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애의 눈매는 선우와 많이 닮아 있었다. 외모로만 보면 오누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여자애가 울기 시작하자 선우는 쪼그리고 앉아 구경이라도 난 듯 눈물을 뚝뚝 떨구며 통곡하는 걸 지켜봤다.아이의 울음소리가 성가실 법도 했지만 선우는 마치 감미로운 멜로디라도 감상하듯 즐기고 있었다.감상할 만큼 한 선우는 사람을 불러 아이의 입을 틀어막고 데려가라고 했다.그 뒤로 아이는 한 번도 선우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우진은 그때부터 선우가 어딘가 미쳐 있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정상적인 심리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심리 상담을 받아야 할 수준이라고 생각했지만 우진은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잘못했다간 큰 화를 입을 수 있으니 말이다.윤아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았다. 선우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기를 납치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뺏기기 싫어서 그러는 걸까.이렇게 생각하며 윤아는 미간을 주물렀다. 만약 그가 비정상적인 심리로 이러는 거라면 일이 복잡해진다.윤아는 방에 잠깐 있다가 바로 두 아이를 찾으러 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찾아와 주방에 디저트를 애피타이저로 준비했으니 내려와 먹으라고 했다.윤아는 멈칫하더니 대답 대신에 집사에게 물었다.“선우는요? 좀 만나고 싶은데.”“그게... 대표님은 일이 있어서 나갔습니다.”윤아는 이 질문에 집사의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진 걸 발견했다.신경이 갑자기 곤두서는 그녀였다.“어디로 간 거예요?”하지만 집사는 표정을 삭 정리하더니 말했다.“심윤아 씨,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저는 대표님이 부른 집사일 뿐 개인 일정까지 관리하지는 않습니다.”집사가 대표의 일정을 모른다고?윤아는 이걸 믿을 리가 없었다.그녀는 속으로 이를 비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일정을 모른다니 어쩔 수 없죠.”집사가 말을 이어갔다.“심윤아 씨, 그럼 디저트는...”“됐어요. 배고프지 않으니 식사할 때도 부를 필요 없어요.”“...”집사는
공항.현아와 주한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윤아가 보낸 주소로 향했다.차가 호텔 앞에 멈춰서고 현아는 윤아가 전에 알려준 건물을 하나씩 대조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전부 들어맞았다.현아는 윤아의 관찰 능력과 기억력에 감탄하며 안전벨트를 풀고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렸다.호텔로 들어가려는데 따라서 내린 주한이 팔을 잡았다.“침착해요. 바로 들어가면 안 돼요.”이를 들은 현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급하게 물었다.“여기까지 왔는데 못 들어간다고요? 친구가 위험한데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기만 해요? 뭐라도 해야죠!”주한은 까만 눈동자로 그런 현아를 힐끔 쳐다보더니 실눈을 뜨고 호텔을 올려다보며 지령을 내렸다.“나 혼자 들어갈게요.”“뭐라고요?”현아는 이 말에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 시간 후에도 내가 나오지 않으면 바로 신고해요.”“...”현아는 할말을 잃었다.“내가 대표님을 어떻게 혼자 들여보내요?”주한이 현아의 어깨를 부여잡았고 현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둘 사이가 매우 가까웠다.“현아 씨, 잘 들어요. 같이 들어갔다가 무슨 일 생기기라도 하면 누가 신고해요? 그러니까 한 명은 꼭 밖에 있어야 해요.”“맞는 말이긴 한데, 윤아... 내 친구예요. 모험하더라도 내가 해야죠. 대표님이 밖에 있어요.”현아를 바라보는 주한의 눈빛이 점점 난감해졌다.“들어가서 사고 안 치고 잘 해낼 자신 있어요?”“...”현아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남자라도 마주치면 맞짱 뜰 수 있어요?”“아니요...”주현아가 이를 부정했다.“그럼 이제 말해봐요. 그래도 들어갈 거예요?”“그래요, 그럼 대표님이 들어가요. 근데 20분이에요. 20분이 지나도 안 나오면 바로 신고합니다.”“그래요.”주한은 덤덤한 표정으로 현아를 놓아주더니 몸에 지닌 물품을 정리하며 말했다.“길 저쪽 편에 카페가 하나 있어요. 거기서 기다려요. 기억해요. 내가 나오기 전까지 절대 들어올 생각하지 마요
