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 뒤, 장경환은 기술 부서 사람들을 데리고 신우 하이테크를 떠났다.그들은 회사 부근의 카페로 가서 창문 쪽 위치에 앉은 이동수를 찾았다.그들을 발견한 이동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여기서 말하긴 그렇고, 나랑 같이 옆에 호텔로 가.”모두 고개를 끄덕인 뒤 이동수 뒤따라 자리를 떠났다.한참 뒤, 그들은 부근의 한 호텔에 방을 잡고 들어갔다.방에 들어간 뒤, 장경환이 곧이곧대로 말했다.“그 아가씨한테 저희 협박이 먹이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우리가 회삿돈을 꿀꺽한 거도 눈치챈 거 같습니다.”그 말을 들은 이동수는 역시나 얼굴이 굳어졌다.그는 장경환 등 기술부 직원들은 회사 핵심기술원들이라, 난동 좀 피우면 자신도 원래 직위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예상외로 진짜 그들을 아예 회사에서 내보낸 것이다.‘지금 회사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기는 것 따위는 겁내지 않는 건가?’장경환은 그가 한 생각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고, 마음속으로는 다른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이 사장님, 뭐든 다 사장님이 말하는 대로 듣겠습니다. 회사에서 나온 뒤로 저희는 일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아가씨가 외부에 뭐라고 말이라도 한다면 앞으로 저희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그 뜻인즉 이동수더러 일자리 좀 소개해달라는 말과 같다.이동수도 물론 그 의도를 파악했고, 자신의 예상했던 일이라 장경환을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너희들 책임질 테니까. 늦게 내가 일자리 알아봐 줄 테니까 일단 돌아가서 소식 기다려.”그 말을 들은 장경환도 더는 의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방안에는 얼굴색이 굳어진 이동수만 남아있었다.“개 같은 년, 전에 고 회장님이 말한 대로 진짜 호락호락하지 않네!”그는 이를 꽉 깨물더니 핸드폰을 집어 들고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물론 이 모든 상황을 고다정은 모르고 있다.그녀는 회사에서 대충 한 바퀴 돌아본 뒤, 사무실로 돌아가려 할 때쯤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확인해 보니 여준
“오래 기다릴까 봐 그러죠.”고다정은 여준재를 보며 혀를 내밀어 보였다.여준재는 그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고 어이없어하며 웃었다.이윽고 그 둘은 부근의 레스토랑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자리에 착석 후 여준재가 물었다.“오늘 회사에서 조사 진행한 건 어떻게 됐어요? ”“별로예요.”회사 관련된 일을 언급하자 고다정의 얼굴색은 순식간에 굳어졌다.그 모습을 본 여준재는 걱정스러운 듯 바라봤다.“왜요?”고다정은 솔직하게 신우 하이테크 정황에 대해 그에게 말했다.“지금 회사직원들도 거의 다 떠났어요. 장부 확인도 아직 다 못했고요. 그냥 이동수만 나가게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닌데.”그녀는 후회가 가득했고,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여준재는 웃기기도 하고 안되기도 해 뭐라고 해줄 말이 없었다.그도 고다정이 이렇게 충동적일지 몰랐기에 고민후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면 제가 그쪽으로 사람 보내서 도와줄까요?”“아니요. 일단 회사 정황에 대해서 제가 먼저 파악하고 그때 다시 말해줄게요.”고다정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만약 여준재가 사람을 보내 자신을 도와준다 해도 뭘 돕는 걸지도 그녀 스스로 모를 것이다.여준재도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 더는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다.“그래요, 만약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걱정하지 마요, 눈치 안 보고 말할 테니까요.”고다정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그렇게 밥을 먹고 여준재는 고다정을 데리고 차에 가서 조금 휴식한 뒤 다시 그녀를 회사로 데려다주었다.사무실에 도착한 뒤, 고다정은 다시금 재무 장부를 들고 확인하기 시작했고, 잘 모르겠는 부분은 전부 메모해 두었다.몇 시간 뒤에야 모든 장부를 확인 완료했고, 문제점 또한 아주 많았다.고다정은 그 문제점들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이 문제점들을 그 재무 실장이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방법을 써서 제대로 답하게 해야겠는데. 그리고 회사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다 조사를 해봐야겠어.”한참 뒤, 그
