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는 거야?”수현이 잡아당기는 바람에 윤아의 손에 있던 보고서가 손쓸 새도 없이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그러나 그는 무언가에 자극받은 사람처럼 보고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윤아를 끌고 성큼성큼 나아갔다.“잠깐만요.”그제야 반응이 돌아온 안경남이 서둘러 달려 나가 두 사람 앞을 막아섰다.“당, 당신. 우리 대표님께 뭐 하려는 거예요. 그 손 놔요!”수현은 겁 없이 그의 앞을 막아서는 하룻강아지 같은 이 남자를 한 눈 흘겨보았다.금테 안경... 그의 안경에 시선이 닿자 수현은 비슷한 안경을 늘 끼고 다니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 남자, 아까 엘리베이터에서도 윤아를 음침하게 쳐다봤었지...수현은 순간 빈정이 확 상했다.그는 냉소를 터뜨리며 안경남을 조롱했다.“그쪽이 뭔데 날 막지?”수현의 드센 기에 눌린 안경남은 잠시 멈칫했다.한편, 윤아는 여전히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진수현. 이거 놔. 대체 뭐 하는 짓이야.”안경남은 그런 윤아의 모습에 용기를 내 앞으로 더 나서며 말했다.“대표님 놔줘요.”“꺼져!”수현이 짜증스럽게 호통을 쳤다.“주먹 나오게 하지 맙시다.”말을 마친 그는 곧장 윤아를 끌고 떠나버렸다.안경남은 한참 후에야 정신이 돌아와 그들을 따라가려 했지만, 수현의 섬뜩한 모습을 떠올리고는 결국 몸을 돌려 오민우의 사무실로 달려갔다.“매니저님, 매니저님!”그는 허둥거리며 사무실로 쳐들어 갔는데 민우가 클라이언트와 통화 중인 걸 보고서야 요란하게 외쳐대던 입을 다물었다.민우는 하는 수 없이 미안하다는 말로 급하게 통화를 마치고 자초지종을 물었다.“무슨 일인데 이렇게 난리법석이에요? 회사에서 누가 이렇게 소리를 지르랍니까?”“매니저님,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저희 대표님을 끌고 갔어요.”윤아의 일을 들은 민우는 순식간에 표정이 굳더니 다급히 물었다.“무슨 남자요? 대표님을 끌고 가요? 납치란 말입니까?”“납치?”안경남은 곰곰이 생각한 후 말을 정정했다.“납치는 아닌 것 같아요. 두 분이
“생각 정도는 해도 괜찮아요. 예쁘고 똑똑한 여자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어서 돌아가서 일이나 해요.”안경남은 하는 수 없이 우울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민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자기 일에 몰두했다._수현은 윤아를 끌고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향했다.초반에는 안간힘을 쓰며 버둥거리던 윤아도 쇠사슬같이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수현의 커다란 손에 완전히 의욕을 잃어버렸다.윤아는 결국 괜한 힘을 빼는 대신 그가 가려는 데로 끌려가기를 선택했다.윤아가 조용해지자 수현도 그녀의 기분이 신경이 쓰였던 건지 얼마 안 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숨 막히는 적막 속,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공중에서 맞물렸다. 이윽고 윤아의 시선은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 단단히 붙잡힌 자신의 손목으로 향했다.“이제 좀 놔주지?”그녀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명확했으며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이런 윤아의 모습에 수현은 미간을 구겼다. 그는 손목을 풀어주는 대신 더 힘을 주어 단단히 붙잡았다. 그러고는 앞으로 두 걸음 다가가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할 말 있어.”수현이 다가오자 순식간에 그의 서늘한 체향이 윤아를 감쌌다.기억 속의 그 냄새와 똑같았다.윤아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옆으로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그래. 할 말 있으면 해.”윤아의 짜증스러운 말투와 귀찮은 듯한 태도에 수현은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 났다. 하지만 오늘 꼭 해야만 하는 말이다.“아까 내 핸드폰 무음 모드 해지할 때, 알림 뜬 거 봤었지?”수현이 이걸 물어볼 줄 몰랐던 윤아는 당황한 듯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코웃음을 쳤다.“그럴 리가. 난 네 사생활에 관심 없어.”“그래?”수현의 시선이 그녀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못 봤다고?”“응.”윤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못 봤어. 그러니까 이제 나 좀 놔주지?”그러나 수현은 곧바로 윤아를 차가운 벽으로 밀어붙인 후 그녀의 손을 포박했다. 그러고는 이빨을
