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 괜찮아요.” 하준이 침착하게 대답했다.다정은 마음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꼬맹이들이 다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상대방이 브레이크를 제때에 밟았기 때문일 것이다. “얘들아, 엄마 어떻게 된 일인지 좀 보고 올게. 너희들은 얌전히 차에 있어.”그녀는 한 마디 당부하고 곧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뒤 차에서 내린 운전기사가 차 상태를 확인하고는, 화난 얼굴로 다정을 보며 다그쳤다. “도대체 운전을 어떻게 한 겁니까? 갑자기 도로에서 이렇게 차를 멈추면 어떡합니까?”“정말 죄송합니다. 제 차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다정은 자기 쪽 문제라는 것을 알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차를 보았다. 뒤 범퍼가 움푹 들어간 걸 확인하고 다시 상대방의 차를 보았다.순간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상대방의 차는 억 소리가 절로 나오는 글로벌 한정판 마이바흐였다.이번 사고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으며, 배상도 본인이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그 많은 돈을 배상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심장이 툭, 발치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최근 2년 동안 외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워낙 변변찮던 살림이 더 쪼들린 터였다. 차 배상금은 적어도 수천만원 될 텐데.‘대물보험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디에 가서 이렇게 많은 돈을 구하지?’이마의 땀을 닦으며 다정은 다시 몸을 굽혀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지금으로서는 덮어놓고 사과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운전기사는 화가 난 듯 두 손을 허리에 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찌푸린 눈살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이봐요, 아가씨, 사과만 하면 무슨 소용 있어요? 우리 쪽은 정상적으로 운행하고 있었다구요. 이번 일은 당신 쪽에서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겁니다. 교통경찰과 보험회사가 오면 어떻게 배상해야 할지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상황을 살피고 말을 듣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초조해졌다.
운전기사의 모양을 보니 차 뒷좌석에 결정권자가 있는 듯했다.‘차 주인이 뒤에 계시나 보다…….’다정은 무의식중에 뒷좌석을 쳐다보았다. 차 뒷좌석에 고급스러운 검은색 양복을 입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비현실적 외모를 가진 남자가 앉아있었다. 몸에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넘쳤다.하지만 하얀 입술 색으로 보아 어디 아파 보이는 것이, 눈을 감고 쉬고 있는 듯했다.남자의 옆에는 금테 안경을 쓴 세련되고 듬직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의 미간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그가 입을 열었다.“이 기사님, 이분에게 명함을 한 장 남겨 주시고, 배상 문제는 다음에 이야기합니다. 먼저 신수 어르신께 갑시다.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그들이 대화를 나눌 때, 차로 다가간 다정은 차 안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맡았다.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차 안의 남자는 어딘가 다친 것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상대방을 다시 쳐다보았다. 보통 인물은 아닌 듯했다.차 안에 있던 여준재는 느껴지는 시선에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차가운 심연과도 같은 눈동자가 흘깃 다정을 향했다.그 눈길은 날카롭고 차가워, 감정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다정은 인간이 이런 눈을 가진 걸 본 적이 없었다. 삽시에 온 몸이 오싹해나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이 사람…… 낯이 좀 익은 것 같은데…….’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정은 기사의 대답을 들었다.“네.”운전기사는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연락처 좀 남겨주세요.”“고다정이라고 합니다. 제 핸드폰입니다.”다정은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운전기사에게 건네어 주었다.“저는 이 번호만 씁니다. 걱정 마세요. 절대 도망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일시금으로 많은 돈을 낼 능력이 안 됩니다. 제가 차 수리비를 낼 테니까 혹시 할부로 지급해도 되는지 물어봐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지급 기한을 좀 더 늘려주시든가요. 제가 돈을 마련하는 데
