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윤아가 부드러운 손으로 셔츠 첫 번째 단추를 풀자마자 수현이 갑자기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힘도 엄청난데 꽤 폭력적이었다.윤아가 고개를 드니 수현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리 밝지 않은 거실에서 수현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는데 눈빛이 마치 한 마리의 늑대 같았다.그리고 단번에 그녀를 덮칠 것 같았다.그의 모습에 윤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어쩌면 깨어난 것도 다행이다. 자기 절로 알코올로 몸을 닦으면 된다. 단지... 그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설마 이성을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비록 그녀가 직접 당해본 건 아니지만 만약 그 물건에 취하게 되면 자기 몸을 컨트롤하기 매우 어렵다고 듣기는 했으나 만약...윤아는 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녀의 팔목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더욱 세지고 수현의 호흡도 아까보다 더 거칠어졌기 때문이다.윤아의 얼굴빛이 살짝 변하더니 애써 손을 뿌리치려 했다.“알코올과 물수건은 여기에 둘게. 이미 깼으면 혼자서 닦.... 악!”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수현에게 끌려갔고 곧 하늘과 땅이 뒤집히더니 단번에 그녀를 소파 위에 깔아 눕혔다. 청초했던 남자의 숨결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그녀의 온몸을 간지럽혔다. 윤아의 손은 또다시 결박된 채 머리 위로 올려졌고 남자는 몸을 천천히 숙였다.윤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순간에도 방안에 두 아이가 곤히 잠들고 있다는 생각에 목소리를 낮추고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진수현, 지금 뭐 하는 거야?”하지만 남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윤아가 그를 정신 차리도록 세게 걷어찰까 말까 망설이던 찰나 수현이 갑자기 모든 동작을 멈춘 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윤아는 그가 지금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죽을힘을 다해 애써 참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여 그의 미간은 아까부터 찌푸려져 있었고 뱉어내는 숨도 뜨
“들어오지 마.”수현은 애써 자제하는 듯했지만 숨은 여전히 거칠게 몰아쉬었다. 또한...그것에 중독된 상태이기에 지금 안에서 말로 묘사하기 힘든 짓을 할 것이다. 윤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당장 그를 안에서 꺼내주고 싶었다.참다못해 그녀는 문밖에서 그에게 말했다.“너... 찬물 샤워만 해. 다른 이상한 짓은 하지 말고.”하지만 안쪽에서 들리는 건 물소리를 동반한 낮은 숨소리였다.윤아는 살짝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수현 씨, 내 말 듣고 있어?”“수현 씨!”윤아가 아무리 수현을 불러도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말을 상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금 아주 바쁜 상태라 그녀의 말에 대답할 시간이 없다.윤아는 화가 났지만 여기서 더 이상 소리쳐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포기했다.하여 다시 몸을 돌려 거실로 가서는 그가 마셨던 물컵을 부엌에 가져가서 씻은 뒤 다시 돌아와서 두 아이의 상태를 살펴보았다.다행히 두 아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어 윤아는 조금이나마 안심되었다.몇 분 기다렸다가 그녀는 다시 화장실 쪽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안에서 물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수현은 마치 화장실에서 잠들었는지 그녀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문 앞에서 여전히 이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이 나쁜 자식!’윤아는 속으로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지만 결국에는 거실에 와서 이불을 껴안은 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기다리다 못해 그녀는 졸리기 시작했지만 수현은 여전히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아 이제는 아예 소파에 기대 살짝 눈을 감았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윤아가 갑자기 잠에서 깼다. 거실은 여전히 조용했으나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수현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설마 욕실에서 너무 추운 나머지 쓰러진 건 아니겠지?’