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엄마를 좋아하는 게 맞지만...“아가, 넌 지금 아픈 거야.”“엄마를 믿어. 네가 무슨 병을 앓든 엄마는 반드시 너를 낫게 할 거야. 예전의 너로 돌려놓을 거야.”...영주시의 어느 병원에서 깨어난 원이림, 머리가 너무 아프고 온 몸이 쑤신다.내가 다쳤나?빌어먹을! 어떤 놈이 나를 이 꼴로 만들었어?그리고 중요한 거래처를 접대하는 자리에서 자기가 만취 상태가 되자 여은진이 호텔 방을 잡아준 기억이 났다.이 여자가 환경을 바꿔 나랑...며칠간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던 터라 그 역시 마음이 동했다.그는 호텔 방에 들어서기 바쁘게 샤워했고 그 후 벨 소리가 울리고 룸서비스가 도착했다.원이림은 모든 것이 생각났다.그 후 윤성아가 호텔 방에 들어왔고 그는 이성을 잃고 윤성아를 덮쳤다.빌어먹을!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지?너무 후회됐다.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이제 무슨 낯으로 윤성아 앞에 나타나겠는가?원이림은 맥이 쭉 빠졌고 갑자기 삶의 희망과 모든 생명력을 잃은 사람처럼 넋을 잃고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었다.하루, 이틀, 어느새 사흗날 저녁이 됐다.“빌어먹을!”원이림은 낮은 소리로 욕했다.그는 무서울 정도로 음울한 눈빛을 하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뭔가 조사하라고 시켰다.얼마 후 전화가 걸려 왔고 조사 결과는 그의 추측과 맞아떨어졌다.화나서 미칠 지경이다.무서울 정도로 안색이 어두워진 원이림은 즉시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병원을 떠났다.그는 직접 여은진의 아파트 앞에 나타났다.벨을 누르자 여은진이 문을 열었다.아파트 문 앞에 나타난 남자를 본 그녀는 어리둥절해했다.“대표님, 무슨...”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이림은 여은진의 목을 졸랐고 눈이 새빨갛게 충혈됐다.“빌어먹을! 네가 감히 나를 모함해?”온몸이 살기와 분노로 가득 찬 그는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하마터면 여은진을 그대로 목 졸라 죽일 뻔했다.“대, 대표님.”여은진은 원이림의 큰 손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얼굴이 빨갛다
그 모습은 마치 이 큰 침대 위에서 여은진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는 것 같았다.“오지 마요.”“싫어요!”여은진은 놀라서 뒤로 물러갔다.“놓아주세요, 제발! 저는 정말 당신을 모함하지 않았어요.”이 순간 악마가 되어버린 남자를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며 그녀는 한없이 울었다.“당신을 좋아하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제발, 놓아주세요…”“복수도 도와줄 필요 없어요. 당신 곁에서 멀리 떠나갈게요. 살려만 주세요. 제발…”여은진은 이 순간 남자 손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원이림은 그녀의 발목을 힘껏 잡아당겨 침대에 쓸어 눕히고 우람진 몸뚱이로 그 위에 올라탔다.이 캄캄한 밤, 여은진은 마치 끝없는 나락과 지옥에 던져진 것 같았다.그녀는 까무러쳤다 깨어났다를 반복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어둠이 걷히고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어떤가? 지옥과 나락에 던져진 그녀는 언제 밝은 빛을 볼 수 있을까?배가 또 아파져 왔다. 너무너무 아프다. 늦어진 생리가 이제 오려는 건가?그녀는 모든 것을 견디며 영혼 없는 낡은 인형처럼 머릿속에서 잡생각을 하고 있었다.날이 점점 더 밝아오고 원이림이 끝내 행동을 멈췄다.그는 온몸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 여은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직접 아파트 위층으로 돌아갔다.…꽈르릉! 하늘을 찢을 듯한 번개와 함께 쩌렁쩌렁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여은진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깥을 내다보았다.그녀는 창백한 얼굴과 공허한 눈빛을 한 채 먹구름에 덮여 당장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꽈르릉! 꽈르릉!연이어 울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콩알만 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여은진은 폭우가 쏟아지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배가 점점 더 아파져 왔고 밑이 빠질 것 같은 아픔과 뒤늦게 찾아온 생리 때문에 여은진은 더 이상 시체처럼 누워있을 수 없었다.그녀는 간신히 일어섰지만 이내 맥없이 다시 쓰러졌다.한참
여은진은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 증오에 찬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난 아직 너한테 복수할 능력이 없어.”“하지만 언제든지 할 거야.”여석진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누나.”그는 어릴 때부터 그녀를 이렇게 불러왔다.차분한 눈빛으로 여은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누나 어젯밤에 기절했어요. 내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임신했다고요!”“그 자식이 이렇게 괴롭힌 거에요?”내가 아끼는 누나를 누구도 괴롭혀서는 안 된다.그는 독기 어린 말투로 말했다.“그 놈을 죽여버릴 거야.”여은진은 어리둥절해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석진을 바라보았다.