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 아니게 수현의 정곡을 찌른 민재는 통쾌한 마음이 들었다.예전 같았으면 어떻게 감히 그에게 이런 말을 했겠는가. 그랬다간 아마 진작에 저 싸늘한 눈빛에 얼어 죽었을 거다. 게다가 진수현이 그의 행동을 너그러이 받아주는 성격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말을 못 했을 거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윤아와 두 아이가 나타난 뒤로 수현은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눈에 띄게 성격이 부드러워졌다.비록 까불대다가 꺼지라는 소리는 가끔 듣지만 말이다.하지만 민재는 이제 수현이 화난 것처럼 보여도 사실 정말 화가 난 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조금 전처럼 말이다.말로는 꺼지라고 하지만 몇초 후에 바로 험상궂던 표정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수현은 이번엔 그를 닦달하기 시작했다.“일 처리가 너무 느린 거 아닙니까? 빨리 처리하고 아이들 먹을 음식이나 사와요.”민재는 그의 재촉에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양훈도 복도에 함께 있었는데 그를 스쳐 지나가던 민재와 마침 눈이 마주쳤다.민재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김양훈이 왜 이곳에 있지?오늘 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그는 돌아가서 자세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간식을 사러 갔다.민재는 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차를 몰고 근처의 키즈랜드까지 갔다. 그러고는 그곳에 있는 것들을 이것저것 두둑이 담은 후에야 병원으로 돌아갔다.수현은 저 멀리서 양손 가득 뭔갈 들고 돌아오는 민재를 발견하고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뭐 샀습니까?”민재가 막 입을 열어 안에 든 물건들을 자세히 설명하려 했으나 수현은 그의 설명엔 관심이 없는 듯 손에 든 봉지만 냉큼 낚아채 갔다.“됐습니다. 내가 들고 갈 테니까 이리 줘요.”민재는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수현의 행동거지에서 그가 한참 동안 기다렸음을 알아차렸다.하긴, 병실에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데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서성이고 있어야 하는 처지라니. 누구든 조급해 날 것이다.수현은 민재
“지난번 경매도 진수현은 소영 씨와 함께 갔던 걸로 기억하는데요.”경매 얘기에 민재는 서둘러 해명했다.“그건 맞지만 그땐 대표님 어머니께서 시키신 일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 강소영 아가씨께서 원하시던 물품이 있어서 함께 출석하신 겁니다.”“그래서요?”양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언제 윤아 씨를 다시 만난 건데요? 윤아 씨는 언제 돌아왔고요? 그 두 아이는... 진수현 아이예요?”“그럼요. 생김새만 봐도 딱 저희 대표님 아이잖아요.”그러자 양훈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하긴. 너무 닮긴 했죠.”수현을 쏙 빼닮은 또렷한 이목구비와 매끈한 얼굴형에 어딘가 윤아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오묘한 눈썹과 눈동자까지... 굳이 친자 검사를 해보지 않아도 누구의 아이인지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민재는 그런 양훈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대뜸 물었다.“김양훈 씨는 왜 여기 계십니까?”최근 수현이 그를 너무 풀어준 탓일까, 민재는 어쩐지 평소보다 더 대범한 듯했다.안 그래도 그는 수현에게 오늘 일에 관해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수현이 병실로 쌩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수현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면 아마 몇 시간은 더 걸릴 것같으니 민재는 생각을 바꿔 양훈에게 오늘 일의 자초지종을 물었다.애초에 먼저 얘기를 나누자며 찾아온 사람은 저쪽이 아닌가.“윤아 씨는 어쩌다 다치신 거예요? 오늘 오후까지도 멀쩡하시지 않았어요?”“그랬죠.”양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가 진수현을 찾으러 갔을 때까지도 괜찮았어요. 모든 건 사고였어요.”“우리라고요?”“저, 고석훈, 그리고 강소영이요.”강소영이라는 말에 민재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네? 강소영 아가씨도 오셨다고요? 그런데 윤아 아가씨가 왜 다치신 겁니까? 설마 강소영 아가씨가?”그러자 양훈은 그를 바보 보듯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강소영 씨가 아무리 사리 분별 못한대도 이런 짓까지 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겁니다.”진수현 앞에서 윤
