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수현 씨 이제 나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아요.”“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넌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소영은 지혜를 보면서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밤이 깊었지만 수현의 서재는 계속 불이 켜져 있었다.그는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빽빽하게 적은 노트와 설계도가 놓여있었다. 평소 깔끔하던 그의 책상은 자연스럽게 어질러져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설계도를 그려나갔다.수현은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그가 설계도를 완성했을 무렵, 창밖은 새벽 어스름 속에 날이 밝아왔다. 밤을 새운 수현의 눈은 핏발이 섰지만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뭔지 모를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시계를 쳐다봤다. 윤아와 아이들이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아직 완벽한 설계도는 아니지만, 바람에 날아갈까 그는 조심히 창문을 닫고 씻으러 들어갔다. 어젯밤에 돌아와서 씻지도 못한 채 책상 앞에 앉아 꼬박 하룻밤을 새우고 설계도를 그렸었다. 이따 윤아를 만나러 가기에 이 꼴을 한 채로 갈 수는 없었다. …윤아도 밤새 잠을 설쳤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눈에는 다크서클이 드리워졌다.최근 벌어진 일 때문에 윤아는 살이 빠지고 얼굴은 더욱 작아졌다.깨어나니 상처가 살살 아파졌다. 검사 결과에는 문제가 없다고 나왔지만 그녀는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오늘 아침에는 상처가 더욱 욱신거리고 아픈 느낌이었다. ‘어제 샤워하다 상처가 물에 닿았나? 다시 염증이 생긴 건가?’그녀가 옷을 입으려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머리에 전해졌다. 그리고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화면은 짧고 흐릿했다. 그녀가 강에서 허우적거리다 물속으로 가라앉기 직전 화면인 것 같았다. 이는 윤아에게 아주 낯선 기억이었다. 어렸을 적 이런 기억이 없었는데...불현듯 윤아는 뭔가 생각이 났다. 어릴 적 물에 빠졌다가 크게 앓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인 건가?’그녀는 한참을 앉아서 생각을
윤아는 생각해 내려고 애를 썼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몇 개의 화면만 떠오를 뿐이었다.밝아오는 창밖을 보면서 윤아는 할 수 없이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두 아이도 마침 옷을 챙겨입고 나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윤아는 아이들이 스스로 옷을 입을 수 있도록 가르쳤다. 자기 전에 다음날 입을 옷을 머리맡에 준비해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이면 꾸물거리지 않고 바로 일어나 옷을 찾아 입을 수 있도록 교육했더니 이젠 아이들도 익숙해져서 아주 잘 따라왔다. 그래도 윤아는 매번 아이들이 따뜻하게 잘 챙겨입었는지 검사해 주었다.“엄마. 오늘 아침 샌드위치 먹어도 돼요?”윤이가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그래. 엄마가 만들어 줄게.”“아니. 엄마가 만든 건 말고. 파는 거 먹고 싶어.”윤아는 이해가 되지 않은 듯 물었다.“왜? 엄마가 한 게 맛이 없어?”딸이 우물쭈물하면서 입을 떼려고 한 순간, 훈이가 말했다.“ 엄마, 윤이는 밖에서 파는 간식을 먹고 싶어서 그래요. 떡볶이랑 어묵도요.”“오빠!”‘그런 거였구나’샌드위치는 금방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떡볶이를 만들기엔 아침에 시간이 모자랐다. 윤아는 평소에 아이들에게 길거리 음식을 잘 사주지 않았다. 하지만 딸이 그렇게 간절하게 쳐다보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먹으러 가자.”세 사람은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생각에 잠긴 그녀는 미처 아이들이 수현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수현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가 메고 있던 아이들의 가방을 잡았다.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가방끈을 움켜쥐었다. 수현은 개의치 않고 그녀에게서 가방을 뺏어 들고 자기의 에깨에 멨다. “여긴 왜 왔어?”윤아는 입술을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계획서를 보여주려고.”“계획서?”‘아직 출근 시간도 멀었는데 무슨 계획서를 보여준다는 거지?’“우선 차에 타서 얘기하지.”가방을 고쳐 매고 수현은 앞장섰다. 그리고 그 뒤에 꼬맹이 둘이 쫄래쫄래 따라나섰다. 그녀의 기억
