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는 앨리스는 기분 좋게 주문을 계속했다.“윤이 훈이는 아직 어리니까 안 매운 탕이 좋겠지? 근데 난 매운 탕으로 먹고 싶으니까 반반으로 하는 거 어때?”앨리스는 윤아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윤아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그녀의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윤아야?”윤아는 앨리스가 손을 휘적이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무슨 생각 해? 밥 먹으러 와서 무슨 멍을 그렇게 때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일 생각 하는 건 아니지?”윤아는 앨리스를 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묻고 싶은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는 듯 보였다.“미안해. 너...”“뭘 또 미안하대.”앨리스가 손을 뻗어 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사이에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난 네가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힘들까 봐 걱정되는 거야. 밥 먹을 땐 일 생각 하지 말고 즐거운 생각만 해.”하긴, 밥 먹으러 와서까지 딴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긴 하다. 윤아는 밥을 다 먹고 나서 방금 그 프로필 사진에 대해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게다가 방금은 그저 찰나여서 잘못 봤을 가능성도 다분했다.윤아는 그저 앨리스도 고독현 밤이라는 사람의 카톡이 있는 거라면 어떻게 추가하게 된 건지 궁금했다.“훈이, 윤이.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더 시켜.”그러자 두 아이도 쪼르르 앨리스의 곁으로 다가가 메뉴를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윤아는 딴생각에 잠기지 않기 위해 메뉴 선정에 더 집중했다.밥을 먹는 와중에도 앨리스는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들어 복스럽게 먹고 있는 아이들을 찍었다. 그리고 중간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주기 위해 나갔다 오기까지 했다.저녁을 다 먹으니 어느새 밤 아홉 시가 다 되었다.두 아이는 배가 부른지 윤아의 양쪽 팔에 매달려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아이고. 이 귀요미들. 난 언제쯤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앨리스가 부러운 듯 말했다.윤아는 그런 앨리
윤아는 앨리스의 반응에 입가의 웃음기가 살짝 옅어졌지만 그래도 내색 않고 부드럽게 물었다.“그럴 수도 지. 그래도 내가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핸드폰 잠깐만 보여줄 수 있을까?”앨리스는 눈을 깜빡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윤아야. 정말 별거 없어. 프로필 사진이 겹친 걸 수도 있잖아?”처음엔 별생각 없던 윤아도 지나치게 핸드폰을 사수하고 안 보여주려는 앨리스의 모습에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남의 핸드폰을 보여달라는 게 무례한 요구란 건 알지만, 앨리스와는 그동안 쌓아온 정도 있고 핸드폰 정도는 보여줄 수 있는 사이였다.멀리 갈 필요 없이 앨리스가 그녀와 선우를 한창 엮으려 하던 그때도 윤아의 핸드폰이 울리기만 하면 앨리스는 냉큼 집어가 자기가 먼저 확인하곤 했다.“나도, 나도 볼래. 분명 선우 씨가 보낸 문자일걸? 어머, 어머머. 이것 봐! 진짜야. 내가 답장 해줄게.”그러고는 선우에게 낯간지러운 말들을 잔뜩 보내버리곤 했었다.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그 후로는 선우도 그런 답장을 받으면 앨리스가 한 짓인 걸 알아차리곤 했었다. 덕분에 이런 일로 오해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사이도 좋고 다 아는 사이라 윤아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은...비슷한 프로필을 본 것 같아 확인해 보고 싶다는 데 이렇게까지 거부할 일인가.윤아는 꼿꼿이 선 채 앨리스를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해보았다.“다른 의도 없어. 그냥 확인만 한 번 해볼게.”앨리스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윤아는 선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예전에도 윤아는 그녀가 싫다고 한 일은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한 번 거절한 일을 또 묻고 있다. 그 말은 지금 윤아가 이 일을 매우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친구라면, 선뜻 핸드폰을 내어주는 게 맞겠지만...앨리스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목소리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안 돼.’만약 윤아에게 보여주면 그녀가 수현과 나눈 대화를 전부 보게 된다.수현의 앞에서 앨리스
