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 웃음은 얼마 가지 않아 수현의 걱정으로 바뀌었다.그녀의 낌새를 눈치 빠르게 알아챈 민재는 서둘러 위로의 말을 건넸다.“마음 놓으세요. 정말 걱정하실 것 없어요. 대표님은 절대 확신이 없는 일은 하지 않으세요.”“알아요.”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과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확실하지 않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성격이란 것쯤은 윤아도 알고 있었다.머리로는 알지만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사실 수현이 그곳에 남아 뒤처리를 해준 덕분에 윤아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안전한 곳에 도착해서는 민재가 세 사람을 방으로 안내해 줬다.이곳까지 오는데 꽤 오래 걸렸기에 민재가 떠나기 전에 윤아가 그를 붙잡고 물었다.“진수현은 언제쯤 올 수 있대요?”“그게...”민재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쪽 일이 잘 처리되면 곧바로 오실 겁니다.”“아직도 답장이 안 온 거예요?”“윤아 님. 저와 이곳까지 함께 오셨잖습니까. 제 핸드폰으로 걸려 온 전화는 현아 씨밖에 없었습니다.”그 말에 윤아의 눈동자에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그때, 때마침 다시 울리는 민재의 핸드폰 알림음에 윤아는 눈을 반짝였다.“혹시 수현...”발신인을 확인한 민재가 말했다.“아니요.”수현이 아니란 말에 윤아의 안광이 다시 스르륵 사라졌다.“알겠어요.”민재는 핸드폰을 한 번 보더니 윤아에게 슬쩍 물었다.“윤아 님. 별다른 일 없으시면 전 먼저 가봐도 될까요?”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일 보세요.”민재는 곧바로 자리를 떴고 남겨진 윤아는 깊은 한숨만 내쉬다 방 문을 닫아버렸다.깔끔하게 정돈되어있는 방을 보고 윤아는 처음엔 그녀를 위해 마련한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곳곳에 누가 살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옷장에 걸려있는 남성용 옷은 딱 봐도 수현의 것이었다.아무래도 민재가 그녀를 수현의 방으로 안내한듯 싶었다.시간도 늦은데다 하루종일 바쁘게 다녔던 터라 두 아이도 어느새 지쳤는지 소파에
“방문진료니까 너무 긴장 안 해도 돼요. 편하게 있어요.”의사는 하윤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다쳤다는 오른쪽 발을 주물렀다.“다친 발이 이 말 맞나요?”의사의 손길에 하윤은 긴장되는지 옷을 질끈 움켜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의사는 하윤의 하얀 발등을 한참 관찰하더니 어딘가를 꾹 눌렀다. 그러자 하윤은 아픈지 저도 모르게 엄마를 외치며 몸을 움츠렸다.윤아는 마음이 아파 하윤이 잡을 수 있게 자신의 손을 뻗었다.“여기가 아픈가 보네요. 다른 쪽은 안 아파요?”그는 한참을 꼼꼼하게 진단한 후 말했다.“큰 문제는 아니고 발이 조금 삐었네요. 약을 처방해 줄 테니 며칠 쉬는 게 좋겠어요. 조만간은 걷는 건 자제해주시고요.”윤아는 연신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고 의사는 처방 약을 건네준 후 짧은 인사와 함께 곧바로 떠났다.그렇게 반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의사가 떠난 후, 윤아는 하윤을 안아 원위치로 돌려놓으며 당부했다.“다음부턴 아픈 데 있으면 혼자 참고 있지 말고 엄마한테 바로 말해야 돼. 알겠어?”하윤은 쓴맛을 본 이후라 그런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됐어. 얼른 먹어. 다 먹고 오빠랑 들어가서 좀 자.”하윤은 다시 숟가락을 들었지만 계속 먹는 대신 윤아를 빤히 쳐다보다 물었다.“엄마. 고독현 밤 아저씨는 왜 우리랑 같이 안 왔어요? 그 아저씨는 어디 갔어요?”그 질문은...윤아도 묻고 싶은 거다. 벌써 한참은 지난 것 같은데, 게다가 조금 전 이동시간까지 더하면 꽤 오래 지났다. 그런데 수현 쪽에서는 아직도 소식 하나 없으니...윤아는 걱정이 한가득이었지만 아이들 앞에서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에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고독현 밤 아저씨는 바쁜 일이 생겨서 처리하러 가셨어. 자고 일어나면 내일엔 아저씨도 와있을 거야. 응?”“네.”한참 후, 윤아가 겨우 두 아이를 재우고서야 방 안은 비로소 조용해졌다. 아이들이 깊은 잠에 빠진 걸 확인한 뒤에야 윤아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이곳