윤아는 태도의 나쁨과 더 나쁨으로 그녀의 기분을 가늠하는 인간은 살다 살다 처음이었다.“그게 뭐? 널 대하는 태도가 너 나빠졌다 해서 그게 뭘 설명할 수 있는데?”수현은 말없이 그저 가만히 윤아를 바라보았다.그런 수현을 보며 윤아는 다시금 그를 밀어내려 시도했다.“일단 나 좀 놔줘.”수현이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아는 힘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다.그 순간, 윤아는 수현 특유의 서늘한 향과 함께 눈앞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수현이 갑자기 몸을 숙여 그녀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지금 뭐 하는...”윤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수현의 품속에 안겨있었다.그 순간 수현의 체온이 윤아의 몸을 감돌았다. 윤아는 수현이 자신에게 강제로 키스라도 하려는 줄 알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래. 너한텐 별 의미 없겠지. 하지만 난 아니야. 나한텐 큰 의미야.”수현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윤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 그저 네 미세한 변화로부터 나한테 조금의 미련이라도 있는지 짐작하는 수밖에. 설령 그게 티끌만 한 마음일 지라도.”진짜든 아니든, 설령 곧 사라질 감정이라도 그는 꽉 붙잡고 싶었다.한편, 윤아는 자기가 잘 못 들은 줄 알았다.방금 그 말, 그답지 않게 비굴했다.진수현 입에서 나온 말이란걸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화법이다.윤아는 처음에 그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5년 전엔 본인이 먼저 이혼하자 해놓고 왜 이제 와 이러는 건지. 게다가 애초에 아이를 포기한 사람도 진수현 본인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 와 미세한 변화로부터 내 감정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고?대체 무슨 뜻이지?5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니면 그 시간 동안 이혼 한 걸 후회하기라도 했단 건가?후회?아니. 분명 지난번 경매에서는 강소영과 함께였다. 함께 경매에 참여하고 함께 서있었고 함께 떠났었다. 둘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정말 타고난 한 쌍이었다.이런 생각이 들자 윤아의
수현의 눈빛은 깊고 어두워 마치 윤아를 집어삼킬 듯했다. 그의 몸이 윤아에게 한 발짝 다가갈수록 더 크게 들려오는 서로의 숨소리에 수현은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5년, 그 긴 시간 동안 미치게 바라왔던 그녀의 입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마침내 두 입술이 맞닿으려던 그 순간, 윤아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경멸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윤아의 비릿한 웃음에 수현은 동작을 멈추었다.“그래서?”윤아는 여느 때보다도 가까워진 수현을 바라보며 냉소를 터뜨렸다. 이윽고 그녀의 하얀 손끝이 수현의 가슴팍을 꾹 누르더니 가볍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후회한다면 내가 널 받아줘야 해? 진수현, 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지?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조종하려 들어? 대체 뭘 믿고?”“그런 적 없어.”수현이 미간을 찌푸렸다.“건망증이 심하네. 자기가 먼저 이혼하자고 하던 일은 까맣게 잊었나 봐.”그 말에 수현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그래. 그땐 내가 잘못했어. 그럼 넌? 그때 넌 내가 이혼 얘기를 꺼내든 말든 상관이 있었어? 내가 이혼하자고 한 건 네 뜻을 따른 것뿐이었어.”그러자 윤아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야?”수현은 입술을 깨문 채 여전히 그늘진 눈빛으로 윤아를 보며 말했다.“그날, 잠에서 깼을 때 네가 그랬잖아. 그냥 정상적인 생리적 욕구일 뿐이라고.”수현은 말을 하면서 떠오르는 기억에 다시금 분노가 차오르는지 이를 꽉 물었다.“그리고 나한테 20억을 요구했지.”윤아는 잠시 침묵하더니 반박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그 돈은 이미 돌려줬을 텐데?”윤아는 그를 떠날 때 정말 다시는 엮이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었다.“그 문제가 아니잖아.”“그럼 뭔데? 진수현. 난 이제 너한테 빚진 거 없어.”“그래, 없지. 그러니까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홀가분하게 갔겠지. 이젠 내 얼굴 한 번 보려고 하지도 않잖아.”수현은 윤아를 바라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신경 쓰는 건 그저 생리적 욕구
