한 사정이 있으니까 일단 물건부터 옮기고 나중에 얘기해.”강하영이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캐리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물건들을 거의 다 정리하고 나서 강하영은 휴대폰으로 배달 음식을 주문했고, 10분 정도가 지나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내가 갈게.”그때 캐리가 문을 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강하영을 막은 뒤, 아무렇게나 슬리퍼를 질질 끌며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는데, 역시 자신의 계획대로 그 남자가 나타났다!정유준은 그런 캐리를 보는 순간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그쪽이 왜…….”“캐리 아저씨!”정유준이 미처 묻기도 전에 뒤에 있던 강세희가 감격에 겨운 듯 작은 머리를 내밀며 캐리를 불렀고, 캐리는 눈을 반짝이며 손을 뻗어 강세희를 안아 들었다.“세희야, 보고 싶었어! 세준이랑 둘이 어디로 갔었던 거야? 아저씨가 좋은 소식 알려줄게. 이제부터 함께 지내게 됐으니 매일 만날 수 있단다!”캐리의 말은 정유준에게 매우 거슬렸다.‘함께 지낸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강하영이랑 동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가 G라서 강하영에게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이렇게 쉽게 외간 남자를 집에 들인다고?’거실에 있던 강하영은 애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에 도착하자, 세 아이와 검은색 코트를 입은 정유준을 발견하고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뭐야? 왜 갑자기 애들을 데리고 왔지?’잠시 후, 정신을 차린 강하영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너희들이 여긴 어쩐 일이야?”강세준은 뽀얀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엄마,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요?”“설명이라니? 무슨 설명?”강세준은 슬리퍼를 갈아 신고 캐리를 향해 턱을 들어 올렸다.“캐리 아저씨가 방금 저희와 함께 지낸다고 하던데요?”“아, 그건 캐리 아저씨가…….”“하
“캐리, 애들을 데리고 거실에 가서 놀고 있어.”강하영의 말에 캐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정유준 뒤에 서 있는 작은 그림자를 힐끗 쳐다봤다.“저 아이는 누구야?”캐리의 물음에 강하영도 캐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작은 머리를 살짝 내밀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유준 뒤에 서 있는 정희민을 발견했다.“희민이야?”“네.”강하영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작은 입술을 오므리고 있는 정희민을 부르자, 아이는 순순히 앞으로 나왔다.하영은 순간 마음이 약해지며 얼른 손을 뻗어 정희민을 안았다.“이리와, 나랑 같이 들어가자.”말을 마친 강하영은 다시 고개를 들어 정유준을 바라봤다.“집이 작아도 상관없다면 당신도 들어와요.”정유준은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 두말없이 별장에 발을 들여놓더니, 캐리를 앞질러 갔다.적대심을 한가득 품고 있는 싸늘한 눈빛에 캐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 한 손으로 강세희를 안고, 다른 한 손은 세준의 손을 잡고 정유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임 씨 아주머니는 안 계셔?”소파에 앉아 주위를 훑어보던 정유준의 물음에, 정희민을 내려놓던 강하영은 손을 움찔하더니 대답했다.“아주머니는 병원에 계셔.”“병원?”강하영의 말에 정유준은 눈살을 찌푸렸다.“네.”강하영은 심장이 옥죄어 오는 아픔을 참으며 대답했다.“애들이 납치된 날, 아주머니께서 심한 폭행을 당하셔서 지금 식물인간이 됐거든요.”그 말에 정유준은 미간을 더욱 세게 찌푸렸다.“왜 그 사실을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얘기하면 뭐가 달라져요? 당신이 아주머니를 구해줄 수 있어요? 부진석 씨마저 속수무책인데 당신한테 얘기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데요?”정유준은 눈을 내리깔고 휴대폰을 꺼내 허시원에게 문자를 보냈다.“임씨 아주머니의 병력을 알아보고, 최대한 빠르게 연세 병원으로 옮겨.”정유준은 휴대폰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은 애들을 너한테 맡기고 내일 다시 데리러 올게.”정유준은 강하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집을 나섰고, 문이 닫히