“뭐라고?”임신이라니! 그럴 수가? 분명 어제 밤 생리도 왔는데...하지만 그게 생리가 아니었다면?여은진은 어제 밤 배가 너무 아프고 출혈량도 생리가 왔을 때와 달리 엄청 많았던 것이 기억났다.설마 정말 임신이란 말인가? 그렇다면...그녀는 평평한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허허! 너무 멍청한 것이 아닌가?생리가 그렇게 늦어졌는데도 임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아이가 없어지다니.여은진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차라리 날 죽여줘.”그녀는 초점을 잃은 까만 눈동자로 여석진을 차갑게 바라보았다.삶의 희망을 잃었고 복수고 뭐고, 그냥 죽고 싶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안 계시고 바보처럼 자기 아이까지 죽게 했다. 죽으면 아버지, 어머니조차 보지도 못한 채로 떠나보내야겠지?여석진은 한심한 듯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이가 아직 살아있으니, 누나도 죽을 필요 없어요.”초점을 잃었던 그녀의 눈동자에 금방 생기가 돌았다.“내 아이가 괜찮다고? 아직 살아있어?”“응.”“그때 많이 위험하긴 했지만 내가 제때에 병원에 데려온 덕분에 아이는 다행히 살아있어요.”여석진은 한 마디 더 보탰다.“이 아이가 누나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요.”어느 한순간 여은진만 무사하다면 그녀 배 속의 아이는 차라리 유산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유산되면 여은진과 그 남자는 더
그는 양도서와 서약서, 그리고 사인펜을 여은진에게 건넸다.“사인해요.”여은진은 놀라운 듯 눈이 휘둥그레져서 앞에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네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수단방법 가리지않고 손에 넣은 주식을 이렇게 쉽게 나한테 준다고?”“그럴 리 없을 것 같은데.”하지만 여은진은 그녀의 사인이 꼭 필요하다는 서약서를 보고는 이내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그녀가 여석진과 결혼해서 여석진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던 것이다.게다가 그녀는 주식을 보유할 뿐 여신그룹의 관리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즉 여신그룹의 실제 권력자가 여석진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허허.”여은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여석진, 넌 진짜 계산에 밝구나.”“나랑 결혼하려고 주식을 주는 거였어. 게다가 여전히 네가 회사와 여씨 가문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어.”여은진이 이렇게 오해하자 여석진은 즉시 해명했다.“누나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우리를 결혼시키는 건 부모님의 마지막 소원이였고 두 분은 오래전부터 이 생각을 갖고 계셨어요.”“그리고 제가 계속 회사 관리에 참여하는 것은 누나가 너무 단순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여유롭게 대처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죠.”“주식은 다 누나 거야.”“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고 단지 너의 일꾼으로 살고 싶은데, 그것도 싫어요?”“꿈도 꾸지 마!”여은진은 차가운 눈초리로 여석진을 쳐다보며 말했다.“우리를 결혼시키는 것이 부모님의 마지막 소원이고 회사도 두 분이 너한테 줬지만, 그때는 두 분이 너의 정체를 몰랐어.”“두 분은 아마 죽을 때까지도 차 사고가 너랑 관련이 있다는 걸 모르셨을 거야.”미간을 찌푸리는 여석진, 그런 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여은진은 말을 이었다.“게다가 난 널 사랑하지 않아.”“나에게 너는 이전에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동생이자 가족이었고 지금은 원수야.”“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너랑 결혼하지 않을 거야.”여석진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서 죽을 것 같았지만 얼굴빛은 하나도 변하지
한편, 원이림은 하루가 지나도록 출근하지 않은 그 여자가 궁금해졌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휴가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어젯밤 애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기를 놓아달라고했다. 비록 그를 좋아했지만, 이제는 안 그러겠다고, 복수를 도와줄 필요도 없고 멀리 떠나겠다고 했다.“빌어먹을!”원이림은 저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나를 모함했는데 어떻게 가만둘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죽을 만큼 힘든 벌을 내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허허, 내가 말했잖아? 네가 나한테 빚진 거라고. 내가 끝났다고 말하기 전까지 너는 영원히 나의 노리개로 살 수밖에 없다고.원이림은 딴사람이 돼버렸다. 지금의 그는 온몸에 독기가 가득하다.그는 퇴근 시간이 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양복 외투를 들고 나갔다. 급히 차에 오른 그는 가속 페달을 밟아 곧바로 아파트로 향했다.그는 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탄 후 여은진이 사는 층수를 눌렀고 조금 뒤 그의 훤칠한 모습이 여은진의 아파트 문 앞에 나타났다.