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형원이 나온 것을 보고 윤소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이 사기꾼. 우리 윤 씨의 기업을 뺏고 나까지 속여? 이 파렴치한 놈!""주의하세요. 여긴 경찰서예요. 똑똑히 생각하고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당신을 속여요? 자기 친언니까지 고소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쯧쯧, 그런 사람이 또 정신 못 차리고 이러네. 형사님, 이 사람 잘 조사해 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큰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그가 득의양양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계획과 조금 어긋났지만 상관없어. 자기들이 뭐 어쩌겠어? 반신불수가 되도 날 고소 못하는데.'노형원은 모든 준비가 다 되어있었다. 절대적인 자신이 없었다면 자신이 원하는 걸 얻지 못했을 테니까.윤소겸은 너무 화가 나서 그에게 주먹질하고 싶었다. 하지만 경찰서에서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가 달려들기도 전에 경찰이 그를 제압했다.그러자 노형원이 더 기고만장했다."이거 보셨죠. 지금 저 때리려고 한 거. 폭력적인 경향까지 있어요. 이 사람이 말한 납치가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이 드네요. 혹은 정신병이 있어서 환각이 생긴 게 아닐까요? 잘 조사해 보세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안 가게!""노형원, 죽여버리겠어!"윤소겸이 화가 나서 난리를 쳤다.안중에도 없었던 녀석이 자기가 원하든 물건을 손에 놓고 지금 의기양양하며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는 너무 화가 났고 너무 후회됐다!'온 집식구가 이 녀석에게 농락당했다니.'"쯧쯧, 흉악해라."노형원이 앞으로 몇 걸음 가다가 뭔가 생각이라도 난 듯 고개를 돌렸다."참, 마침 생각났는데, 당신 큰아버지 윤 사장 말이에요. 이미 지분 양도 동의했어요. 수속도 곧 밟을 거니까, 앞으로 대윤은…… 제 거예요. 댁 같은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도 없다고요!""너…… 으아악…….""누가 그런 소리를 해?!"갑자기 두툼한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노형원은 잠시 당황하더니 고개를 들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그러자 문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윤백건을 발견
"내 아내는 내가 보살피면 되니까,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윤백건이 웃었다."그것보다 네 걱정이나 하는 게 어때?"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경찰을 보며 입을 열었다."신고하려고요!"아무도 윤씨 가문의 일에 반전이 생길 거라고 생각 못 했다. 완치에 가망이 없다던 윤백건이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로 노형원을 고소했다.윤씨 가문에 불던 태풍도 하룻밤에 잠잠해진 것 같았다.윤백건의 귀환은 모든 걸 제자리로 돌아오게 했다. 윤 씨의 고위층에도 아주 큰 변화가 생겼다. 윤설아의 줄을 탔던 사람, 그리고 노형원의 줄을 탔던 사람도 모두 쫓겨나고 말았다.모든 사람은 이제야 깨달았다. 이 모든 게 전부 윤백건의 계략이라는 걸.대윤은 겉으론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많은 문제가 있었다. 내부 갈등과 관리층의 편 가르기 때문에 회사는 큰 손해를 보았다.전에도 프로젝트가 몇 개 있었는데 윤설아를 지지하던 무리와 회사 장로들, 그리고 몰래 노형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투는 바람에 그 프로젝트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그나마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건 윤백건이 중간에서 조절하고 해결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윤백건도 점점 나이 들고 언제까지 버텨낼지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이대로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면 아마 많은 사람이 탐탁지 않아 할 것이다. 그리고 윤백건은 윤설아의 야심을 잘 알고 있었다..어차피 자기 친조카이니 어느 정도의 지분과 이익을 나눠줘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윤설아의 욕심이 너무나도 컸다. 그녀는 대윤의 모든 것을 손안에 쥐려고 했고 두 눈에는 탐욕으로 가득했다.윤백건은 윤설아가 몰래 하는 짓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저 터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만약 설웅이가 이 자리에 오르게 되면 윤설아가 무슨 짓을 할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자기 아들을 위해, 그리고 회사와 윤씨 가문을 위해, 그는 큰 계획을 준비했다. 윤설아가 참지 못하고 욕심을 드러내길 기다렸고 이참에, 회사안에 불안정한 요소들
