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윤아가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는 좋은 시작점이었다. 수현은 바로 대답했다.“맞아.”윤아는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아이들을 만나게 해줄 수 있어. 그런데 조건이 있어.”‘과연 나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군.’수현은 심장이 튀어나올 듯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대답했다.“그래. 말해봐. 조건이 뭔지.”“먼저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해. 당신과 아이들이 만나는 건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서야. 당신과의 혈연관계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어.”“알았어.”수현은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윤아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이어서 말했다.“당신을 아저씨라고밖에 부르지 않을 거야. 아이들한테 아빠라고 말하면 안 돼. 이 점에 동의하는지 알아야겠어. 아니면...”“약속할게.”윤아는 말문이 막혔다. 수현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나는 그저 못다 한 책임을 지려는 것뿐이야. 호칭은...”윤이와 훈이가 자신의 아이들이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수현은 매일 아이들이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을 기다려왔었다. 하지만 그는 이 5년 동안 윤아가 고생하면서 혼자 아이들을 키운 것을 잊지 않았다. 차마 두 아이에게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게 할 면목이 없었다. 어렵게 키운 아이들이 한순간에 그를 아빠라고 부른다면 윤아가 상처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욕심을 접었다. 더군다나 요즘 수현의 눈에는 윤아가 진짜로 아이들을 뺏기지는 않는지 불안해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긴 소영과 나 사이를 오해하면 그럴 수도 있지. 이젠 소영이 일도 해결했으니...’그는 시간이 필요했다. “당신 진짜 약속 지킬 수 있어?”윤아는 계속 신경 쓰여서 물었다.“정말 걱정되면 계약서를 쓰면 되잖아. 어때?”수현은 안심시키며 물었다.녹음하는 것만으로 윤아는 불안한듯하였다.“계약서?”“그래.”수현이 먼저 얘기를 꺼냈지만 윤아도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었다.윤아는 두 사람 사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회의심이 들었지만 지나간 일들은 다시 돌이
“그래.”윤아는 차에서 내려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수현이와 평온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이들 때문인가.’ 아니면 정말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가 아이를 지우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는 걸 알아서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일지라도 윤아는 따지기 싫었다. 그저 두 아이가 온전한 사랑을 받고 클 수만 있다면 그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윤아는 아이들이 자신과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낼까 두려웠다. 사무실에 도착한 윤아는 바로 계약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민우가 와서 면접 인원 몇 명 있다고 보고하자 그녀는 할 수 없이 같이 다녀왔다.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었다. 면접이 끝나고 윤아는 돌아와 계속 계약서를 마무리했다. 자신과 수현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며 관계가 있다면 아이들 때문에 이어진 관계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둘은 그저 이혼한 남남이었다. 윤아는 조항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작성한 후 예전의 변호사에게 연락했다. 윤아가 자신의 의도를 간략하게 설명하자 변호사도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윤아 씨의 의견은 아이들의 양육권은 여전히 윤아 씨에게 속하며 남자 측은 그저 아버지의 의무를 다할 뿐 실질적 권리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으시다는 거지요?”“네. 맞아요.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일단 작성한 조항을 제가 한번 볼게요.”변호사는 윤아가 작성한 계약서를 빠르게 훑어본 후 말했다.“네.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한 번 더 보완해서 드릴게요.”“네. 그렇게 해주세요. 고맙습니다.”전화를 끊은 후 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수현이라면 이런 불공평한 계약서에 절대로 사인을 안 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5년의 세월도 그녀에게 불공평하긴 마찬가지였다. ‘사인 안 하면 말지 뭐. 아이들을 떠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지. 내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잖아.’윤아가 생각에 잠겨있는 그때
심인철은 그 뒤의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윤아는 그런 그의 낌새를 눈치채고 먼저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요?”지금까지 한 번도 연애 얘기는 물은 적 없던 아빠이기에 윤아는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조금 의아해 났다. 설마 선우와 관계가 틀어진 걸 알게 되신 건가?“우리 공주님.”심인철이 윤아를 친근하게 불렀다.“아빠가 네 사생활을 물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 아무래도 이 일은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말씀하세요.”윤아는 마음의 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그게 말이다. 최근에 들은 바로는 그 집 영감이 선우의 짝이 될 여자를 찾는 중이라고 하더라.”‘짝이 될 여자를 찾는 중이라고?’그 말에 윤아는 한시름 놓으며 말했다.“아빠. 하시려던 얘기가 이거였군요. 전 또...”“왜 그래?”심인철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너한테 중요한 일 아니니? 너 선우랑...”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딸의 침묵에서 그도 뭔갈 눈치챈 듯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속상해할까 봐 걱정했는데. 그 사람과는 이미 끝난 거니?”“아빠. 