다정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무거운 마음을 안고, 견인회사에 전화를 걸어 주소를 알려준 뒤 교통경찰에게 연락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 장소에 도착한 교통경찰은 대략적인 상황을 간단히 확인하고 이미 쌍방이 서로 합의하였음을 알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견인 기사가 차를 끌고 가는 것을 빤히 보면서 아쉬워했다.“고다정 씨, 경찰서에 함께 가셔서 조서를 작성해 주셔야 합니다.” 교통경찰이 다가와 말했다.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두 꼬맹이와 함께 경찰차에 올랐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한편, 여준재의 차도 신의약방에 도착했다.비서 구남준은 먼저 내려 차 문을 열었고, 곧 운전기사와 함께 여준재를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갔다.문에 들어서자마자, 구남준은 프런트의 여직원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물었다.“신수 어르신은?”프런트 데스크의 여직원은 얼른 걸어 나와 안으로 안내했다.“신수 어르신은 지금 대기 중입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시죠.”곧 여준재를 방으로 모셨다.집 안에는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났다. 공기 중에 퍼져 있는 은은한 단향목 냄새가 정신을 맑게 해주는 듯했다.티테이블 한쪽에 개량한복을 입은 70, 80세로 보이는 노인이 손에 찻잔을 들고 차를 음미하고 있다. 빛나는 두 눈과 꼿꼿한 허리가, 그 연세의 노인 것이 아닌 것 같았다.구남준은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신수 어르신, 도련님이 오늘 부상을 입어 지병이 도진 거 같은데……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여준재는 거의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오는 내내 고통을 꾹 참느라 미간이 찌푸려졌다. 꼭 감은 눈꺼풀 밑에서 눈동자가 마구 요동쳤다.“빨리 눕혀라, 내가 좀 보마!”신수 노인은 얼른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여준재를 침대에 눕히자, 신수 노인이 앞으로 다가와 자세히 살폈다.잠시 후에야 낮은 소리로 일갈했다.“내가 뭐랬어? 진작에 몸뚱이 함부로 쓰지 하지 말라고 충고했거늘……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요즘 젊
한쪽의 구남준도 의아해하며 얼른 되물었다.“어르신, 혹시 그 약초 더 있나요? 있으면 저희에게 넘겨주세요. 있는 만큼 저희가 다 구입하겠습니다.”이 약초만 있다면 도련님은 아마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신수 노인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시장에서 야채처럼 한 트럭씩 갖다 파는 줄 아나? 희귀 약초라고 했잖은가?”“그…….”모처럼 한 가닥의 희망을 잡은 구남준은 여전히 단념하지 않았다.“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그동안 약초를 공급해 온 사장이 우연히 몇 뿌리 구했다고 넘겼어. 나도 물었지…… 혹시 여분이 있냐고…… 없다더라.”구남준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준재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그저 눈빛이 한결 더 어두워졌을 뿐. 그의 지병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요 몇 년 동안 세계 명의를 두루 찾아다녔지만, 완치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지금 그냥 남은 목숨을 부지하며 구차하게 살아갈 뿐이었다. 다행히 신수 노인에게서 치료받은 뒤 약간의 차도가 있었다. 고통도 다소 완화되었다.지금, 이렇게 기이한 효과가 있는 약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 많이 구매하여 약물 연구에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쩌면 완치가능한 약품을 연구해 낼 수도 있을 테니.하지만, 희망의 불꽃이 다시 꺼졌다. 여준재는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듯했다.그들의 실망스러운 표정을 읽은 신수 노인이 큰 소리로 위로를 건넸다.“자, 비록 약초가 몇 뿌리밖에 없지만, 몇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어. 적어도, 이 기간 에는 고통을 줄일 수 있을 테니……. 나중에 그 사장을 다시 만나면 꼭 물어봐 주마. 오늘 밤은 여기서 푹 쉬도록 해라…….”노인은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준재를 향해 한 소리 했다.“내가 아무리 네 병을 잘 치료하고 싶어도 내 의술로는 불가능에 가까워. 은둔 명의인 부윤솔을 찾을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사람을 찾기 전에 먼저 네 건강 좀 챙겨! 넌 사람이지 신이 아니라고. 매일 이렇게 악착같이 일만 하다간 몸