"그럼 신임 회장을 환영합시다."문이 열리고 윤설웅이 들어왔다.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이 숨을 들이마셨다. 다들 죽은 줄 알았던 윤설웅은 아직 살아있었고 심지어 대윤의 회장 자리까지 맡게 되었다.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이미 상황을 파악했다. 전에 있던 모든 일들은 다 이날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윤설웅을 위해 걸림돌을 제거하고 그가 회장 자리에 더 안정적으로 앉아있을 수 있도록.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신임 회장을 환영한다는 뜻을 보냈다.윤설웅이 걸어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회사에 온 것도 그리고 회의에 참석하는 것도 다 처음이 아니지만 이런 신분으로 여기에 서 있는 건 처음입니다. 앞으로 대윤의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설웅아, 자기소개는 됐어. 다 아는 사이니까. 그럼, 지금부터 두 번째 일을 발표하겠습니다. 최근 회사에서 새 프로젝트를 개발할 계획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개발되면 회사에 아주 큰 이득이 될 겁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윤설웅이 여러분께 설명해 드릴 겁니다."윤백건 옆에 앉아 있던 윤설웅이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USB를 비서에게 건네며 컴퓨터에 연결하게 했다.화면의 내용을 확인한 사람들이 모두 당황했다."목조?!"이건 전혀 손을 댄 적 없던 분야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과연 이득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네, 바로 목조입니다!"윤설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러분의 고려를 잘 알고 있어요. 필경 우리 회사에서 처음 접촉하는 프로젝트이니깐요."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일어서서 계속 말했다."사실 해본 적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프로젝트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에 그저 시도만 했을 뿐이죠.""몇 개월 전, 적합한 목재를 찾기 위해서 진해랑 열대 지역에 갔었습니다. 공급업자랑 상담도 나눠봤고 시장에 대해 조사도 했습니다. 이 분야를 주의하고 발을 디딘 사람이 적어서 아주 큰 잠재력이 있다고 봅니다.""목각은 예술품이기에 소장 가치가 아주 높습니다. 많
병원에 있던 윤중성은 자기가 이런 방식으로 다시 큰형과 만나게 될 줄 생각 못 했다. 한순간 만감이 교차했다."형님, 저……"그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요 며칠 일어난 일들을 어느 정도 들었다. 처음엔 충격이었고 그러다가 점점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많은 일들을 정리했다.몇 개월 전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니, 마치 꿈만 같았다. 모든 걸 손에 쥐게 된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은 이미 모든 걸 파악하고 있었다.결국 이런 결말로 끝나다니."몸은 좀 어때?"윤백건이 의자를 끌어다가 그의 앞에 앉으며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뭘 어떻겠어요. 앞으론 이렇게 살수 밖에요."그가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안 본 사이 그는 폭삭 늙은 것 같았다."형님, 이렇게 된 이상 하나만 부탁할게요. 제가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형님한테도 미안하다는 걸 알아요. 그래도 형제 사이를 봐서, 그리고 지금 제 처지를 봐서 허락해 주셨으면 해요.""네 그 아들 일이야?"윤백건이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윤중성이 고개를 끄덕였다."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어서 제일 좋은 걸 다 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헛수고 될 줄 생각 못 했죠. 고은과 소겸이한텐 많이 미안해요. 몇 년 동안 아무 신분 없이 제 곁에 있었으니까. 소겸이는 어릴 적부터 온전한 가정이 없었어요. 지금은 또……."윤소겸은 거짓 신고와 허위 진술로 체포되었다.한바탕 난리 친 결과, 딸과 아들이 모두 감옥에 가게 되고 말았다. 요영은 그를 무시했고 진고은은 난리를 몇 번 치더니 울면서 떠났다.지금 그를 돌보는 건 간호사뿐이었다. 만약 돈이 없고 윤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이 안 갔다."중성아!"윤백건이 그의 이름을 한 번 부르더니 한숨을 쉬었다."설아를 생각한 적은 없어?""네?"윤중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아들을 아끼는 건 이해해. 하지만 설아도 네 딸이잖아. 설아를 위해서 고려한 적은 있어?""……."그가 이마를 찌푸렸다. 윤백건이 무슨 뜻인지