오후.강하영은 생산팀과 회의를 열었는데, 열흘 뒤면 첫 번째로 예약이 들어온 일부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생산 속도도 중요하지만 현재 공장에 직원들도 많지 않으니 절대 야근을 많이 시키지 마세요.”열흘이라는 시간은 이미 강하영의 예상을 뛰어넘었기에, 강하영은 생산팀 부장한테 당부했다.강하영은 생산 속도만 추구하기보단 의상의 품질과 직원들의 건강이 더 중요했다.“네, 강 대표님. 지금까지 대표님이 정해준 대로 정상 시간에 출퇴근하고, 저녁엔 가동하지 않고 있습니다.”강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 발탁된 비서인 임수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수진 씨, 안전 부문에 가서 이 기간엔 절대 경솔하지 말고 공장 상황에 더 신경 써 달라고 전해줘.”임수진은 30대 초반의 여성으로 짧은 머리가 매우 세련돼 보였다.강하영이 임수진을 자신의 곁에 두기로 한 것은 임수진의 엄숙한 이목구비가 왠지 자신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강하영의 당부에 임수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네, 강 대표님”이라고 대답했다.회의를 마치니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정유준이 아이들을 데리러 유치원에 가는지 확신이 서지 않은 강하영은 유치원에 갈 준비로 회사를 나서자, 회사 앞에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서 있었다.허시원이 운전석에서 내려 강하영 앞으로 다가와 차 문을 열어주며 입을 열었다.“강하영 씨, 대표님께서 함께 갈 곳이 있다고 합니다.”강하영은 뒷좌석에 앉아있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아니요. 애들이 유치원 마칠 시간이라 데리러 가야 해요.”하영의 말에 정유준이 시선을 던져왔다.“이미 데리러 갔으니, 차에 타.”“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죠?”“임씨 아주머니 만나러.”그 말에 강하영은 피식 웃었다.“아주머니는 현재 김제 병원에 있어요. 아주머니가 보고 싶으면 내가 알아서 보러 가면 되니까 괜히 헛걸음하지 마시죠.”“김제 병원에서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가도 좋아.”“그게 지금 무슨 말이죠?”정유
하영은 생각을 정리하고 정유준의 발걸음을 따라 입원 동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 타고 맨 꼭대기 층에 도착해서야 멈췄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강하영은 완전히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눈앞에는 거의 넓은 아파트에 버금가는 공간에, 투명한 유리로 분리된 방이 5개나 있었다.안에는 정원으로 꾸며진 듯 화초와 나무도 있었고, 나른할 정도로 따스한 햇살도 쏟아졌다.‘여기가…… 어딜 봐서 입원실이야? 휴가를 왔다고 해도 믿겠네.’분주하게 움직이는 의사들 사이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침대에 누워있는 임씨 아주머니를 발견한 강하영은 빠른 걸음으로 병실에 들어갔다.그리고 안정된 의료기기의 소리에 강하영의 긴장된 마음도 따라서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그때 병실에서 환자의 기록을 작성 중이던 의사가 고개를 돌려 정유준을 발견하고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넨 뒤, 유창한 독일어로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설명하는 도중에 의사가 가끔 불쾌한 표정을 내비쳤고, 강하영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정유준에게 의사가 방금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물었다.정유준은 강하영을 지긋이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임씨 아주머니가 이미 위험한 고비는 넘기셨다고 얘기했어.”“그 한마디뿐이었어요??”분명 많은 얘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본 강하영은 마음이 답답했고, 정유준은 하영의 모습에 그저 입술을 오므리며, “그래.”라고 짧게 대답했다.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독일 의사는 임씨 아주머니의 상황을 지켜본 결과 지난번 두개골 수술 후, 정상이라면 식물인간이 아니라 진작에 깨어났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혼수상태에 빠져있는지 알 수 없다고 전했다.그러나 현재 상황에 의사들도 원인을 찾을 수 없으니, 두개골 절제 수술을 한 번 더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강하영은 임씨 아주머니를 이곳으로 옮긴 것도 내키지 않은 것 같은데, 또다시 두개골을 절제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정유준도 좀 더 상황을 자세히 알아본 뒤에 설명할 생각이었다