이렇게 생각한 현아는 종업원을 다시 불렀다. 공복에 커피를 마시는 게 아직 습관 되지 않았으니 디저트를 하나 올려달라고 했다.디저트가 올라오고 현아는 포크를 들어 그럴싸하게 두 입 크게 뜯어먹었다. 빨리 이 디저트를 해결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하지만 한입에 너무 많이 욱여넣었는지 너무 달아서 이가 빠질 것 같았다.어쩔 수 없이 이미 식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고 그제야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현아는 디저트와 커피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결국 둘 다 포기했다.그러고는 모든 신경을 맞은편 호텔에 쏟았다.이미 15분이나 지났다. 5분이 더 지나도 주한이 나타나지 않으면 바로 신고해야 한다.비록 윤아에게 신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순간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자리에 앉아있던 현아가 화들짝 놀랐다.현아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화면에 뜬 이름은 배주한이었다.현아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까칠남?”말이 헛나간 현아는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긴장해서 그런지 그의 별명을 부른 것이다.수화기 너머에 침묵이 흘렀다. 이렇게 노골적인 별명에 말문이 막혔는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제 와도 돼요.”“네?”현아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가도 된다고요? 윤아 찾았어요?”“아니요.”주한이 덤덤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설명했다.“호텔 방은 비어있어요. 떠난 지 꽤 되는 거 같은데요.”이를 들은 현아는 바로 전화를 끊고 그쪽으로 건너갔다.도착해보니 주한이 이미 문 앞에 서 있었다. 옆에는 호텔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현아를 본 주한이 얼른 설명했다.“바로 여기에요.”현아가 안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니나 다를까 호텔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같이 찾아봐요. 다른 단서는 없는지.”“그래요.”둘은 그렇게 방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십여 분이 지났지만 둘은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아무것도 안 나오네요. 이건 윤아답지 않아요. 만약 우리와 연락이 닿았다는 걸
윤아가 방에서 아이들과 꽤 오랜 시간을 보낼 동안 선우는 여태 돌아오지 않았고 윤아는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그녀를 여기로 데려와 놓고는 온 적이 없다는 게 수상하게 느껴졌다.그리고 아까 집사에게 확인했을 때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집사의 표정도 떠올랐다.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윤아는 그렇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나가보기로 했다.이렇게 결심한 윤아는 두 아이에게 같이 있으라고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나가자마자 밖에서 들어오는 선우와 딱 마주쳤다. 그는 옷을 갈아입었고 안경도 벗고 있었다.윤아를 본 선우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걸렸다.“윤아야.”“...”윤아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고 선우의 이상한 차림새를 보며 물었다.“어디 갔다 오는 거야?”선우가 대답했다.“잠깐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일 처리 하는데 옷까지 갈아입어야 해?”윤아가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다.이를 들은 선우는 멈칫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뭘 입고 있는지 알고 있었구나. 나한테 아예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윤아는 할말을 잃었다.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이다니, 신기했다.어이없긴 했지만 그래도 문제는 해결해야 하니 다시 물었다.“지금은 시간 좀 나? 할말 있어.”“그래?”선우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윤아를 보며 물었다.“드디어 나랑 대화라는 걸 하네. 당연히 시간 되지. 너만 원한다면 내 시간은 다 네 거야.”윤아가 몸을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그럼 조용한데 가서 얘기 좀 해.”“어디 가고 싶은데?”“여기 너희 집이야.”“그래, 그럼 내려가서 밥 먹으면서 얘기할래?”“나 입맛 없어.”윤아는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앞에 있는 테라스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로 가자.”“그래.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자.”윤아는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잠깐만.”선우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윤아에게 걸쳐주었다.“테라스는 뻥 뚫려 있어서, 이거라도 걸쳐.”윤아는 걸쳐준 외투를 바로 쳐내려
