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물어봤지?”윤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수현을 보았다.“네가 알고 싶었던 일을 다 알았으니까 이제 더는 날 귀찮게 하지 좀 말아줄래?”이 말을 듣자, 수현은 고개를 번쩍 들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난 그 메시지를 보지 못했고 너한테 아이를 포기하라고 하지도 않았어. 너도 방금 알았잖아. 그래도 날 밀어낼 거야?”윤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메시지를 보지 못한 게 내 탓이야? 넌 핸드폰을 다른 곳에 함부로 두지 않는 사람이야. 하지만 넌 강소영 씨한테 핸드폰을 여러 번 빌려줬어. 그러니까 설령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그건 네가 감당해야 할 결과야. 진수현, 비 오는 그날 잊지 않았지? 네가 클럽에 있을 때 내가 장난으로 보낸 메시지를 받고 클럽에 우산을 건네러 갔다가 아래층에서 네 친구들한테 놀림당한 일 말이야.”“그거 알아? 클럽에 가기 전에 난 금방 병원에서 임신 진단을 받았었어.”윤아의 말에 수현은 주먹을 꽉 쥐었는데 동공마저 흔들렸다.“그땐 나도 참 단순했어. 이 기회에 너한테 좋은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거든. 비록 우린 쇼윈도 부부였어도 아이가 생겼으니까 너한테 알려주면 어쩌면 네가 받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뭐, 아쉽게도 클럽에 가자마자 한바탕 희롱이나 당했지만 말이야.”전에 그녀에게서 이런 얘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지금 이걸 들으니 수현은 온몸이 차갑게 식으면서 벼랑 끝에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은 소식의 기쁨을 그와 함께 나누려고 했지만 결국 장난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어쩐지 그날 집에 돌아갔을 때 윤아가 비에 흠뻑 젖은 모습이더라니...그때 그녀는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더욱 끔찍한 건 그날 저녁에 수현이 그녀에게 이혼을 제안했었다.그래서 임신처럼 중요한 일을 메시지로 보냈던 거구나... 아무리 용기를 내도 자신을 마주할 엄두가 없었을 거다.이렇게 생각한 수현은 마음속에 후회만 한가득 남아 있었다.“미안해. 그땐 나도 몰랐어...”미안하다는 수현의 말을 들었지만
여기까지 생각한 윤아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다른 사람이랑 만날 생각이 없어. 난 그냥 혼자 두 아이랑 살 거야.”“그렇다면 왜 내가 도와주면 안 돼?”그는 씁쓸한 마음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으나 목이 메어와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어쨌든...내가 아이들 친 아버지잖아.”“그냥 혈연관계가 있을 뿐, 뭐 중요하지 않아.”윤아는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중요하지 않아...중요하지 않아...수현의 귀가엔 윤아가 한 이 말만 맴돌았다.그는 휠체어에 앉은 윤아를 한참 동안 바라본 후, 쓴웃음을 지었다.하긴, 혈연관계가 있다고 뭐 달라질 게 있나. 5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는데.하지만 윤아가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소리를 듣자 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그녀 곁에 다른 사람이 없다면 어쩌면 앞으로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녀의 건강이었다.생각을 정리한 후, 수현은 얼른 윤아에게 가장 유리한 결단을 내렸다.“좋아. 네가 말한 대로 할게.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네 몸 상태야.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어.”이 말을 듣자, 윤아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수현을 한눈 보았다. 그녀와 다투지 않고 너무 빨리 동의해서 그런지 윤아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설마 앞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접은 건가?역시나, 남자의 독점욕은 참...5년 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윤아는 고개를 푹 숙이면서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수현은 이걸 눈치채지 못했다. 설령 눈치챘어도 지금의 그는 그저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검사 결과가 나온 후, 윤아의 이마 상처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수현은 그제야 그녀에게 퇴원 절차를 밟아 주었다.퇴원한 다음 수현은 윤아와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주었다.원래 윤아는 수현을 집에 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수현이 두 아이를 데리고 잽싸게 들어가는 바람에 입을 열 기회도 없었다.그녀가 문어구에 서서
