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더니 이마 위의 힘줄이 불끈 튀어나왔다.하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목마르지 않아? 따뜻한 물이라도 마실래?”윤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수현은 그녀와 눈이 몇 초간 마주친 뒤 따뜻한 물을 따라왔다.“방금 봤는데 온도가 딱 적당해.”윤아는 물잔을 보더니 거절했다.“안 마셔.”“밤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쭉 누워만 있었잖아. 먼저 따뜻한 물이라도 마셔.”말을 마치고 수현은 물잔을 아예 윤아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하지만 윤아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돌렸다.“안 마신다니까.”수현은 얼마간 물잔을 들고 있다가 결국에는 다시 내려놓았다.“그럼 뭐라도 먹을래? 뭐 먹고 싶어?”순간, 윤아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물도 마시기 싫고 아무것도 먹기 싫어, 그리고 수현 씨도 보고 싶지 않아. 만약 정말 오늘 밤의 일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으면 선우 씨나 불러줘.”그녀의 입에서 이선우라는 이름이 불린 것과 동시에 평온했던 수현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생각하지도 않고 단번에 거절했다.“그럴 순 없어.”“그래, 그럼 날 귀찮게 하지 마.”말을 마치고 윤아는 다시 자리에 누웠는데 움직이다가 그만 이마의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깜짝 놀랐다.그 모습에 수현의 냉랭하던 눈빛은 순간 돌변하더니 걱정스레 물었다.“상처 건드린 거야? 아프지?”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묻는데 아까의 무서운 얼굴은 온데간데 사라진 지 오라다.“상관하지 마, 손 치워.”윤아는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도 아파서 앓음 소리를 냈다.“왜 갑자기 착한 사람인 척하는데, 만약 수현 씨가 내 동의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내가 그쪽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그들과 마주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늘 같은 일은 더더욱 일어나지 않았을 거잖아.”수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확실히, 그녀의 말이 모두 옳았다. 만
“지켜볼 필요 없어.”수현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나갔다.윤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착각일수도 있겠지만 아까부터 계속 수현이 왠지 모르게 억울해하는 것 같았다.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윤아는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대체 뭐가 억울하지?’‘지금 다친 사람이 누군데, 뭐가 억울하다는 거야?’쾅!병실의 문이 닫히면서 수현이 밖으로 나갔다.윤아는 천천히 돌아누웠다. 상처는 아직 아프지만 돌아 누우면 두 아이를 볼 수 있었다. 두 꼬마는 여전히 아무 걱정 없이 달콤하게 자고 있었다. 혹시 그녀가 여기에 있어서일까 아니면 병실에 수현이 지키고 있어서일까?이마의 상처가 여전히 따끔거려서 윤아는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고 의식은 빠르게 희미해지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잠이 들기 시작했다.하지만 깊게는 잠이 들지 못했다. 그저 의식만 살짝 있을 뿐이다.가끔 자기도 모르게 병실 밖의 사람을 떠올리곤 했지만 다시금 헛된 생각을 하지 못하게 애써 이성으로 돌아오곤 했다.그렇게 얼마나 지나지 않아 윤아는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소리는 아주 작았는데 만약 병실이 시끄럽거나 그녀가 이미 잠에 빠졌더라면 아예 들리지도 않았을 소리였다.‘아까 분명 밖으로 나가지 않았나? 돌아와서 뭐 하려는 거지?’문을 등진 바람에 윤아는 들어온 사람이 수현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잠시 후, 가벼운 발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멈춰지더니 등 뒤로 그 사람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윤아는 그 시선이 불편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고 어렵게 고개를 돌렸다.역시나 수현이었고 마침 그의 검은 두 눈과 마주쳤다.수현도 윤아와 눈이 마주친 뒤 살짝 놀랐다. 아마 그녀가 깨어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그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그는 아마 밖에서 있던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윤아가 잠든 사이에 들어와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또 거절하지도 않았다.