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그녀의 이마에 대고 호하고 입김을 불었다.비록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어서 별로 효과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정한 딸애의 행동에 윤아는 마음이 따뜻해졌다.심지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면서 입꼬리마저 위로 올라갔다.“엄마, 어때요? 많이 나았어요?”윤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응. 많이 나았어. 윤아, 고마워.”윤이는 얼른 웃음을 보이며 천진하게 입을 열었다.“뭘요. 엄마만 아프지 않으면 돼요.”이때 의사가 병실에 들어왔고 그의 뒤엔 수현이 따르고 있었다.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수현은 윤이가 병상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다가와 아이를 들어 품에 안은 후 훈이의 손을 잡으며 옆으로 옮겼다.그 후, 의사와 간호사는 윤아의 상처를 검사하며 몸 상태를 물었다. 의사는 윤아가 말도 조리 있게 하고 정신도 멀쩡한 것을 확인한 후, 수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환자분 지금 상태를 보니 별로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뇌 CT 한번 찍어 보시면 돼요. 만약 검사 결과에 별문제가 없으면 퇴원해도 됩니다.”아직 윤이를 안고 있던 수현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그 후, 수현은 휠체어를 빌려 윤아를 데리고 뇌 CT를 찍으러 가려고 했다.“...”윤아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수현을 보며 말했다.“난 이마를 다쳤지 다리를 다친 게 아니야.”“알아.”수현은 이렇게 대답한 후, 병상에 다가가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이마를 다쳤으니 휠체어에 앉아야지.”“...”가기 전, 수현은 두 아이에게 병실에서 함부로 뛰놀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한 후, 또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아이들까지 데리고 갔다.뇌 CT를 다 찍은 후,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수현은 윤아를 병실에 데려다주었다.병실 복도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뒷모습 두 개가 병실 문 앞에 서 있으면서 안으로 머리를 기웃거리는 것을 발견했다.두 사람이 누군지 제대로 본 순간 윤아의 표정은 서늘하게 변했다.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
“진수현, 너 뭐 하자는 거야? 우리가 몇 년 지기 친구냐? 나한테 막 대하는 건 괜찮은데 너 소영이한테 무슨 태도야? 어젯밤 일은 내가 잘못한 게 맞아. 먼저 때리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너도 책임이 있고 심윤아도 소영이한테 사과해야 해!”수현의 시선은 순간 사나워졌고 마치 예리한 칼날처럼 석훈의 얼굴에 꽂혔다.“뭐라고? 다시 말해 봐.”그의 사나운 시선에 석훈은 두려움이 몰려왔으나 눈시울을 붉힌 소영을 보니 또 용기가 생겼다.“내가 잘못 말했어? 너랑 윤아가 이혼한 지 오 년이나 지났어. 이 시간 동안 네 곁에 있어 준 사람은 소영이야. 그리고 지금 윤아가 돌아왔다고 소영이 자리를 마음대로 차지해도 돼?”“석훈아, 그만 말해...”소영은 석훈의 손을 잡으며 가엽게 말했다.“난 괜찮아. 윤아 씨가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수현 씨가 챙겨주는 것도 당연한 거야.”“소영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심윤아가 다친 게 진수현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당연하게 챙겨줘. 애초부터 저 심윤아가 염치없이...”펑!석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현은 주먹을 휘둘러 그의 턱을 내리쳤다.그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다른 한쪽도 얻어맞았고 곁에 있던 소영도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곧 석훈도 반격을 하면서 결국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였다.하지만 아쉽게도 석훈은 수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수현에게 제압당한 채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엎어졌다.“수현 씨, 그만 때려. 제발 화내지 마. 만약 우리가 병문안 오는 게 달갑지 않다면 갈게. 가면 되잖아.”소영은 달려와 수현의 팔을 잡았고, 울면서 수현을 끌었다.“고석훈, 경고하는데 내 일에 함부로 손가락질하지 마. 만약 강소영한테 마음이 있다면 당당하게 좋아해. 이걸 빌미로 다른 사람의 생활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심지어 다른 여자를 때리지도 마. 오늘 이대로 넘어가는 건 모두 윤아를 봐서야. 그렇지 않으면...”이렇게 말하면서 수현은 손에 힘을 넣었고 석훈은 순간 너무 아파서 식은