다정은 정성껏 약초에 물을 주며 가지치기와 곁순치기도 같이 했다. 어느덧 한 시간이나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날이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 약초는 신수 어른에게 넘긴 것보다 훨씬 진귀한 약종으로, 가격도 몇십 배나 더 비쌌다.‘낮에 그 뿌리들을 200여 만 원에 팔았는데, 이런 약초 모종들은 잘만 키운다면 만만치 않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거야.’가치를 매길 수 없는 진귀한 약종이니.얼굴의 땀을 훔치던 다정은 약초들을 보며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특히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꼬맹이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덧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다정은 공구를 정리하고 문을 잠근 뒤 집으로 걸어갔다.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들어서니, 두 꼬맹이가 목욕가운을 두르고 증조할머니와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새끼 고양이 앙꼬와 크림이 흥분하여 옆에서 맴돌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따뜻하고 즐거웠다.“외증조할머니가 또 졌어요.”첫째 하준이 팔짱을 끼고 앉아있다. 귀엽고 작은 얼굴에 진지한 표정을 더하니 너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우리 하준이, 정말 갈수록 대단하네!”강말숙이 웃자, 눈이 반달이 되었다. 자기 집 아이가 이렇게 총기가 넘치다니……. 어린 나이임에도 논리 정연하고 언어 표현 면에 있어서도 절대 어른에게 뒤지지 않았다.둘째 하윤이는 엄마를 보고 기뻐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엄마다!”말과 함께 작은 몸이 날듯이 다정에게 달려왔다.하준은 다가와 물을 한 잔 내밀었다.“엄마, 피곤하죠? 물 한 잔 드세요.”두 꼬맹이를 품에 안은 다정은, 모든 피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애들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다 버텨낼 수 있어!’다음 날 아침, 다정은 두 아이를 유치원에 보냈다.그리고 택시를 타고 신의약방으로 향했다.컴퓨터에 환자 정보를 등록하고 있던 프런트 데스크의 여직원 소영은 다정이 문에 들어서는 걸 보고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다정 씨
홀에는 오직 한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다정은 잠자코 서서 자리를 떠야 할지, 계속 있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금테 안경을 쓴 그 남자가 바로 어제 교통사고가 났던 차량의 뒷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기품이 고귀하고 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의 특유한 카리스마가 몸에 넘쳐흘렀던 그 사람…… 그때 맡았던 피비린내와 현재 상황을 종합해 보면…… 안에 있는 사람이 바로 그 남자일 것이다.보기만 해도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자와 시비가 붙었으니, 이치대로라면 빨리 도망가는 게 맞다.그러나 의술을 익힌 자로서, 눈앞에 목숨이 시급한 사람을 구하지 않고 모른 척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다정이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안에서 구남준의 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이것저것 따질 틈도 없이 다정은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에 들어갔다.문에 들어서니, 진한 한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깨끗한 병상에 정교한 얼굴의 남자가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창백한 얼굴로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두 볼은 비정상적인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다정은 한눈에, 그가 열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열은 이미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듯.한쪽의 구남준과 소영은 어쩔 바를 몰라 허둥지둥했다.어젯밤에 신의약방에 온 후 여준재는 줄곧 여기에 묵고 있었다.그전까지는 멀쩡했다.그런데 방금 구남준이 여준재를 불렀는데 미동이 없었다. 혼수상태였다. 숨결이 미약하고 이마는 손을 델만큼 뜨거웠다.당황한 구남준이 바로 신수 어른을 부르러 나간 것이었다.소영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침착해야 했다. 그녀는 놀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구 비서님, 지금 신수 어르신이 안 계십니다. 도련님의 상황이 급박하니 먼저 병원으로 모시는 건 어떨까요?”“그럴 수밖에요…….”구남준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전화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누르고자 할 때, 얼핏 빨간 그림자가 침대 곁으로 다가와 여준재에게 손을 뻗으려