“무시하면 안 돼? 네가 그렇게 잘났어? 부르면 내가 꼭 대답해야 해?”윤아는 화가 나서 그를 밀치고 도망갔지만 이내 수현에게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어딜 가? 똑똑히 말하라고.”그녀가 학교에 없으면 그는 윤아 집까지 쫓아가곤 했다.어릴 적부터 죽마고우였던 사이라 집안의 가정부들도 수현을 보면 웃으면서 문을 열어주곤 했었다. 하루는 윤아가 집사에게 그를 들여보내지 말라고 졸랐지만 집사는 허허 웃기만 했었다.“아가씨 또 진 씨 도련님이랑 싸우셨어요? 다 그렇게 장난치면서 크는 거지요. 금방 화해하게 될 거예요.”“흥, 다시 수현이랑 안 놀 거예요. 수현이 문 열어주시면 안 돼요. 그러면 저 진짜 화낼 거예요.” “집사 할아버지. 들어가게 해주세요. 윤아가 계속 저랑 놀지 않으려고 해요.”매번 수현이 조르면 집사는 문을 열어 그를 들여보내 줬다.지금도 윤아는 그때 집사 할아버지가 수현에게 매수되었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엄마.”아이의 목소리에 윤아는 정신이 돌아왔다.두 아이는 벌써 차에 탄 채로 그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윤아는 할 수 없이 아이들 따라 차에 올라탄 후 수현과 떨어져 앉았다. “아침은 먹었어?”“고독현 아저씨, 엄마가 샌드위치 사준다고 했어요!”샌드위치?“길거리 샌드위치 말하는 거야?”수현이 물었다. “네!”윤아는 대꾸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의 의아한 눈길에 그만 발끈해서 물었다.“왜? 길거리 샌드위치 먹는게 체면이 깎이는 건가? 하긴 당신의 옷차림은 길거리 음식을 사 먹는 사람 같지는 않네. 애들이랑 나 먼저 내릴게.”“그런 게 아니라.”수현은 다급하게 윤아의 무릎을 잡았다. 이혼한 사이였지만 윤아는 불쾌하거나 하지 않은듯했다.“당신과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거라면 무엇이든 다 좋아.”“정말?” 윤아는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고독현 밤 님께서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야?”‘고독현 밤’이라는 호칭에 수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윤아야,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마.”“왜? 당신이 직접 지은 이름
종이에 빼곡하게 적힌 내용을 보고 윤아는 내심 놀랐다. 모두 수현의 필체였다.‘하룻밤 사이에 이걸 다...’윤아는 그제야 그의 눈에 다크서클이 자신보다 더 심해 보이는 걸 알았다. 아까는 예전과 같은 멀끔한 모습에 알아채지 못했었다.계획서를 대충 훑어보고 윤아는 다시 수현에게 돌려줬다.수현이 당황한 듯 물었다.“다 본 거야?”윤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수현은 건네받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렇게 빨리. 자세히 보긴 했어?”“봤다니까.”윤아의 심드렁한 반응에 수현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애써 웃으며 물었다.“이 설계도가 당신 마음에 안 들어?”윤아는 싱긋 웃으면서 그를 보고 말했다.“밤새 사람 찾아 설계도 그리느라 고생하셨네요.”수현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수현은 그녀가 진짜로 자신이 직접 그린 설계도를 알아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그저 자신을 화나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수현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설계도를 두 아이에게 보여줬다. 윤아는 의아했다. 이 설계도는 자신이 밤새 만든 거라고 얘기할 줄 알았는데 수현은 티를 내지 않았다. 대신 어린 딸이 수현의 조력자로 나섰다.“와. 이거 다 아저씨가 그린 거예요?”윤이는 빼곡하게 그린 설계도를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윤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딸을 쳐다봤다. ‘내 딸 이거 진짜 엑스맨인 거 아니야?’수현은 윤이의 질문이 맘에 든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윤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대답했다.“그래. 다 이 아저씨가 그린 거란다.”“우아.”무엇을 그린 건지도 모르고 빼곡한 그림을 보면서 윤이는 감탄하고 있었다.“고독현 아저씨. 정말 대단해요!”딸에게 칭찬받은 수현은 처음 느끼는 감정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구름을 나는듯한 기분이란 게 이런 건가.“윤아, 아저씨가 그린 그림 잘 보면 안에 뭐든 다 있어. 만약에 윤이라면 이런 집에서 살고 싶어 할까?”“네! 저는 좋아요!”윤이는 신나서 우