벨을 누르려는 순간 출입문이 약간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문을 잠그지 않다니, 원이림은 문을 열고 들어가 직접 침실로 향했다.침실의 큰 침대 위는 깨끗이 정리할 틈이 없었는지 난잡하게 어질러진 상태였고 침대 위와 바닥에 말라버린 피가 섬뜩하게 남아있었다.원이림은 머릿속이 쿵 하고 울렸다.어떻게 된 거지?설마 그 여자가 다친 건가? 아니면...내가 어젯밤에 너무 험하게 굴어서 그 여자가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건 아니겠지?그 가능성을 생각하자 원이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조금 무서워졌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가슴속부터 순식간에 온몸으로 번지면서 다리 힘이 쫙 풀렸다.“누구세요?”차가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훤칠한 키의 여석진이 살기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허! 원 대표님, 뭘 보고 있어요?”원이림은 미간을 찌푸리며 쌀쌀맞게 말했다.“여긴 뭐 하러 왔어?”여석진은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살기등등해서 다가오더
여석진은 원이림에 대한 여은진의 짝사랑을 다시 한번 언급했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원이림은 듣고 나서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를 향한 여은진의 사랑이 이렇게 깊은 줄을 전혀 몰랐다.19살 때부터 나를 좋아하고 나를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했다고? 줄곧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다고?하지만 그러면 뭘 해? 나에 대한 사랑이 깊다고 나를 모함해도 되는 건 아니다.이때 여석진이 차분한 눈으로 원이림을 보며 갑자기 질문했다.“우리 양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요?”“...”그가 입을 열기 전에 여석진이 말을 이었다.“부모님은 누나에게 마음속에 담고 있는 남자가 있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어요.”“그리고 그 남자가 당신이고 당신은 누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게다가 좋아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왜 상처는 줬어?”“좋아하지 않는데 왜 관계는 가져서 누나의 순결을 빼앗았어요?”“부모님이 모든 걸 알게 되고 당신을 찾아가 결판을 내려 했어요. 남의 귀한 따님을 어떻게 할 건지 따지려 한 거지.”“하지만...”여은진의 부모는 결판을 내려고 원이림을 찾아가는 길에 차 사고가 났다.부모님은 눈을 감을 때까지 그녀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불행하지 않을까, 오로지 딸 걱정뿐이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여신그룹과 여씨 가문의 모든 것, 그리고 소중한 딸까지 여석진에게 부탁했다.“누나는 아직 이 사실을 몰라. 알게 되면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부모님이 자기와 당신 사이 일을 알고 당신을 찾아가 따지려다가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알면, 자기 자신과 당신을 죽도록 미워하게 될 거야. 심지어 평생 자신의 불효를 용서하지 못하겠지.”생각 밖의 진실에 원이림은 충격을 받았다.여석진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며 그런 그를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원이림, 당신이 누나에게 준 것은 고통과 재난과 상처뿐이야.”“끝나게 돼서 다행이고, 오늘부터 당신은 우리 누나와 아무 관계도 없어.”여석진은 사직서를 꺼내 원이림에게 넘겨주었다.“사
고은희와 송아름은 강주혜를 픽업하러 공항에 왔다.잠시 후 강주혜는 한 남자와 팔짱을 낀 채 승객무리를 따라 출구에서 천천히 나왔다.이기적이고 거침없는 강주혜가 이 순간만큼은 여린 여자애로 보였다.고은희를 발견한 강주혜는 그 남자의 팔을 뿌리치면서 말했다.“엄마가 온 것 같은데!”강주혜는 고은희를 향해 달려갔다.강주혜는 생기발랄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엄마!”“그래그래. 얼른 와.”고은희는 강주혜에게 한 여자애를 소개해 줬다.“얘가 바로 내가 저번에 너랑 통화하면서 말했던 오윤미 딸 송아름이야.”강주혜는 시무룩하게 대답하고는 송아름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아~ 네.”그리고 돌아서서 옆에 있던 남자의 팔짱을 다시 끼더니 고은희에게 그 남자를 소개해 줬다.“엄마, 우리 선배야. 예전에도 본 적이 있을 텐데.”“근데 지금은 선배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바로 내 남자 친구야.”강주혜가 팔짱을 끼고 있던 그 남자의 이름은 남궁성우였다.180센티미터를 넘는 훤칠한 키에 안경을 낀 뽀얀 얼굴 그리고 깔끔한 옷차림을 한 남궁성우에게서는 지적인 분위기가 풍겼다.햇빛에 반사되는 렌즈의 무지개색 빛이 남궁성우의 맑고 이해심 깊은 눈동자를 희미하게 가렸다.“어머님, 안녕하세요.”“그래. 안녕!”남궁 가문은 M국 의학계 명문가이다.남궁성우는 남궁 가문의 계승자로서 어릴 적부터 뛰어난 의학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수년간의 부지런한 노력을 끝에 지금의 남궁성우는 존경받는 의사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젊은 의학계에 유망주로 불린다.고은희는 남궁성우가 맘에 들었다.이런 사윗감이 어디 있나 싶을 정도로 자랑스럽고 기뻤다.“그래그래.”“서 있지만 말고 우리어서 집으로 가자.”