윤아는 냉큼 이불을 가지고 욕실로 향했다. 이번에는 더 이상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욕실 안은 고요했다.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뭐?”콸콸 흐르는 물소리 때문에 윤아는 수현이 낮은 목소리로 뭐라고 말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어쩔 수 없이 쪼그리고 앉아 다시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수현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이 옷은 어디서 났냐고.”‘집에 남자도 없는데 이런 남성복은 대체 어디서 난거지?’이번에야말로 윤아는 똑바로 알아들었는데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수현은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토라진 듯한 말투로 말했다.“다른 남자의 옷은 싫어.”윤아는 할말을 잃었다.“...”그의 표정과 말투를 보아하니 분명 이 옷이 다른 남자의 옷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그래서 지금 입지 않겠다고?’수현의 말을 듣고 윤아는 그의 면전에 대놓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입지 마. 여기에 계속 앉아 있어. 까다로운 분인 것 같은데 지금 당장 비서한테 전화해서 모시고 가라고 할게.”‘한밤중에 여기까지 와서 행패를 부린 것도 모자라 편하게 자게도 못 했으면서 지금 투정까지 부려?’‘그렇게 버릇을 들일 수는 없지!’말을 마치고 윤아는 자리를 뜨려고 했으나 한 발짝 떼는 순간 옷이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숙여보니 수현이 그녀의 옷자락을 손에 쥐고 있었다.윤아가 눈살이 찌푸려진 채 그에게 물었다.“뭐 하는 거야?”수현은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눈을 내리깔고 다시 창백한 입술로 말했다.“날 내쫓지 마, 입으면 되잖아.”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윤아는 자꾸만 자신이 수현을 다치게 하고 비참하게 만든 것 같아 숨이 막혀왔다. 그의 모습이 불쌍한 유기견이랑 다를 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윤아는 순간 두통이 밀려와 미간을 긁적였다.“놔.”“그럼 계속 나를 내쫓을 거야?”윤아가 답했다.“여기에 있어서 뭐 하려고? 그만 집에 가면 안 돼? 지금 체온도 내려갔고 다 나았잖아.”“내가 괜찮아져서 내쫓는 거야?”“아니면?”“알았어.”수현은 손에 쥐고 있던 샤워 헤드를 내동댕이쳤다.“그럼 온수 샤워는 그만할래.”윤아는 할말을 잃었
머릿속에는 하나의 물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 남성복은 대체 누구의 것일까?’수현이 올 것을 미리 짐작하고 준비해 둔 건 아니겠지?그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옷을 갈아입었는데 얼굴이 아까보다 더욱 거메졌다.상의와 바지가 한 사이즈 이상 커서 입어보니 매우 헐렁했기 때문이다.다행히 옷에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는데 입지 않은 상태에서 씻기만 한듯했다.하지만 그녀가 다른 남자들에게도 갈아입을 옷을 챙겨줬다는 생각에 수현의 안색은 더욱 검게 변했다.이선우...‘설마 진짜로 이 옷은 그 사람을 위해 준비한 것이란 말인가?’‘두 사람의 관계가 언제 여기까지 왔지?’수현은 갑자기 질투심이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안에서 뭘 꾸물거려?”윤아의 목소리가 문 앞에서 들려오자 수현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그가 나오자 윤아는 아래위로 훑어보았다.이 옷이 수현한테는 역시나 컸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옷이 좀 크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대로 입어.”말을 마치고 외투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이건 내 코트인데 먼저 걸치고 있어.”윤아의 옷이라는 말에 수현은 손을 뻗어 받았다. 그녀의 코트는 날씨가 추울 때 안에 옷을 많이 입기 위해 특별히 크게 산 것 같아 마침 수현이 입을 수 있었다.코트에서는 아주 옅지만 여전히 그녀의 향기가 배어있었고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현은 여전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마음에 걸렸다.하여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내가 입은 이 옷은 누구를 위해 준비해 뒀던 옷이야?” 듣고 있던 윤아가 살짝 머뭇거리다가 뒤돌아서 그를 쳐다보았다.“그렇게 궁금해?”수현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윤아도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이선우.”수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뭐라고?”