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는 말문이 막혔다.“난...”“설마 아이들의 친아빠라서 집안으로 들였다고 핑계 댈 거는 아니지?”윤아는 할말이 없었다. 예상 밖으로 현아가 자신이 뒤에 말하려던 말을 단번에 알아맞혔기 때문이다.하여 그저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맞다는 뜻이네? 아이들의 친아빠라면 더욱 도와주면 안 되지. 전에 너한테서 아이들을 뺏어갈까 봐 항상 걱정했잖아? 만약 그 사람이 진짜 소영의 꾀에 넘어갔더라면 두 사람은 이제 한 쌍이 되는 거고 거기에 아이까지 낳으면 수현은 이제 아빠가 되는 몸이고 그럼 더 이상 너한테서 아이를 뺏어갈 일은 없잖아.”윤아는 현아가 한 모든 말이 다 맞기에 대꾸할 수 없었다.만약 오늘 밤 수현이 진짜 소영의 꾀에 넘어갔더라면 두 사람은 지금쯤...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기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윤이와 훈이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왜 그를 도와줬을까?분명히 처음에 그를 문전박대까지 했는데 왜 후회했을까. 그러다 마음 약해져서 다시 문을 열어 그를 집안으로 들이고 또...생각하다가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처음에 문을 열어줬을 때까지는 문제없었는데 두 번째부터...이건 분명 그녀의 탓이다.수현이 이 일로 오해가 생긴다면 분명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할말이 없지?”현아가 살짝 웃으며 물었다.“아직 수현이를 좋아하네. 아니면 왜 선우 씨한테는 이런 여지조차 주지 않는데?”윤아가 반박했다.“난 그저 너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을 뿐이지 너더러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해석해 달라는 게 아니야.”“겸사겸사 이 기회에 자기 마음도 알게 되는 거지. 우리 자매님을 대변해서 해석해 주면 좋지 뭐,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낫잖아.”“무슨 후회? 난 후회하지 않아.”“그래? 후회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그 사람을 내쫓아, 아직 기회가 있어. 어쩌면 그가 단념할 수도 있잖아.”“내가 그렇게 모질게 대한다고 그가 과연 단념할 사람일까?”“하긴.”
윤아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앞에 했던 말은 그렇다 쳐도 뒤에 말은 대체 무슨 뜻으로 내뱉은 말일까?“내 방에서 자겠다고?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윤아는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보고 말을 이었다.“설마 내가 그 계약에 사인을 했다 해서 우리 사이가 예전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건 아니겠지?”“아니.”수현은 눈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아까 찬물에 너무 오랫동안 몸을 담근 데다가 밖이 너무 추워서.”“추우면 이불을 덮으면 되잖아?”말을 마친 윤아는 몸을 돌려 이불을 꺼내려고 수납장을 열어보았으나 이미 텅텅 비어있었다.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그녀는 이불 한 세트를 더 준비해 뒀는데 그 이불은 이미 수현에게 줬다. 만약 그 이불마저 모자란거면...윤아는 다시 몸을 돌려 자기 침대 위의 이불을 그에게 주려고 했다.“이거 가져가. 이불 두 개면 충분하지? 지금 세시 넘었어. 또다시 찾아와서 내 휴식을 방해하면 그때는 진짜 내쫓아버릴 거야.”수현은 그녀가 자기 침대 위의 이불을 끌어안고 오는 모습을 보았으나 받지 않았다.“아니야, 됐어.”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윤아는 할말을 잃었다.“...”‘싫으면 말아!’더 이상 신경 쓰기 귀찮았다.윤아는 문을 닫은 뒤 다시 침대에 돌아와 이불을 뒤덮은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했다.허나 눈을 감은 지 십분도 넘었는데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수현이 춥다고 했던 말이 맴돌았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춥다고 한 말이 아예 신빙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찬물 샤워를 한데다가 최근에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거기에 이렇게 한겨울에 그런 추위를 겪었으니 어쩌면 위병이 다시 발작할지도 모른다.게다가 방금 윤아를 찾아온 모습은 거의 서있기도 힘들 정도로 허약해 보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아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이번 한 번뿐이고 마지막이다. 내일 그를 보내고, 나중에 그가 다시 자기 앞에서 불쌍한척해도 모른 체 할 것이다. 윤아는 문을