이 말을 듣자 수현의 시선은 순간 서늘해졌고 말투도 날카로웠다.“그건 나랑 윤아 사이 일이야.”소영은 달갑지 않았다.“그건 우리 사이 일이기도 해. 수현 씨한테 매달리지 말라고? 그런데 수현 씨도 지금 윤아 씨한테 매달리면서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은 거잖아. 그러면서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난 그냥 수현 씨가 너무 좋아서 그러는 건데.”소영의 말이 끝난 후, 수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담담하고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좋아. 강요하지 않을 수 있어. 그러니까 너도 고석훈 이용해서 너 대신 나서게 하지 마.”소영의 안색은 순간 변했다.“수현 씨,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석훈이를 이용해서 대신 나서게 하겠어? 그건 분명 석훈이가...”“그 자식은 멍청해서 이용당한 거지만 너도 아무 사심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어? 어젯밤 일은 우연한 사고라고 쳐. 그렇다면 오늘은? 네가 고석훈을 병원에 데려온 거잖아.”수현의 말에 소영은 정말 하나도 반박할 수 없었다.“내가 데려온 거 맞아. 하지만 내 본의는 석훈이가 어젯밤에 잘못했으니까 사과하려고 그런 거야.”“그래서 사과 했어?”“그건...”“사과하러 왔으면 상응한 태도를 갖춰야지. 너희들 아까 무슨 태도였어?”소영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비록 사과하고 병문안하려는 빌미로 오긴 했지만 원래 목적은 확실히 사과하러 온 게 아니었다.그녀는 사실 윤아가 어느 정도 다쳤는지, 수현이 윤아에 대한 태도가 어떤지 알아보려고 왔었다. 석훈을 데려온 건 그가 멍청하고 충동적이어서 수현이 말한 대로 이용하기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평소에 아주 잘 감추었다고 생각했는데, 수현은 도대체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그리고 지금은 사과하고 연약하게 행동하는 것 외 다른 방도가 없었다.“미안해. 우리는 정말 사과하러 온 거야. 올 때도 미리 다 말해 놓았어. 하지만 수현 씨도 석훈이가 욱하는 성격인 거 잘 알잖아. 이건 내가 함부로 조절할
답은 두말할 것 없었다. 그는 이걸 원했다.하지만... 지금 윤아가 자신을 이토록 배척하는데, 과연 합치려고 할까?더군다나 아직 두 사람 사이의 오해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보낸 그 메시지를 비롯해서 말이다.수현은 여전히 그 메시지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다. 민재에게 이걸 맡긴 후, 어제저녁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그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핸드폰을 늘 갖고 다녔었는데 어떻게...“수현 씨...”소영은 수현이 계속 자신을 상대하지 않는 것을 보자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소영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수현은 문득 뭔가 떠올랐다.머릿속에서 뭔가 스쳐 가는 느낌이었다.처음에는 잡지 못했지만 소영의 목소리가 나타나면서 그는 드디어 잡을 수 있었다.수현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는데 주위의 기운마저 아주 큰 변화가 나타났다.그는 몸을 돌려 빠르게 소영의 어깨를 잡았다.소영은 수현의 행동에 깜짝 놀라 멍하게 눈앞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왜, 왜 그래?”아까 한 말에 자극이라도 받았나? 아니면 왜 갑자기 이렇게 흥분하는 건데?‘설마... 드디어 내 말을 믿었나?’소영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수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5년 전, 네가 내 핸드폰 가져갔었지.”“뭐?”갑작스러운 말에 소영은 갈피를 잡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무슨 소리야? 왜 갑자기 화제가 5년 전으로 돌아간 거야? 핸드폰을 가져간 건 왜 묻는 거지?’수현은 이렇게 물은 후 그는 막혔던 생각이 순간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해 사무실에서의 장면이 떠올랐다.비록 시간이 오래 지나긴 했지만 그날 소영이 했던 일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 지금 이렇게 떠올릴 때 꽤 선명했다.소영은 그날 그의 핸드폰을 빌려 달라고 했다.그리고 수현은 그녀에 대한 믿음으로 거절하지 않고 직접 건넸고 그 후엔 바쁜 업무 처리 때문에 빠르게 일에 푹 빠져버렸다.비록 메시지 알림 소리를 듣긴