고다정은 난처한 듯 답했다.“묻는 사람이 없어서 굳이 말하지 않았어요. 의술이라고 하기엔 그렇고…… 진맥 정도는 조금 할 줄 알아요.”의술을 안다고 하면, 오만방자하다고 생각할까 봐 얼버무려 얘기했다.의술이 뛰어난 스승님 밑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으니, 일반적인 병을 진찰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다.구남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이 사람을 믿어야 할지 고민 중인 듯했다.“조금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이죠? 고다정 씨, 저는 도련님 목숨으로 장난칠 수는 없는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다정은 구비서의 말을 끊었다.“지금 병원으로 옮기기엔 이미 늦었어요. 지금 이분은 기운이 약해져서 언제든지 목숨이 위험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병원까지 꽤 멀어요.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간다고 해도 차로 30분은 족히 걸릴걸요. 그 난리를 피울 동안, 이분은 위험한 상황에 빠질 것 같습니다만…….”다정의 말을 들은 소영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일리가 있긴 한데, 그럼 지금 어떻게 해야 하지?’“고다정 씨, 그럼, 도련님의 병을 치료할 방법이 있습니까? 지금 상황이 매우 위험한 듯합니다.”구남준은 아무 말없이 다정만 쳐다보았다. 눈빛에 그가 원하는 답이 뭔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다정은 한숨을 내쉬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의학에는 한계가 있어요. 병을 100% 치료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의사는 없을 겁니다. 하물며 이분은 지금 목숨이 반밖에 남지 않았어요. 최선을 다하겠다는 얘기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하세요.”구남준은 마음속으로 저울질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정은 이곳의 단골이다. 소영도 그녀를 여러 번 봤었다.’‘성격이 침착하고 연구개발한 약초도 효과가 뛰어나, 신수 어르신도 평소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의술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이 급박하니, 그냥 속는 셈 치고 맡겨볼 수밖에…….’“구 비서님, 다정 씨에게 한번 맡겨 봅시다. 차도가 있다면 좋고…… 만약 안 된다면 병원에 갈 수밖에요…….”
다정은 머릿속의 생각들을 다 말로 하지 않았다. 굳이 얘기해도 별 소용없으니, 말을 아끼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진맥하던 손을 거두고 다정은 고개를 돌려 소영에게 물었다.“소영 씨, 혹시 침 있어요? 침술용 그런 침이요.”소영은 눈이 맑아지며 얼굴에 희색을 띠었다.“네. 있어요! 그 말인즉 치료 가능하다는 얘기인가요?”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답했다.“네.”그녀의 의술이 미덥지 않았던 구남준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고다정 씨, 정말 가능한 거죠?”다정은 별말 없이 구 비서를 한 번 쳐다보았다.‘이 사람 벌써 몇 번 확인하는 거야? 쓸데없는 말이 참 많군.’다정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제가 가능하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대체 제가 치료하는 겁니까? 아니면 그쪽이 치료하는 겁니까?”구남준은 순순히 입을 다물고 더는 캐묻지 않았다.위층으로 한걸음에 달려간 소영은 침이 들어있는 작은 케이스를 하나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사이즈의 다양한 침이 촘촘히 꽂혀 있었다.“저 혼자 힘으로는 안 돼요.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말만 하세요.” 구남준도 캐묻지 않았다.“그래요, 소영 씨, 수고스럽지만 이 침들 전부 소독해 줘요.”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구남준에게 말했다.“비서님, 이분의 옷을 다 벗겨 주세요. 아…… 속옷은 빼고요…….”“네?” 소독하러 가려던 소영이 놀라서 다정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소독하러 갔다.구남준은 꼼짝하지 않고 놀란 눈빛으로 다정을 바라보았다.‘어찌 이 여자 앞에서 도련님의 옷을 반쯤 다 벗긴단 말인가? 모양 빠지게…….’‘그리고 침술 하는데 바지를 벗기는 게 어딨어? 기껏해야 상의 정도지…….’구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다정의 초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바지 안 벗겨도 돼요, 대신 바짓가랑이는 걷어줘요, 말 안 따랐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쪽 책임인 겁니다…….”다정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