생각 끝에 윤아는 결국 밖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이 늦은 시각까지 그녀의 안전을 위해 보초를 서주는 사람들한테 괜히 나갔다가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생각을 마친 윤아는 곧바로 말했다.“안 나갈게요. 대신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윤아 님. 저희는 대표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윤아 님은 대표님의 사람이니 윤아 님 일이 곧 대표님의 일이죠. 무슨 일이든 편하게 시켜만 주십쇼.”“이 비서가 오면 볼일이 있으니 잠깐 들러달라고 해주시겠어요?”“그럼요. 지금 바로 물어볼까요?”“...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굳이 사람을 부를 필요 없이 그저 이쪽으로 오면 잠깐 들러달라는 거였는데 이 자리에서 바로 핸드폰을 꺼내 민재에게 전화를 걸 줄이야.민재가 전화를 받자 경호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 비서님. 윤아 님이 잠시 뵙자시는데요. 지금 바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됐어, 그냥 두자.’윤아는 그의 엄청난 추진력에 적잖이 놀랐다.“윤아 님, 비서님이 곧 오신답니다. 들어가서 기다리시죠.”“고마워요.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여기서 뭐라 더 하겠는가. 윤아는 군말 없이 방으로 돌아갔다.소파에 앉은 지 몇분도 채 되지 않아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윤아는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줬다.“윤아 님. 찾으셨다고요?”“진수현은요? 아직도 소식 없어요?”첫마디는 역시 수현에 관한 질문이었다.민재는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윤아 님,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쉬세요. 소식 있으면 제가 바로 전달하겠습니다.”사실 수현이 돌아오면 제일 먼저 찾을 사람은 윤아이니 민재가 굳이 전달할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윤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여기가 한국이라면 모를까 해외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윤아는 심란한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이런 말이 실례가 될 줄은 알지만 그래도 해야겠어요. 이곳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그쪽으로 지원
윤아가 현아를 떼어내고 보니 민재는 이미 가버린 이후였다. 윤아의 눈동자에 잠시 우울한 기색이 비쳤지만 그를 계속 잡아둔다 해도 더 뭐라 하지도 못했을 테니 바쁘게 일하는 사람을 붙잡지 않기로 했다.윤아의 달라진 낌새를 눈치챈 현아는 바짝 긴장하며 물었다.“왜 그래?”윤아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는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아무것도 아니야. 왜 이제야 왔어. 차는 다 고친 거야?”“아니. 내가 네 걱정 너무 한다고 까칠남이 사람 불러서 나 데려다줬어.”현아는 말하다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서둘러 정정했다.“아니지, 까칠남이라고 하면 안 되지. 이제부터 그렇게 안 부르기로 약속했거든. 앞으론 꼬박꼬박 대표님이라고 불러야겠어.”“까칠남?”“응. 이번에 너 찾으러 같이 와주셨어. 오래 같이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까칠남이라고 불러버려서...”“...”‘못살아 정말.’“화내진 않으셔?”“화내긴. 내가 그 별명을 근거 없이 막 지은 건 아니잖아? 그게 사실인걸. 야근을 밥 먹듯이 시키는 바람에 내가 연애를 못한거 아냐. 아냐. 내가 제일 큰 피해자라고. 그러니까 화를 안 내는 게 아니라 못 내는 거 아닐까? 근데 그거 알아? 내가 너 찾으러 간다고 할 때 대표님이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해서 진짜 놀랐잖아. 까칠하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정의감 넘치는 모습도 있더라고.”“정의감?”어울리지 않는 형용사에 윤아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러니까 그 사람이 정의감 때문에 널 따라온 거다?”“그렇지?”말을 마친 현아는 턱을 괴더니 다시 생각에 잠겼다.“정의감 때문이 아니라면 뭣 때문일까? 아! 알겠다. 착취할 일꾼을 잃고 싶지 않은거네.”“...”고심해서 얻은 결론이 그거라니. 윤아는 어이가 없어 목이 막혔다.“대체 어떻게 하면 결론이 그렇게 나는 거야?”“내가 사표 낸다니까 따라왔다니까? 나 같은 직원을 잃고 싶지 않은 거지. 쳇. 이번 일 잘 해결하고 마음 편히 돌아가서 개미처럼 일하라는거잖아.”“...”