수현은 그녀의 하얀 팔목을 잡고 말했다.“내가 잘할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줄게. 목숨도 바칠 수 있어. 응?”하지만 윤아는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온도도 서서히 내려가는 것 같은데 왜 그의 입에서 생명 문학까지 나오지?“안 돼.”윤아는 그를 대신해서 알코올로 몸을 닦아주며 무표정한 얼굴로 거절했다.“손들고 뒤돌아 누워. 등도 닦아 줄게.”만약 수현이 깨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윤아가 자기 절로 닦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왕 그가 깨어났으니 체력도 아낄 겸 그더러 뒤돌게 했다.결국 한참 동안 기다려도 꿈쩍하지도 않는 수현을 보고 윤아가 다시 재촉했다.“빨리.”가만히 누워있던 수현은 그제야 팔을 들었다. 윤아는 그가 돌아눕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고 있던 팔로 그녀의 목을 휘감더니 그대로 자기 품에 안았다. “악!”윤아는 깜짝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그의 품에 엎어졌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턱을 잡았는데 서늘한 기운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쳐왔다.마침 두 사람의 이마가 서로 맞닿게 되었는데 한껏 다정해 보이기도 했다.“왜 안 돼?”남자는 뜨거운 숨을 그녀의 얼굴에 뿜어댔다.입술과 입술이 거의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두 사람의 숨결이 뒤엉키면서 분위기도 같이 야릇해졌다.윤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이런 분위기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뒤로 물러서려 했는데 남자는 떨어지기 싫어 다시 거리를 좁혔다.그의 숨결이 다시 가까워지자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피했다.하지만 행동이 너무 느린 탓에 부드러운 입술이 남자로 인해 그대로 포개졌다.윤아의 호흡이 순간 뒤틀어졌다.그녀가 움직이기 전에 이미 재미를 본 수현은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더니 놀라서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입술을 사납게 삼켰다.“웁...”윤아는 그를 밀쳐내려고 손을 뻗었는데 마침 손이 그의 가슴 쪽에 닿자 수현은 짜릿함을 느꼈는지 뒤통수를 잡고 있던 손을 그녀의 목 쪽으로 옮기면서 엄지손
키스하자마자 쓰러진다고?입술엔 아직도 그의 온기가 남아있는 듯했고 심지어 조금 부어오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까 이런 일을 한 인간은 지금 소파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마음에 안 들어...윤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수현의 준수한 얼굴을 훑어보았다.아까는 멀쩡하더니 밀자마자 쓰러진다고?윤아는 손을 뻗어 수현의 얼굴을 툭툭 쳤다.“진수현, 쓰러진 척 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그러나 수현은 조금의 반응도 없었다. 이를 본 윤아가 그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또 열이 나기 시작했다.설마 아까 너무 격렬하게 키스해서 그런가...방금 전, 정욕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던 수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그녀를 깔끔하게 먹어 치웠을 게 뻔했다.윤아는 입술을 꼭 깨물며 속으로 머리채를 잡았다.어쩌다가 순순히 따라갔지? 어흑,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오...“너 설마 아직도 진수현 사랑하는 거야?”현아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사랑...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윤아.이 때문에 수도 없이 아팠었다.“5년이나 지났어.”아픔을 남겨줬던 곳을 떠나면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활달하게 살 줄 알았다. 가시로 가득했던 사랑을 싹둑 자르고, 잊고 살 수 있으리라 여겼으니까.“정말 현아 말대로 나 아직... 진수현을 사랑하고 있나...”그러나 사랑은 인간이 모르는 곳에서 뿌리를 두고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우매한 인간을 간간이 비웃으며 존재를 드러내면서.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윤아의 안색은 서늘하게 변했다.-이튿날.“고독현 아저씨, 고독현 아저씨.”아이들의 부름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정신을 차린 수현. 눈을 뜨자마자 앞에 엎드린 작은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지금 작은 손으로 그를 힘껏 흔들고 있었다.수현이 깬 것을 보자, 아이는 활짝 웃었다.“아저씨, 드디어 깨셨네요!”원래 머리가 깨질 듯 아파 기분이 좋지 않았던 수현은 아이의 맑은 웃음과 귀여운 소리를 듣자 신기하리만치 많이 나아진 것
