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은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김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고모님이 꼭 만나야 가겠다고 그러시는데요?"그녀도 일일이 일러바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복잡한 친척 관계에 대응하는 게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김서진이 만나지 말라고 했기에 그저 그의 말을 따랐을 뿐이고 그만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그리고 매번 가족의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이었고 그의 마음속에 숨겨진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그냥 모른척해요. 기다리겠다면 그냥 기다리게 내버려 둬요. 어차피 할 일도 없을 테니까!""네, 알겠어요."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연이가 옆에 있으니까 심심하진 않을 거예요. 맘 편히 일하세요. 어쩌면 있다가 혼자 갈지도 모르죠.""알았어요!"김서진이 대답했다.그의 말투가 좋지 않자, 한소은이 웃으며 혀를 찼다."우리 서진 씨 착하죠? 그러니까 말 들어요."전화 양쪽에서 숨을 한 모금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김서진은 한소은이 이런 말을 할 거라 예상 못 했다. 그는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도 싶었다. 한편 이연은 속으로 감탄했다.'정말 전화 한 통도 이렇게 알콩달콩하다니, 내가 옆에 있는 걸 잊었나?'"제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요!"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그의 기분은 좋아 진듯했다."대단하다! 전에는 분명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이연이가 감탄했다.한소은은 늘 일이 일 순위였고 노형원과 연애할 때도 이러지 않았다. 한소은은 한때 자신이 아주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뿐이었다.지금은 그녀도 아주 자연스럽게 김서진이랑 닭살 돋는 말들을 하고 스킨십도 자주 했다. 이건 다 그녀가 진심으로 하고 싶어서 한 행동들이었다.아마 이게 바로 맞는 사람과 하는 달콤한 사랑이겠지.한편 김지영은 차 안에 앉아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오늘 이 문이 열리지 안
마음먹고 기다렸지만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사람을 짜증 나게 했다. 그녀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것도 오랜만이었다.김지영의 짜증이 하계에 다다를 때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순간 기분이 풀렸다."서진아!""고모가 저희 집에 오셨다고 들었어요."김서진이 차갑게 말했다."오기 전에 미리 말씀하시지. 준비라도 하게요.""준비는 무슨. 다 한 가족인데. 나도 지나가는 길에 마침 들른 거야."그녀가 웃으며 말했다."아쉽게도 제가 마침 집에 없어서요."그가 말했다."이만 돌아가시는 게 어때요? 시간 있으면 제가 본가로 돌아갈게요.""괜찮아. 네가 집에 없어도 조카며느리가 있잖아! 똑같아, 똑같아."그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근데 서진아, 네 부인이 너무 오만한 게 아닌가 싶어. 내가 문을 두 번이나 두드렸는데 한 번도 안 열어주고 밖에서 기다리게 하네.""뭐 젊은 사람이니까 성격이 좀 있을 수 있어. 오만한 것도 당연하고. 고모는 다 이해해. 여기서 천천히 기다릴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일해.""그래요? 저희 집 도우미가 제 아내의 몸이 안 좋아서 쉬고 있다고 안 그랬나요?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못 들으신 거예요, 아니면 못 알아들으신 거예요?"그녀의 뜻은 명백했다. 한소은이 버릇없다고 김서진에게 이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김서진이 도리어 자기 보고 뭐라 할 줄 생각 못했을 것이다."어머? 그래? 그럼 꼭 들어가 봐야겠네. 조카며느리가 아프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이야? 아니면 내가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라도 한번 할까?"그녀가 대문 쪽을 바라보며 머리를 굴렸다. 이 이유가 정말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차에서 내린 김지영은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남자들은 참 섬세하지 못해. 아프다는 게 어디 작은 일이야? 내가 병원에 한 번 데려가 볼게. 만약 무슨 일 있으면 너한테 전화할게.""괜찮아요. 이미 의사를 불러서 검사했으니까. 남의 방해 없이 며칠 쉬면 나아질 거예요."김서진이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러자 문 앞에