“그래.”강하영은 애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병원을 떠났다.병원 입구에 도착해 콜택시를 부르려던 순간 하얀 실루엣과 부딪쳤고, 그 충격에 강하영은 잠시 비틀거리다가 몸을 제대로 가누었지만, 하영과 부딪친 사람은 바닥에 심하게 주저앉았다.강하영이 시선을 돌려 보니 흰 잠옷을 입은 초라한 행색의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는데,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도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가진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다만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죄……, 죄송합니다…….”“아니에요, 괜찮으세요?”여자가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눈시울을 붉히자 강하영은 고개를 저으며 여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바닥이 차요. 제 손 잡고 일어나세요.”그런데 뜻밖에도 강하영의 행동에 여자는 더욱 놀라며 온몸을 벌벌 떨기 시작하자, 강하영은 깜짝 놀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혹시 도움이 필요하세요?”강하영의 물음에 여자는 악의가 없다고 느꼈는지 그제야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강하영과 조금 거리를 두고 입을 열었다.“방금 누가 쫓아와서 실수로 부딪쳤어요.”여자는 말을 하면서도 두려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강하영은 피투성이가 된 여자의 맨발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 할 때, 갑자기 여자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려 퍼졌다.황급히 배를 움켜잡은 여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미안해요, 배가 고파서 그만…….”“혹시 괜찮으시면 우리 집으로 같이 가는 건 어때요? 발에 있는 상처도 바로 치료하지 않으면 감염될 수 있어요.”여자는 깜짝 놀란 표정을 하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어서 저를 여기서 데려가 주세요!”강하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아크로빌.캐리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다가 강하영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 입구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오자 주방에서 나오며 강하영에게 말했다.“G, 다녀왔어? 저녁 준비 다 해놨으니까……, 어?
강하영은 여자의 상처에 약을 갈아주고 또 갈아입을 깨끗한 옷을 가져다준 뒤, 캐리와 여자가 식사하러 간 틈을 타서 정희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전화를 받은 사람은 세희였다.“엄마, 또 나랑 오빠들이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그래, 다만 다른 용건이 있거든. 혹시 세준이 바꿔줄 수 있어?”“오빠,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어!”세희가 전화기 너머로 세준을 부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강세준이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세요?”강하영은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 여자를 보며 강세준에게 물었다.“세준아, 혹시 한 사람의 정보를 알아봐 줄 수 있어?”“그럼요. 누구 정보가 필요한데요?”“나도 잘 몰라서 그래. 이따가 사진 한 장 보내줄 테니까 대략 언제쯤 알아낼 수 있는지 알려줘.”“걱정하지 마세요. 다만 의뢰 비용이 만만치 않을걸요?”강세준의 사악한 웃음에 강하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너 이 자식, 사흘 동안 안 본 새에 많이 컸네?”“농담이니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엄마.”다른 사람의 부탁이었으면 꽤 많은 돈을 벌었겠지만, 아쉽게도 엄마의 부탁이니 공짜로 해드릴 수밖에 없었다!몇 마디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은 뒤 강하영은 전화를 끊고 여자의 사진을 정희민에게 보냈다.사진을 받은 강세준은 빠르게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보통 때와 같았으면 사진만 있으면 몇 분 안에 그 사람의 자료를 찾아냈겠지만, 이번에는 30분이나 걸려도 두서를 잡지 못했다.마치 이 여자의 자료만 누군가 일부러 지운 것만 같았다.처음으로 이런 실패를 맛본 강세준은 작은 손으로 끊임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으로 자신의 불쾌함을 분출시키는 것 같았다.“세준아, 그만해.”그때 곁에서 보다 못한 정희민이 입을 열자 강세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이상하지 않아?”“맞아.”정희민은 노트북 화면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데이터가 지워진 이상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어.”강세준은 정희민의 말에 힌트를 얻었다.“참, 너 데