앨리스는 다 포기한 사람처럼 핸드폰을 건넸다.“봐.”윤아는 잠시 멈칫했다.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때에 앨리스의 생각이 갑자기 바뀔 줄은 몰랐던 것이다.윤아는 조금 의외라는 눈빛으로 앨리스를 바라봤다.“사실... 네가 불편하다면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어.”“안 불편해.”앨리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나도 예전에 네 핸드폰 자주 봤었잖아. 네가 내 핸드폰 볼 수도 있는 거지. 나만 네 핸드폰 보고 넌 못 보게 하면 내가 너무 막무가내잖아? 어서 봐.”말을 마친 앨리스는 아예 핸드폰을 윤아의 손에 쥐어주었다.핸드폰을 쥔 윤아는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고마워. 앨리스.”윤아는 핸드폰 잠금을 풀기 위해 앨리스에게 도움을 청했다.지문인식을 위해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앨리스의 마음은 귀신의 집에 들어가는 아이처럼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앨리스는 생각 끝에 어차피 보게 될 거 그냥 먼저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사실 최근에 그때 술집 남자를 추가했어. 네가 아는 그 사람 말이야. 내가 전에 얘기한 적 있잖아.”그 말에 윤아는 심장이 철렁했다.진수현만 추가했다는 건가?그럼 그 프로필 사진은...“다른 사람은 없어?”“없어.”앨리스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그 사람만 추가 했어. 윤아야, 너랑 그 사람 사이에 뭐가있었든 날 탓 하진 말아줘. 나도 그 사람 반년이나 기다렸다고. 고집 좀 부릴 만 하잖아.”윤아는 앨리스가 그녀에게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핸드폰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건가? 우리 사이에 흠이라도 생길까 봐?생각 끝에 윤아는 팔을 뻗어 앨리스를 꼭 안았다.“걱정 마. 우리 사이가 다른 사람 때문에 휘둘릴 일은 없을 거야.”“정, 정말이지? 거짓말 하면 사람 아니고 개다?”“응. 정말이야.”윤아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앨리스는 핸드폰 잠금을 풀어주었다. 조금 전 상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건지 윤아가 봤던 그 카톡 화면이 그대로 나타났다.덕분에 윤아는 단번에
그 말에 윤아가 고개를 들어 앨리스를 바라봤다. 그녀는 지금 그 어떤 정보도 놓칠 수 없었다.“어쩐지 뭐?”“나...”앨리스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전에 한동안 네가 볼일이 있어서 내가 아이들 봐줬잖아.”“응. 그래서?”“인스타에 사진을 올렸는데 수현 씨가 본 것 같아. 나한테 연락이 왔었어.”윤아는 충격적인 소식에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미치게 벌렁거리고 낯빛은 어느새 백지장이 되었다. 윤아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물었다.“그래서? 연락 와서 뭘 물었는데?”“윤이와 훈이에 관해 물었어. 난... 윤이 훈이 팬인 줄 알고 깊이 생각 안하고 다 알려줬어. 미안해 윤아야. 네 일도 전부 말해줬어... 난 정말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앨리스는 말하면서도 죄책감이 밀려와 몸 둘 바를 몰랐다. 왠지 윤아에게 엄청난 잘못을 해버린 느낌이 들어 괜히 애꿎은 손만 꼼지락댔다.한편, 여기까지 들은 윤아는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지금껏 기를 쓰고 숨기려 했는데 진수현은 이미 모두 알고 있었던 거다.고독현 밤과의 만남 장소에서 진수현을 마주친 것도, 진수현이 그녀를 끌고 갔는데 고독현 밤이 나타나지 않은 것도 전부 이제야 이해가 됐다.두 아이도 그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고독현 밤 아저씨가 참 잘해준다고. 먹다 남긴 햄버거 빵도 그 아저씨가 다 먹어준다고 말이다.그리고 수현이 무슨 이유인지 말을 삼키던 그 모든 순간까지... 모든 정황이 그가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그런데도 그녀는 잘 숨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자부했다.아무것도 모르고...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는 윤아를 보며 앨리스는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었다.“왜 그래? 윤아야...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윤아야, 윤아야?”앨리스가 연달아 몇 번이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윤아는 정신이 돌아왔다.하지만 그 후에도 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엄마, 왜 그래요?”그녀가 침묵한 시간이 너무 길 자 두 아이는 조금 이상함을 눈치챘다. 윤아는 고개를 돌린 후, 훈이와 윤이가 고개를 들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것을 발견했다.윤아는 입술을 꾹 다문 후 웃음을 지어 보였다.