둘의 입술은 어느새 거의 붙다시피 가까워졌다. 이제 윤아가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것 같았다.이 거리... 아주 위험하다.윤아는 하는 수 없이 손을 뻗는 동시에 머리를 뒤로 젖혀 수현에게서 멀어지려 애썼다.그러나 몸을 움직이는 순간 수현이 곧바로 입을 맞춰올 줄은 몰랐다.“읍.”입술이 부딪힌 순간, 수현은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자극에 정신이 몽롱해졌다.말캉한 촉감에 그는 저도 모르게 윤아의 허리를 더 꽉 잡아당겼다. 긴 시간 동안 억눌렸던 욕망을 펼치듯 그의 숨은 거칠게 윤아를 파고들었다.윤아는 손으로 수현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말했다.“놔, 이거 놔.”매일 밤 갈망하던 걸 이제 겨우 얻었는데 놓아 줄 리가 있나. 수현은 손을 놓기는커녕 그녀를 삼켜버릴 듯 더 매섭게 밀어붙였다.그러다 윤아가 온 힘을 다해 그를 깨무는 바람에 외마디 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윤아는 뒤엉킨 입술 사이로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동시에 입술을 뗐고 물러난 수현의 입가에도 피가 묻어있는걸 볼 수 있었다.“짝!”수현이 물러나자 윤아는 곧바로 그의 뺨을 세게 쳤다.수현도 피하지 않고 그녀의 분노를 온전히 받아냈다.“짐승같은 자식.”윤아는 욕 한마디 날린 후 몸을 돌려 떠나버렸다.그러자 뒤에서 수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말 전부 진심이야.”그 말에 윤아는 냉소를 터뜨렸다.“진심? 그럼 뭐? 네 말은 무조건 믿어야 해?”곧이어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수현은 그곳에 가만히 서있다가 한참 뒤에 손을 올려 상처 난 입술을 가볍게 만졌다.아프고 달콤했다.고통과 쾌락의 전율 속에서 수현은 한참 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그는 눈을 질끈 감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_사무실에 돌아온 윤아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을 씻었다.찬물로 얼굴을 세 번이나 씻고 나서야 비로소 차분해진 윤아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간신히 붙잡고 있는 이성으로 한 번, 또 한 번 되뇌었다.절대 현혹돼서는 안 된다고.수현은 그녀가 좋아했던 사람이
민우의 말에 윤아는 말문이 막혔다.민우는 유난히 붉은 윤아의 입술을 한 눈 보고는 슬그머니 웃었다.“그리고 제가 간다고 해도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두 분 대화 잘하고 계시나 구경이나 하라고요?”말을 마친 민우는 윤아의 싸늘한 눈빛을 느꼈다.“오 매니저님. 별다른 일 없으면 이만 가보세요.”“거 참. 이젠 절 보기도 싫으신 모양이네요. 갑니다. 가요. 저도 일이 바빠서.”민우가 떠난 후 윤아는 잔뜩 구겨진 미간을 짜증스레 누르다 결국 포기하고 몸을 뒤로 젖혔다. 윤아는 잠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그 상태 그대로 가만히 누워있었다._윤아가 아이들을 픽업하러 가려는데 마침 앨리스가 저녁을 같이 먹자며 전화를 걸어왔다.윤아도 저녁에 별다른 일정이 없어 흔쾌히 승낙했다.“나 곧 학교에 도착해. 먼저 애들 데리고 쇼핑몰에 가 있을게. 오면 연락해.”“응.”쇼핑몰의 저녁은 항상 사람이 붐빈다. 윤아가 앨리스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이미 윤이와 훈이를 데리고 범퍼카를 타고 사진도 찍으며 놀고 있었다.윤아가 다가올 때 앨리스는 이미 몇 장의 사진을 찍은 후 인스타에 올리기 위해 보정을 하고 있었다.한창 몰두하던 그녀는 윤아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왔어? 오는 길에 차는 안 막혔어?”“괜찮았어. 막히진 않았는데 차는 많더라.”앨리스는 잠시 핸드폰을 멈추고 있다가 윤아의 말이 끝나고 나서 다시 인스타에 올릴 말을 다듬었다.앨리스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윤이와 훈이를 올리기 좋아하는 건 윤아도 이미 익숙해진 일이었다.그 때문에 윤아는 그 일에 대해서 딱히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앨리스가 인스타를 올리다 말고 윤아에게 물었다.“우리 같이 사진 찍은 지 꽤 된 것 같지 않아? 우리도 한 장 찍을까?”윤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앨리스의 곁으로 다가갔다.그러나 앨리스는 포즈까지 다 취해 놓고 윤아의 예쁘장한 얼굴이 화면에 잡히자 문득 뭔가 떠오른 듯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굳었다.진수현 씨가 윤아와 뭔가 있어 보이던데 같이 찍