윤설아는 그를 위협하기까지 했다. 어떤 자식이 자기 아버지한테 그러겠는가.그러자 윤백건이 고개를 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설아가 왜 그랬는지, 왜 이런 야심을 갖게 됐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그리고 설아가 회사에 있을 때 능력이 어땠는지 너도 봤잖아.""설아의 야심은 욕심이 많아서 그런 거겠죠. 제가 그렇게 많은 걸 줬는데. 그리고 만약 소겸이가 회사를 물려받게 되면 윤 씨가 그의 가장 큰 후원이 될 거라고 그랬는데도 만족하지 못하고……."여기까지 들은 윤백건이 갑자기 웃었다."이봐. 넌 아직도 이해 못 했어!""그렇게 많이 줬다고 생각하면 왜 바람피워서 난 아들한테 이 모든 걸 물려받게 해? 설아도 사실 그럴 능력이 있을 거란 생각 안 해봤어?""내가 입원하는 동안 너희가 소란 피운 걸 알면서도 모른척했어. 왜?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지켜보기 위해서. 네 아들은 설아보다 능력이 없어. 프로젝트 하나도 제대로 못 하고 심지어 몇 번이나 함정에 빠졌지. 만약 회사가 이런 사람 손에 넘겨진다면 결과가 어떨 거 같아?"윤중성이 이걸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냥 봤는데도 못 본 체 눈 감았을 뿐이었다.뭐 어쩌겠는가? 그의 아들은 하나뿐이고 윤소겸이 아니며 누구에게 넘겨주겠는가?"그건…… 소겸이가 경험이 없었을 뿐이에요. 그 계기로 성장했을 거라 믿어요. 형님, 소겸이한테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세요! 아직 이렇게 젊은데 전과가 있으면 앞으로 일자리 찾기도 힘들 거예요. 대윤에서 자리 하나만 마련해 주면 알아서 배울 거예요. 소겸이는 똑똑해서 문제없어요.""중성아, 어떻게 아직까지 걔 생각만 하니?"윤백건이 한 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한 잔 따랐다."네가 딸보다 아들을 더 중시하는 거 알아. 하지만 이렇게까지 편애할 줄 몰랐어. 설아는 왜 안 되는 건데? 아들은 배울 수 있다고 하면서 왜 설아한테는 기회를 안 주는 건데?""설아는 여자잖아요. 언젠간 시집갈 거라고요!"윤중성이 중얼거렸다."지금이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그
"형님, 제가 틀렸다고 칩시다. 그럼 소겸이랑…… 그리고…… 설아, 절 대신해서 보살펴 줄 수 없나요?"그가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말했다.지금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윤백건을 부탁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었다. 필경 한 가족인데 몇 년간의 정을 봐서라도 너무 냉정하지 말았으면 했다."게네들이 나오면 그때 말하자고. 아무래도 윤 씨 후손인데. 하지만…… 앞으로 회사 일은 설웅이가 맡을 거야. 난 회사의 인사변동에 끼어들지도 않을 거고. 설웅이 외에 인사부도 규정에 따라 일을 처리할 거야. 다만 그들이 굶지 않게 사는 건 내가 보장하지."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만약 또다시 편 가르게 내버려 둔다면 대윤은 언젠간 망하게 될 테니까.윤중성은 시선을 내리고 속으로 실망했다. 다시 회사에 들어가면 전처럼 높은 자리에 앉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부장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결정권은 지금 윤설웅 손에 쥐어져 있고 그의 형도 이렇게 말했으니 더 이상 의논할 여지가 없었다."좋아요. 저도 더는 뭐라 안 할게요!"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또 뭔가 생각 난 듯 말했다."참, 형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어떻게 이런 계획을 생각하신 거예요? 형님이 입원하기 전에는 다들 얌전하게 있었는데.""얌전하게 있어?"윤백건이 냉소를 지으며 그를 흘겨보았다."네가 리베이트를 받아먹은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회사의 프로젝트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겼는지도 다 알고 있어. 네가 재료 공급업체를 바꾼 것도 물론 알고 있고.""전……."그는 큰형이 모든 일을 알고 있을 줄 생각 못했다. 그렇다면 평소에 그저 모른척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한 번도 묻지 않길래 그는 모르는 줄 알았다.전에 있던 불만도 그의 말을 듣고 사라지고 말았다."그랬구나!""얌전히 치료나 받아. 난……."이때 병실의 문이 열렸다. 요영은 윤백건을 보고 잠시 당황했다. 그리고 자신의 잔머리를 정리하는 척하며 어색함을 감추었다."형님, 오셨어요.""응."윤백건도 그녀가 난