“아무것도 아니야. 일 생각하고 있었어.”윤이는 비교적 단순했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 딱히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훈이는 계속 침묵하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유지했다.“엄마, 지금 퇴근 시간이니까 일 생각 하지 마요.”윤이는 일어서서 윤아의 팔을 껴안으며 귀엽게 입을 열었다.“응, 알겠어. 그러면 엄마가 너희들에게 뭘 물어봐도 돼?”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점심에 고독현 아저씨가 학교에 가지 않았어?”두 아이는 이 말을 듣더니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윤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어제랑 그제도 갔는데 오늘 안 갔다고?”“네.”윤이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민기가 오늘 아저씨가 바빠서 오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다른 아저씨를 보내 우리들에게 먹을 걸 갖다줬어요.”“다른 아저씨?”윤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오늘 점심, 수현은 그녀와 함께 있었다. 만약 ‘고독현 밤’이 정말 수현이라면 확실히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만날 시간이 없었을 터였다.“네. 고독현 아저씨 비서라고 했어요. 엄마, 아저씨 정말 대단해요. 비서도 있고 말이에요. 딱 봐도 돈 엄청 많을 거 같아요. 그리고 윤이가 엄마 대신 물어봤는데요, 아저씨 싱글이래요.”심윤아:“...”이 녀석, 아직도 ‘고독현 밤’이 자기 아빠로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는구나.그런데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을까?전에 다른 사람이 아아들한테 잘해주었을 때 윤이는 한번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독현 밤’에겐...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윤이를 자신의 품에 끌어당겨 앉히고 아이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조용히 물었다.“윤이야, 너 솔직하게 엄마한테 말해. 고독현 아저씨가 너한테 아빠로 인정받으려고 유도하지 않았어?”유도라고 말할 때 윤아는
두 사람이 다 말한 다음 윤아는 대략 그날에 있었던 일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손을 뻗어 윤이의 코를 가볍게 터치했다.“바보야, 다른 사람이 너한테 조금이라도 잘해준 것 가지고 네 아빠로 되어 달라면 어떡해? 엄마가 전에 가르치지 않았어?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믿지 말라고 했잖아.”“음.”윤이는 자신의 코를 감싸며 애교를 부렸다.“그런데 엄마, 윤이는 아저씨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전 아저씨가 진짜 좋아요!”여기까지 듣자, 윤아는 놀라서 멈칫했다.“좋다고?”“네.”윤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고독현 아저씨에겐 아빠의 느낌이 나요. 엄마, 그냥 고독현 아저씨가 윤이랑 오빠 아빠 해주면 안 돼요? 네? 오빠도 아저씨 좋아해요.”이 말에 윤아는 고개를 돌려 훈이를 보았다.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자 훈이는 당황해하며 순간 눈을 피했다.“훈아?”“아, 아니에요. 엄마, 훈이는 아저씨 안, 안 좋아해요.”직접 낳고 키운 아이였으니 어떤 성격인지 윤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훈이에게서 저렇게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윤이 뿐만 아니라 훈이도 이 ‘고독현 밤’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안타깝게도 말이다.만약 ‘고독현 밤’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신분이었다면 어쩌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람은...윤아는 더는 말하지 않았고 차 안에도 침묵이 맴돌았다. 윤이는 결국 윤아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집에 도착한 후, 윤아는 아이를 안고 방에 데려갔다. 나올 때 마침 방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훈이와 마주쳤다.“엄마.”훈이는 조금 긴장한 듯 얼굴을 들고 윤아를 보았다.“엄마는 우리가 고독현 아저씨랑 함께 있는 게 싫어요?”일시에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할지 몰라 윤아는 훈이 앞에 몸을 쭈그리고 앉아 아이의 머리를 만졌다.“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방에 돌아가서 자. 응?”훈이는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결국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아이가 모두 방에 돌아간 후, 윤아도 자신의 방에