“왜? 아까부터 지금까지 내가 선우 씨를 위해 이 옷을 준비해 뒀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어?”수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윤아가 자기 방에 돌아오니 그제야 모든 게 조용해졌다.아까 수현을 기다리면서 잠깐 졸았지만 이제 그의 몸 상태도 괜찮으니 안심하고 푹 잘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윤아는 침대에 누웠다. 진작에 잠에 들어야 했는데 자꾸만 오늘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수현이 소영의 속임수에 넘어갔지만 이 시간에 자신한테 달려왔다는 건 그도 소영과 어떤 관계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만약 예전이었으면 윤아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자신이 먼저 수현에게 이혼을 제기했으니까. 비록 두 사람의 결혼은 가짜라고 해도 당시 윤아를 향한 수현의 마음은 유난히 티가 났다.그런데 왜 그와 소영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을까?윤아가 왜 이렇게 생각했냐면, 만약 수현과 소영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악독한 수법을 쓸 필요 없기 때문이다.원래는 두 사람 사이를 정리해 보려고 했으나 정리하면 할수록 윤아는 수현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웠다.원래대로라면 수현은 소영을 좋아했다. 또한 자기 생명의 은인이다. 하지만 그녀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게 많이 이상해 보였다.오히려... 윤아와 수현이 가짜 결혼이라지만, 두 사람은...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 윤아는 몸을 뒤척였다.‘말도 안 돼.’‘설마 수현이 어렸을 때 소영에 대한 고마움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착각한 걸까?’‘근데 어떻게 두 가지 감정을 헷갈릴 수 있지?’윤아는 생각할수록 납득이 가지 않아 아예 일어나 앉아서 캄캄한 창밖을 조용히 바라보았다.혹시...문득 현아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고민 끝에 윤아는 핸드폰을 꺼내 현아의 번호를 눌렀다. 시차 때문에 현아 쪽은 낮이었다.윤아의 전화를 받은 현아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나한테 낮에 전화한 게 이번이 처음이야. 왜? 그쪽은 이미 밤일 텐데 아직 안 잤어?”“나...”윤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현아와는 몇 년 동안 아무런 비밀도 없이 지낸 절친 사이라 그녀는 단번에 낌새를 알아채고 다급히 물었다.“무슨 일 있구나?”“응...”윤아는 고개를
윤아는 말문이 막혔다.“난...”“설마 아이들의 친아빠라서 집안으로 들였다고 핑계 댈 거는 아니지?”윤아는 할말이 없었다. 예상 밖으로 현아가 자신이 뒤에 말하려던 말을 단번에 알아맞혔기 때문이다.하여 그저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맞다는 뜻이네? 아이들의 친아빠라면 더욱 도와주면 안 되지. 전에 너한테서 아이들을 뺏어갈까 봐 항상 걱정했잖아? 만약 그 사람이 진짜 소영의 꾀에 넘어갔더라면 두 사람은 이제 한 쌍이 되는 거고 거기에 아이까지 낳으면 수현은 이제 아빠가 되는 몸이고 그럼 더 이상 너한테서 아이를 뺏어갈 일은 없잖아.”윤아는 현아가 한 모든 말이 다 맞기에 대꾸할 수 없었다.만약 오늘 밤 수현이 진짜 소영의 꾀에 넘어갔더라면 두 사람은 지금쯤...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기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윤이와 훈이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왜 그를 도와줬을까?분명히 처음에 그를 문전박대까지 했는데 왜 후회했을까. 그러다 마음 약해져서 다시 문을 열어 그를 집안으로 들이고 또...생각하다가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처음에 문을 열어줬을 때까지는 문제없었는데 두 번째부터...이건 분명 그녀의 탓이다.수현이 이 일로 오해가 생긴다면 분명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할말이 없지?”현아가 살짝 웃으며 물었다.“아직 수현이를 좋아하네. 아니면 왜 선우 씨한테는 이런 여지조차 주지 않는데?”윤아가 반박했다.“난 그저 너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을 뿐이지 너더러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해석해 달라는 게 아니야.”“겸사겸사 이 기회에 자기 마음도 알게 되는 거지. 우리 자매님을 대변해서 해석해 주면 좋지 뭐,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낫잖아.”“무슨 후회? 난 후회하지 않아.”“그래? 후회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그 사람을 내쫓아, 아직 기회가 있어. 어쩌면 그가 단념할 수도 있잖아.”“내가 그렇게 모질게 대한다고 그가 과연 단념할 사람일까?”“하긴.”
