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딸이 모두 감옥에 가게 되자 그녀도 너무 큰 타격을 받았다. 윤 씨의 가업이 자기 자식의 것이 될 줄 알고 애써서 공들인 반평생이 물거품으로 될 줄 몰랐다.홀몸이 된 그녀는 아무것에도 흥미를 갖지 못했다. 몇 년이나 다투며 조심스럽게 살아온 게 무엇 때문이고 왜 그랬는지.노형원은 이미 그녀가 알던 아들이 아니었다. 너무 극단적이어서 심지어 친동생까지 가만두지 않았다. 그리고 설아는…… 그녀와 만나는 걸 거부했다.그녀는 엄마로서 실패했고 아내로서도 실패했다.윤중성이 진고은과 바람을 피우고 아들까지 낳게 내버려 뒀다. 심지어 그가 윤소겸을 집으로 데려와 가업을 물려줄 거라고 할 때 그녀는 그저 아내의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부질없었다. 모든 게 다 부질없었다. 결국엔 다 헛수고일 뿐이었다."무슨 사심을 품었든 네가 형수를 돌본 건 사실이야. 윤 씨는 네 집이야. 설령……."어두운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윤중성을 한번 보더니 그가 계속 말했다."설령 중성이랑 이혼했다 해도 넌 이 가족의 일원이야.""감사해요, 형님!"요영이 고마워서 눈물이 글썽했다.윤백건은 자기 동생을 보며 천천히 한숨을 내뱉었다.--한소은은 요즘 모든 일이 잘 풀렸다.유란과의 소통이 잘 됐고 두 브랜드의 합작 기사도 나왔다. 그러자 업계에서 찬사가 가득했고 조향 산업협회의 조사 결과도 나왔다.하 씨 어르신이 후각을 잃은 게 증명됐고 시간을 유추하니 꽤 오래된 일이었다.이 소식이 알려지자, 업계 전체, 심지어 다른 업계에서도 크게 놀랐다.한 조향사가, 그것도 업계에서 이름난 조향사가 향기와 악취를 구분해 내지 못하는 데 무슨 자격으로 심사위원을 하고 무슨 자격으로 평판을 내리며 무슨 자격으로 그 자리에 앉아있겠는가.전에 그의 평가를 받았던 선수들도 모두 나서서 항의했다. 많은 글이 올라오면서 하 씨 어르신은 하룻밤 사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다.정말 탄식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사람들은 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우러러보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한소은의 이름은 빈번히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갔다. 전에 노형원과 소송을 볼 때보다 더 심했다. 그리고 짜증이 나는 건 자기 이름이 또 노형원과 엮이게 됐다는 거였다.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할 일이 없는 사람이 현재와 과거를 대비하며 감탄한 글을 올린 것뿐이었다.당시 한소은이 타인의 작품을 훔치고 표절했다는 루머 때문에 거짓말쟁이라고 많이 욕먹었는데, 지금 그 모든 일이 우스운 증거가 되었다.노형원은 시원 웨이의 사장에서 사람들의 욕을 먹다가 갑자기 대윤의 신임 회장이 될 뻔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감방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 천지 차이의 변화가 사람들의 흥미를 일으켰다.드라마도 이렇게 못 찍는데 더구나 이건 현실이었다.많은 사람이 이 과정을 봐 왔기에 지금 더 많은 사람이 한소은을 우러러보기 시작했다.그래서 한소은과 노형원, 한소은과 하원진, 한소은과 조향 산업협회, 이런 검색어가 다수를 차지했다.그 인기를 피하고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집에 틀어박혀 쉬게 되었다. 전화도 모두 끊고 그냥 조용하게 지내고 싶었다.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소은한테 조향 산업협회를 관리하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녀가 업계의 내막을 들췄고 혼자의 힘으로 업계의 인식을 뒤엎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소문 속의 한소은은 마치 신화 인물이라도 된 것처럼 들을수록 신기했다.그녀도 어쩔 수가 없었다. 긍정적인 뉴스든 부정적인 뉴스든 다 그녀의 본의가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증서 하나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게 싫어서 그랬는데 협회에서 고소하겠다고, 이 업계에 다시 발을 못들이게 하겠다고 그녀를 몰아세우지 않았다면 그녀도 이 지경까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그렇다고 후회되진 않았다. 하 씨 어르신도 나이를 그만큼 드셨는데 후각이 퇴화하는 건 정상이었다. 더구나 이 직업은 코를 많이 쓰기에 과도 사용과 다른 문제들로 퇴화할 가능성이 있었다.발견 당시에 물러났으면 그만인데 하필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심지어 후배들을 전혀 배려해 주지 않았다.정말 권력과