만약 평소였다면 수현은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이 일을 진지하게 추궁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있었고 절박하게 진실을 원했던 수현은 이 물음을 물은 후, 시선을 줄곧 소영의 얼굴에 두면서 표정의 미세한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조금이라도 정신줄을 놓았다간 진실과 함께 스쳐 지날까 봐 걱정되었다.그래서 그는 지금 소영의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원래 가늘게 뜨고 있던 두 눈은 이제 위험한 기색이 역력했다.“기억하지? 좋아. 그럼 물어볼 게 있어.”소영은 정신을 차린 후, 아까 표정 관리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식하고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며 침착한 자태를 되찾았다. 그리고 수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되게 오래 지난 일 아니야? 왜 갑자기 이 일을 꺼내? 설마 그때 내가 수현 씨 핸드폰 망가뜨린 건 아니지?”“아니야.”“그럼 뭔데?”수현은 복잡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왜 그랬어?”소영은 숨통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알, 알고 있었어? 아니면 왜 이렇게 묻는데?’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뭐, 뭐? 그때 스팸 메시지 한 통 삭제했을 뿐인데, 왜 그래?”이 말을 듣자, 수현의 표정은 순간 어두워졌다.“내가 언제 스팸 메시지라고 했어?”“...”소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너 되게 긴장한 것 같다?”“난...”“그때 네가 삭제한 거 스팸 메시지 아니었지? 그렇지?”수현의 시선은 마치 칼날 같았고 소영의 어깨를 쥔 손에도 점점 힘이 들어갔는데 마치 그녀의 뼈를 부수기라도 할 듯싶었다.소영은 찌릿한 아픔을 느끼고 눈썹을 찌푸렸다.“수현 씨, 나 아파.”하지만 수현은 듣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손에 힘을 넣었고 눈빛도 더 어두워졌다.“말해. 그때 삭제한 메시지가 도대체 뭐야? 윤아가 나한테 보낸 거지? 임신했다고 말하지 않았어?”“아니야, 난 아니야...”처음에 아프다고 말했을 때 소영은 수현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걱정해 주기를 바랐
수현은 차갑게 석훈을 한 번 쳐다본 후, 시선을 다시 소영에게 돌렸다.“똑바로 말해.”“나, 난 수현 씨가 도대체 뭘 말하는지 잘 모르겠어. 만약 메시지 일이라면 이미 알려줬잖아. 내가 삭제한 건 그냥 아무 쓸모가 없는 스팸 메시지였고 다른 건 없었어. 아까 수현 씨가 말한 임신 메시지는 난 몰라.”수현은 이 말에 가볍게 비웃었다.“모른다고? 난 핸드폰을 계속 갖고 다녔어. 너 외에 다른 사람에게 핸드폰을 준 적이 없다고. 네가 내 핸드폰을 가져갔을 때 하필 스팸 메시지를 지웠고, 또 하필 그때 내가 윤아가 보낸 메시지를 받지 못했어. 세상에 어떻게 이 정도로 우연한 일이 있어?”지금 소영은 이미 눈물범벅이 된 상태였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수현 씨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날 지운 건 맹세코 스팸 메시지야. 수현 씨가 말한 그건 난 정말 몰라. 수현 씨,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라? 만약 수현 씨를 해칠 마음이 있다면 강에 뛰어들어 수현 씨를 구하지 않았을 거야. 난 수현 씨를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는데...”목숨을 구한 일을 꺼내자, 수현의 표정에는 드디어 조금의 변화가 생기면서 소영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도 조금 풀렸다.소영은 이걸 보자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난 윤아 씨가 수현 씨한테 뭘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날 믿어줘. 난 언제나 수현 씨 편이야. 어떤 일이 발생하든 수현 씨를 해치지 않을 거고, 그렇게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지 않을 거야.”수현은 여전히 소영의 말에 믿음이 가지 않았다.그러나 소영이 그의 목숨을 구한 일을 꺼내니 수현은 확실히 마음이 약해졌다.그녀가 목숨도 마다한 채 강에 뛰어들어 자신을 구한 걸 떠올리자 그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소영이 아니었다면 강에서 죽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정말 소영이 메시지를 지웠다고 해도 그녀가 인정하지 않으니 수현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생명의 은인에게 지나치게 몰아붙일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신세를 지고 은혜를 입었