재무팀장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자기가 방심하는 바람에 이동수를 떠나보냈다고 또 한 번 후회했다.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재무팀장을 바라보며 물었다.“이동수가 이미 회사를 떠났는데, 지금 그를 찾아 횡령 문제를 추궁하는 게 가능할까요?”“솔직히 말하면 어렵습니다.”재무팀장은 머리를 흔들며 부정적 의견을 냈고, 심지어 마음속으로 고다정이 장부를 파헤치지 않기를 바랐다.그가 조금 전 했던 거짓말이 탄로 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부에 이동수가 저지른 것도 있지만 그가 몰래 손댄 것도 있기 때문이다.상황을 모르는 고다정은 재무팀장의 말을 듣고 표정이 안 좋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금 뒤 그녀는 말머리를 돌려 물었다.“현재 회사에 유동 자금은 얼마나 있어요?”“2,000만 원 미만입니다.”재무팀장은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 듯 목소리가 훨씬 낮아졌다.이를 눈치채지 못한 고다정은 오히려 금방 들은 숫자 때문에 깜짝 놀랐다.운산에서 50위권에 드는 상장회사가 장부상 유동 자금이 2,000만 원밖에 안 된다고 말하면 누가 믿겠는가.이 순간 고다정은 많은 직원이 회사를 나간 것이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달 월급을 지급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녀는 또 참지 못하고 물었다.“장부상 자금이 이렇게 적은데, 그동안 월급은 어떻게 지급했어요?”“아, 이전에는 줄곧 본사에서 월급을 지급했었는데, 이제 대표님이 맡으셨으니 앞으로는 회사 자금에서 나가야겠죠.”재무팀장은 말하고 나서 그렇지 않냐는 눈빛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그 뜻을 모를 리 없는 고다정은 돈을 버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어쨌든 이미 인사팀장한테 직원을 모집하라고 지시했으니 모든 직원을 합하면 100명까지는 아니더라도 80~90명은 될 것이다. 그러면 한 달 월급만 적어도 2억 원 가까이 지급해야 한다.물론 그녀에게 2억 정도의 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달 회사에 자기 돈을 쏟아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고다정은 재무팀
자책하는 여인을 바라보던 여준재는 가슴 아픈 나머지 그녀를 꼭 껴안으며 다독여 주었다.“이 일은 당신 탓이 아니에요. 비즈니스 요령을 모르니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도 정상이에요.”고다정은 몇 초간 침묵했다. 그녀도 여준재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안다. 이 일에 그녀도 책임이 있지만 가장 큰 책임은 그녀가 아니라 이동수한테 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몸을 일으켜 희망에 찬 눈빛으로 여준재를 쳐다보았다.“제가 지금 이동수의 책임을 추궁하면 그가 횡령한 돈을 토해낼까요?”“시도해 볼 수 있어요. 이따가 자료를 정리한 후 경찰에 넘겨서 입건하게 해요.”여준재가 고다정의 귓가에 대고 아이디어를 냈다.정말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지 못했던 고다정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러면 재무팀장한테 알고 있는 상황들을 정리해 달라고 해야겠어요.”“그래요.”“이렇게 되면, 손실을 일부 만회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직원 모집이 시급해요.”고다정은 말하다 뭐가 생각난 듯 다시 여준재를 바라보며 물었다.“헤드 헌팅 회사를 좀 소개해 줄래요? 빨리 직원을 모집하지 않으면 회사가 엉망진창이 될 것 같아요.”“그건 간단해요. 이따가 사람을 찾아줄게요.”여준재가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고다정이 그를 향해 방긋 웃었다.“당신이 있어서 너무 좋아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어요.”“뭔데요?”여준재가 묻자 고다정이 웃으며 대답했다.“당신한테 회사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배우고 싶어요. 오늘 회사에 이런 문제가 생긴 데는 제 탓이 커요.”그녀가 회사 경영에 대해 알았다면 이동수에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 말과 품속에 안긴 여인의 침울한 표정에서 여준재는 그녀가 여전히 후회하고 있음을 알아챘다.“회사 일에 관해서는 자책할 필요 없어요. 이동수가 고경영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아요. 