윤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눈썹을 씰룩거렸다.조금 전까지는 아예 예상도 못 하더니 한번 그쪽으로 생각을 바꾸니 곧바로 진도를 빼는 모습이다.윤아는 눈썹을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진짜 너 좋아하는 걸 수도 있잖아?”“그럴 리가!”현아는 곧바로 머리를 흔들며 부정했다.“까칠남이 왜 날 좋아하겠어? 아, 까칠남 아니고 대표님이지. 그렇게 안 부른다고 해놓고 또 이런다. 그 사람이 미쳤다고 날 좋아하겠어?”“그럼 넌 그 사람이 왜 널 안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데?”“그거야 당연하지. 대표님 주위에는 죄다 재벌에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들뿐이잖아. 돈과 명예를 한 손에 쥐고 있는 그런 여자들이 득실대는데 일개 회사 직원인 나를 미치지 않고서야 왜 좋아하겠어.”친구가 자기 비하를 하는 모습에 윤아는 속상해 단번에 반박했다.“네가 뭐가 어때서.”“아이참. 알았어.”현아는 윤아한테 붙으며 배시시 웃었다.“나도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인 거 알지. 그렇지만 친구야, 이건 다른 문제라고. 돈 많고 얼굴 예쁜 다른 여자들이랑은 난 비교도 안 돼. 그리고 대표님 주위엔 그런 여자들이 가득하고. 그런데 어떻게 날 좋아하겠어? 이번에 같이 와준 것도 맘 편히 부려 먹으려는 거 아니면 그냥 그분 정의감 때문일 거야.”윤아는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모든 사랑이 상대방의 조건을 보고 시작되는 건 아니잖아. 난 오래 내 곁에 있어 주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가. 아니면 특정적인 어느 순간에 마주친 사람과 한눈에 반한다거나 그런 사랑 말이야.”현아는 듣고 보니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응. 네 말도 맞는 것 같아. 그래도 난 아닐 것 같아. 네가 우리 대표님 주위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서 그래. 아, 아니다. 너도 아마 알 거야. 진수현 곁에도 그 곁을 노리는 여자들 엄청 있을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일이니 더 이상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만약 그 배주한이라는 사람이 정
“네 탓 아니야.”현아는 그래도 속상한지 말했다.“너 진수현한테서 연락 올 때까지 못 잘 것 같으니까 나도 옆에서 같이 기다려줄게. 진수현 돌아오면 나도 마음 놓고 갈 수 있을 것 같아.”“그럴 필요 없어 현아야.”윤아는 고개를 흔들었다.“나 혼자 기다려도 돼. 너도 오늘 이리저리 다니느라 힘들었을 텐데 얼른 돌아가서 쉬어야지.”“말도 안 되는 소리. 날 내쫓으려 하지 마. 우린 베프잖아. 우리 못 본 지 엄청 오래됐는데 같이 잠도 못 자? 설마 내가 귀찮아졌어?”“그럴 리가 없잖아. 알겠어. 그러면 여기 있어.”결국 현아는 윤아와 함께 수현을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잠들지도 못하니 현아는 야식으로 먹을 간식들과 술을 들고 윤아와 방 옆의 베란다에서 함께 마셨다.“너랑 술 마셔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너 결혼한 뒤로 자주 안 마시긴 하지만 오늘은 특수상황이니 네 무사 귀환 축하 겸 오랜만에 한잔하자.”윤아는 술을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를 위해 이 먼 이국 타향까지 와준 맞춰주기 위해 술잔을 들었다.둘 사람이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좋아. 한잔하자. 대신 딱 한 잔만이다?”벌컥벌컥 술을 들이켠 둘, 테이블 위 간식도 잊지 않고 먹어준다.“윤아야 너도 먹어. 탈출하고 나서도 뭐 못 먹었을 거 아냐. 나도 저녁 먹다 말고 나오는 바람에 마침 배고팠거든.”그러나 맛있게 먹고 있는 현아와 달리 윤아의 젓가락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좀처럼 먹질 못하는 윤아의 모습에 현아는 작은 디저트를 집어다 그녀의 앞접시에 내려놓으며 말했다.“아이고, 내 밥 친구 해준다고 생각하고 좀 먹어.”“현아야. 나 입맛이 없어.”“알아. 그래도 먹어야지. 지금 안 먹어두면 밤새 쫄쫄 굶을 텐데 무슨 힘이 나서 진수현 기다리겠어?”결국 현아의 성화에 못 이겨 윤아도 몇 입 우물거리기 시작했다.둘은 그렇게 밤이 깊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제 지쳐 나란히 소파에 누워있는데 현아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