윤아의 예쁜 미간이 구겨졌다.“윤아야.”선우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숨결이 가볍게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은 건 네가 나를 동정하는 게 싫었을 뿐이야. 근데 결국 알게 됐네? 진 비서가 알려준 거야?”거리가 가깝긴 했지만 윤아는 선우의 체온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선우는 마치 온도가 없는 사람 같았다.게다가 선우의 눈빛은 그가 우진에게 무슨 짓을 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이런 생각에 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물어본 거지 우진 씨와는 아무런 상관없어.”이를 들은 선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윤아를 바라봤다.“윤아야, 넌 여전히 참 착해.”어릴 적 여자애들은 자주 뒤에서 선우에 대해 수군거렸고 선우는 사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윤아도 그저 모른 척 지나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그냥 지나가면 그만이었다.하지만 윤아는 앞에 나서서 선우 편을 들어줬다. 이런 여자를 어떻게 놓아줄 수가 있단 말인가?윤아가 태양이라면 그는 음지에 있는 악마와도 같았다.음지에 너무 오래 있으면 누구든 빛을 갈망하게 된다.“이건 착한 거랑 아무 상관 없어.”윤아가 설명을 덧붙였다.“확실히 내가 물어본 게 맞거든. 게다가 너는 지금 나를 가둬놓고 있고. 알려주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있었겠어?”“응.”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좋은 핑계가 될 수 있지.”말은 그렇게 해도 윤아는 그가 이 말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우진 씨 어떡하지...일단 이 생각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지금 제일 시급한 건 선우의 마음의 병이었다.“그때...”윤아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만약 네가 필요하다면 친구로서 우리 모두가 너를 위로해 줄게. 이미 너무 오래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윤아야.”항상 온화하기만 하던 선우가 갑자기 그녀의 말을 잘랐다.“이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더는 꺼내지 말아 주라. 걱정하지 마. 앞으로 너랑 있으면서 이
이번에는 선우도 그녀의 질문을 마주했다.“윤아야, 우리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데 어떻게 안 봐?”“꼭 이래야겠어? 지금이라도 그만둬. 계속 이렇게 물고 뜯고 싸우다가 친구를 다 잃어야 그만할래?”“그건 아니야.”선우가 앞으로 다가가 윤아의 어깨를 잡으며 들릴까 말까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누가 뭐래도 넌 포기 못 해.”“...”윤아는 말문이 막혔다.순간 윤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선우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더니 성큼성큼 방으로 향했다.무슨 상황인지 알아챈 윤아가 발버둥 쳤지만 선우와의 힘 차이는 무시할 수가 없었고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안겨 방으로 향했다.선우가 향하는 곳이 침대라는 걸 알고 윤아의 눈빛과 목소리가 변했다.“뭐 하자는 거야? 이선우, 경고하는데 감히 나한테 손 대면 확 죽어버릴 거야.”이를 들은 선우가 움찔하더니 침대 옆에 멈춰 섰다.“이거 놔!”선우의 눈빛이 서글퍼졌다.“윤아야. 넌 나를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다고 그래?”“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이미 방에 들어왔기에 선우도 더는 윤아를 힘으로 가둬두지 않았고 윤아는 그 틈을 타 얼른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쓰고 있던 외투도 덕분에 툭 바닥에 떨어졌다.선우는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외투를 한참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여 이를 주었다.“네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나도 강박하지 않아.”옷을 주워 든 선우가 낮은 목소리로 해명했다.“그래? 그럼 지금 당장 나랑 하윤이, 서훈이 놓아주든지.”“그것만 빼고 다른 건 다 들어줄 수 있어. 얼른 쉬어.”선우가 나가고 방에는 윤아 혼자 남았다. 윤아는 아까 발버둥 치느라 숨결이 흐트러졌다.문이 닫히고 선우가 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윤아는 한시름 놓였다.만약 선우가 정말 윤아에게 무슨 짓을 하고 싶었던 거라면 그녀는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언제쯤 그녀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휴식이고 뭐고 자리에서 일어나