윤중성이 사인할 리가 없었다. 그가 서류를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안 해요! 사인 안 할 거예요!""맘대로 하세요. 사인 안 하면 고소하거나 한동안 별거하면 되니까요. 아무튼 전 꼭 이혼해야겠어요. 더 이상 의미 없어요, 중성 씨.""의미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저희가 결혼한 지 몇 년인데 지금 제가 이런 꼴 되니까, 초라해지니까, 이혼하려는 거예요?"윤중성이 자기 다리를 치며 화를 냈다. 그의 다리는 이미 감각을 잃었다."이것 때문이 아니란 거 알잖아요. 그래요. 다들 제가 재벌 집에 들어왔다고 부러워하지만, 당신도 잘 알잖아요. 당신이 저한테 뭘 해줬고 또 제가 이 집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그런데 당신은 바람이나 피고 그 아이를 집에까지 데려왔어요. 제 생각은 안 해봤어요? 제 심정을 고려한 적 있냐고요? 단 한 번도 이혼을 생각한 적 없다고 말할 수 있어요?"그녀의 물음에 윤중성의 말문이 막혔다.생각해 봤었다. 당연히 그녀와 이혼할까 고민해 봤다. 매번 진고은의 부드러운 속사임에 넘어갈 때마다 이혼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혼하면 문제 될 게 너무 많았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래서 이대로 지내기로 했다. 두 여자를 달래면서 자기는 즐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점에 요영이 이혼하겠다고 할 줄 생각 못했다."아무튼 전 이혼 안 해요."그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옆에 서 있는 윤백건을 바라보았다."형님도 말려보세요. 정말 무슨 미친 짓인지.""요영아……."윤백건이 윤중성을 한번 보고 또 요영을 한번 보았다."형님, 말리지 마세요."요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말하고 싶은 건, 만약 결정을 내렸으면 그렇게 해."그가 이렇게 말할 거라 생각 못 한 윤중성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형님, 무슨 말이세요? 미쳤어요? 지금 저랑 이혼하라고 부추기는 거예요?""중성아, 내가 그랬지. 넌 아직 이해 못 했다고. 네가 네 아내랑 아이, 그리고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적이나 있어?""이런 소리
아들과 딸이 모두 감옥에 가게 되자 그녀도 너무 큰 타격을 받았다. 윤 씨의 가업이 자기 자식의 것이 될 줄 알고 애써서 공들인 반평생이 물거품으로 될 줄 몰랐다.홀몸이 된 그녀는 아무것에도 흥미를 갖지 못했다. 몇 년이나 다투며 조심스럽게 살아온 게 무엇 때문이고 왜 그랬는지.노형원은 이미 그녀가 알던 아들이 아니었다. 너무 극단적이어서 심지어 친동생까지 가만두지 않았다. 그리고 설아는…… 그녀와 만나는 걸 거부했다.그녀는 엄마로서 실패했고 아내로서도 실패했다.윤중성이 진고은과 바람을 피우고 아들까지 낳게 내버려 뒀다. 심지어 그가 윤소겸을 집으로 데려와 가업을 물려줄 거라고 할 때 그녀는 그저 아내의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부질없었다. 모든 게 다 부질없었다. 결국엔 다 헛수고일 뿐이었다."무슨 사심을 품었든 네가 형수를 돌본 건 사실이야. 윤 씨는 네 집이야. 설령……."어두운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윤중성을 한번 보더니 그가 계속 말했다."설령 중성이랑 이혼했다 해도 넌 이 가족의 일원이야.""감사해요, 형님!"요영이 고마워서 눈물이 글썽했다.윤백건은 자기 동생을 보며 천천히 한숨을 내뱉었다.--한소은은 요즘 모든 일이 잘 풀렸다.유란과의 소통이 잘 됐고 두 브랜드의 합작 기사도 나왔다. 그러자 업계에서 찬사가 가득했고 조향 산업협회의 조사 결과도 나왔다.하 씨 어르신이 후각을 잃은 게 증명됐고 시간을 유추하니 꽤 오래된 일이었다.이 소식이 알려지자, 업계 전체, 심지어 다른 업계에서도 크게 놀랐다.한 조향사가, 그것도 업계에서 이름난 조향사가 향기와 악취를 구분해 내지 못하는 데 무슨 자격으로 심사위원을 하고 무슨 자격으로 평판을 내리며 무슨 자격으로 그 자리에 앉아있겠는가.전에 그의 평가를 받았던 선수들도 모두 나서서 항의했다. 많은 글이 올라오면서 하 씨 어르신은 하룻밤 사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다.정말 탄식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사람들은 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우러러보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