윤아는 두 아이와 함께 병실에 들어간 다음, 밖에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심지어 중간에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와 아이들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어도 그녀는 아주 담담하게 행동했다.“훈아, 윤아. 밖에 일에 신경 쓰지 마.”“하지만...”윤이는 조용히 말했다.“고독현 아저씨가 다른 사람이랑 싸우는 것 같단 말이에요. 엄마, 정말 말리지 않을 거예요? 만약 아저씨가 다치기라도 하면...”이 말을 듣자, 윤아는 참지 못하고 윤이를 한 번 바라보았다.“윤이는 고독현 아저씨가 많이 걱정돼?”윤이는 큰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아무런 꿍꿍이도 없는 모습이었다.“고독현 아저씨가 윤이랑 오빠한테 벌로 계속 밥 사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만약 아저씨가 다치면 우리한테 밥 사주지 못하잖아요.”“...”윤아는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수현 이 인간 정말, 내가 자고 있을 때 아이들에게 무슨 소리를 한 거야?’“윤아, 걱정하지 마. 만약 고독현 아저씨가 맞아서 다치기라도 한다면 엄마가 밥 사줄게. 응?”윤아는 두 아이를 부드럽게 교육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열리면서 수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뭘 말하고 있었어?”윤아는 수현이 이렇게 빨리 들어올 줄 몰라 멈칫했다.원래 소영과 석훈이 함께 그를 찾아왔기 때문에 꽤 오래 상대할 거라고 생각했었다.윤아는 고개를 돌려 수현의 뒤를 보았지만 익숙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수현은 윤아가 뭘 찾는지 알아챈 듯 이렇게 말했다.“안 봐도 돼. 돌아가라고 했어.”이 말에 윤아는 시선을 거두었다.수현은 윤아를 보며 메시지 일이 떠올랐다.비록 소영이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이상한 반응을 보니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소영의 말 대로 그녀는 수현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대가 그가 아닌 윤아라면 어떻게 될까?확신할 수 있는 건 그녀는 분명 수현을 대하듯 윤아를 대하지 않을 거다.뒤에 벌어질 일들을 떠올린 후, 수현은 윤이와 훈이를 한눈 보고 아이들에게 다가
수현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왜 그렇게 생각해? 난 그냥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나한테 임신했다는 메시지를 보낸 다음 누가 널 만나러 갔어?”윤아는 멈칫했다. 그때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영이 그녀를 찾아와 그 말을 했었다.수현은 윤아의 표정을 보자 분명 누가 그녀를 찾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다.“정말 누가 널 찾아갔어? 누구야?”윤아는 직접 대답하는 대신 수현을 바라보았다.“지금 이걸 왜 물어보는 거야? 내가 말하면 믿을 수 있어?”놀랍게도 수현도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만약 내가 너도 믿지 못한다면 또 누굴 믿을 수 있는 건데?”그의 눈빛은 매우 진지했는데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이런 믿음에 윤아는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때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두말할 것 없이 좋았다. 비록 사랑 정도 까지는 아니었어도 서로는 서로에게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었고 모든 정서와 비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때는 두 사람 사이에 제삼자도 끼지 않았다.하지만 나중에... 두 사람은 모두 컸고 중간에도 다른 많은 것들이 자리를 잡았다.“윤아야?”윤아가 계속 말이 없자 수현은 그녀를 불렀다. 윤아는 정신을 차린 후, 수현을 한참 동안 보다가 결국 한마디를 던져주었다.“확실히 누군가가 날 찾아왔었어. 하지만 그게 누군지 안다면 넌 엄청 놀랄 걸. 강소영 씨야.”소영의 이름을 듣고 수현이 아주 놀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지금 이미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윤아의 마음속 의혹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래서 그녀는 또 한마디 물었다.“네가 강소영 씨한테 날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어?”“뭐?”“내가 왜 강소영한테 널 찾아오라고 했겠어?”윤아는 수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의 미세한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의 반응을 보니 거짓은 아닌 듯했다.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며 속으론 여전히 믿음이 가지 않아 수현을 계속 떠보았다.“난 네 핸드폰에 메시지를 보냈어. 네가 보내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