저와 선우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붙잡아둔 것도 미안한데, 이제 정말 선우 앞길 막지 말아야죠.”“그래. 몇 년이나 봐 왔는데도 아닌 것 같다면 그래야지. 다만... 널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인데 정말 이대로 끝인 거니? 더 생각 해보지 않아도 되겠어?”“더 생각할 것도 없어요. 제 생각이 길어질수록 그 사람 시간만 더 낭비할 거예요. 그리고 저한테 잘해준다고 무조건 만나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선우가 저한테 잘해줄수록 그의 마음이 더 뚜렷이 보이는데 저를 향한 그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만난다면 그건 선우한테 너무 불공평하잖아요.”윤아도 그녀에게 지극정성인 선우에게 감동할 때도 많았다. 그런 그에게 마음을 줘 볼까 하는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다.하지만 아무리 노력해 봐도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몇 년이 지나도 윤아는 그를 사랑할
윤아는 담담하게 웃었다.“네. 만났어요.”윤아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그러자 심인철은 적잖이 놀란 듯 되물었다.“뭐? 아이에 대해서까지 다 알아버렸다고? 게다가 너와 같이 아이를 키우려 한다고?”“그저 같이 키우는 거지 공동 양육권은 아니에요.”윤아가 정정했다.“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놈이 다시 아이를 빼앗으려 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니?”“합의서를 작성했으니 그러진 못할 거예요.”“합의서에 사인 한다더냐?”“안 한다면 아이들 얼굴 볼 생각은 말아야죠.”윤아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때가 되면 아이는 그쪽에 보낼게요. 아빠가 아이들이랑 같이 지내주세요.”그 말에 심인철도 바로 승낙했다.“네 말이 맞다. 아이를 빼앗으려 하면 아빠한테 보내라.”“네.”“다만...”심인철이 또다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그 사람과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니? 이선우랑 헤어진 데에 정말 그 원인은 없었던 거야?”“그게 무슨 소리세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아빠. 그 사람 아니었어도 전 선우와 안됐을 거예요. 이건 정말 확신할 수 있어요.”그러자 심인철도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하긴.”오늘 물으려던 것도 다 물어봤으니 그는 윤아의 휴식에 방해가 되지 않게 짧은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핸드폰을 내려놓은 후 윤아는 사색에 잠겼다.선우네 집에서 벌써 선우의 짝을 찾고 있다니. 이렇게 서두르는 걸 보니... 이미 마음 정리를 다 끝내고 잘 살아가고 있는 모양이다.그도 이제 보통의 사람들처럼 결혼하고 아이도 갖는 그런 평범한 삶을 살겠지.윤아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드리웠다.뭐라 해도 한때 그녀에게 참 잘해줬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건 윤아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_오후에 윤아는 변호사에게서 수정을 마친 합의서 내용을 받아 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후 이메일을 통해 수현에게 보냈다.윤아의 이메일을 받은 수현은 큰 걱정 없이 내용을 확인했다. 윤아가 얼마나 깐깐하고 세심한 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으
결국 윤아는 복잡한 마음으로 수현과의 통화를 끝마쳤다.사무실 의자에 기대어 있는 윤아는 마음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그녀가 제시한 조건은 사실 수현에게 굉장히 불리한 내용이었다.그에게 아이들의 양육비는 물론 시간에 에너지까지 투자하라고 하면서 정작 자기는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양육권도 줄 수 없을뿐더러 아이들이 그를 아빠라고 부르는 일도 없을 것이다.어떻게 보면 그는 남의 아이를 키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두 아이가 그와 혈연적으로는 관계가 있다지만 성씨는 윤아의 성을 따르는 데다가 그를 아빠라고 부르지도 않으니.사실 수현이라면 얼마든지 이 황당한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다. 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밀어붙이거나.하지만 그는 이 모든 걸 다 받아들이겠다고 하고 있다. 심지어...윤아는 손을 올려 미간을 꾹 누르며 흐트러지는 정신을 다잡았다.“이건 진수현의 계략이야. 쉽게 믿어선 안 돼. 또다시 상처받진 않을 거야.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진수현도 이제 어릴 적 그 애가 아니야.”윤아는 스스로를 세뇌 하며 겨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야 윤아는 다시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_시간은 흘러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었다. 물건을 정리하고 회사를 나선 윤아의 앞엔 익숙한 검은 차량이 입구에서 보란 듯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 옆에는 수현이 차에 기대어 서있었는데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그도 그럴것이 마침 퇴근 시간이라 나오는 사람들이 많았을뿐더러 회사 사람들 중에 수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수현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져서 수군대기 시작했다.그들의 뒤에서 나오던 윤아는 이 광경을 보고는 주춤하더니 곧바로 발길을 돌려 구석진 곳으로 몸을 피했다.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도망간 윤아는 그제야 숨을 돌렸다.진짜 어이없는 사람이다. 분명히 얘기 했는데 또 이렇게 약속을 어기고
수현은 하는 수 없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알았어.”하지만 윤아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말투도 어딘가 이상한 것이 아무래도 말로만 알겠다고 하고 또 마음대로 행동할 것 같았다.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수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그런데 난 네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진 않았어.”“?”“지금 주고 있잖아.”그러자 수현이 한참 후에 다시 입을 뗐다.“내가 데리러 오든 말든 넌 평소대로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퇴근도 할거잖아. 내가 와주면 기름값도 아끼고 아침값도 아끼는 거 아닌가.”아침밥을 수현이 사긴 했지.“그럼 내가 뭐 고맙다고 해야 해?”“괜찮아.”수현이 사뭇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내 아이와 아이 엄마한테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윤아는 수현과 말도 섞기 싫어졌다.