고은희의 말에 경호원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남궁성우의 트렁크는 경호원에게 넘겨지고 고은희는 강주혜와 남궁성우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한 후 고은희는 송아름더러 강주혜와 남궁성우랑 얘기를 나누게 하고 반대쪽으로 걸어가 강주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궁성우는 심리학을 공부한 적이 있을까? 최면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는 걸까?’송아름은 무척 궁금했다.남궁성우는 무심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릴 때부터 의학에 관련된 거라면 모두 흥미로워 보였고 배워보고 싶었어요.”“물론 심리학도 포함이고요.”송아름은 환한 미소를 짓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 물었다.“그러면 F 국 페르만타운에 엄청 유명한 심리치료사가 있는데 혹시 그분이랑도 친분이 있나요?”남궁성우는 대답했다.“그럼요. 알죠.”남궁성우는 그 심리치료사 어머니의 학생이기도 했고 예전에 함께 최면을 배웠던 경험도 있었다.하지만 그 후 어떤 일로 인해......이 또한 남궁성우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지금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고 그 어떤 일로도 남궁성우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남궁성우가 떠나고 난 몇 년 뒤에 그 심리치료사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한 여자애를 제자로 삼았다.남궁성우는 그 제자가 바로 송아름이란걸 몰랐다.송아름은 선생님으로 삼은 그 심리치료사로부터 남궁성우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선생님 곁을 떠난 지 꽤 오래됐는지라 사진 속 주인공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송아름이 보았던 사진 속 남자아이는 열일곱 열여덟 살쯤 되어 보였고 그는 지금 눈앞에 있는 스물여섯 살의 남궁성우와는 매우 달랐다.그래서 남궁성우가 구면인 것 같았지만 정확히 어디서 봤던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송아름은 계속 대화하고 싶었지만 강주혜는 남궁성우를 소파에서 끌고 일어나면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가자. 내 방 구경 시켜줄게.”방금 통화를 마친 고은희는 거실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는 송아름을 보고 물었다.“왜 혼자야? 주혜랑 성우는?”송아름은 대답했다.“주혜가 남궁성우 씨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어요.”송아름은 멈칫했으나 결국에는 고은희한테 솔직하게 말했다.“은희 아줌마, 주혜가 저를 싫어해요.”고은희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그럴 리가! 너랑 주혜는 친......”아차 싶었던 고은
남서훈은 싱긋 웃었다.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순 없었지만 느낌은...“아마 남동생일 거야.”“아... 남동생...”양나나는 눈을 굴리더니 남서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남동생도 좋은 것 같아요. 동생 태어나면 저랑 엄마가 동생한테 의술도 가르쳐주고 아빠랑 사업하는 것도 배우고요. 그리고 남자애는 너무 응석 받아줄 필요도 없고 내가 맘껏 부려 먹을 수 있잖아요.”자기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양나나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어떻게 생긴 남동생이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까, 양나나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남서훈이 임신 다섯 달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양나나는 실종됐다.양준회와 남서훈은 매일 안절부절못하여 속이 타들어 갔다.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동원해 전 세계 각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전히 양나나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양나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때 양나나는 이미 8살이었다.남서훈은 딸을 찾지 못해 날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점점 야위어갔다.그걸 보는 양준회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나는 똑똑한 아이야. 당신이 의술과 독 쓰는 법도 잘 가르쳐줬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나나는 너와 내가 낳은 딸이야. 전에 풍운파에 혼자 몰래 들어가서도 그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잖아.”아무튼 그는 양나나가 어디에 가서 어떠한 상황에 부딪히던 자신을 잘 보호할 거라고, 아무 일 없이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남서훈을 위로했다.남서훈도 굳게 믿고 있었다. 양나나의 시체를 보게 되지 않는 한 그들의 딸은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거라고.그 후 넉 달이 지났다. 9달이 된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왔다.양나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그러다 남서훈은 아들을 낳았다. 강보에 싸여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보며 남서훈은 양나나를 그리워했다.