김지영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문을 두드리려 하자 갑자기 울리는 경적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고모도 참 남의 충고를 안 들으시네요."김서진이 창문에서 머리를 내밀며 차갑게 말했다."……."'방금 전만 해도 통화 중이었는데 언제 돌아온 거지? 그러니까 통화했을 때 이미 여기로 오는 길이었고 날 보면서 말했다 이거야? 아내를 끔찍이도 아끼네. 출근 중에도 이렇게 부리나케 돌아오다니.'그녀가 속으로 냉소하며 그를 반겼다."난 그저 조카며느리가 걱정돼서! 마침 잘 왔네. 같이 들어가자."'잘 왔어. 그럼 나도 같이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소은이가 불편해서 손님을 안 들린다고 했잖아요? 왜 자꾸 강요하세요?""……."김지영이 이마를 찌푸렸다."네 고모인데 집안에도 못 들어가?""네."그가 자신의 체면을 한치도 고려하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할 줄 생각 못했다.김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단단히 화가 났다."뭐야?""그만 하세요, 고모! 서로 다 잘 알잖아요. 꼭 털어놓고 말해야 해요? 고모가 어른이라서 몇 번이나 좋게 말했어요. 몇 년 동안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잘 살았잖아요. 무슨 속셈으로 오늘 갑자기 찾아왔는지 서로 다 알고 있으니까 더 이상 연기하지 마세요."원래 좋게 말하려고 했는데 김서진의 무례와 무정한 태도에 김지영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서진아, 똑똑히 기억해! 어쨌든 난 네 고모야. 네 할머니도 그렇고. 넌 어쩔 수 없는 김 씨의 후손이라고. 이 건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안 돼.""지금 컸다고 우리가 널 간섭 못하는 건 아니야.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 기억하지. 효자인 네 아버지 말도 안 들을 거야?"그녀가 어른 행세를 하며 당당하게 서서 김서진에게 호통을 쳤다.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김서진의 표정은 점점 차가워졌고 주위의 공기마저 얼려 버릴 기세였다."말 다 하셨죠?""…….""다하셨으면 그만 꺼지세요!
"……."그의 이상을 눈치챈 한소은이 당황하더니 이내 힘을 풀고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옆에 있던 오이연도 너무 놀라서 얼어버렸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가 여기 있으며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손을 뻗어 자기 물건을 가지고 한소은에게 가겠다는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방안에 둘만 남게 됐지만 한소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김서진이 자신을 안게 내버려 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조금 진정된 듯했다.그가 천천히 손을 놓고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아팠어요?"아프진 않았지만, 그의 머리가 어깨를 누르고 있어서 조금 시큰했다."아니요."한소은이 어깨를 움직이면서 웃으며 말했다."왜 이 시간에 돌아온 거예요? 제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문을 열지도 그렇다고 나가지도 않을 건데. 더구나 이연이 옆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당신은 몰라요."그가 말했다."그들이 얼마나 비열한 사람인지, 당신은 몰라요.""……."확실히 잘 알지 못했다. 김서진이 말한 그들이 누구인지. 밖엔 그저 김지영밖에 없었는데 혹시 김씨 가문을 말하는 건가?"아무리 비겁해도 문만 닫으면 다 바깥사람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어요."한소은이 그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녀의 손은 크지 않았지만, 그에게 많은 힘을 줬다. 따듯한 온기가 그녀의 손에서 전해져 왔다. 전에는 그런 환경 속에서 혼자 몸부림치며 자라왔지만, 지금은 한소은이 곁에 있었다.그가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긴 숨을 내쉬었다."미안해요. 감정 통제가 안 됐어요."한소은이 얼굴을 그의 가슴에 붙였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감정을 억제할 필요도 없고요. 제 앞에선 숨기지 않아도 돼요. 하고 싶은 말 하고 울고 싶으면 우세요.""울긴 누가 울어요. 당신이나 울지!"그가 그녀의 코를 톡 쳤다. 한소은의 말에 김서진의 기분이 조금 풀렸다.그리고 그
