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에는 오직 한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다정은 잠자코 서서 자리를 떠야 할지, 계속 있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금테 안경을 쓴 그 남자가 바로 어제 교통사고가 났던 차량의 뒷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기품이 고귀하고 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의 특유한 카리스마가 몸에 넘쳐흘렀던 그 사람…… 그때 맡았던 피비린내와 현재 상황을 종합해 보면…… 안에 있는 사람이 바로 그 남자일 것이다.보기만 해도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자와 시비가 붙었으니, 이치대로라면 빨리 도망가는 게 맞다.그러나 의술을 익힌 자로서, 눈앞에 목숨이 시급한 사람을 구하지 않고 모른 척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다정이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안에서 구남준의 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이것저것 따질 틈도 없이 다정은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에 들어갔다.문에 들어서니, 진한 한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깨끗한 병상에 정교한 얼굴의 남자가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창백한 얼굴로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두 볼은 비정상적인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다정은 한눈에, 그가 열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열은 이미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듯.한쪽의 구남준과 소영은 어쩔 바를 몰라 허둥지둥했다.어젯밤에 신의약방에 온 후 여준재는 줄곧 여기에 묵고 있었다.그전까지는 멀쩡했다.그런데 방금 구남준이 여준재를 불렀는데 미동이 없었다. 혼수상태였다. 숨결이 미약하고 이마는 손을 델만큼 뜨거웠다.당황한 구남준이 바로 신수 어른을 부르러 나간 것이었다.소영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침착해야 했다. 그녀는 놀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구 비서님, 지금 신수 어르신이 안 계십니다. 도련님의 상황이 급박하니 먼저 병원으로 모시는 건 어떨까요?”“그럴 수밖에요…….”구남준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전화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누르고자 할 때, 얼핏 빨간 그림자가 침대 곁으로 다가와 여준재에게 손을 뻗으려
고다정은 난처한 듯 답했다.“묻는 사람이 없어서 굳이 말하지 않았어요. 의술이라고 하기엔 그렇고…… 진맥 정도는 조금 할 줄 알아요.”의술을 안다고 하면, 오만방자하다고 생각할까 봐 얼버무려 얘기했다.의술이 뛰어난 스승님 밑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으니, 일반적인 병을 진찰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다.구남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이 사람을 믿어야 할지 고민 중인 듯했다.“조금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이죠? 고다정 씨, 저는 도련님 목숨으로 장난칠 수는 없는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다정은 구비서의 말을 끊었다.“지금 병원으로 옮기기엔 이미 늦었어요. 지금 이분은 기운이 약해져서 언제든지 목숨이 위험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병원까지 꽤 멀어요.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간다고 해도 차로 30분은 족히 걸릴걸요. 그 난리를 피울 동안, 이분은 위험한 상황에 빠질 것 같습니다만…….”다정의 말을 들은 소영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일리가 있긴 한데, 그럼 지금 어떻게 해야 하지?’“고다정 씨, 그럼, 도련님의 병을 치료할 방법이 있습니까? 지금 상황이 매우 위험한 듯합니다.”구남준은 아무 말없이 다정만 쳐다보았다. 눈빛에 그가 원하는 답이 뭔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다정은 한숨을 내쉬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의학에는 한계가 있어요. 병을 100% 치료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의사는 없을 겁니다. 하물며 이분은 지금 목숨이 반밖에 남지 않았어요. 최선을 다하겠다는 얘기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하세요.”구남준은 마음속으로 저울질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정은 이곳의 단골이다. 소영도 그녀를 여러 번 봤었다.’‘성격이 침착하고 연구개발한 약초도 효과가 뛰어나, 신수 어르신도 평소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의술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이 급박하니, 그냥 속는 셈 치고 맡겨볼 수밖에…….’“구 비서님, 다정 씨에게 한번 맡겨 봅시다. 차도가 있다면 좋고…… 만약 안 된다면 병원에 갈 수밖에요…….”