윤아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앞에 했던 말은 그렇다 쳐도 뒤에 말은 대체 무슨 뜻으로 내뱉은 말일까?“내 방에서 자겠다고?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윤아는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보고 말을 이었다.“설마 내가 그 계약에 사인을 했다 해서 우리 사이가 예전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건 아니겠지?”“아니.”수현은 눈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아까 찬물에 너무 오랫동안 몸을 담근 데다가 밖이 너무 추워서.”“추우면 이불을 덮으면 되잖아?”말을 마친 윤아는 몸을 돌려 이불을 꺼내려고 수납장을 열어보았으나 이미 텅텅 비어있었다.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그녀는 이불 한 세트를 더 준비해 뒀는데 그 이불은 이미 수현에게 줬다. 만약 그 이불마저 모자란거면...윤아는 다시 몸을 돌려 자기 침대 위의 이불을 그에게 주려고 했다.“이거 가져가. 이불 두 개면 충분하지? 지금 세시 넘었어. 또다시 찾아와서 내 휴식을 방해하면 그때는 진짜 내쫓아버릴 거야.”수현은 그녀가 자기 침대 위의 이불을 끌어안고 오는 모습을 보았으나 받지 않았다.“아니야, 됐어.”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윤아는 할말을 잃었다.“...”‘싫으면 말아!’더 이상 신경 쓰기 귀찮았다.윤아는 문을 닫은 뒤 다시 침대에 돌아와 이불을 뒤덮은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했다.허나 눈을 감은 지 십분도 넘었는데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수현이 춥다고 했던 말이 맴돌았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춥다고 한 말이 아예 신빙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찬물 샤워를 한데다가 최근에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거기에 이렇게 한겨울에 그런 추위를 겪었으니 어쩌면 위병이 다시 발작할지도 모른다.게다가 방금 윤아를 찾아온 모습은 거의 서있기도 힘들 정도로 허약해 보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아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이번 한 번뿐이고 마지막이다. 내일 그를 보내고, 나중에 그가 다시 자기 앞에서 불쌍한척해도 모른 체 할 것이다. 윤아는 문을
수현은 그녀의 하얀 팔목을 잡고 말했다.“내가 잘할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줄게. 목숨도 바칠 수 있어. 응?”하지만 윤아는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온도도 서서히 내려가는 것 같은데 왜 그의 입에서 생명 문학까지 나오지?“안 돼.”윤아는 그를 대신해서 알코올로 몸을 닦아주며 무표정한 얼굴로 거절했다.“손들고 뒤돌아 누워. 등도 닦아 줄게.”만약 수현이 깨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윤아가 자기 절로 닦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왕 그가 깨어났으니 체력도 아낄 겸 그더러 뒤돌게 했다.결국 한참 동안 기다려도 꿈쩍하지도 않는 수현을 보고 윤아가 다시 재촉했다.“빨리.”가만히 누워있던 수현은 그제야 팔을 들었다. 윤아는 그가 돌아눕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고 있던 팔로 그녀의 목을 휘감더니 그대로 자기 품에 안았다. “악!”윤아는 깜짝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그의 품에 엎어졌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턱을 잡았는데 서늘한 기운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쳐왔다.마침 두 사람의 이마가 서로 맞닿게 되었는데 한껏 다정해 보이기도 했다.“왜 안 돼?”남자는 뜨거운 숨을 그녀의 얼굴에 뿜어댔다.입술과 입술이 거의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두 사람의 숨결이 뒤엉키면서 분위기도 같이 야릇해졌다.윤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이런 분위기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뒤로 물러서려 했는데 남자는 떨어지기 싫어 다시 거리를 좁혔다.그의 숨결이 다시 가까워지자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피했다.하지만 행동이 너무 느린 탓에 부드러운 입술이 남자로 인해 그대로 포개졌다.윤아의 호흡이 순간 뒤틀어졌다.그녀가 움직이기 전에 이미 재미를 본 수현은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더니 놀라서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입술을 사납게 삼켰다.“웁...”윤아는 그를 밀쳐내려고 손을 뻗었는데 마침 손이 그의 가슴 쪽에 닿자 수현은 짜릿함을 느꼈는지 뒤통수를 잡고 있던 손을 그녀의 목 쪽으로 옮기면서 엄지손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