“나나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 뒤꽁무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양준회와 남서훈, 그리고 백나연과 성진훤, 이렇게 네 사람은 백무산을 찾아갔다.그를 만나자마자 양준회와 성진훤은 백무산한테 사과부터 했다.어리둥절한 백무산은 그들이 왜 갑자기 찾아와서 사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 후 양준회는 남서훈의 어깨를 와락 감싸안았고 성진훤도 보란 듯이 백나연의 손을 꼭 잡았다. 성진훤은 원래 양준회처럼 백나연을 확 끌어안고 싶었지만 미래 장인어른이 될 사람 앞이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손만 잡았다.백무산은 더 혼란스럽고 얼떨떨해졌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눈알이 튀어져 나올 듯하게 그들 넷을 번갈아 쳐다봤다.그때 양준회가 입을 열었다.“어르신, 우리 서훈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남씨 집안의 특수한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남장을 했던 것이고, 백나연 씨와의 혼약도 그저 소동극이었습니다. 이 일은 서훈이한테 책임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노여움이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그 말에 백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남서훈이 여자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여자가 그의 딸과 약혼했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백무산은 불같이 화를 냈다.그러자 백나연이 나섰다.“아빠, 이 일은 서훈이 탓이 아니에요, 제가, 제가 꼭 도와달라고 했어요.”“뭐야? 널 도와줘?”“네.”백나연이 설명했다,“아빠랑 오빠가 자꾸 소개팅 주선하는 바람에 제가 너무 골치 아파서 서훈이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나랑 약혼하자고. 그럼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선 자리를 더는 강요 안 할 거 아니에요. 서훈이는 싫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 써서 해주기로 한 거예요.”백나연은 자기 잘못이라고 매우 강조했다.그녀의 눈빛에 아픔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전 그때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랑 서훈이는 서로 약속했어요. 누가 먼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든, 그때 되면 파혼하기로요. 절대 서로의 앞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 순간 용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펑펑 쏟아졌다.이게 얼마 만인가.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은 생각을 항상 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는 오늘 끝내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용준은 또 한참을 울었다.예서는 그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다.그는 품속에 있는 그녀를 부드럽고 진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고마워. 넌 너무 용감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해. 옛날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넌 이것만 기억해. 난 널 사랑하고, 네가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내가 괴물로 변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난 모든 걸 다 망가뜨렸을 거야. 스스로도 혐오하는 그런 나쁜 인간으로 돼버렸을 거야.”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하려는 말이 뭔지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이날, 둘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예서는 더는 용준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용준이 있으므로 하여 그녀는 더 빨리 회복될 것이었다.그렇게 예서가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을 때. 남서훈과 양나나는 한 번 나가 돌아다니기로 했다.한 거리의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남자애 몇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양나나를 에워쌌다.그들은 매우 들뜬 소리로 말했다.“대장! 살아 있었어요?”“너무 잘 됐어요!”“대장, 대장을 그 사람들이 데려간 후로 우린 계속 대장의 소식을 기다렸어요. 대장도 그 애들처럼 상처투성이가 돼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고요.”“지금은 어떤 상황이에요? 대장이 후계자가 된 거예요?”양나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남자애들한테 말했다.“난 후계자 되는 것에 관심 없어. 풍운파에 지금 남아있는 건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야.”양나나는 시선을 남서훈한테 향하며 그들한테 남서훈을 소개했다.“이분이 내 스승님이야, 우리 스승님 엄청 대단해!”그날, 양나나는 그