다정은 머릿속의 생각들을 다 말로 하지 않았다. 굳이 얘기해도 별 소용없으니, 말을 아끼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진맥하던 손을 거두고 다정은 고개를 돌려 소영에게 물었다.“소영 씨, 혹시 침 있어요? 침술용 그런 침이요.”소영은 눈이 맑아지며 얼굴에 희색을 띠었다.“네. 있어요! 그 말인즉 치료 가능하다는 얘기인가요?”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답했다.“네.”그녀의 의술이 미덥지 않았던 구남준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고다정 씨, 정말 가능한 거죠?”다정은 별말 없이 구 비서를 한 번 쳐다보았다.‘이 사람 벌써 몇 번 확인하는 거야? 쓸데없는 말이 참 많군.’다정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제가 가능하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대체 제가 치료하는 겁니까? 아니면 그쪽이 치료하는 겁니까?”구남준은 순순히 입을 다물고 더는 캐묻지 않았다.위층으로 한걸음에 달려간 소영은 침이 들어있는 작은 케이스를 하나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사이즈의 다양한 침이 촘촘히 꽂혀 있었다.“저 혼자 힘으로는 안 돼요.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말만 하세요.” 구남준도 캐묻지 않았다.“그래요, 소영 씨, 수고스럽지만 이 침들 전부 소독해 줘요.”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구남준에게 말했다.“비서님, 이분의 옷을 다 벗겨 주세요. 아…… 속옷은 빼고요…….”“네?” 소독하러 가려던 소영이 놀라서 다정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소독하러 갔다.구남준은 꼼짝하지 않고 놀란 눈빛으로 다정을 바라보았다.‘어찌 이 여자 앞에서 도련님의 옷을 반쯤 다 벗긴단 말인가? 모양 빠지게…….’‘그리고 침술 하는데 바지를 벗기는 게 어딨어? 기껏해야 상의 정도지…….’구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다정의 초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바지 안 벗겨도 돼요, 대신 바짓가랑이는 걷어줘요, 말 안 따랐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쪽 책임인 겁니다…….”다정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쳐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쉽게 깨어난다고?’‘도련님 상태가 이렇게 심각한데…… 침 몇 대 놓고 10분 기다리면 깨어날 수 있다고……?’다정의 확신에 찬 말투에 구남준과 소영은 의아했지만, 별말 없이 초조히 기다렸다.구남준은 몇 번이고 병원에 전화를 걸어 의사에게 연락하고 싶었다. 여준재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미칠 것 같았다.‘저 여자 말을 대체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모르겠네…….’두 사람의 긴장한 모습과 달리, 다정은 평온했다.다정은 침대 위의 남자를 주시하기 시작했다.말도 안 되게 잘생긴 남자의 얼굴은 병색으로 창백했지만, 이목구비는 조각같이 정교하고 또렷했다.꼬리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썹, 서글서글한 눈매에 총기가 넘치는 반짝거리는 눈, 단정하게 생긴 오뚝한 코, 복사꽃 같은 입술.비록 몸 정면은 보이지 않지만, 탄탄한 근육이 크고 건장한 몸에 보기 좋게 분포돼 있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남성미가 넘쳤다.‘어떻게 이렇게 잘생겼지?’힐끗 훑어보았을 뿐인데 다정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찌릿했다. 이렇게 쳐다보는 것이 예의 아니라고 자책하며 시선을 돌려 소영 옆으로 가서 기다렸다.구남준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10분 지났어요.”다정은 여재준에게 다가가 침을 하나씩 뽑기 시작했다. 천천히 침착하게.마지막 침을 몸에서 뽑자, 침대 위의 남자는 긴 속눈썹을 떨며 손을 움직였다.깨어났다.잔뜩 긴장했던 구남준이 총총걸음으로 얼른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도련님, 기분이 어떠십니까?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소영은 얇은 담요를 가져와 여준재의 몸을 가려주었다.열이 아직 내리지 않은 여준재의 얼굴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봤지만,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입술을 오므리고 몸을 일으켜 앉으려고 했지만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는 기력이 없는 나지막한 소리로 구남준에게 물었다.“나…… 이거, 왜 그래?”구남준은 눈시울을 붉히며 여준재를 부축하여 일으키고 얼른 옷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가 입을