어느 회사에서 임원이 바뀌었다고 아래 직원들이 집단 사직을 해요? 고경영이 당신이 회사 관리에 아마추어인 걸 알고 일부러 훼방을 놓았을 거예요.”“왜 그렇게 깔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운산은 인터넷 기사 때문에 시끄러웠고, 사람들은 신우하이테크에 관한 기사를 보고 여러 가지 추측을 쏟아냈다.“직원들이 다 떠났다면 신우하이테크가 이번에는 정말 문을 닫겠네.”“최근 몇 년 계속 적자였다고 들었는데, 5년 버틴 것도 쉽지 않은 거야.”“아, 갑자기 내가 신우하이테크 주식을 샀던 게 기억났어. 파산한다면 주식을 가지고 있는 게 손해잖아. 지금 당장 팔아야겠어.”“나도 신우하이테크 주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버텼으니 다시 살아날 줄 알았더니 파산이라니. 가지고 있는 주식을 팔아야겠어. 너무 많이 손실 보기 전에.”이런 댓글들이 나오자 그 아래에 가지고 있는 주식을 팔겠다는 대댓글이 줄을 이었다.이로 인해 원래 그나마 안정적이던 신우하이테크 주식이 하락세를 지속했다.여준재의 지시를 받고 신우하이테크에 대해 조사 중이던 구남준은 이때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와 신우하이테크의 주가 변동을 보고 급히 여준재에게 연락해 상황을 간단히 보고했다.“대표님, 인터넷에 신우하이테크 직원의 집단 사직에 관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누리꾼들이 신우하이테크가 파산하는 줄로 알고 줄줄이 보유한 주식을 매도하면서 지금 신우하이테크 주식이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이 말을 들은 여준재는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인터넷 쪽은 잠시 내버려두고 주식시장에 집중해서 누리꾼들이 매도하는 주식을 전부 사들여. 다른 사람이 집중 매수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해.”“알겠습니다.”구남준은 지시를 받고 전화를 끊었다.고다정은 여준재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무슨 일이 있어요?”“신우하이테크 직원의 집단 사직에 관한 기사가 인터넷에 보도돼 회사가 파산한다고 생각한 누리꾼들이 줄줄이 주식을 매도하고 있어요. 조금 전 구 비서가 전화 와서 나한테 어떻게 할지 물었어요.”여준재는 숨기지 않고 인터넷에서 일어난 일을 그대로 말해주었다.이 말을 들은 고다정도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여준재는 고다정이 뒤숭숭해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회사 일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구 비서한테 주식시장에서 개인투자자들이 매도하는 주식을 전부 사들이라고 지시했으니 주식시장 쪽에는 문제가 없을 거예요.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지금 회사에 나가요. 구 비서가 사람을 데리고 건너갔을 거예요. 준이와 윤이는 내가 학교에 데려갈게요.”“정말 회사 일이 걱정되긴 해요. 그럼 준이와 윤이는 당신에게 맡길게요.”고다정은 사양하지 않고 이내 핸드백을 들고 문을 나섰다.여인이 급하게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준재는 빙그레 웃었고, 속으로 회사 일을 끝낸 후 신우하이테크에 도우러 가기로 마음먹었다.이를 모르는 고다정이 회사에 도착하니 밖에 언론 기자들이 쫙 깔려 있었다.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에돌아서 뒷문으로 회사에 들어갔다.들어서자마자 구남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작은 사모님, 대표님께서 사모님이 회사에 나오셨다고 하던데 지금 어디 계셔요? 지금 회사 밖에 기자들이 깔려 있어서 도착하시면 절대 앞문으로 들어오지 마세요.”“알아요. 저 이미 뒷문으로 들어왔어요.”고다정은 말하며 비상 통로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무실을 보며 휴대폰에 대고 말을 이었다.“제가 곧 사무실에 도착하니 만나서 얘기해요.”“알겠습니다, 작은 사모님.”구남준은 대답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몇 분 후, 고다정이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구남준까지 무려 10명이나 됐다.이들은 고다정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잇달아 일어서며 공손하게 인사했다.“작은 사모님.”“안녕하세요.”고다정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구남준이 사람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작은 사모님, 이 사람들은 대표님의 지시로 각 지사에서 뽑아온 능력자들입니다. 당분간 신우하이테크의 프로젝트, 마케팅, 고객서비스와 재무 등 직무를 맡을 것입니다.”이 사람들이 여준재가 각 지사에서 뽑아서