마침 출근 시간이라서 안에는 간단히 아침을 때우려는 사람들로 붐볐다.등교 시간에 맞춰야 해서 차를 안까지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시 차를 가지고 나오려면 한참이 걸릴 게 뻔했다. “자. 여기서부터는 우리 내려서 걷자.”윤아가 입을 떼기도 전에 수현은 두 아이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윤아는 그런 수현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대표님, 제가 차를 저 앞에 대고 기다리겠습니다.”운전기사는 말을 들은 윤아는 할 수 없이 따라 내렸다. “진짜 그 비싼 정장 차림으로 들어가도 괜찮겠어?”수현은 그런 그녀를 돌아보면서 말했다.“왜. 문제 있어? 그쪽 차림도 만만치 않은데.”윤아는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보았다. 까만 슬랙스 바지에 하늘색 스웨터, 그리고 베이지색 아우터. 평범한 출근 복장이었다. 어리둥절한 윤아를 보면서 수현은 말했다.“못 믿겠으면 주위 사람들 표정 봐봐.”그들이 차에서 내린 후부터 주위의 시선은 모두 그들에게 향했다. 잘생긴 선남선녀에 귀여운 아이 둘까지.“놀랄 것 없어. 당신 같은 얼굴은 비닐봉지 써도 사람들이 쳐다볼 테니깐.”“가자.”수현은 한 명을 안고 한 명은 손을 잡은 채 앞장서서 걸어갔다. 윤아는 벙찐 얼굴로 그들 뒤를 따라갔다.‘뭐야? 아까 그거 칭찬이야?’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들이 매점에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은 선남선녀에게로 향했다. 사장도 아이들이 귀엽다며 서비스를 쥐여주면서 말을 걸었다. “둘이 부부?”윤아가 나서서 부인하려고 했지만 수현이 한발 빨랐다.“사장님, 눈썰미 좋으시네요.”매점 사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나서 떠들었다.“그럴 줄 알았어. 둘이 부부가 아니면 이렇게 이쁜 자식들이 나올 수 없지.”윤아는 그런 사장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사실 부부라고 할 것도 없어요.”“그건 또 뭔 말이래?”“이 사람 와이프 따로 있거든요.”순간 분주하던 사장의 손이 허공에 멈추었다. 옆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던 수현의 얼굴도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사장은 눈빛이 흔들리더니 한참 지나서야 수현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수현은 기막힌 듯 윤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런 장난을 즐기는 건지 아니면 그저 그를 약 올리려고 그러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리를 잡고 먹으려고 둘러보았다.길거리에는 먼지가 나부끼고 손님들이 버리고 간 휴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수현과 아이들은 순간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특히 밖에서 사 먹겠다고 졸랐던 윤이는 많이 당황한 듯 고개를 들어 울상을 지었다.“엄마.”윤아는 이때다 싶어 딸 앞에 쪼그려 앉아 말했다.“윤이 길거리 샌드위치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우리 여기 앉아서 먹을까?”“근데 엄마, 여기 너무 더러워. 다른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도 있어.”윤이는 갑자기 서러워진 듯했다. “윤아, 모든 사람이 윤이처럼 배운 대로 하지 않아. 똑같은 교육을 받았지만 어른이 된 후 많이 변하게 돼있어. 세상은 그런 거란다. 네가 도리를 지킨다고 해서 남들도 똑같길 바라는 건 때론 힘들어. 그러니까 우리 이제부터 집에서 밥을 먹고 나오자. 알았지?”윤이는 알쏭달쏭 잘 이해가 되지 않는듯했으나 마지막 물음에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녀석이 밖에서 사 먹자고 했구나.’수현은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그럼 우리 차에 가서 먹을까?”“네!”우울해하던 윤이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어서 가자.”그러는 동안 훈이는 계속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따라다니기만 했다. 훈이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고독현 아저씨가 잘 대해주지만 엄마는 왠지 아저씨에게 냉정한 듯하였고 아빠로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듯했다. 그래서 훈이는 동생과 달리 오는 내내 수현에게 거리를 두고 말도 하지 않았다. 차에 가는 길에도 훈이는 윤아의 손을 잡고 돌아가려 했다. 그 순간 수현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말을 마치고 수현은 훈이를 안아 들었다. 그의 한쪽 팔은 윤이를 안고 있었다. 떨어질까 훈이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어려서부터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윤아는 아이에게 행복한 어린 시절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나중에 자신의 아이가 한부모가정에게 자라게 될 줄은 몰랐으며 더군다나 하나도 아니고 둘이 될 줄은 더더욱 생각지 못하였다. 