소영은 다정의 분부대로 약을 한 시간 동안 달여서 여준재에게 먹였다.그는 여전히 매우 허약한 모습이었다. 깨어났을 때는 의식조차 혼미했지만,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몇 시간이 지나고, 정오가 다 되었을 무렵, 구남준은 신기한 모습을 보았다. 약을 한 그릇 마셨을 뿐인데, 준재 도련님의 열이 내리고 얼굴색도 많이 돌아왔다. 정신도 멀쩡한 것이, 방금 전의 그 허약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이렇게 침 몇 곳 놓고, 약 한 그릇 마셨다고 이게 가능하다니.’여준재의 몸이 많이 회복되었다.“도련님, 다행이에요. 드디어 깨어나셨군요!”소영도 놀람을 금치 못했다. 방금까지도 다정의 의술을 의심했었는데.그러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도련님, 정말 어디 불편한 곳 없습니까?”준재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저었다.“아니, 몸이 훨씬 가벼워졌다.”지병때문에 늘 가슴이 답답해서 괴로웠는데, 지금은 그 기운은 어디로 갔는지도 가벼웠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홀가분함을 느꼈다. 이전에 지병이 재발했을 때 여러 차례 신수 어른께 도움을 청했었다. 그때 먹었던 약도 효과가 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약효가 뛰어나진 않았다.그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구남준에게 물었다.“이번에 먹은 약은 뭐야? 효과가 아주 좋네.”.“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암튼 처방전은 소영 씨에게 있습니다.”사방을 둘러보니 신수 어른이 보이지 않자, 한마디 덧붙였다.“신수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어르신이 나에게 처방해 주셨지?”구남준은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대답했다.“어르신은 지금 약방에 안 계십니다. 잠깐 외출하셨는데…… 곧 돌아오실 겁니다. 도련님, 이번에는 신수 어르신이 치료해 준 것이 아닙니다. 약도 어르신께서 처방한 것이 아니고요…….”여준재는 얼떨떨해졌다. 신수 어른보다 의술이 더 높은 사람이 또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누가 처방한 거야?”“그게…….” 구남준은 다정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서 고개를 들어 그녀
“어르신이 나가신지 얼마 안 되어서 도련님의 상황이 악화되었어요. 혼수상태에 빠져서 열도 나고…… 아주 심각했었습니다. 어르신께는 전화도 안 받으시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때……. 마침 어르신을 찾아뵈러 온 고다정 씨가 도와주었어요. 다정 씨 덕분에 도련님이 이렇게 빨리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정 씨 의술이 이렇게 좋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글쎄, 침을 몇 곳 놓으니까, 도련님이 이렇게 일어나셨지 뭐예요…….”신수 노인이 나타나니, 소영은 마음속에 걸려 있던 큰 돌이 내려간 듯 안심되었다. 방금 있었던 일을 신이 나서 설명하였다.“어르신, 사실이에요.”구남준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다정이가?” 신수 노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네. 맞아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신수 노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더해졌다.“다정이가 의술을 할 줄 안다고?”“네, 알고말고요. 게다가 의술도 아주 대단하던 데요. 저도 오늘에야 알았어요……. 어르신이 다정 씨랑 친하니까…… 진작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소영의 말을 듣고 신수 노인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다정과는 그래도 교류가 많은 편이었다. 한데 지금까지 그녀가 약재를 재배하여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만 알 뿐, 의술을 할 줄 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다정이 그 녀석,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구먼.’‘그런데 생명이 위독한 준재를 다정이가 구하다니…….’“녀석아, 손 좀 내놔, 내가 맥을 짚어 보마.”여준재의 맥박에 손을 얹고 한참이나 진맥하던 신수 노인이 갑자기 혀를 내둘렀다.준재를 치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맥이 이렇게 평온한 것은 처음이었다.외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상황이 심각했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원기 왕성해질 수 있지?“소영아, 다정이가 침을 놓을 때…… 무슨 혈을 찔렀더냐?”신수 노인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만약 다정이가 정말 이 녀석의 병을 고칠 수 있다면 큰 경사일 것이다.소영은 회상하며 입을 열었다.