아무것도 모르는 앨리스는 기분 좋게 주문을 계속했다.“윤이 훈이는 아직 어리니까 안 매운 탕이 좋겠지? 근데 난 매운 탕으로 먹고 싶으니까 반반으로 하는 거 어때?”앨리스는 윤아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윤아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그녀의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윤아야?”윤아는 앨리스가 손을 휘적이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무슨 생각 해? 밥 먹으러 와서 무슨 멍을 그렇게 때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일 생각 하는 건 아니지?”윤아는 앨리스를 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묻고 싶은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는 듯 보였다.“미안해. 너...”“뭘 또 미안하대.”앨리스가 손을 뻗어 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사이에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난 네가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힘들까 봐 걱정되는 거야. 밥 먹을 땐 일 생각 하지 말고 즐거운 생각만 해.”하긴, 밥 먹으러 와서까지 딴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긴 하다. 윤아는 밥을 다 먹고 나서 방금 그 프로필 사진에 대해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게다가 방금은 그저 찰나여서 잘못 봤을 가능성도 다분했다.윤아는 그저 앨리스도 고독현 밤이라는 사람의 카톡이 있는 거라면 어떻게 추가하게 된 건지 궁금했다.“훈이, 윤이.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더 시켜.”그러자 두 아이도 쪼르르 앨리스의 곁으로 다가가 메뉴를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윤아는 딴생각에 잠기지 않기 위해 메뉴 선정에 더 집중했다.밥을 먹는 와중에도 앨리스는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들어 복스럽게 먹고 있는 아이들을 찍었다. 그리고 중간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주기 위해 나갔다 오기까지 했다.저녁을 다 먹으니 어느새 밤 아홉 시가 다 되었다.두 아이는 배가 부른지 윤아의 양쪽 팔에 매달려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아이고. 이 귀요미들. 난 언제쯤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앨리스가 부러운 듯 말했다.윤아는 그런 앨리
윤아는 앨리스의 반응에 입가의 웃음기가 살짝 옅어졌지만 그래도 내색 않고 부드럽게 물었다.“그럴 수도 지. 그래도 내가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핸드폰 잠깐만 보여줄 수 있을까?”앨리스는 눈을 깜빡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윤아야. 정말 별거 없어. 프로필 사진이 겹친 걸 수도 있잖아?”처음엔 별생각 없던 윤아도 지나치게 핸드폰을 사수하고 안 보여주려는 앨리스의 모습에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남의 핸드폰을 보여달라는 게 무례한 요구란 건 알지만, 앨리스와는 그동안 쌓아온 정도 있고 핸드폰 정도는 보여줄 수 있는 사이였다.멀리 갈 필요 없이 앨리스가 그녀와 선우를 한창 엮으려 하던 그때도 윤아의 핸드폰이 울리기만 하면 앨리스는 냉큼 집어가 자기가 먼저 확인하곤 했다.“나도, 나도 볼래. 분명 선우 씨가 보낸 문자일걸? 어머, 어머머. 이것 봐! 진짜야. 내가 답장 해줄게.”그러고는 선우에게 낯간지러운 말들을 잔뜩 보내버리곤 했었다.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그 후로는 선우도 그런 답장을 받으면 앨리스가 한 짓인 걸 알아차리곤 했었다. 덕분에 이런 일로 오해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사이도 좋고 다 아는 사이라 윤아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은...비슷한 프로필을 본 것 같아 확인해 보고 싶다는 데 이렇게까지 거부할 일인가.윤아는 꼿꼿이 선 채 앨리스를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해보았다.“다른 의도 없어. 그냥 확인만 한 번 해볼게.”앨리스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윤아는 선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예전에도 윤아는 그녀가 싫다고 한 일은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한 번 거절한 일을 또 묻고 있다. 그 말은 지금 윤아가 이 일을 매우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친구라면, 선뜻 핸드폰을 내어주는 게 맞겠지만...앨리스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목소리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안 돼.’만약 윤아에게 보여주면 그녀가 수현과 나눈 대화를 전부 보게 된다.수현의 앞에서 앨리스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