병실 안.윤이는 누군가의 노크 소리에 곧바로 고개를 돌려 자기 오빠를 바라보았다.그리고 훈이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비로소 수현에게 문을 열어줬다.병실 문이 열리자 두 꼬마는 수현이 큰 봉투 두 개를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발견하였고 윤이가 호기심에 물었다.“고독현 아저씨, 혹시 뭐 사셨어요?”물어보자마자 윤이는 비로소 자기의 행동을 깨닫고 당황한 얼굴로 입을 막았다.아뿔싸!분명 그를 상대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는데 그가 가져온 물건을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말을 걸어버렸다.“응.”수현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들고 온 물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내가 우리 비서더러 먹을 걸 좀 사 오라고 했어.”말을 마치고 수현은 봉투에서 먹거리를 꺼내더니 테이블에 가지런히 세팅하기 시작했다.두 꼬마는 이 모습을 보고 그저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병실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수현은 곁눈질로 두 아이가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고도 느긋하게 하던 일을 마저 했다.테이블 위가 더 이상 물건을 놓을 자리가 없자 그제야 멈췄다.그리고 고개를 들어 두 아이에게 물었다.“아직 저녁 안 먹었잖아, 배 안 고파?”훈이는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답했다.“괜찮아요.”음식을 보자마자 먹고 싶었던 윤이도 냉큼 대답했다.“저, 저도 배 안 고파요.”하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윤이의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윤이는 깜짝 놀란 나머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재빨리 자그마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그리고 훈이의 곁으로 가더니 나지막하게 속삭였다.“오빠, 나 너무 창피해.”훈이는 오빠로서 여동생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위로했다.이 광경을 지켜보던 수현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눈에 콩깍지가 씐 걸까?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다.수현의 눈이 순간 반달 모양으로 변하더니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진짜 배 안고파? 식으면 맛없어.”윤이는 배고팠지만 자존심을 부리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저는 고독현 아저씨 음식을 먹지 않을래
또한 지금 제일 중요한 건 고독현 아저씨가 음식을 이렇게나 많이 사 왔는데 이 시점에서 선우 아저씨를 부르면...“오빠...”이때, 더 생각할 나위도 없이 배고픈 윤이가 또다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어쩔 수 없이 수현한테서 핸드폰을 가져오려고 하던 이때, 마침 그가 테이블에서 두 사람 있는 곳으로 다가오더니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둘이 뭘 속닥거려?”윤이는 냉큼 그를 등지면서 못 본 척했다.그 모습에 수현은 윤이의 머리를 콩 때리면서 말했다.“아직도 아저씨한테 화난 거야?”“흥.”윤이가 도저히 그와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에 수현은 그녀의 목덜미를 콕콕 찌르며 다시 물었다.“아저씨가 잘못했어. 우리 윤이랑 훈이한테 사과할게. 그러니깐 이제 그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안 돼요!”원래 그냥 무시하려고 했던 윤이는 씩씩거리면서 말했다.“용서 안 해도 돼. 근데 진짜 안 먹을 거야? 배고파서 쓰러진 모습을 엄마가 깨어나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어쩔 수 없이 수현은 최후의 수단을 써야 했다.아이는 아인지라 수현의 말에 금세 마음이 동요했다.“엄, 엄마가요?”“그래.”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어린이가 제때 밥을 먹지 않으면 쓰러지기 쉬워.”윤이는 그에게 되물었다.“진짜요?”수현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진짜로.”옆에서 듣고 있던 훈이는 그들의 대화가 어이없었다.“...”자꾸만 이 아저씨가 일부러 자기 여동생을 속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수 없지만 어쨌든 오빠로서 자기 여동생을 굶기기 싫었다. “또한 너희들은 지금 나한테 화가 난 상태잖아. 그러면 더 굶으면 안 되지, 이 고독현 아저씨한테 벌을 줘야 하지 않겠어?”“벌을 준다고요?”윤이는 이 기발한 아이디어에 드디어 구미가 당기는지 다시 물었다.“어떻게 벌주면 돼요?”그녀의 물음에 수현은 한껏 진지한 얼굴로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벌은 이 아저씨가 너희들에게 밥을 사주는 걸로 하자.”훈