수현의 마음도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옆으로 누워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불쌍한 척 한 게 아니다...그저 바깥의 온도가 한 자릿수인 데다 홑 옷차림으로 서있었으니 확실히 춥긴 했다. 더구나 얼마 전 위출혈때문에 병원에 갔었는데 아직 다 낫지 않은 것 같았다.그래서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물론 그는 충분히 민재더러 외투 한 벌을 가져오라고 할수 있었지만 시간이 많이 걸렸다.민재도 확실히 그렇게 제안했었다.하지만 그 순간, 수현은 들어가서 윤아의 마음을 테스트해 보고 싶었다. 만약 남으라고 하면 제일 좋겠지만 말이다.역시나 그의 바람대로 성공적이다.비록 실내도 춥긴 마찬가지지만 아이들이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수현의 마음도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잠시 앉아 있다가 일어나 뜨거운 물을 한 잔 따랐는데 병실 안이 너무 조용한 탓에 물 마시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윤아는 저녁때부터 지금까지 긴장한 탓에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상태라 지금 목이 살짝 말랐다.하지만 수현과는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눈을 감고 참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윤아는 갈증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두 눈을 떴다. 그 상태로 또 한참 기다리다가 결국에는 일어나서 물을 마시려고 했다.자신의 움직임이 작다고 착각한 윤아는 물론 수현이 아까처럼 잠에 들었으리라 생각했다.하여 동작을 최대한 작고 가볍게 일어나려고 했다.생각했던 찰나, 수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그래?”그의 목소리에 윤아는 놀란 나머지 몸이 굳어버렸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수현이 그녀에게 다가오면서 다시 물었다.“뭐 해줄까? 말해 봐, 내가 도와줄게.”“필요 없어.”윤아는 고민할 새도 없이 그의 말을 거절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고 하던 순간 몸이 갑자기 앞으로 기울었는데 다행히 수현이 재빨리 부축했으니 마련이지 아니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머리 위에서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
말을 마친 뒤 그녀는 남은 반 잔의 물까지 다 마시고 다시 컵을 그에게 넘겨줬다.수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컵을 건네받고 뜬금없이 물었다.“화장실 갈래?”윤아는 할말을 잃었다.‘왜 또 그걸 물어봐?’그녀는 이번에도 거절하고 싶었지만 젠장, 왠지 마려운 것 같기도 했다...윤아의 얼굴이 순간 검게 변했다.하지만 수현은 여전히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안아서 데려다줄게.”그리고는 다시 그녀를 공주님 안기식으로 화장실까지 데려다주었다.다행히 마침 링거도 다 맞아서 손을 쉽게 사용할 수 있었고 다친 건 이마라 화장실 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화장실에 들어선 뒤 수현은 변기 뚜껑을 열어주고 휴지도 미리 준비해 두고 모든 준비를 다 끝내고 나서야 그녀에게 말했다.“문밖에서 기다릴게, 끝나면 날 불러.”말을 마치고 나가면서 문도 닫아줬다.윤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밖에 있겠다고?” 문밖에서 재빨리 수현의 대답이 들려왔다.“응.”“...”윤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말했다.“조금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돼?”그녀는 단지 아무렇게나 가볍게 한마디 했을 뿐인데 뜻밖에도 그에게 들렸던 모양이다.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어떻게 마음놓고 화장실을 쓸 수 있겠는가?잠시 조용해지더니 이내 수현의 낮고 아까보다는 조금 멀리 떨어진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충분해?”윤아는 아예 화장실 문을 열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더 멀리.”수현은 조금 더 멀리 갔다.그가 매우 멀리 떨어진 모습을 보고 나서야 윤아는 화장실 문을 닫을 수 있었다.볼일을 다 본 뒤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와보니 수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는데 윤아가 나오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다가왔다.“안아줄 필요 없어.”그가 손을 뻗기도 전에 윤아가 말했다.그녀의 말에 수현은 어쩔 수 없이 하려던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 “혼자 갈 수 있겠어?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없어.”