"어디 그렇게 쉽게 해체되겠어."그녀가 꽃을 다루며 천천히 말했다."협회가 어떻게 발전한 건데 이렇게 쉽게 무너질 리가. 어느 한 사람 때문에 존재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느 한 사람 때문에 사라지지도 않아. 난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고."따지고 보면 그녀는 그저 도화선에 불과했다. 조향 산업협회가 이렇게 된 건 모두 자신이 초래한 일이었다.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만약 하 씨 어르신이 사심이 없었다면, 만약 정하진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조급해 하지 않았다면, 만약 협회 전체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기를 쓰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초심을 잃었기에 그녀가 손가락을 까닥하니 무너진 것이었다.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녀 덕분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그럼…… 지금 어떻게 해?""대꾸하지 말고 그냥 얌전히 있으면 돼. 이것도 잠시일 뿐이야. 진심인지 악의를 품은 건지 어떻게 알아?"튀어나온 가지를 자르고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생각해 봐. 만약 정말 그 자리에 앉게 되면 얼마나 많은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지. 난 그럴 그릇이 안 돼. 그럴 능력도 없고."그녀는 그저 향수 만드는 데만 집중하고 싶었다. 회사 관리하는 경험이 없어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더러 회장 자리에 오르라는 사람도 어쩌면 한순간의 생각일 뿐, 그저 맹목적인 숭배에 눈이 먼 것뿐이었다. 사실 그사이에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이 일이 잠잠해지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것이다. 한소은과 실력이 비슷한 조향사는 몇 없겠지만 그녀보다 관리를 잘하고 일 처리를 잘하는 사람은 아주 많을 것이다."어쨌든 난 조향 산업협회에 안 들어갈 거야."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부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그녀와 김서진의 사이가 공개되고 결혼 준비를 하면서 그가 집에 가사 도우미를 몇 명 들였다. 두 사람이 자주 집에 있다 보니 집안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그리고 도우미들은 모두 한소은을 부인이라
"그냥 내쫓으세요!"그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그녀도 김서진이 어쩌면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대놓고 사람을 쫓아내려고 할 줄 예상 못했다."하지만…….""아직 들여보내지 않았다면 그냥 가게 하세요. 만나지 말고.""하지만 도우미 말로는 어쩌면 축하해 주려고 선물까지 들고 왔다는데."그녀는 김서진이 그의 고모에 대한 적의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축하는 무슨. 분명 좋은 의도가 아닐 거예요!"김서진이 코웃음을 쳤다."그냥 내버려 두세요. 도우미한테 몸이 불편해서 이미 쉬고 있다고 다음에 오라고 하세요.""네, 알겠어요."그가 이렇게 말했으니, 그만의 도리가 있겠지 싶어 한소은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렇게 할게요?""네."전화를 끊은 한소은이 도우미더러 자기가 아파서 약 먹고 쉬고 있으니, 다음에 오라고 전했다. 도우미는 이해가 안 갔지만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이 장면을 본 오이연도 이해가 안 갔다."정말 친고모 맞아? 들어오지도 못하게 그냥 내보내라니!"지금 생각해 보니 서로 안 지도 오래됐는데 한 번도 김서진의 친척을 만난 적 없었던 것 같았다. 그가 김씨 가문의 후손이 아니었다면 아마 고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나도 잘 몰라. 그냥 가족들이랑 사이가 안 좋은 거 같아."한소은이 어깨를 으쓱하며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도 김서진이 시켜서 그런 거니까.그런 복잡한 가족이랑 만나지 않아도 되니 그녀로서는 좋았다. 차씨 집안의 일 때문에 그녀는 이미 트라우마가 생겼다."쯧쯧, 역시 재벌 집의 물이 깊어!"어차피 할 일도 없기에 이연이는 자리에 앉아 신나게 과일을 먹었다."근데 난 지금 이대로도 좋은 것 같아. 동서 갈등 같은 거 신경 안 써도 되고. 그런 게 좀 귀찮잖아.""너도 걱정할 필요 없잖아."한소은이 그녀를 흘겨보았다."나?"이연이가 고개를 들며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서한은 고아니까. 김서진 빼고 다 사업파트너잖아. 너도 이런 복잡한 상황이 없을 거라고."