지난 날에 발생한 그 끔찍한 과거를 스스로 입에 올리는 용준은 피가 흘러나올 듯이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감정이 폭발할 한계치까지 다다랐다.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몇 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죄다 죽여버려야 할 놈들이에요. 예서가 이쁘니까, 내 앞에서 예서를... 그때 예서는 이미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용준의 온몸에서 난폭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으로 나무를 세게 한 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그 큰 나무가 흔들릴 정도면 얼마나 센 펀치를 날렸는지 알 수 있었다.그의 손마디도 살이 찢겨나가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상처에 무덤덤했다. 아마도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터였다.용준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예서가 피투성이가 된 채 텅 빈 눈으로 누더기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서 누워있던 참혹한 장면만 머릿속에 떠올리면 그놈들을 무참하게 도륙을 내고 싶었다.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풍운파의 보스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예서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그놈들의 범죄증거를 전부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직접 처단했다.그때 그들은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막다른 길에 몰려 살려고 해도 안 되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할 때, 그들은 찌질이같이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정작 그들은 용준이나 예서한테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데 말이다.용준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그것들이 나와 예서의 모든 것을 망치고 날 시궁창에 몰아넣었죠. 여전히 난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생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해요!”그러나 그놈들이 죽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용준은 피로 물든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들은 예서가 그들이 한
용준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고, 금호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그는 어둠이 없는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사는 반듯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일부 국제조직에서는 용준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심지어 그가 의심되어 오랫동안 그에게 전자발찌를 채웠다.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는 범죄자 취급을 당했고, 그리하여 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당시 그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었던 여자친구마저 누구한테 몹쓸 짓을 당하게 된 것이다.그러므로 용준이 점점 나쁘게 변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요 몇 년 동안 풍운파는 용준의 관리하에 동남아에서 제일 큰 폭력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나 다 저지르는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그건 바로 노약자와 여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였다.의리도 지켰다.하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남서훈이 말했다.“이 세상은 원래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니깐요. 동남아는 원래 상황이 어수선하잖아요. 무장세력과 폭력조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도 없어요. 오히려 풍운파와 같은 조직이 있다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양준회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측면으로 보면 용준은 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원수지간이다. 양준회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 짓을 안 했어도, 또 그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풍운파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다스린 용준이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리하여 양준회는 안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남서훈과 같이 풍운파를 즉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나나도 여기 있어요.”남서훈이 예상치도 못한 폭탄을 터트렸다. 양준회는 깜짝 놀랐다.양나나가 여기에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는 바로 말했다.“그럼 나나도 같이 떠나면 돼.”갇힌 두 달