두 사람은 잠시 장난치다가 결국엔 숨을 헐떡이며 떨어졌다. 한소은의 입술을 빨갛게 부어있었다. 그녀는 몸부림치며 김서진의 몸에서 일어난 후 구석에 앉았다.'더 이상 같이 앉으면 안 되겠어. 이 미친놈, 이러다간 날 잡아먹을 기세야.'"일로 와요!"그가 자기의 다리를 치며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욕구 불만으로 가득했다."싫어요! 좀 쉬게 해줘요!"그녀가 조금 구겨진 옷을 정리하며 말했다. 기분이 안 좋다는 핑계로 보상받으려는 게 아닌지 의심이 갔다."여기 와서 쉬어요!"그가 다시 자기 다리를 치며 견고하게 말했다."김서진!"그녀가 원망하는 말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김서진은 그녀가 올 기미가 없자 자리에서 일어났다."당신이 안 오면 제가 갈 거예요…….""스톱!"그녀가 그만하라는 손짓을 보내며 말을 돌렸다."근데 고모는 보낸 거예요?"역시 고모 얘기가 나오자, 그의 반응이 잠시 굳어버리더니 더 이상 장난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앉으며 대답했다."네.""사실 저번에 한번 봤어요. 사이가 안 좋다는 걸 느꼈지만 괴물처럼 절 잡아먹진 않을 거예요.""당신은 몰라요!"김서진이 말했다."괴물이 아니지만 괴물보다 더 무서운 존재예요!""……."그의 반응에 한소은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김씨 가문의 사람이 뭘 했길래 그가 이토록 혐오하는지."됐어요. 그들 얘기는 그만하자고요. 이젠 갔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요."한소은이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걸어갔다."모처럼 돌아왔는데 저랑 같이 나가요.""어디 갈 건데요?"김서진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쇼핑하러요. 오랫동안 같이 쇼핑 안 했잖아요. 옷 몇 벌 사고 싶어요."그 말에 김서진이 눈썹을 한번 들어 올렸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옷을 사자고 한 게 신기했다. 향료나 각종 재료만 사고 막는 것과 옷에는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절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도 옷은 입어야죠."그의 눈빛을 읽은 한소은이 말했다."그래요? 사실 안 입어도 전 상관없는데!"
사진 속 두 사람은 서로를 기대며 아주 달콤하게 웃고 있었다. 그들 사이는 아주 친밀해 보였고 그 누구도 둘 사이를 끼어들 수 없을 것만 같았다.그는 이런 느낌이 아주 좋았다. 자기가 그녀의 남자고 그녀는 자기 여자인 것 같았다. 둘을 서로의 것이고 제삼자는 둘 사이에 끼래도 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안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김서진이 고개를 드니 계단에 이상한 차림을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큰 후드 외투에 아래는 헐렁한 긴 바지를 입고 있었고 얼굴을 반쯤이나 가리는 선글라스에 검은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다.'이렇게 가리면 알아보지는 못하겠지만 더 눈에 티는 게 아닌가?'거기에 이 더운 날 이렇게 가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위험인물이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됐었다."이렇게 나갈 거예요?"김서진이 물었다."괜찮아요. 연예인들도 다 이렇게 나가던데요. 파파라치 방지용으로!"그녀가 지퍼를 올리며 의기양양했다.조금 덥긴 하겠지만 방금 거울 속의 자신을 한참 보았다. 자기 자신도 못 알아보는 데 남이면 더욱 못 알아볼 것이다. 이러면 편하게 쇼핑할 수 있을 것 같았다.김서진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기뻐하는 그녀를 보고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다만--한소은이 잊은 게 있었다. 요즘 그녀는 화제 인물이고 기자들이 그녀를 인터뷰하려고 밖에서 지키고 있지만 그녀보다 옆에 서 있는 김서진이 더 주목받는다는 것을!김서진은 자체 발광하는 체질이어서 그와 가까이 다니는 것만으로도 세기의 스캔들일 것이다."가요!"그녀가 그와 팔짱을 끼며 흥미진진하게 말했다.그러자 김서진이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자기 아내를 바라보았다.'정말 귀여워 죽겠어!'--"뭐야?!"김 씨 저택에서 김서진의 할머니가 울부짖었다."그 여자가 널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고?!""네."김지영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불쌍한 척하며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제가 선물까지 들고 갔어요. 서진이가 아무리 그래도 제 조카인데 고모로서 조카의 결혼을