다정은 어리둥절했다. 신수 어른이 이렇게 흥분한 것은 처음 봤다.다정은 한동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었다. 신수 어른은 친절하게 그녀를 휴게실로 이끌고 갔다.“햇볕이 이렇게 뜨거운데…… 자, 다정아, 우리 시원한 곳으로 들어가자꾸나!”다정은 의아했다. ‘오늘의 신수 어르신은 좀 지나치게 열정적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이지?’휴게실에 이미 준비해 둔 차를 보고 그녀는 약간 놀랐다.신수 노인은 의술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은 분이었다.다정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손을 꼭 잡은 신수 노인을 보며 다소 어색해했다.“네, 어르신,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자신이 좀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 신수 어른은 웃으며 다정의 손을 놓았다.“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내가 흥분했구나.”애써 멋쩍게 웃으며 자기 손을 움츠렸다.뒤를 힐끗 보고서야 다정은 소영, 조각남과 그리고 그의 비서인 구남준이 모두 같은 쪽에 서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다정의 시선은 중간에 서 있는 조각남 여준재에게 고정되었다. 정신은 아주 맑아 보였다. 보아하니 자신의 구급치료 효과는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았다. 그녀는 당연히 그가 왜 이렇게 빨리 회복되었는지 알고 있었다.표정으로는 도무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신수 노인을 보고, 다정은 신수 노인이 이렇게 흥분한 연유를 알 것 같았다.신수 어른이 단도직입적으로 자기 생각을 말했다.“다정아, 내가 오늘 널 여기로 부른 것은, 묻고 싶은 게 있어서야. 소영이한테 들었어……. 준재는 심맥이 손상되고, 외상과 내상이 모두 심각한 상태에다 지병까지 재발해서…… 살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심각했었지……. 그런데 네가 침을 놔주고 처방한 약을 먹었더니 이렇듯 혈기도 돌고 살아났잖아. 정말 구사일생인 셈이지. 어떻게 준재가 이렇게 빨리 회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구나……. 그리고, 너의 처방전에 어떤 약이 들어있었는지도 알고 싶어……. 빙설련, 이 약재는 시장에서 보기 드문 희귀한 약재인데, 어떻게 구했니……
화제가 자신한테로 돌려지자, 준재는 팔짱을 끼고 눈썹을 치켜세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역시 구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요, 보수는 편하게 얘기하세요. 그러고 보면 우린 다정 씨랑 인연이 참 깊은 것 같죠…….”신수 노인은 의아하다는 듯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왜? 아는 사이냐?”구남준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런 셈이죠?”남준은 콧등에 걸쳐진 안경을 올려 세우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며칠 전에 저와 도련님이 차를 타고 가다 다정 씨와 도로에서 약간의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때 접촉 사고로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다정 씨가 이런 대단한 분인 줄 몰랐습니다.”이 말을 꺼낸 뒤 분위기는 다소 어색해졌다.구남준은 다정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다정 씨, 그 교통사고에 관해서는, 다정 씨에게 어떠한 배상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가능하다면, 다정 씨를 우리 도련님의 개인 주치의로 모시고 싶습니다. 비용은 다정씨가 원하시는 데로 드리겠습니다.”준재는 침묵했다. 그렇게 진행하라는 의미였다.다정은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생각지도 못했다.너무 갑작스러워서 여러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결정해야 한다.다정은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의술이 대단하다니요, 과찬입니다. 제가 무슨……. 만약 고수라면 지금 이렇게 가난하고 초라하게 살고 있지는 않겠죠……?”다정의 이 말은 겸손이자, 자조였다.자신이 지금 이렇게 초라한데, 무슨 고담준론을 펼치겠는가?다만…… ‘가난하고 초라하게 산다’라는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 완곡한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다정 씨, 혹시 돈 문제 때문입니까? 고민할 필요 없이 비용을 제시해 보세요.”준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다정은 처음으로 준재의 목소리를 들었다.그의 목소리는 매우 듣기 좋았다. 톤은 낮고 분위기 있으며, 마치 파도의 속삭임처럼 사람을 매료시켰다. 세상에 둘도 없는 그의 비주얼과도 너무 찰떡궁합이었다.다정은 마음속으로 그의 신분을 생각해 보았다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