다만 일부 화면만 눈앞에 선명히 나타났다.예를 들어서 윤아가 그를 문밖에 가둔 장면과 나중에 문을 열고 그를 들여보낸 장면.윤아가 침대에서 이불을 안고 와 그에게 건넸지만 그가 받지 않았던 장면.아, 그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윤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던 장면과... 두 사람의 몸이 엉킨 채 키스하던 장면도 떠올랐다.격렬한 입맞춤이었다...이런 화면이 수현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면서 마음을 점점 불타오르게 했다.수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수현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며 예쁜 각도를 만들었다. 어젯밤 그는 느꼈다. 키스할 때 윤아가 호응해 줬다는 것을.윤아는 어쩌면 그를 그렇게 싫어하지 않은 걸 수도 있다.이런 생각만 해도 수현은 기분이 좋아졌고 눈앞이 훤히 밝아왔다. 전에 지끈지끈 그를 괴롭히던 두통도, 돌멩이가 짓누르듯 가슴이 답답하던 증세도 지금은 전부 사라졌다.“심윤아, 심공주...”속삭이듯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전에 수현은 이미 마음을 먹었다. 윤아가 조금이라도 그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면,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 정도라고 해도 그는 영원히 손을 놓지 않겠다고 말이다.그 시기가 바로 지금이었다. 수현은 확실히 윤아에게서 오매불망 기다리던 감정 표현을 느꼈다.“콜록콜록.”약효가 떨어지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또 어제 찬 물로 샤워까지 하는 바람에 몸이 더 불편해진 수현이 연이어 기침을 했다. 하지만 어젯밤 일만 떠올리면 꿀을 듬뿍 먹은 듯 진한 달콤함이 밀려왔다. 신기하게도 안 좋은 몸 상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듯했다.구름에 가려졌었던 무언가가 서서히 걷히며 형체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답을 얻지 못했던 물음에 진지하게 입을 열 용기가 생겼다.남녀 사이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굳이 기나긴 해석으로 풀이할 필요가 있을까. 어릴 때부터 윤아와 줄곧 함께 지내서 그런지 그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희로애락을 자신의 감정으로 여겼다. 윤아가 기쁘면 따라서 웃었고 그녀가 슬프면 곁
수현의 행동에 윤아는 눈썹을 찌푸렸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윤아 쪽을 향해 두 걸음 다가갔다. 이를 본 윤아가 연 걸음 후퇴했다.수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더 밀어붙였다. 허리가 현관의 수납장에 닿았을 때 수현과 거리를 유지하려던 윤아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뒤로 젖혔다. 이때 큰 손이 그녀의 허리춤을 타고 올라갔다. 움찔하며 시선을 올리니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현과 눈을 마주쳤다.“네가 날 붙잡지 않으니 남을 수밖에.”허!뻔뻔한 인간!이때 그녀의 허리에 조용히 죽어 있던 큰 손이 느리게 위로 올라갔다.“너어...!”윤아는 큰 적이라도 만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지금 뭐 하는 거야?”수현은 윤아의 목덜미 부근에 고개를 푹 숙이며 가볍게 웃었다. 뜨거운 열기가 목에 닿자 윤아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듯 간지러웠다.“심 공주.”수현이 낮은 소리로 윤아의 애칭을 불렀다.“예전에 몰랐던 일을 알게 돼서 말이야. 그래서 가지 않을 거야.”가지 않는 거로 과연 끝날까. 백배 천배 더 매달리리라.말이 끝난 후, 수현은 윤아의 몸에 두었던 손을 내렸다.“가자. 아침 먹으러.”주방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는 수현과 반대로 아까 그 자리에 혼자 남은 윤아는 멍해 있었다.무슨 뜻이야? 예전에 몰랐던 일은 또 뭐고?진수현 저 인간, 도대체 뭘 알아챘다는 거야?아 진짜, 심란해 미치겠어!윤아가 입술을 꾹 다물며 봉지를 들고 수현의 뒤를 따라가려던 찰나, 몇 걸음 나아갔던 수현이 갑자기 몸을 돌려 그녀의 손에서 봉지를 낚아채 갔다.“내가 할게.”반항할 틈도 없이 봉지는 이미 강제적으로 수현의 손에 들어갔다.그는 봉지 안에 든 아침을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았다. 윤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수현이 음식을 다 차려 놓은 후, 뭔가 떠오른 윤아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타깝게도 이미 늦은 상태였다.테이블에 놓인 사 인분의 아침밥을 보며 수현이 유쾌하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 건가?윤아는 곧 이 일을 통해 어젯밤 수현이 속았던 일이 떠올랐다.