"누가 알겠어요. 차 씨도 명문이어서 저희랑 맞먹는 줄 알았는데……."김지영이 한숨을 쉬며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척했다."차 씨가 무슨 명문이라고."체구가 마르고 얼굴에 옅은 흉터가 있는 남자가 콧방귀를 끼며 들어왔다."당시 차 씨네 집안의 명성이 자자했던 것도 고대 무술의 후계자들이라서 그랬어요.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가문에서 훌륭한 인재가 나온 걸 보셨어요? 전에는 괜찮았지만 차 씨 그 늙은이부터는 이미 몰락됐어요.""그 차 씨 늙은이도 겁쟁이일 뿐이에요. 제자는 많이 가르쳤지만, 맨날 숨어서 무슨 시비를 일으키지 않을 거라며, 그저 단련만 할 거라며 그러는데 분명 실력이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허세 부리기는. 지금은 더욱 볼 게 없고요."그가 의자 옆에 천천히 앉으며 말했다."그 차성재도 똑같아요. 다 겁쟁이죠. 차성호라도 뭔가 해낼 줄 알았는데 결국엔 그릇이 안 될 사람이었어요. 차 씨는 지금 망했다고 보시면 돼요. 그런 가문이 어떻게 우리 김 씨랑 비교되겠어요!""그래요. 맞는 말이에요. 전 처음부터 그 계집이 맘에 안 들었어요. 걔가 어릴 적 우리 집에 놀러 왔었던 걸 기억해요. 그때는 괜찮았지만, 기가 너무 세서 부모님도 오래 못 살고 죽었잖아요. 그 뒤로는 소식 못 들었는데요 몇 년에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왔어요."김서진의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소은에 대한 인상이 어렴풋이 있었다.지금 자기 손자와 만나고 있다지만 할머니는 그녀가 맘에 들지 않아 사진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한소은에 대한 인상은 그저 어릴 적 그때의 기억뿐이었다."요 몇 년 정말 한바탕 소란을 피웠어요. 소송에도 얽매이고 또 무슨 삼각관계인가 뭔가 하면서. 서진이가 왜 이런 여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저희 김씨 가문의 며느리라면 어떤 명문의 아가씨를 못 찾겠어요. 제가 미용실에 갔을 때 친구들이 묻는 데, 너무 부끄러워서 대답도 못 했어요.""뭘 말해? 우리 김 씨가 언제 걔를 받아들였어?"김서진의 할머니가 콧방귀를 끼며 언짢은 말
"취미든 뭐든 일단 잘 감춰놔. 우 씨와 결혼하게 된다면 너한테도 그리고 김 씨 가문한테도 다 좋은 거야. 서진은 그저 네 아버지가 쌓아온 것들을 믿고 이러는 거야. 네가 조금이나마 능력 있었다면 네 아버지가 가업을 그 녀석이 아닌 너에게 물려줬겠지.""그건 아버지가 편애해서 그런 거잖아요! 아버지는 늘 큰형을 더 좋아하셨어요. 덩달아 큰형의 아들도 편애하고요. 누가 회사를 자기 아들이 아닌 손자에게 물려줘요? 이 몇 년 동안 밖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것 때문에 절 비웃는지 아세요?"이 얘길 꺼낼 때마다 김승엽은 화가 났다.이 무리엔 거의 재벌 집 도련님들이었다. 다 가업을 물려받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형제간의 싸움이지 누가 자기처럼 조카와 다투겠는가?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다툴 기회조차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 이미 결단을 내리셨다. 그리고 회사와 모든 산업을 전부 김서진의 손에 넘겨주었다.그가 아무리 불만스럽다고 해도 감히 아버지에게 대들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원래 자기 것이 남의 것으로 되는 걸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 일 때문에 남몰래 웃음거리가 된 적이 많았다."남이 널 비웃는 건 그들이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거야. 그것 때문에 화낼 필요 없어."김서진의 할머니가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내가 몇 번이나 그랬어. 사람은 굴복할 줄 알아야 한다고. 네가 고생을 해봐야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어. 인내심 있게 기다린 덕에 지금 좋은 기회가 왔잖아?""한낱 우 씨 아가씨가 정말 제 소원을 이뤄줄 수 있을 거라고 믿으세요?"김승엽이 코웃음을 쳤다. 그도 기대는 하지만 큰 희망은 품지 않았다."엄마는 김씨 가문의 어르신이에요. 할머니의 말조차 듣지 않는데 걔가 순순히 회사를 내놓겠어요?"김서진의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맞아. 걔가 포기하게 기다리는 거야. 우씨 가문을 얕보지 마. 이 우씨 가문이야말로 진정한 고대 무술 가문이야. 그들은 섬에서 은거하고 있지만 그들의 소문은 여전히 자자해.""우 씨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