강하영이 부케를 내던지는 일순간 우양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부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부케를 잽싸게 낚아채는 그의 모습이 정지화면인 양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부케를 손에 쥔 그다음 순간, 그는 부케와 함께 바다에 떨어졌다.모두가 경악했다.강하영은 크루즈 난간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며 입을 떡 벌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선원들이 즉시 튜브를 던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즉시 뛰어내려 구조하려 했지만 강주환이 그들을 말렸다.왜 구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아는 강주환을 쳐다봤다.그러다 팔로 물살을 가르며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우양주가 크루즈 위에 있는 강하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걸 듣고 왜 그러는지 알 것만 같았다.“여보, 어쨌든 내가 부케 받았으니까 당신 나랑 결혼식 치러야 돼요! 안 그러면...”그 뒤엔 위협적인 말이 따라야 하는데 우양주도 무엇으로 강하영을 협박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남은 건 자신의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안 그러면 나 안 올라갈 거야. 여기 바다에 계속 있을 거야, 결혼식도 못 하는데 그냥 빠져 죽지 뭐.”강하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바다에 빠진 남자를 까만 눈동자로 차분하게 내려다보며 끝내 입을 열었다.“빠져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안 말려요.”“...”우양주는 서럽게 그녀를 쳐다봤다.역시나 아내는 매정했고 자신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그러나 그때 윤성아 곁에 서있는 강주환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바다에 상어가 출몰한다고 했어요. 식인 상어.”강주환은 고개를 돌려 강하영한테 말했다. “지금 아직 상어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나타나기만 하면 한꺼번에 열 몇 마리씩 무리 지어서 나올 거예요. 그게 게네들 습성이라. 이야... 쟨 아마 그러면 뼛조각도 남지 않겠네.”“...”그 말에 강하영이 급해 났다. 말투도 전처럼 차분하고 담담하지 않았다.난간에 기대어 우양주를 향해 내리 소리 질렀다.“뭐
미리 준비한 축사를 울먹이며 끝까지 다 읽고는 원이림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너 이 놈 자식, 내가 죽을 때까지 네가 결혼하는 걸 못 보는 줄 알았다. 아이고...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너도 이제 가정이 생겼어.”“너 똑바로 들어. 은진이한테 평생 잘 해줘야 돼, 아내한테 잘 하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이야. 나도 네 엄마 말을 엄청 잘 들었어. 너도 똑같아, 알겠니? 오늘부터는 은진이한테 더 잘해야 돼, 말도 잘 듣고, 은진이부터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은진이가 조금이라도 맘고생을 하게 되는 날엔 내가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알겠어?!”원이림은 새카만 눈동자로 여은진을 깊게, 애틋하게 들여다보며 그녀와 깍지를 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걱정 마세요. 난 평생 우리 여보 맘고생 안 시킬 거예요.”여보라는 호칭이 지금 이 시각부터 명실상부하게 되었다.원이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크루즈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데이지 꽃을 바다로 뿌렸다. 하얀 꽃잎들이 파도에 실려 멀리 떠내려갔다.둘은 거기에 선 채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며 말했다.“어머니, 아버지. 저 너무 행복해요. 우리 너무 행복해요.”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부케 토스하는 시간이 다가왔다.강주환과 윤성아, 그리고 나엽과 안효연은 모두 기혼자로서 나가지 않고 구경만 했다. 하객 중에 미혼인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우양주도 강하영의 손을 잡고 그리로 향했다.강하영은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우린 결혼했는데 왜 부케를 받으러 가요? 다른 사람한테 갈 좋은 축복을 왜 우리끼리 받겠다고 달려들어요, 쓸데없이. 그렇게 할 일 없고 힘이 남아돌면 내가 다른 일 하게 해 줄게요.”“무슨 일?”강하영은 푸른 바다를 향해 눈을 힐끔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수영 좋아하잖아요. 내가 엉덩이 확 걷어찰 테니까 바다로 들어가서 수영이나 할래요?”“...”저번에 강하영과 같이 수영하면서 그녀가 자신한테 새빨간 수영팬티를 사줘 창피를 당하고 나서부터 우양주는 수영하는