결국 훈이도 자신의 작은 손을 그에게 쥐여주면서 같이 자리를 떴다. 민재는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여러 가지를 다양하게 샀는데 덕분에 테이블이 꽉 차게 되었다.윤이는 의자에 앉자마자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고독현 아저씨, 이게 다 윤이와 오빠가 먹어도 되는 건가요?”“당연하지.”말과 동시에 수현은 냅킨을 뽑아서 그들의 테이블에 펴줬다.최근에 두 아이를 돌보면서 아직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식사할 때 도구들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은 알게 되었다. 하여 아까 먹거리를 살 때 겸사겸사 같이 구매했다. 윤이와 훈이는 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수현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아까까지만 해도 도도한 척 수현을 애써 상대하지 않던 윤이는 모든 경계모드가 해제된 채 그를 부려 먹기 시작했다.“아저씨, 저 이거 먹고 싶어요!”“그래.”수현은 냉큼 그녀가 말한 음식을 밥그릇에 덜어줬다.“저것도 먹을래요!”“응.”“그 옆에 탕수육도!”“그래.”수현은 거의 입도 대지 못한 채, 윤이의 요구를 다 들어주면서 한편으로는 또 훈이에게도 음식을 집어주었다. 하지만 이 어린이가 매우 내성적이라 받아먹으면서도 내키지 않지만 고맙다는 인사는 꼬박꼬박 했다.수현은 예의 바른 두 아이를 보면서 속으로 감탄했다.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렇게나 훌륭하게 자랐기 때문이다. 생각에 잠기던 수현은 침상에 누워있는 윤아를 흘낏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혼수상태에 빠진 채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수현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아직 그녀가 얼마나 더 누워있어야 할지 짐작조차 안 되었기 때문이다. “고독현 아저씨.”꼬마 아가씨의 부름에 수현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는 살짝 불만스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왜 그래요?”그가 잠시 딴생각하던 모습을 눈치챈 모양이다.“미안, 아저씨가 방금 다른 생각 하느라 못 들었어. 우리 윤이 뭐 먹고 싶어? 아저씨가 집어 줄게.”윤이는 입술을 삐쭉 내밀더니 사
때는 이미 저녁이었고 병실안은 작은 등불만 켜져있었는데 불빛이 적당히 온화하여 윤아가 눈을 떠도 전혀 눈부시지 않았다.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침대옆에 있는 불청객을 발견했다.진수현...머릿속이 백지상태던 윤아는 그를 발견한 뒤로 빠르게 오늘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이마에 물건이 부딪히면서 필름이 끊겨 그 뒤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보아하니 윤아가 다치게 된 후 수현이 병원까지 데려온 것 같다. 병원...그럼 윤이와 훈이는?두 아이를 떠올리자마자 가만히 누워있던 윤아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그녀의 움직임에 침대 옆에서 잠깐 졸고 있던 수현이 눈을 떴다.그렇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의 눈동자에 윤아의 모습이 비쳤다.빠르게 수현은 윤아를 도와 침대에서 일으켜줬다.“깨났어?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그의 목소리는 많이 잠겼는데 아마 피곤해서 그런 것 같았다.윤아는 제일 먼저 아이들의 안부를 물었다.“훈이랑 윤이는?”그녀의 물음에 수현은 살짝 당황했다.깨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아이들을 묻는 걸 보니 진짜 걱정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수현은 턱으로 윤아의 뒤쪽을 가리켰고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포근한 불빛 아래 두 아이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자고 있었는데 그들 위에는 두꺼운 이불과 수현의 옷까지 덮여 있었다.조명이 너무 따뜻한 탓에 마치 지금 일상도 포근하고 안락한 것처럼 사람을 착각하게 했다.두 아이가 모두 자기 곁에 있는 모습을 보고 윤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자기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면 두 아이는 어떡할지 항상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아이가 여기까지 따라오고 수현도 와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두 아이보다 너 자신부터 챙기는 게 어때?”수현의 목소리에 윤아는 그제야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두 아이가 무사한 모습을 보고는 윤아의 표정이 다시 차가워지더니 수현을 보고 물었다. “다른 사람은?”그녀의 말에 수현은 살짝 머뭇거리며 대답했다.“나 혼자 너를 여기