이튿날.심윤아는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는 회사로 향했다.회사에 도착한 후, 그녀는 앨리스의 문자를 받았다.[윤아야, 어젯밤 정말 괜찮았어?]비록 어제 서로 안부를 전했지만 앨리스는 어제 그녀의 표정이 떠올라 한번 다시 물어보기로 결정했다."괜찮지 그럼, 걱정하지 마.”"정말? 하지만 어제…”윤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정말 괜찮아. 다만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그래.”"그래? 그럼 네가 다 처리할 때까지 기다릴게. 다 처리하면 먼저 나한테 말해, 현아한테 먼저 말하지 말고.”그녀의 말에 윤아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알았어, 내가 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줄게. 그때 단체방에서 통화하자, 알았지?”"응응.”앨리스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후 윤아는 손을 들어 시계를 보았는데 점심까지 아직 몇 시간 남았었다.지금 서둘러도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제대로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일하는 동안 사적인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지금 완전히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오전 시간을 간신히 넘기고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윤아는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들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문 앞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또 걸음을 멈추었다.아니, 그녀는 지금 갈 수 없었다.비록 그녀는 이미 퇴근했지만 두 아이는 아직 식사 시간이 아닐지도 모르니 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시간을 잘 체크해서 그 자리에서 단번에 박살 낼 계획을 세웠다.일찍 가 있다면 상대방에게 들킬 위험이 있고 그렇다면 그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그녀의 이성이 윤아를 다시 냉정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컴퓨터 책상에 돌아가 앉아 시간을 지켜보다가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사무실을 나섰다.사무실을 나설 때 그녀는 마침 그녀를 찾으러 온 오민우를 만났다."계속 내려오지 않으셔서요. 점심 같이 드실래요?”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윤아는 황급히 그의 어깨를 스치며 뛰어나갔다."안 먹어요. 점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윤아는 보안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마침 오늘 시간이 나서 아이 보러 왔는데 지금 들어가도 되나요?”보안은 문을 열면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들어오세요.”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한 뒤 안으로 들어가며 무심한 듯 물었다."오늘 다른 학부모도 오셨어요?”"없는 것 같은데요?”“없다고요?” 윤아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설마 그녀의 판단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아니면 그가 이미 자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경비원은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뭐가 생각난 듯 갑자기 입을 열었다."아니, 아니. 제가 깜빡했어요. 오늘 한 분이 오셨어요. 애들 밥 갖다 주러 왔다는데 요즘 자주 와요.”자주 온다고? 그것도 도시락을 가져다줘?여기까지 듣고 나니 윤아는 드디어 자신감이 생겼다.이 도시락을 갖고 오는 사람이 바로 그녀가 지금 찾고 있는 사람이다!"참, 아이들이 자주 그 사람들과 노는 것도 봤어요.”"고맙습니다. 제가 들어가 볼게요.”"자, 어서 들어가세요. 점심 같이 드실 수 있을지도 몰라요.”점심을 같이 먹는다?윤아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고 속으로는 냉소를 지었다.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오늘 수현이 가져온 것은 모두 특별히 요리사를 초대해 만든 것이었다. 디저트도 파티시에가 만든 것으로 색깔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맛도 일품이었다.하윤은 작은 볼에 불룩하게 넣고 맛있게 먹었고 수현은 손수건을 손에 들고 수시로 아이의 입가를 닦아주었다.몇 번 후, 소녀는 약간 쑥스러워졌는지 수현의 손을 밀치며 부드럽게 말했다."아저씨도 드세요. 윤이 혼자서도 잘 먹어요.”"괜찮아, 아저씨는 배 안 고파.”"그런데 아저씨는 아직 점심을 안 드셨잖아요.”"응, 아저씨는 나중에 먹을게. 윤이 어서 먹어.”하윤은 눈망울을 굴리며 생각하다가 혼자 음식을 먹지 않고 수현의 숟가락을 들어서는 닭고기 한 조각을 떠냈다."아저씨, 윤이가 먹여줄게요.”이 동작은 수현을 매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