윤아는 아이들을 어릴 적부터 공평하게 대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두 아이를 똑같이 대할 수는 없다는 것을.훈이는 내성적이고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는 아이였다. 떼도 안 쓰고 항상 윤아의 말을 잘 들었다. 윤이는 그런 오빠와 달리 장난꾸러기인 데다 식탐도 많고 떼도 많았다. 항상 윤아에게 안겨서 어리광을 부리고 관심을 구했다. 윤아는 그런 딸에게 자연스레 손이 많이 갔고 훈이는 습관이 된 듯 불평불만 없었지만 윤아의 마음속에는 항상 훈이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그런데 수현이가 양팔에 하나씩 안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윤아는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이도 5년간 알고 지낸 선우보다 수현에게 더 의지하는 듯했다. 훈이는 비록 동생처럼 티는 안 냈지만 훈이의 내성적인 성격에 저 정도의 행동으로 볼 때 아마 수현을 내심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른 때 같으면 안기지도 않을 아이가. 윤아는 항상 자신이 노력만 한다면 두 배의 사랑을 줄 수 있다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지금 세 사람을 보면서 그녀 혼자서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아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들 뒤를 따라갔다. 차에 돌아간 후 윤아는 수현이 두 아이를 돌보는 모습을 지켜봤다. 비록 서툴렀지만 수현은 세심하게 아이들을 챙겼으며 긴장한 그의 눈에서는 비장함까지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윤아는 자신이 처음 아이들을 키울 때가 생각이 났다. 윤아는 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린 수현과 눈길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한밤중처럼 새카맣고 그의 표정은 알 듯 모를 듯했다. 윤아는 놀란 듯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아까부터 뒤통수가 따가웠던 수현은 자신의 눈길을 피하는 윤아를
수현은 윤아가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는 좋은 시작점이었다. 수현은 바로 대답했다.“맞아.”윤아는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아이들을 만나게 해줄 수 있어. 그런데 조건이 있어.”‘과연 나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군.’수현은 심장이 튀어나올 듯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대답했다.“그래. 말해봐. 조건이 뭔지.”“먼저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해. 당신과 아이들이 만나는 건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서야. 당신과의 혈연관계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어.”“알았어.”수현은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윤아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이어서 말했다.“당신을 아저씨라고밖에 부르지 않을 거야. 아이들한테 아빠라고 말하면 안 돼. 이 점에 동의하는지 알아야겠어. 아니면...”“약속할게.”윤아는 말문이 막혔다. 수현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나는 그저 못다 한 책임을 지려는 것뿐이야. 호칭은...”윤이와 훈이가 자신의 아이들이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수현은 매일 아이들이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을 기다려왔었다. 하지만 그는 이 5년 동안 윤아가 고생하면서 혼자 아이들을 키운 것을 잊지 않았다. 차마 두 아이에게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게 할 면목이 없었다. 어렵게 키운 아이들이 한순간에 그를 아빠라고 부른다면 윤아가 상처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욕심을 접었다. 더군다나 요즘 수현의 눈에는 윤아가 진짜로 아이들을 뺏기지는 않는지 불안해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긴 소영과 나 사이를 오해하면 그럴 수도 있지. 이젠 소영이 일도 해결했으니...’그는 시간이 필요했다. “당신 진짜 약속 지킬 수 있어?”윤아는 계속 신경 쓰여서 물었다.“정말 걱정되면 계약서를 쓰면 되잖아. 어때?”수현은 안심시키며 물었다.녹음하는 것만으로 윤아는 불안한듯하였다.“계약서?”“그래.”수현이 먼저 얘기를 꺼냈지만 윤아도 생각 안 해본 건 아니었다.윤아는 두 사람 사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회의심이 들었지만 지나간 일들은 다시 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