수현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더니 이마 위의 힘줄이 불끈 튀어나왔다.하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목마르지 않아? 따뜻한 물이라도 마실래?”윤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수현은 그녀와 눈이 몇 초간 마주친 뒤 따뜻한 물을 따라왔다.“방금 봤는데 온도가 딱 적당해.”윤아는 물잔을 보더니 거절했다.“안 마셔.”“밤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쭉 누워만 있었잖아. 먼저 따뜻한 물이라도 마셔.”말을 마치고 수현은 물잔을 아예 윤아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하지만 윤아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돌렸다.“안 마신다니까.”수현은 얼마간 물잔을 들고 있다가 결국에는 다시 내려놓았다.“그럼 뭐라도 먹을래? 뭐 먹고 싶어?”순간, 윤아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물도 마시기 싫고 아무것도 먹기 싫어, 그리고 수현 씨도 보고 싶지 않아. 만약 정말 오늘 밤의 일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으면 선우 씨나 불러줘.”그녀의 입에서 이선우라는 이름이 불린 것과 동시에 평온했던 수현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생각하지도 않고 단번에 거절했다.“그럴 순 없어.”“그래, 그럼 날 귀찮게 하지 마.”말을 마치고 윤아는 다시 자리에 누웠는데 움직이다가 그만 이마의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깜짝 놀랐다.그 모습에 수현의 냉랭하던 눈빛은 순간 돌변하더니 걱정스레 물었다.“상처 건드린 거야? 아프지?”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묻는데 아까의 무서운 얼굴은 온데간데 사라진 지 오라다.“상관하지 마, 손 치워.”윤아는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도 아파서 앓음 소리를 냈다.“왜 갑자기 착한 사람인 척하는데, 만약 수현 씨가 내 동의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내가 그쪽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그들과 마주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늘 같은 일은 더더욱 일어나지 않았을 거잖아.”수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확실히, 그녀의 말이 모두 옳았다. 만
“지켜볼 필요 없어.”수현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나갔다.윤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착각일수도 있겠지만 아까부터 계속 수현이 왠지 모르게 억울해하는 것 같았다.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윤아는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대체 뭐가 억울하지?’‘지금 다친 사람이 누군데, 뭐가 억울하다는 거야?’쾅!병실의 문이 닫히면서 수현이 밖으로 나갔다.윤아는 천천히 돌아누웠다. 상처는 아직 아프지만 돌아 누우면 두 아이를 볼 수 있었다. 두 꼬마는 여전히 아무 걱정 없이 달콤하게 자고 있었다. 혹시 그녀가 여기에 있어서일까 아니면 병실에 수현이 지키고 있어서일까?이마의 상처가 여전히 따끔거려서 윤아는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고 의식은 빠르게 희미해지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잠이 들기 시작했다.하지만 깊게는 잠이 들지 못했다. 그저 의식만 살짝 있을 뿐이다.가끔 자기도 모르게 병실 밖의 사람을 떠올리곤 했지만 다시금 헛된 생각을 하지 못하게 애써 이성으로 돌아오곤 했다.그렇게 얼마나 지나지 않아 윤아는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소리는 아주 작았는데 만약 병실이 시끄럽거나 그녀가 이미 잠에 빠졌더라면 아예 들리지도 않았을 소리였다.‘아까 분명 밖으로 나가지 않았나? 돌아와서 뭐 하려는 거지?’문을 등진 바람에 윤아는 들어온 사람이 수현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잠시 후, 가벼운 발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멈춰지더니 등 뒤로 그 사람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윤아는 그 시선이 불편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고 어렵게 고개를 돌렸다.역시나 수현이었고 마침 그의 검은 두 눈과 마주쳤다.수현도 윤아와 눈이 마주친 뒤 살짝 놀랐다. 아마 그녀가 깨어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그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그는 아마 밖에서 있던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윤아가 잠든 사이에 들어와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