여기까지 듣자, 윤아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윤아가 말이 없는 것을 본 수현은 그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마 윤아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그는 얼른 설명했다.“오해하지 마. 널 나무라는 게 아니야. 그냥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 보니까 여러 가지 재미있는 활동이 필요하고 생각해서 그래.”윤아는 조금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네 뜻은 알겠지만 불가능한 일이야. 설마 그런 활동 장소를 집에 만들 거야?”그러나 놀랍게도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응.”“...”원래 수현에게 이런 장소를 아무나 집에 지을 수 있는 거냐고 불평을 토로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입에서 말이 나오려고 할 때 수현의 전 재산과 전에 귀국할 때 그녀에게 준 거액의 재산을 생각하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단언컨대 그녀가 허락하기만 하면 그는 분명 사람을 시켜 집에 아이들이 놀 공간을 만들 것이다.“어때?”역시나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수현은 또 물었다.윤아는 조금 짜증이 났지만 두 아이 앞에서 심한 말을 내뱉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도우미에게 말했다.“아이들을 데리고 내일 시간표를 보러 가주시겠어요?”계속 로봇처럼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도우미가 이 말을 듣자 얼른 다가와 알겠다고 했다.“알겠습니다.”그리고 도우미는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아이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윤아는 얼른 말했다.“병원에서 잘 얘기하지 않았어? 나랑 두 아이를 놔주기로 했잖아.”“응.”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약속했었어. 하지만 그거랑 너한테 제안한 게 모순돼?”“아니야. 난 그냥 네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왜?”“왜라고? 필요 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런 공간을 마련할 돈도 없고. 알겠어?”이 말을 하는 건 사실 거절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현이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돈은 나한테 있어. 사람을 시켜 만들어 놓으라고 할 테니까 너랑 아이들은 그냥 이사 오기만 하면 돼.”윤아는 눈썹을 찌푸렸다.“그건 전에 우리가 얘기했던 거랑 다르잖아.”
“그리고 당신이 원하지 않는 건 그렇다고 쳐. 근데 아이들한테는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애들도 원하지 않는지?”“내 아이들이니 내 말을 들어야지.”윤아는 쌀쌀하게 대꾸했다.그런 윤아의 태도에도 수현은 화를 내지 않고 차분히 얘기했다.“내일 사람 불러서 설계도를 만들 거야. 설계도를 보고 당신 마음에 들면 그때 다시 시공을 시작할게. 오늘은 우선 푹 쉬어. 상처에 물이 안 닿게 조심하고. 잘 때는 엎드려 자지 않도록 해. 일단 요 며칠 휴가를 내고 일을 하지 않는 게 좋겠어.”“얘기 끝났어?” 수현이 아무리 다정한 말을 건네도 윤아의 태도는 차갑기만 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할말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 줘.”수현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갈게.”문이 닫히고 방안은 조용해졌다. 윤아는 갑자기 이 모든 게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전에는 귀찮게 굴던 그가 이번에는 자기 말을 고분고분 따르자 윤아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한참 지나고 가정부가 들어와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사모님”선우가 데려온 가정부라는 걸 떠올린 윤아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선우 씨랑 연락했나요?”몇십 년 일해온 가정부는 바로 윤아의 뜻을 알아차리고 대답했다. “사모님, 염려하지 마세요. 비록 사장님이 저희를 고용하셨지만 제가 모시는 분은 사모님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모님의 사생활은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습니다.” 윤아는 내심 마음에 들었다. 모든 가정부가 이정도 소양을 가지면 좋을 텐데. 흡족해하는 그녀를 보면서 가정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자들 집에서 일하는 것도 고액 연봉 직업이어서 가정부들은 주인집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 편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고용주와 뭔가 있다면 집세를 그에게 돌려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윤아의 집에서 나온 수현은 가로등 아래에 한참을 서있었다. 운전기사도 그의 부름이 없자 길가에 차를 댄 채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수현이 마침내 눈