설마 강소영을 찾아가서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마음 약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은인에게 손을 쓸 수 있을지도 문제였다.전에 소영이 자신을 도왔던 일 때문에 윤아는 꼬박 5년 동안 신세를 갚았고 또 소영이 요구한 여러 가지 조건도 응해주었다. 그러니 수현의 목숨을 구했던 일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다 갚을 수 있을까.신세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목숨을 구한 은혜는 더 했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한 그림자가 갑자기 그녀의 앞에 걸어오더니 그녀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허리를 굽혀 그녀의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윤이는 부끄러운 듯 얼른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감쌌고 훈이도 자리에 멍해 있었다.하룻밤 사이에 엄마와 아저씨 사이의 진도가 이렇게 되다니.훈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실은 윤아 본인도 무척이나 놀랐다. 헐.이 인간 진짜 미쳤나 봐. 어젯밤 나한테 키스하자마자 쓰러진 것도 모자라 이젠 아이들 앞에서까지 뽀뽀하다니...하느님이시여, 저 인간이 돌았나요, 아니면 제가 돌았나요...아쉬움이 듬뿍 자리 잡은 마음을 이기지 못한 수현이 입을 맞추고 물러나려던 중, 다시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머금었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줘.”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윤아가 자신을 밀어내기 전에 얼른 손을 놓고 빠른 걸음으로 줄행랑 치는 수현.쾅!문이 닫힌 후, 윤아는 두 아이를 보며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반면, 윤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쁘게 물었다.“엄마, 정말 고독현 아저씨랑 결혼할 거예요? 그럼 앞으로 아저씨가 우리 아빠 하는 거예요?”“아니, 그런 게 아니야. 엄마가 잘 설명해 줄게.”“하지만 어젯밤에 아저씨께서 우리 집에서 잤잖아요. 아저씨를 우리 아빠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왜 집에서 자게 했어요?”윤아는 주저하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말하는 걸 잊었다면 괜찮았다. 그런데 엄마가 속상해할까 봐 말하지 않았다는 딸애의 말에 윤아는 더 가슴이 아팠다.마음에 품고 사랑으로 애지중지 키운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렇게 안 좋은 소리를 듣고도 그녀를 일 순위에 두고 그녀의 기분부터 챙겼다.마음이 저릿하며 코끝이 찡해 났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야가 흐릿해졌다.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힌 윤아에 비해 딸애는 동경으로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하지만 엄마, 이제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에겐 곧 아빠가 생기니까요! 나중에 선생님께서 윤이랑 오빠에 관한 나쁜 얘기를 할 때 윤이가 아빠한테 혼내 주라고 할게요.”나이가 어리다 보니 딸애는 생각이 단순했다.사실 윤아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혼자 그들을 키우는 엄마를 많이 안쓰러워한다는 것을. 사소한 일로 엄마를 힘들게,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늘 어른스럽게 행동한다는 것을. 그래서 이런 일도 그녀에게 숨겼던 것이다.이만한 나이에도 이러는데 앞으론?기나긴 성장의 과정에서 또 다시 이런 일을 겪게 될 때마다 엄마를 생각하고 엄마를 위해 이 서러움을 꾹꾹 내리 삼켜야 한단 말인가.윤아 본인도 유년 시절에 이런 억울함을 겪었었다. 다만 그때 사람들이 공격한 대상은 그녀의 엄마였다. 매번 수현이 곁에서 지켜 주긴 했지만 밤이 깊어질 때마다 그녀는 사람들이 떠들고 다니는 말이 대단히 신경 쓰였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는 응어리로 가슴 속에 푹 묻혀 있었다.지금... 그녀가 겪었던 아픔을 아이들도 겪게 해야 한단 말인가...이런 생각에 윤아는 원래 하려던 말을 모두 내리 삼켰다.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볼 생각이다. 수현이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 관찰해본 후 결정을 내릴 것이다. 만약 제대로, 깔끔하게 처리하기만 한다면 아이들이 그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허락하겠다고, 윤아는 다짐했다.어찌 됐든 수현의 핏줄이었다. 그리고 현재 수현이 아이들에게 한 일을 보면 그가 정말 진심으로 아이들을 중시하고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