처음엔 선우를 돕는 우진도 좋은 사람은 못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일을 그녀에게 말해주는 걸 보면 진심으로 선우를 도와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아닌 것 같았고 비서로서 어쩔 수 없이 돕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집사가 다가왔다.“심윤아 씨, 혹시 배고프신가요? 뭘 도와드릴까요?”윤아는 바로 거절했다.“배고프지는 않아요.”“아.”집사는 아마 배고프지도 않으면서 왜 내려왔는지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그냥 잠이 안 와서 여기저기 걷고 있어요.”이를 들은 집사가 얼른 대꾸했다.“그럼 동행할까요? 길도 안내해 드릴 겸요.”“아니요. 혼자 걸을게요.”윤아가 단칼에 거절했다.“하지만...”“왜요?”윤아의 말투가 급 차가워졌다.“설마 이 별장에서 걸어 다닐 권한도 없나요?”윤아는 이렇게 말하며 집사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아니면 지금 밧줄이나 쇠사슬을 가져와 나를 방에 묶어두지 그래요? 앞으로 식사도 내려올 필요 없이 사람 시켜서 먹여주면 되겠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이 말에 집사는 어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심윤아 씨...”“가요. 얼른 가서 가져와요.”윤아가 그를 재촉했다.결국 집사는 윤아의 재촉에 두손 두발 다 들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닙니다, 심윤아 씨. 돌아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 돌아보세요. 하지만 날이 어두워져서 별장 주변에 가로등을 설치하긴 했지만 빛이 비치지 않는 곳도 있어요.”집사는 서랍에서 랜턴 하나를 찾아 윤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이거 챙겨가세요. 잘 안 보이면 랜턴으로 비추고요.”“...”윤아는 할말을 잃었다.아예 나가지 못하게 하더니 랜턴까지 준비해 준다?안 챙기는 게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다.윤아는 바로 랜턴을 받았다.“사람 붙여서 미행할 건 아니죠?”이 말에 집사가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마음껏 돌아보시면 됩니다. 사람을 붙이진 않을게요.”사실 윤아는 이 말 뒤에 숨겨진 속뜻을 알고 있었다. 돌아보고 싶으면 얼마든
고민에 잠긴 건 윤아뿐만이 아니었다.현아와 주한은 시간이 늦었기에 룸을 두 개 예약했지만 윤아 일로 잠이 오지 않았던 현아는 대충 씻고 주한을 찾아갔다.현아가 주한을 찾아갔을 때 주한은 금방 샤워하고 나와 하반신에 타올만 달랑 걸치고 있었다.주한이 입을 열려는데 현아가 막무가내로 비집고 들어왔고 딱히 뭐가 이상한지는 감지하지 못했다.들어오자마자 현아는 윤아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도대체 윤아를 어디로 숨긴 걸까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아쉽게도 지난 5년간 선우와 별로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만약 연락을 자주 했다면 선우 성격에 근거해서 윤아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맞춰볼 텐데.”주한은 아직도 문어구에 서서 점점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현아를 지켜봤다. 그녀는 아직도 주한이 윗통을 벗고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주한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현아를 힐끔 쳐다봤다.조심성이 없거나 그를 전혀 남자로 보지 않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이렇게 보고도 못 본척 할 리가 없었다.주한은 난감한 표정으로 문을 닫고는 현관 쪽에 위치한 옷장에서 가운을 꺼내 걸쳤다.이대로 있다가 현아가 정신을 차리고 웃통을 까고 있는 그를 보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변태라고 욕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가운을 걸친 주한은 띠를 묶고 가슴만 조금 드러냈다.저편에 앉아있던 현아는 그제야 본인이 한참을 떠들었는데 주한이 대꾸하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현아는 고개를 돌려 주한을 바라봤다. 주한이 이미 가운을 입은 뒤였기에 딱히 이상한 점은 보아내지 못했다.“대표님, 왜 아무 반응이 없어요?”주한은 현아 앞으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추측만으로 안 돼요. 범위가 너무 커요.”이를 들은 현아는 금세 풀이 죽었다. 수도가 커도 너무 컸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추측만으로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다.현아가 가만히 있자 주한은 컵에 온수를 따라 한 모금 마셨다.“아직도 신고는 싫어요?”이를 들은 현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고 망설이기 시작했다. 윤아의 말을 듣고 신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