윤아는 그를 힐끔 보면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순간 수현의 눈살이 찌푸려지더니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내가 언제 아이를 안 가지겠다고 했어?”그의 반응에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쓴 웃음이 났다.“시치미 떼지 마,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네가 한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이 말은 수현의 눈살을 더욱 찌푸리게 했고, 너무 터무니없어서 꼭 해명해야 했다.“그럼 내 입으로 한 말이 아닌데 왜 내가 했다고 단정짓는 거야?”그의 말을 들은 윤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수현 씨, 인정할 용기도 없는 거야?”수현은 너무 괴로웠다.“내 입으로 한 말도 아닌데 왜 내가 인정해야 하냐고?”윤아는 참을 수 없는 비웃음이 또 터져 나왔다.“당신이 이렇게까지 겁쟁이로 변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자기가 했던 일도 인정 못 하고 말장난만 하고 있네.”“내가 언제 말장난을 했어?”윤아가 버럭 화를 냈다.“말장난이 아니면 왜 인정하지 못하냐고.”“아니,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인정하냐니까?”수현과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자기 입으로 증거가 없다고 했지만 확실히 그때 당시 그가 직접 말한 게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지금 윤아한테서 아이를 뺏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부인하고 싶을 것이다.윤아는 그가 이런 사람으로 변 줄은 몰랐다.수현은 그녀가 말도 없고 그를 보는 눈빛과 얼굴빛이 돌변하자 참지 못하고 어깨를 움켜쥔 채 이를 악물며 말했다.“좋아, 꼭 그렇게 말해야 한다면 내가 했다고 인정할게. 그럼 당사자의 권한으로 그때 일을 다시 되짚어봐도 될까?”말을 듣고 있던 윤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인정하면 인정했지 왜 되짚어본다고 하지? 설마...’“나에게 죄를 묻더라도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말을 하면서 수현은 이를 너무 세게 악문 나머지 이빨이 부스러질 것 같았다. 정말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윤아는 분명 그가 한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진짜 못 봤어. 내가 그런 중요한 문자를 보고 답장 안 할리가 없잖아.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왔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라?”“맞아, 네 말대로 우린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서 너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잖아? 어쨌든 소영 씨는 당신 생명의 은인이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당신이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까.”“설마 내가 그 여자 때문에 너에게 상처줬다고 생각하는거야?”그의 물음에...윤아는 비아냥거리며 답했다.“그런 적 없어?”수현이 물었다.“내가 언제?”‘언제냐고?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수현이 대신 입을 먼저 열었다.“만약 이혼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내가 해명할 수 있어.”윤아는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애초에 우리 혼인은 가짜였다고 말했었지?”그의 말에 윤아는 그를 한번 슬쩍 보았다.수현은 계속 말을 이었다.“그때 나한테 뭐라고 했어? 할머니 수술이 끝나면 이혼한다고 했잖아.”“내가 한 말이 아니야.”윤아가 그의 말을 반박했다.“수현 씨가 그렇게 말했지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잊었어?”수현의 웃음은 조금 처량해 보였다.“우리가 관계를 맺은 지 5일째 되는 날 아침, 할머니 수술 끝나면 이혼하자고 네 입으로 직접 얘기했어.”윤아는 그의 말에 멍해졌다. 이미 그녀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졌기때문이다.수현의 말을 듣고 윤아는 다시 기억을 되짚어보았는데 확실히 그때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그 당시 그들은 처음 관계를 맺었지만 알코올이 그중 큰 역할을 했었다.하여 깨어났을 때 서로 매우 어색했고 특히 대화가 끝나도 수현은 매우 저기압이었다.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닷새째 되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얼굴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수현을 보며 말했다.“하루 종일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날 밤 일은 내가 말했잖아, 그냥 사고였어, 그렇게 신경 쓰이면 할머니 수술이 끝나고 바로 이혼하자.”그녀의 말에 수현의 발걸음이