‘이 늦은 밤에 누구지?’아무리 보안이 잘 되어있다지만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혹시 외부인이면 어쩌지?’두려운 마음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수려한 용모에 빼어난 몸매,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윽한 눈빛이 드디어 눈앞에 나타났다.수현을 본 순간 윤아는 환각인 줄 알았다.“너...”그러나 윤아가 말을 채 뱉기도 전에 그녀에게로 돌진하는 수현. 그는 여느 때보다도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그 순간 익숙한 체향이 윤아를 감싸왔다.윤아는 두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뻗어 그를 맞이했다.손이 수현의 등에 닿자 그녀를 안은 손이 더 꽉 조여온다.행복도 잠시,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에 윤아는 흠칫했다.그녀는 감았던 눈을 뜨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놔봐.”그러나 눈앞의 이 남자는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조금만 더.”사람이 다쳤는데 지금 그게 중요하겠는가.윤아는 어쩔 수 없이 힘을 써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그를 밀어냈다.두 걸음 물러선 윤아는 수현을 위아래로 자세히 훑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왜?”윤아의 표정을 본 수현이 낮게 물었다.그 순간, 윤아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의 옷깃을 잡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그러나 이제 막 첫 번째 단추를 풀려는데 수현이 그녀의 손을 잡아 세웠다.“뭐 하려고?”그의 눈빛은 늘 그랬듯 그윽했고 목소리는 허스키했다.그 모습에 윤아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뭐 안 해. 너 어디 다쳤나 보려고.”“...”‘상처를 보려던 거구나. 난 또...’“무슨 표정이야? 너 설마 내가 너한테 뭐 하려고 하는 줄 알았던 거야?”윤아는 그의 손등을 찰싹 치며 말을 이었다.“손 놔. 좀 보게.”낮지만 힘 있는 말투였다. 윤아는 수현의 손을 기어코 떼어내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코를 찌를 정도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걸 보아 상처가 꽤 깊을 거다.그러나 이번엔 두 번째 단추까지 겨우 풀었는데 다시 또 수현에게 잡혀버렸다.
눈에 보이는 데도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안 보이는 옷 밑은 어떨지.두려운 생각이 들자 윤아는 다급해졌다.“어디를 다친 거야? 옷 벗고 보여줘.”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는 수현의 얼굴엔 복잡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말했잖아. 이선우 피라고.”옷깃에서 멈추었던 윤아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수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윤아.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그대로 수현의 눈에 담겼고 곧이어 그의 얼굴에도 씁쓸한 기색이 어렸다.“걱정돼?”“진수현!”그의 말을 끝으로 윤아가 거칠게 소리쳤다.“때가 어느 땐데 그런 걸 농담이라고 해. 설령 정말 선우가 다쳤다고 해도 난 그의 곁으로 날아갈 수도 없거니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오직 진수현 너 하나뿐이야. 나는 지금 눈앞에서 네 상처를 보고 싶어.”수현의 동공이 흔들렸다.“그게 아니면 혹시 네 말들은 다 날 속이려는 거야? 네가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알리지 못하겠으니까 일부러 그딴 말들로 날 현혹하려는 거냐고!”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한참 뒤, 생각을 마친 듯한 수현이 고개를 숙이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그래서 현혹됐어? 누가 더 걱정되는데? 나야, 이선우야?”“...”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물리자 윤아가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유치하기는.”“내가 뭘?”윤아를 잡은 수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알고 싶은 게 유치할 일인가.”고집을 쓰는 수현을 윤아는 말로 당해낼 수 없었다.특히 사랑하는 여인이라는 그 말 말이다.‘언제부터 그렇게 열렬했다고.’“대답해.”윤아가 끝내 말을 하지 않자 수현은 말을 이었다.“그렇게 대답 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나?”“아니. 난 그냥...”“이선우가 나보다 더 걱정됐던 거야? 지금이라도 그놈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그의 질문에 윤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올려다보았다.“그런 질문을 꼭 해야 해?”“응. 대답하기 전까진 내 단추도 안 풀려.”그는 그녀의 대답이 무슨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