“나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그는 윤아가 거절할까 봐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아이들 기다리겠다.”“...”그는 윤아를 다루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윤아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의 차에 타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수현도 그걸 눈치챈 듯 말했다.“계약이 성사되면 앞으로 이런 기회는 많을 거야. 어차피 나와 아이들 사이는 숨긴다 해서 숨겨지는 일이 아니야. 사람들도 언젠간 알게 되겠지.”듣고 보니 그렇긴 하다.“알았어.”윤아는 짜증스럽게 전화를 끊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그녀는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수현에게 다가갔다.다가오는 윤아를 보자 수현의 입꼬리는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서서히 올라갔다. 그는 자상하게 손수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구애하는 공작새와 같이 우아했다.윤아는 회사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피해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쾅.차 문이 닫히던 그때, 윤아는 마침 고개를 돌린 운전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윤아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며 운전기사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윤아 아가씨.”그의 가벼운 인사에 윤아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이윽고 수현도 빠르게 차에 올
합의서에 무슨 수작이라도 부린건지, 아니면 정말 그의 말대로 차에서 글을 읽는 게 눈에 안좋다고 그러는건지는 알 수가 없다.수현은 이미 합의서를 도로 넣었고 덕분에 윤아도 계속해서 읽을 수 없게 되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윤아는 수현과 더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아졌다.수현도 그런 윤아의 생각을 눈치 챈건지 더 말을 걸지 않았다.둘은 그렇게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침에도 아이들은 수현이 등교를 시켰다. 그리고 이번에도 윤아가 움직이지 않아도 수현이 능숙하게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두 녀석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윤아에게 안기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윤이는 수현이 아직 차에 타지 않은 틈을 타 작은 얼굴을 들어올리며 소곤소곤 물었다.“엄마, 고독현 밤 아저씨를 우리 아빠로 허락한거예요?”그 질문은...윤아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주춤하던 그때, 수현이 어느새 차 문을 열고 들어왔다.윤아는 턱끝까지 올라왔던 말을 삼키고 급하게 말을 돌렸다.“우리 애기, 그건 엄마가 돌아가서 얘기해 줄게.”그녀의 말에 윤이는 고분고분하게 알겠다고 한 후 입을 다물었다.운전기사는 빠르게 그들을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수현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저녁 같이 먹을래?”그 말에 윤아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다음에.”수현은 기어코 그 설계도를 윤아의 손에 쥐어주더니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합의서 다 보고 시간 남으면 그것도 봐.”윤아는 어느새 손에 쥐어진 설계도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이만 돌아가.”말을 마친 윤아는 두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수현은 차에 기댄 채 윤아와 그녀의 두 아이가 무사히 집에 들어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고는 그제야 차에 탔다.차에 탄 수현은 차창을 내리더니 평소와 같이 차가운 시선으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백미러로 그런 수현의 모습을 힐끗 보던 운전기사는 그가 오늘따라 어딘가 좀 이상한 듯 싶어 조심스레 말했다.“대표님
하지만 소영이 어떤 사람인지 운전기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수현의 말에 바로 차에서 내리는 대신 조심스레 물었다.“소영 아가씨가 안 가시면 어쩌죠?”“이 비서한테 전화하세요. 사람 불러오라고.”그 말에 운전기사는 마음속에 수가 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곧이어 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었다.소영은 가방끈을 손에 꼭 쥔 채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가방 안에는 엄마가 그녀를 도울 거라며 챙겨준 물건이 들어있었다.소영은 이제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바로 찾아오는 건 승산이 없는 것 같아 며칠 잠자코 있을 예정이었지만 그녀의 엄마인 유지혜가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며 그녀를 부추기는 바람에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다.소영은 조금 긴장한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승패는 한순간에 달려있다. 그녀는 오늘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그러나 차에서 내린 사람은 수현이 아닌 그의 운전기사였다.소영은 그녀에게 다가오는 운전기사를 한 눈 보고는 시선을 돌려 차 안을 보았지만 어두운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운전기사에게 물었다.“수현 씨는?”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그녀의 말투에는 운전기사에게 따지는 듯한 뉘앙스가 풍겼다.운전기사는 윤아와 다른 소영의 이런 성격을 참 싫어했다. 특히 부잣집 아가씨라고 사람 깔보는 듯한 저 태도.소영은 운전기사에게 뭘 물을 때마다 저런 태도다.그는 원래 예의를 갖춰 돌아가달라고 할 참이었지만 소영이 이렇게 나오자 빈정이 확 확 상해 퉁명스럽게 말했다.“아가씨. 저희 대표님께서 아가씨와 만나고 싶지 않으니 이만 돌아가시랍니다.”그러자 소영은 안색이 확 바뀌더니 차 안을 보았다.“수현 씨가 그렇게 말하라고 했다고요?”운전기사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이 아가씨 보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어요.”조금 전까지만 해도 콧대 높게 굴던 소영은 순식간에 풀이 죽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기사 아저씨.”“...”“저 대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