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눈 앞에 안개가 낀 듯 고다정의 시야가 흐릿했다.손을 뻗었지만 다섯 손가락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다른 감각들은 더 선명해졌다.마치 한 덩어리의 화염이 온몸을 감싸고 뜨거운 파도가 이따금 엄습하는 것 같았다.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격정적인 움직임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여자를 반드시 소유하겠다는 의미를 가진 듯한 몸짓이었다.다정은 눈을 힘껏 떠 상대방을 똑똑히 보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 뜰 수가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거센 폭풍이 멈췄다. 마침내 그 남자의 단단하고 섹시한 가슴을 볼 수 있었다. 왼쪽 가슴에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검은 매가 있었다. 날카로운 맹금류 특유의 눈길로, 흉흉하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신의 눈길과 마주한 것처럼, 고다정은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으아아악…….”다정은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놀라 깨어났다.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침대에서 일어난 다정, 9개월 된 만삭의 배로 동작이 서툴고 힘겨웠다.옆에서 자고 있던 강말숙이 외손녀의 인기척을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왜 그래? 다정아, 또 악몽을 꾼 거야?”다정은 기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강말숙은 핼쑥한 외손녀의 얼굴을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달랬다.“그때 그 일……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그럴까요? 그런데 다들 저를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고…… 자업자득이라고 해요.”다정은 초점 잃은 눈빛으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9개월 전, 그녀는 고 씨 가문의 금지옥엽으로, 소꿉친구인 진시목과 약혼을 앞두고 있었다.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던 결혼 준비가 약혼 전날 와장창 박살 났다. 그날 밤, 예비신부 고다정이 모르는 남자한테 정조를 잃은 것.그 다음날 스캔들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파격 일탈! 운산시 명문가 장녀의 약혼 전날 원나잇!!]다정은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잃었다.어머니 강수지는 이 일로 충격을 받아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아버지 고경영은 고 씨 집안 망신이라며, 인연을 끊겠다는 불호령과 함께
5년 후.운산시의 고색창연한 한약방.다정은 방금 약재를 팔아 좋은 수입을 얻었다.기분이 좋은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차장을 향했다. 이따 차 안에 있는 두 꼬맹이 녀석을 데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갈 생각하니 신이 났다.5년 전, 아들딸 쌍둥이를 낳은 다정은 외할머니와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교외에서 살고 있다. 우연히 그곳에서 연세 많으신 한의사에게 의학이론과 여러 가지 약재를 판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 중에는 약재 재배 등도 포함되었다.다정은 5년 동안 줄곧 약재 판매로 집안의 생계를 유지했다.두 아이도 건강하게 자랐고, 생활이 돛 단 듯 순조로웠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센텀 광장을 지날 무렵.광장 위쪽의 대형 스크린에서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연예계 떠오르는 샛별, 부잣집 아씨 고다빈 곧 JS그룹 도련님 진시목과 결혼, 5년간의 연애 드디어 마침표…….]다정은 삽시간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스크린을 바라보았다.화면에는 남녀의 웨딩촬영 비하인드 씬들이 보였다.다정하게 서로 껴안고, 마주보며 눈빛으로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그 모습이 다정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강펀치를 맞은 듯 숨이 턱 막혀왔다. 한때 진시목도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며 평생 함께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그러나 자신에게 그런 불행이 닥쳤을 때, 진시목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혼약을 취소하고 고다빈과 함께 했다.다정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그날 밤, 그 일은, 혼약을 깨기 위한 모략이 아니었는지…….온갖 생각들이 얼기설기 뒤섞여 복잡한 마음은 한참을 애써 달래고서야 비로소 진정되었다.아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총기가 넘치는 두 꼬마녀석들에게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마음을 다잡은 다정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곧 주차된 곳에 도착했다.차에 올라 운전석에 앉은 다정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두 귀염둥이가 얌전히 뒤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이목구비가 뚜렷한 작은 얼굴, 총기 가득한
“엄마, 우리 괜찮아요.” 하준이 침착하게 대답했다.다정은 마음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꼬맹이들이 다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상대방이 브레이크를 제때에 밟았기 때문일 것이다. “얘들아, 엄마 어떻게 된 일인지 좀 보고 올게. 너희들은 얌전히 차에 있어.”그녀는 한 마디 당부하고 곧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뒤 차에서 내린 운전기사가 차 상태를 확인하고는, 화난 얼굴로 다정을 보며 다그쳤다. “도대체 운전을 어떻게 한 겁니까? 갑자기 도로에서 이렇게 차를 멈추면 어떡합니까?”“정말 죄송합니다. 제 차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다정은 자기 쪽 문제라는 것을 알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차를 보았다. 뒤 범퍼가 움푹 들어간 걸 확인하고 다시 상대방의 차를 보았다.순간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상대방의 차는 억 소리가 절로 나오는 글로벌 한정판 마이바흐였다.이번 사고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으며, 배상도 본인이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그 많은 돈을 배상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심장이 툭, 발치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최근 2년 동안 외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워낙 변변찮던 살림이 더 쪼들린 터였다. 차 배상금은 적어도 수천만원 될 텐데.‘대물보험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디에 가서 이렇게 많은 돈을 구하지?’이마의 땀을 닦으며 다정은 다시 몸을 굽혀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지금으로서는 덮어놓고 사과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운전기사는 화가 난 듯 두 손을 허리에 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찌푸린 눈살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이봐요, 아가씨, 사과만 하면 무슨 소용 있어요? 우리 쪽은 정상적으로 운행하고 있었다구요. 이번 일은 당신 쪽에서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겁니다. 교통경찰과 보험회사가 오면 어떻게 배상해야 할지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상황을 살피고 말을 듣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초조해졌다.
운전기사의 모양을 보니 차 뒷좌석에 결정권자가 있는 듯했다.‘차 주인이 뒤에 계시나 보다…….’다정은 무의식중에 뒷좌석을 쳐다보았다. 차 뒷좌석에 고급스러운 검은색 양복을 입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비현실적 외모를 가진 남자가 앉아있었다. 몸에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넘쳤다.하지만 하얀 입술 색으로 보아 어디 아파 보이는 것이, 눈을 감고 쉬고 있는 듯했다.남자의 옆에는 금테 안경을 쓴 세련되고 듬직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의 미간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그가 입을 열었다.“이 기사님, 이분에게 명함을 한 장 남겨 주시고, 배상 문제는 다음에 이야기합니다. 먼저 신수 어르신께 갑시다.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그들이 대화를 나눌 때, 차로 다가간 다정은 차 안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맡았다.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차 안의 남자는 어딘가 다친 것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상대방을 다시 쳐다보았다. 보통 인물은 아닌 듯했다.차 안에 있던 여준재는 느껴지는 시선에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차가운 심연과도 같은 눈동자가 흘깃 다정을 향했다.그 눈길은 날카롭고 차가워, 감정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다정은 인간이 이런 눈을 가진 걸 본 적이 없었다. 삽시에 온 몸이 오싹해나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이 사람…… 낯이 좀 익은 것 같은데…….’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정은 기사의 대답을 들었다.“네.”운전기사는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연락처 좀 남겨주세요.”“고다정이라고 합니다. 제 핸드폰입니다.”다정은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운전기사에게 건네어 주었다.“저는 이 번호만 씁니다. 걱정 마세요. 절대 도망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일시금으로 많은 돈을 낼 능력이 안 됩니다. 제가 차 수리비를 낼 테니까 혹시 할부로 지급해도 되는지 물어봐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지급 기한을 좀 더 늘려주시든가요. 제가 돈을 마련하는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