고다정의 생각을 모르는 구남준은 대뜸 머리를 저으며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저는 사양할게요. 작은 사모님께서 솔로인 저를 좀 봐주세요.”“풉.”구남준이 이렇게 익살스럽게 거절하리라 생각지 못했던 고다정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가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 준재 씨한테 월급을 2배로 올려주라고 말할게요.”이런 말을 주고받을 때 책상 위의 내선전화가 울려서 받아보니 고객서비스팀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작은 사모님, 조금 전 몇몇 협력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는데, 이들은 우리와 제휴를 해지하고 싶다는 의사를 넌지시 밝혔습니다. 제가 일단 달래긴 했지만 이들의 생각이 바뀔 것 같지 않고, 게다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전화기 저편에서 담당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용건을 말했다.겨우 긴장이 풀렸던 고다정은 이 말을 듣자 또다시 신경이 곤두서서 급히 캐물었다.“왜 제휴를 해지하려는 건지 물어봤어요?”“물어봤는데, 대부분 똑같은 생각입니다. 다수 직원이 회사를 그만두고 회사 주가도 하락한 데다 인터넷에 머지않아 파산한다는 루머가 돌고 있어 빨리 손절하려는 겁니다.”담당자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할 말을 잃었다.담당자는 고다정이 한참 동안 반응이 없자 그녀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걸 알아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작은 사모님, 현재 중요한 일은 두 가지입니다. 구 비서님한테 말해서 인터넷상의 루머를 해명하고 신우하이테크가 재정비 후 YS그룹과 제휴를 맺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요. 그러면 잠시 고객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그렇게 해도 돼요? 그리고 YS그룹과 제휴를 맺지 않았는데 그건 사람을 속이는 거잖아요?”고다정은 사람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비즈니스를 모르지만 신용이 사업가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쯤은 안다.담당자는 고다정이 이런 말을 하리라 예상치 못했는지 몇 초간 침묵하더니 말을 이었다.“작은 사모님과 대표님의 관계로 볼 때, 두 회사가 제휴를 맺지
이 공고가 나오자 사태를 지켜보던 주식투자자들은 아연실색했다.특히 주식을 대거 저가 매도한 개인투자자들은 이때 후회가 막심했다.“회사 재정비라니? 신우하이테크가 파산하는 줄 알고 주식을 황급히 저가에 매도했는데, 진짜 큰 손해를 봤어.”“큰 손해뿐이야? 완전히 망했지. YS그룹과 관계를 맺기만 하면 돈을 번다는 법칙을 잊었어? 내 돈, 아까워죽겠어.”“하하하, 난 다행히 주식을 팔지 않았어. 돈 벌었네.”인터넷에서 누리꾼들의 희비가 엇갈렸다.고다정과 여준재는 이 사실을 모른 채 단독룸에서 오붓하게 밥을 먹었고, 식사가 끝난 후에도 즉시 떠나지 않고 같이 앉아 커피를 마셨다.이때 여준재의 휴대폰이 울리고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는 휴대폰을 들고 한 번 훑어보더니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고다정이 이내 그의 표정 변화를 감지하고 걱정스레 물었다.“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어요?”“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제 구 비서한테 신우하이테크 직원의 집단 사직에 배후가 있는지 조사해 보라고 했는데, 결과가 나왔어요.”여준재가 휴대폰을 고다정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내 추측이 맞았어요. 직원들의 사직이 고경영과 연관이 있어요. 심지어 오늘 아침의 인터넷 여론도 그가 뒤에서 수작을 부린 거예요. 그리고 당신 계모도 엉큼한 사람인지라 이번 일에서 고경영 몰래 많은 일을 꾸몄어요.”이 말을 듣고 휴대폰 속의 자료를 보던 고다정도 안색이 변했다.“고경영, 심여진, 이 사람들은 계속 제 주변을 맴돌면서 어디나 빠지지 않네요.”그녀의 눈에서 혐오감이 넘쳐흘렀다.여준재는 증오에 불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달랬다.“됐어요. 그런 사람들 때문에 화를 내서 몸을 망가뜨리면 손해에요.”고다정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혔다.여준재의 말이 맞는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화를 내다가는 조만간 화병 걸려 죽을 것이다.품속의 여인이 진정된 것을 본 여준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계속 설득했다.“사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