오는 길에 수현은 생각나는 시설은 거의 다 얘기했다. 핸드폰 너머의 민재도 일단 그가 불러주는 대로 모두 받아 적었다. 민재는 설계 얘기가 나오면서부터 노트를 준비하고 녹음기도 같이 켜서 녹음하고 있었다. “일단 여기까지고. 생각나는 대로 다시 알려줄게요. 나머지는 건축사보고 보완하라고 해요.”“네, 알겠습니다. 대표님.”민재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그제야 그는 정신이 들었다.‘잠깐만, 집을 설계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었나. 집안에 이런 걸 설치한다고?’ 통화를 마치자 차도 마침 멈춰 섰다.“대표님, 도착하셨습니다.”“네.”수현은 피고한 목소리로 대답한 후 핸드폰을 넣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수현의 머릿속에는 온통 집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빼먹은 건 없는지 고민하다 그냥 빨리 집에 가서 바로 확인하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차 안에서는 자신이 생각나는 대로 비서에게 분부했지만 아버지로서의 경험이 없던 그는 그냥 평소 주위에서 들은 대로 얘기했을 뿐이었다.전에 접해보지 못해서 그는 모르는 게 많았다.'그냥 집에 가서 자료를 찾아보고 다시 정리하자.'수현은 설계도를 그려줄 사람을 찾으려다 이내 집 설계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불안해졌다. 짧은 몇 걸음 동안 수현의 생각은 수십 번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 줄곧 그림자 하나가 따라오고 있었지만 너무 깊이 생각에 빠진 바람에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빠른 걸음에 따라오던 그림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수현 씨.”수현이 발걸음을 멈추자 그림자의 주인은 숨을 고르며 그의 앞에 섰다. 얼굴을 확인한 수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여긴 왜 왔어?”차가운 수현의 목소리에 소영은 문자를 몰래 지운 일을 그가 알아챈 건 아닐까 불안했다. 사실 병실 밖에서부터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수현과 윤아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게 되면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였다. 소영은 그가 윤아에게 묻지 않기를 바랐지만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수현
말을 마치고 소영이는 훌쩍이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수현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그리고 내가 그냥 문자만 지운 거지 윤아 씨에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잖아. 지금 아이도 낳고 잘 지내고 있잖아. 수현 씨만 원한다면 아이들을 데려오자. 응? 내가 친자식들처럼 키울게. 자신 있어. 그리고 나도 앞으로 아이를 낳지 않을게.”수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내 자식들 다른 사람 손에 안 키워.”“수현 씨...”주먹을 쥔 수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은 한밤중처럼 새카맣고, 그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네가 내 목숨을 구해주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그는 이를 악문 채 똑같은 말만 되뇌었다. 이를 가는 수현을 보며 소영은 오싹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를 구해줬다는 명분이 없었더라면 분명 이렇게 간단히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수현의 성격에 자신뿐만 아니라 강씨 집안 전체가 같이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보통 여자 같으면 수현의 이런 모습을 보고 후환이 두려워 그만뒀을 것이다. 앞으로 얌전히만 지낸다면 비록 그녀가 큰 잘못을 했을지라도 소영은 생명의 은인이라는 타이틀만 있으면 수현도 진씨 집안도 그녀를 어떻게 하지 않을 것이다. 되려 사업상에서 강씨 집안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며 강씨 집안도 진씨 집안을 등에 업고 의스댈 수 있었다.하지만 진씨 집안 안주인이 될 뻔한 꿈이 바로 눈앞에서 물거품이 되었다. 소영은 이렇게 물러날 여자가 아니었다. 수현의 인내심도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말을 마친 수현은 그녀만 남긴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차가운 밤바람에 소영의 얼굴에 남은 눈물은 말라갔다. 수현에게 대한 야속한 마음과 윤아에 대한 원망이 점점 더 커졌다.호텔에 돌아온 소영의 몸과 마음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바람에 머리도 산발이 되었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마침 지혜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원래 전화 받을 마음이 없었던 소영은 엄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보고 서러운 마