정보를 찾을 수 없게 되자, 강하영은 어쩔 수 없이 여자를 당분간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면서 내일 경찰서에 가서 상황을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강하영은 여자를 위해 따로 방을 마련해주려고 했지만 여자는 혼자 있는 게 무섭다면서 기어이 강하영 곁에 붙어있으려 했고, 하영도 어쩔 수 없이 여자를 깨끗이 씻겨준 다음 자기 곁에서 자게 했다.“이름이 뭐예요?”강하영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여자가 하영의 이름을 물었다.“강하영이에요.”“강하영…….”하영의 이름을 중얼중얼 반복하는 여자에게 하영이 웃으며 되물었다.“그쪽은요? 본인 이름은 기억나세요?”하영의 물음에 여자의 눈동자가 약간 어두워졌다.“백지영, 이 세글자만 기억나요.”“그럼 앞으로 지영 언니라고 부를게요. 기억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시간이 지나면 떠오를 테니까, 당분간 안심하고 여기서 지내요.”강하영의 위로에 백지영의 두 눈이 밝아졌다.“정말 그래도 돼요?”“그럼요.”다른 문제라면 물어봐도 아마 소용없을 것 같았다. 아마 안 좋은 기억으로 인해 너무 자극을 주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그래서 강하영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다음날, 토요일.정유준의 전화에 잠에서 깬 강하영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백지영을 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무슨 일이죠?”“김호진이 애들을 데리고 그쪽으로 갔을 거야. 요 며칠 일이 좀 생겨서 애들을 돌볼 시간이 없어.”정유준의 잠긴 목소리엔 짙은 피로가 묻어있었다.“네, 알았어요.”정유준이 전화를 끊고 하영이 휴대폰을 내려놓는 순간 어느새 잠에서 깼는지 백지영이 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저 때문에 깼어요?”백지영은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어딘지 익숙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그 생각은 뒤로 하고, “배고파요.”라고 대답했다.“그래요. 제가 가서 아침 식사 준비해 줄게요.”세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애들이 도착했고, 강세준과 강세희는 하영을 보자마자 쏜살같이 품
백지영은 겉보기엔 서른 살 좌우로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알 수 없었으니 이모라고 부르는 것도 틀리진 않았다.백지영은 깜짝 놀라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방금 나한테 이모라고 한 거야?”“여기 엄마랑 이모밖에 없는데 제가 엄마를 이모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강세희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얘기하자, 백지영은 그제야 반응하기 시작했는지 웃기 시작했다.“그래, 이모라고 불러주니 듣기 좋네.”백지영은 계단에서 내려와 애들 앞에 쪼그리고 앉은 뒤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한 번만 더 불러 줄래? 듣고 싶어.”“이모!”“그래!”강세희가 달콤한 목소리로 이모라고 부르자, 백지영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이모, 안녕하세요.”곁에 있던 강세준도 따라서 이모라고 부르자 백지영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라고 대답했다.낯을 많이 가리는 정희민은 그저 옆에 서서 입술을 달싹이더니 결국 입을 열지 못했고, 강하영도 그런 희민이를 강요하지 않았다. 아직 아이 마음속에 남아있는 트라우마 때문에 억지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강하영은 다시 주방에 들어가 바삐 돌아쳤고, 애들은 백지영을 끌고 같이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이때, 교외 별장.정유준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소파에 앉아, 서늘한 표정으로 앞에 한 줄로 서 있는 경호원들을 보고 있었고, 바닥에는 정유준이 깨뜨린 유리 조각들이 가득했다.그 모습에 경호원들은 감히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다들 고개를 숙이고 야단맞기를 기다렸다.“자리를 비운 지 1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왜 못 찾은 거야! 나한테서 돈 벌기가 참 쉽다고 생각하지?”정유준이 싸늘한 말투로 따져 묻자, 경호원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더욱 고개를 푹 숙였다.사실 그들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사모님이 어떻게 15분 만에 사라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처음엔 CCTV를 따라 찾을 수 있었지만, 그 뒤로는 아예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이렇게 큰 김제에서 솔직히 사람을 찾는다는 건 바다에 빠진 바늘을 찾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