“그때 심씨 가문에 어려움이 있을 때 도와준 건 고맙지만 우리가 결혼하게 된 이유는 잊지 않았지? 할머니가 그때 몸이 안 좋아서...”할머니 얘기가 나오자 윤아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얼굴도 못 본 일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으나 심호흡하면서 겨우 진정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아무튼 서로가 필요한 걸 주고받았으니깐 비즈니스 사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그래?”수현의 눈빛이 진지해지더니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만약 진짜 비즈니스 사이라면 왜 떠날 때 한푼도 챙기지 않았어? 아이는 왜 또 낳았고?”“이혼한 마당에 내가 당신 돈을 어떻게 가져? 수현 씨가 우리 심씨 가문의 일을 처리해 주고 나는 할머니를 돌봐주는 거로 서로 윈윈했잖아, 근데 내가 왜 당신 돈을 받아야 하지? 그리고 아이를 왜 낳았냐고 물었는데, 웃겨, 내가 같이 자자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서로 합의 하에 관계를 맺은 거잖아. 내 배로 임신한 아인데 당연히 낳을지 말지에 대한 권리가 나한테 있지.”“근데 아이는 내 핏줄이기도 하잖아.”“그게 뭐? 수현 씨 핏줄이 그렇게 대단해? 내가 낳았으니 내 자식이야. 나한테 자식이 있단 사실이 배 아프면 다른 사람한테 가서 낳아달라고 해.”수현은 할말을 잃었다.“...”대화의 주제가 점점 요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수현은 결국에는 문제점을 발견했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왜 윤아가 지금 그에게 이렇게까지 큰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했지만, 아이 이야기를 꺼내자 온몸에 가시가 돋친 모습으로 그가 아이를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오해를 풀지 않으면 윤아는 영원히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고 자기가 아이를 뺏어가려는 게 아니라 그저 그녀와 같이 키우고 싶어 하는 마음도 믿지 않을 것이다.오늘의 계획은 가능한 한 빨리 그녀를 안심시켜서 그때의 오해를 풀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그러다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자기 핸드폰인 걸 알아챈 윤아는 냉큼 받았지만 수현이 갑자기 말했다.“녹음 기능을 켜.”그의
수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분하게 핸드폰에 대고 그녀가 말한 그대로 녹음했다.윤아는 누워서 수현을 보며 말했다. “언젠가 나한테서 아이를 뺏으려는 생각이 들거나, 법적 절차를 밟아서라도 아니면 몰래 내 아이를 뺏으려 하면 나는 꼭 당신을 법정에 세울 거야. 그러면 당신 명의의 모든 재산은 나 심윤아에게 넘겨야 하고.”윤아는 이 말까지는 녹음 못 하겠지 싶었다.이 말을 했다는 것은 법적 효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일단 아이를 데려간다고 해도 아마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하여 윤아는 말을 마치고 기대하지도 않은 채 그쪽에 아예 신경을 꺼뒀다.이때, 갑자기 수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토씨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녹음하기 시작했다.윤아는 할말을 잃었다.“...”그리고 복잡해 보이는 눈빛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진짜로 그 말을 전부 녹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무슨 뜻이지? 설마 진짜 아이를 뺏지 않을 건가? 정말 나만의 착각이었나? 생각해 보니 요 며칠 너무 의심만 했었나?’수현은 처음부터 그녀와 같이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강조했었다...“이제 안심이 돼?”그녀가 예전처럼 자신을 경계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수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드디어 두 사람 사이의 오해를 마음 놓고 풀 수 있지 않을까?윤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담긴 녹음을 저장 후 백업까지 해두었다.앞으로 정말 필요한 순간에 충분히 증거자료로 쓸 수 있어 보였다.수현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녹음파일도 잘 챙기고 핸드폰도 잘 간수해. 다른 사람이 가져가거나 잃어버리면 안 되니깐, 그때 가서 또 내 탓 하지 말고.”“말하지 않아도 알아.”윤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베개 밑에 핸드폰을 밀어 넣었다.“그래서, 이제 나한테 마음이 조금 놓여? 이제야 내가 아이를 빼앗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으니깐?”그의 표정을 보니 지금 분명 자신에게 더할 말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할말이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