“수현 씨의 애를 낳는다고요?”소영은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왔다.“엄마, 내가 무슨 수로 수현 씨의 애를 낳아요? 지금 나를 만나려고도 안 해요. 오늘 나를 보는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고요!”유지혜는 한심하다는 듯 딸을 보며 말했다.“뭐 그렇게 놀라? 너 강씨 집안 딸 맞아? 이까짓 일로 그렇게 호들갑 떨면 어떡하니?”“그래도...”“누가 뭐래도 너는 수현의 생명의 은인이야.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거봐, 그런 일 있어도 여전히 너한테 뭐라고 하지 못하잖아. 그러고 보니 수현이 정말 참 괜찮은 애야. 나 같았으면 ...”지혜는 말끝을 흐리다 말이 없어졌다. 그러다 이내 다시 딸의 이야기로 넘어갔다.“네가 지금 윤아랑 비하면 아이만 없다 뿐이지 꿀리는 게 뭐가 있어. 그래서 수현이 지금 그러는 거야. 생명의 은인인데 네가 아이까지 가져봐. 걔가 누구한테 가겠어?” 소영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너도 참 애가 순진한 거야 바보인 거야? 너랑 수현이 약혼하지 않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남자는 다 똑같아. 애만 가지면 다 결혼하게 돼 있어. 수현이가 안 한다고 해도 그 집안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야.”소영은 입술을 깨문 채 차마 엄마에게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한참 딸의 대답을 기다리던 지혜는 말이 없는 소영을 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얘는 참, 뭐라 말 좀 해. 엄마 숨이 넘어가겠다.”“나...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그럴 기회가 없었어요.”딸의 말뜻을 알아차린 지혜는 놀라서 물었다.“뭐? 그동안 한 번도 없었어?”소영은 내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옆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한 번도 그럴 기미가 안 보이던?”“네, 없었어요...”“그럴 리가, 너...”“없다고요!”끈질긴 추궁에 소영은 자존심이 상해서 소리를 빽 질렀다.모녀 사이에 정적이 흐르고. 지혜는 할말을 잃었다. 그녀는 수현이가 다른 남자들과 똑같은 줄 알았다. 수현은 우수한 남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우수한 남자도 여자에게 눈길이 가기 마련
“근데 수현 씨 이제 나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아요.”“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넌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소영은 지혜를 보면서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밤이 깊었지만 수현의 서재는 계속 불이 켜져 있었다.그는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빽빽하게 적은 노트와 설계도가 놓여있었다. 평소 깔끔하던 그의 책상은 자연스럽게 어질러져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설계도를 그려나갔다.수현은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그가 설계도를 완성했을 무렵, 창밖은 새벽 어스름 속에 날이 밝아왔다. 밤을 새운 수현의 눈은 핏발이 섰지만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뭔지 모를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시계를 쳐다봤다. 윤아와 아이들이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아직 완벽한 설계도는 아니지만, 바람에 날아갈까 그는 조심히 창문을 닫고 씻으러 들어갔다. 어젯밤에 돌아와서 씻지도 못한 채 책상 앞에 앉아 꼬박 하룻밤을 새우고 설계도를 그렸었다. 이따 윤아를 만나러 가기에 이 꼴을 한 채로 갈 수는 없었다. …윤아도 밤새 잠을 설쳤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눈에는 다크서클이 드리워졌다.최근 벌어진 일 때문에 윤아는 살이 빠지고 얼굴은 더욱 작아졌다.깨어나니 상처가 살살 아파졌다. 검사 결과에는 문제가 없다고 나왔지만 그녀는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오늘 아침에는 상처가 더욱 욱신거리고 아픈 느낌이었다. ‘어제 샤워하다 상처가 물에 닿았나? 다시 염증이 생긴 건가?’그녀가 옷을 입으려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머리에 전해졌다. 그리고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화면은 짧고 흐릿했다. 그녀가 강에서 허우적거리다 물속으로 가라앉기 직전 화면인 것 같았다. 이는 윤아에게 아주 낯선 기억이었다. 어렸을 적 이런 기억이 없었는데...불현듯 윤아는 뭔가 생각이 났다. 어릴 적 물에 빠졌다가 크게 앓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인 건가?’그녀는 한참을 앉아서 생각을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