한소은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김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고모님이 꼭 만나야 가겠다고 그러시는데요?"그녀도 일일이 일러바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복잡한 친척 관계에 대응하는 게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김서진이 만나지 말라고 했기에 그저 그의 말을 따랐을 뿐이고 그만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그리고 매번 가족의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이었고 그의 마음속에 숨겨진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그냥 모른척해요. 기다리겠다면 그냥 기다리게 내버려 둬요. 어차피 할 일도 없을 테니까!""네, 알겠어요."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연이가 옆에 있으니까 심심하진 않을 거예요. 맘 편히 일하세요. 어쩌면 있다가 혼자 갈지도 모르죠.""알았어요!"김서진이 대답했다.그의 말투가 좋지 않자, 한소은이 웃으며 혀를 찼다."우리 서진 씨 착하죠? 그러니까 말 들어요."전화 양쪽에서 숨을 한 모금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김서진은 한소은이 이런 말을 할 거라 예상 못 했다. 그는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도 싶었다. 한편 이연은 속으로 감탄했다.'정말 전화 한 통도 이렇게 알콩달콩하다니, 내가 옆에 있는 걸 잊었나?'"제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요!"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그의 기분은 좋아 진듯했다."대단하다! 전에는 분명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이연이가 감탄했다.한소은은 늘 일이 일 순위였고 노형원과 연애할 때도 이러지 않았다. 한소은은 한때 자신이 아주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뿐이었다.지금은 그녀도 아주 자연스럽게 김서진이랑 닭살 돋는 말들을 하고 스킨십도 자주 했다. 이건 다 그녀가 진심으로 하고 싶어서 한 행동들이었다.아마 이게 바로 맞는 사람과 하는 달콤한 사랑이겠지.한편 김지영은 차 안에 앉아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오늘 이 문이 열리지 안
마음먹고 기다렸지만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사람을 짜증 나게 했다. 그녀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것도 오랜만이었다.김지영의 짜증이 하계에 다다를 때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순간 기분이 풀렸다."서진아!""고모가 저희 집에 오셨다고 들었어요."김서진이 차갑게 말했다."오기 전에 미리 말씀하시지. 준비라도 하게요.""준비는 무슨. 다 한 가족인데. 나도 지나가는 길에 마침 들른 거야."그녀가 웃으며 말했다."아쉽게도 제가 마침 집에 없어서요."그가 말했다."이만 돌아가시는 게 어때요? 시간 있으면 제가 본가로 돌아갈게요.""괜찮아. 네가 집에 없어도 조카며느리가 있잖아! 똑같아, 똑같아."그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근데 서진아, 네 부인이 너무 오만한 게 아닌가 싶어. 내가 문을 두 번이나 두드렸는데 한 번도 안 열어주고 밖에서 기다리게 하네.""뭐 젊은 사람이니까 성격이 좀 있을 수 있어. 오만한 것도 당연하고. 고모는 다 이해해. 여기서 천천히 기다릴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일해.""그래요? 저희 집 도우미가 제 아내의 몸이 안 좋아서 쉬고 있다고 안 그랬나요?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못 들으신 거예요, 아니면 못 알아들으신 거예요?"그녀의 뜻은 명백했다. 한소은이 버릇없다고 김서진에게 이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김서진이 도리어 자기 보고 뭐라 할 줄 생각 못했을 것이다."어머? 그래? 그럼 꼭 들어가 봐야겠네. 조카며느리가 아프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이야? 아니면 내가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라도 한번 할까?"그녀가 대문 쪽을 바라보며 머리를 굴렸다. 이 이유가 정말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차에서 내린 김지영은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남자들은 참 섬세하지 못해. 아프다는 게 어디 작은 일이야? 내가 병원에 한 번 데려가 볼게. 만약 무슨 일 있으면 너한테 전화할게.""괜찮아요. 이미 의사를 불러서 검사했으니까. 남의 방해 없이 며칠 쉬면 나아질 거예요."김서진이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러자 문 앞에