여은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나 다 알아요.”지난 1년 동안 그가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아는 그녀는 더 이상의 맹세와 언약 같은 건 필요 없었다.“응!”여은진을 안은 채로 원이림은 그녀의 여린 입술에 쪽쪽거리며 뽀뽀를 했다.장내의 플래시 세례가 정신없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돌아서서 무대 아래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한테 당찬 목소리로 선포했다.“오늘 저의 이 행복한 순간을 지켜본 여기 계신 모든 증인 분들한테 제가 선물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저희 베린 그룹에 가셔서 선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달 20일에 저와 은진이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여러분들께서 모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여은진을 안고 시상대를 내려가려 했다.여은진이 내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안은 채로 시상식장을 걸어 나와 차에 올라탔다.럭셔리한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내달리고 있었다.여은진은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있었다.“이번 달 20일에 결혼한다고요? 그럼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너무 촉박하지 않아요?”그녀가 눈을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아니, 전혀.”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원이림이 말했다.“시간이 모자라지만 않았으면 내일에라도 당장 결혼식 치르고 싶어.”반년이 넘는 동안, 그는 매일 결혼식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결혼반지, 웨딩드레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디테일한 사항들을 전부 준비하고 체크했다. 그녀가 결혼을 동의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이 끝내 다가왔다.웨딩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크게 시간을 들일 일도 없었다.다만 여은진이 임신했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결혼식에 참석할 하객을 초대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10일이면 충분했다.촉박하지 않을뿐더러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여보, 우리 지금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원이림은 한시라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한테 얘기하여 구청으로 가자
원이림은 금방 샤워를 마친 여은진한테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침대로 향했다.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순을 밟아갔다.한창 격렬해지려던 찰나, 원이림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지르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은진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살에 푹 찔린 그 가는 물건을 빼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빨리 반응했다.하지만 역시 늦었다.여은진이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고, 어두웠던 방안은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이어 급히 그를 살피던 여은진은 원이림의 엉덩이에 바늘이 하나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짧고 가는 옷을 꿰맬 때 쓰는 그런 바늘이었다.여은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남자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바늘에 찔릴 수 있어요? 침대에 왜 바늘이...”“...”꽂힌 바늘을 빼며 원이림은 이야기를 얼버무렸다.“괜찮아, 그냥 바늘인데 뭐. 별로 아프지도 않아.”그러고는 또 다짜고짜 몸을 뒤집으며 여은진을 몸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스탠드를 끄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잠깐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진행 중이었던 일을 마무리하려는 의지였다.하지만 여은진은 그의 키스를 받아내면서도 오후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난데없이 침대에 나타난 바늘을 함께 떠올렸다.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지금의 행동도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잠깐만.”여은진은 원이림을 밀어내고 다시 한번 스탠드를 켰다.의심이 부풀어 오른 눈으로 빤히 그를 노려봤다. “똑바로 말해요. 아까 그 바늘로 수작 부린 거 맞죠? 말해요, 몇 개나 찔렀어요?”“...”끝내는 발각되었다. 원이림은 이실직고했다. 강주환이 원흉이라고, 그가 시켜서 했다고 불었다.“여보, 나 며칠 전에 운봉 비즈니스 회담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강주환을 만났어. 그 자식이 날 비웃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라고 아이디어를 내줬어. 바늘로 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