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얼리?’나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조금 전 화장실로 들어간 여진구에게 물었다.“진구 씨, 정은 언니가 와서 먼저 내려갈게요.”그런데 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진구가 바로 성큼성큼 나왔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얼굴이었다.“내가 내려갈게. 당신은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씻어.”내 앞에서는 늘 점잖고 차분하던 남자가 오늘따라 목소리에 짜증과 긴장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에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난 다 씻었어. 당신 치약도 내가 짜줬잖아. 잊었어? 됐어. 같이 내려가자. 손님 기다리겠다.”나는 그의
나는 순간 멈칫했다. 다시 확인하려고 메일을 여러 번 꼼꼼하게 보았다. 여러 번 확인해도 여정은이 확실했다.여정은은 낙하산으로 디자인팀 본부장이 되어 나의 직속 상사가 되었다.“지연이 너 이 여자 알지?”나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강예지는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말했다.“응. 이 사람이 바로 진구 씨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누나야. 예전에 너한테 얘기한 적이 있어.”졸업 후 다른 친구들은 각자 자기 삶을 쫓느라 뿔뿔이 흩어졌지만 대학교 때부터 사이가 좋았던 나와 강예지는 어디도 가지 말고 경운에
여진구는 한 치의 망설임과 고민도 없이 흔쾌히 동의했다.나는 그의 목을 잡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윽하게 쳐다보았다.“정말 10%나 주려고? 아깝지 않아?”그의 두 눈은 한없이 맑고 투명했다.“남도 아니고 당신 주는 건데, 뭐.”그 순간 돈은 정말 충성을 표하는 좋은 물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온 점심 우울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풀리는 것 같았다.나는 뭔가를 떠보듯 웃으며 물었다.“그럼 정은 언니는? 언니한테는 줄 거야?”여진구는 잠깐 침묵하다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정말?”“응. 내가 누나한테
여진구가 날 기다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차를 얻어탔다. 그것도 조수석에.마음 같아서는 홱 돌아서고 싶었지만 이성의 끈을 붙잡고 여진구에게 손을 내밀었다.“차 키.”여진구는 아무 말 없이 차 키를 나에게 건넸다.나는 곧장 운전석에 올라탄 후 여정은의 놀란 얼굴을 보며 히죽 웃었다.“뭐라 하긴요. 언니도 진구 씨 누나인데 차를 얻어타는 게 이상할 건 없죠.”그러고는 고개를 내밀어 밖에 있는 여진구를 쳐다보았다.“빨리 타. 할아버지 기다리시겠다.”본가로 가는 길 내내 차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여정은은 여진구와 얘기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온몸에 흐르는 피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가끔 두 사람 사이에 진짜 뭔가가 있는 건 아닌지 상상하긴 했었다. 하지만 매번 계속 부정했다. 비록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고 해도 여씨 가문 도련님과 아가씨인 두 사람은 명의상으로는 그래도 남매였고 게다가 각자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여진구처럼 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절대 이런 황당한 일을 할 리가 없었다.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여진구는 여정은을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조롱과 싸늘함이 섞인
여진구는 여정은을 내팽개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조금 전의 날카롭고 차갑던 목소리와는 달리 한없이 다정했다.“다 들었어?”“응.”나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여진구도 뭐라 하지 않고 도우미에게서 겉옷을 받아 나의 어깨에 걸쳐주고는 안으로 걸어가며 자연스럽게 말했다.“바람이 차니까 들어가자.”마치 내가 방금 들은 얘기들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얘기인 듯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진구야.”여정은의 고집스러운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여진구!”하지만 여진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 후 여진구는 정신이 딴 데 팔린
여진구는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뭐라 하진 않았다.나는 입술을 적시고 말했다.“그럼 신혼 첫날밤에는 무슨 이유로 만났어?”그날 밤 베란다에서 밤새 기다렸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신혼 첫날밤에 결혼한 아내를 내팽개치고 집을 나간 여진구였다. 나는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무척이나 걱정했었고 나한테 불만이 있는 건 아닌지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그가 빨리 집에 들어오길 바랐었다.그때 난 고작 23살이었고 어쩌다 보니 내가 오랫동안 짝사랑한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그러니 결혼과 여진구에게 어찌 기대가 없겠는가?그런데 오늘에
강예지가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무슨 밥?”그녀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여진구가 식당에서 밥 몇 번 사줬잖아. 잊었어?”“...”잊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여진구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부모를 일찍 여윈 나는 고모네 집으로 갔다. 고모는 나에게 잘해주고 싶었지만 고모부와 사촌 동생의 눈치를 봐야 했다.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대학교 때는 학비와 생활비를 내가 직접 벌었다. 가끔 갑자기 학교에 내야 할 돈이 생겨 다 내고 나면 생활비가 부족하기 일쑤였다.그리고 영양실조로 학교에서 쓰러진 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