김지영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문을 두드리려 하자 갑자기 울리는 경적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고모도 참 남의 충고를 안 들으시네요."김서진이 창문에서 머리를 내밀며 차갑게 말했다."……."'방금 전만 해도 통화 중이었는데 언제 돌아온 거지? 그러니까 통화했을 때 이미 여기로 오는 길이었고 날 보면서 말했다 이거야? 아내를 끔찍이도 아끼네. 출근 중에도 이렇게 부리나케 돌아오다니.'그녀가 속으로 냉소하며 그를 반겼다."난 그저 조카며느리가 걱정돼서! 마침 잘 왔네. 같이 들어가자."'잘 왔어. 그럼 나도 같이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소은이가 불편해서 손님을 안 들린다고 했잖아요? 왜 자꾸 강요하세요?""……."김지영이 이마를 찌푸렸다."네 고모인데 집안에도 못 들어가?""네."그가 자신의 체면을 한치도 고려하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할 줄 생각 못했다.김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단단히 화가 났다."뭐야?""그만 하세요, 고모! 서로 다 잘 알잖아요. 꼭 털어놓고 말해야 해요? 고모가 어른이라서 몇 번이나 좋게 말했어요. 몇 년 동안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잘 살았잖아요. 무슨 속셈으로 오늘 갑자기 찾아왔는지 서로 다 알고 있으니까 더 이상 연기하지 마세요."원래 좋게 말하려고 했는데 김서진의 무례와 무정한 태도에 김지영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서진아, 똑똑히 기억해! 어쨌든 난 네 고모야. 네 할머니도 그렇고. 넌 어쩔 수 없는 김 씨의 후손이라고. 이 건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안 돼.""지금 컸다고 우리가 널 간섭 못하는 건 아니야.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 기억하지. 효자인 네 아버지 말도 안 들을 거야?"그녀가 어른 행세를 하며 당당하게 서서 김서진에게 호통을 쳤다.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김서진의 표정은 점점 차가워졌고 주위의 공기마저 얼려 버릴 기세였다."말 다 하셨죠?""…….""다하셨으면 그만 꺼지세요!
"……."그의 이상을 눈치챈 한소은이 당황하더니 이내 힘을 풀고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옆에 있던 오이연도 너무 놀라서 얼어버렸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가 여기 있으며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손을 뻗어 자기 물건을 가지고 한소은에게 가겠다는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방안에 둘만 남게 됐지만 한소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김서진이 자신을 안게 내버려 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조금 진정된 듯했다.그가 천천히 손을 놓고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아팠어요?"아프진 않았지만, 그의 머리가 어깨를 누르고 있어서 조금 시큰했다."아니요."한소은이 어깨를 움직이면서 웃으며 말했다."왜 이 시간에 돌아온 거예요? 제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문을 열지도 그렇다고 나가지도 않을 건데. 더구나 이연이 옆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당신은 몰라요."그가 말했다."그들이 얼마나 비열한 사람인지, 당신은 몰라요.""……."확실히 잘 알지 못했다. 김서진이 말한 그들이 누구인지. 밖엔 그저 김지영밖에 없었는데 혹시 김씨 가문을 말하는 건가?"아무리 비겁해도 문만 닫으면 다 바깥사람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어요."한소은이 그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녀의 손은 크지 않았지만, 그에게 많은 힘을 줬다. 따듯한 온기가 그녀의 손에서 전해져 왔다. 전에는 그런 환경 속에서 혼자 몸부림치며 자라왔지만, 지금은 한소은이 곁에 있었다.그가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긴 숨을 내쉬었다."미안해요. 감정 통제가 안 됐어요."한소은이 얼굴을 그의 가슴에 붙였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감정을 억제할 필요도 없고요. 제 앞에선 숨기지 않아도 돼요. 하고 싶은 말 하고 울고 싶으면 우세요.""울긴 누가 울어요. 당신이나 울지!"그가 그녀의 코를 톡 쳤다. 한소은의 말에 김서진의 기분이 조금 풀렸다.그리고 그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