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좋아요!”교장은 멀찍이 서서 그들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탄식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의 의혹은 점점 커졌다. 그는 시선을 민재에게 돌리며 물었다.“이 비서님, 저분들 무슨 사이예요?”민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맞춰봐요.”교장: “…”어떻게 감히 맞추겠나.-정당한 명분이 없었고 아이들이 수업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수현은 그들과 이십 분만 있다가 떠났다.차에 오른 후, 그의 기분은 눈에 띄게 좋았다.민재는 이를 보자 보온병을 그에게 건넸다.“대표님, 날씨가 추우니 따뜻한 걸 드시면서 위를 챙기세요.”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민재가 보온병을 건넬 때 거부하지 않고 받아서 몇 모금 마셨다.보온병엔 우유와 오트밀이 들어 있었다. 민재가 특별히 수현을 위해 만든 거였다. 온도도 적당하니 마신 다음 위가 따뜻할 거다.아마 기분이 좋은지 수현은 몇 모금 마신 후에야 병을 그에게 건넸다.“대표님, 더 마시는 건 어때요? 몸에도 좋고 또 지금 대표님께선…혼자가 아니잖아요.”이 말을 듣자 보온병을 들고 있던 수현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민재의 말을 소화하는 듯했다.잠시 후, 그는 고개를 들고 가볍게 웃었다.“그렇죠.”민재는 놀란 얼굴로 수현을 바라보았다.이렇게 오랫동안 수현과 함께 일하면서 그가 마음속으로부터 기쁜 웃음을 짓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신 후, 그는 늘 자신의 마음을 봉쇄한 상태였다.지금 이 상태라면 드디어 천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건가?민재는 수현이 천천히 보온병을 들고 다 마시는 것을 본 후에야 보온병을 거두었다.그는 뚜껑을 닫으면서 말했다.“아까 대표님께서 아이들과 계실 때의 장면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리고 정말 닮았어요. 그래서 사진을 찍어 뒀어요.”이 말을 듣자 수현의 표정은 조금 변했다.“사진이요? 보내 봐요.”민재는 사진을 수현에게 보냈다. 수현은 사진을 클릭해 한 눈 본 후, 또 입꼬리를 올렸다.민재는 앞에서 또 말을 이었다.“아까 즐겁게
오후, 윤아는 평소와 같은 시간에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그들을 픽업하고 학교에서 나올 때 그녀는 또 아침에 보았던 검은색 차를 발견했다.검은색 차는 자리를 이동했지만 여전히 조용히 세워져 있었다.어쩌면 학생 부모의 차일 수 있었다. 아침엔 너무 많이 생각한 것 같았다.요즘 너무 바쁘다 보니 차를 살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걸어서 가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차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아이들을 픽업하는데 많이 불편할 것 같았다.앞으로 아이들한테 들어가는 돈이 많고 또 차는 그저 교통수단일 뿐이니 너무 비싼 걸 살 생각은 없었다. 예산은 한 사천만 원 이하였다.윤아는 물건을 보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 아주 빠르게 가성비가 좋은 차를 검색해 냈고 내일 시간 내 매점에 가서 사용해 볼 생각이었다.시간이 적당할 때 윤아는 아이를 재촉하여 자게 했다. 아이들도 매우 말을 잘 들었고 얼른 방에 돌아갔다.윤아는 창가에 가서 커튼을 닫으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이때 아래층 길거리 가로등 곁에 검은색 차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낮에 학교에서 보았던 그 차와 똑같았다.커튼을 닫던 윤아의 손은 멈칫했다. 그녀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어두워서 잘못 본 걸까? 아니면 그녀의 착각인가?왜 이 검은색 차가 낮에 학교에서 봤던 차랑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윤아는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유심히 보려고 했을 때 핸드폰에서 알림 메시지가 떴다. 핸드폰을 꺼내 한눈 보자마자 자리에 경직되어 서 있었다.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낸 건 이미 이웃 리스트에 오래 있었지만 톡을 하지 않았던 ‘고독현 밤’이었다.저번 이후, 둘은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 윤아는 비록 돈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상대방이 답장하지 않으니 질척거리며 카드 번호를 알려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하지만 그는 지금 갑자기 자신한테 메시지를 보냈다.윤아는 그와의 채팅장에 들어가 그가 보낸 톡을 보았다. 아주 간단한 인사였다.[안녕하세요.]너무 오랫동안 톡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독현 밤 님?][네. 언제 시간 되십니까? 한 번 만나죠.]이번에 돌아온 답장은 꽤 길었지만 그의 제안에 윤아는 미간을 찌푸렸다.만나자고?송금만 하면 되는 일인데 굳이 만나야 하나?[제가 그냥 계좌로 보내드리면 안될까요?][현금만 받습니다.][...][갚기 싫으시면 그래도 괜찮습니다.]이 말에 윤아는 사실 상대방도 돈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걸 눈치챘다. 그저 이런 방식으로 윤아가 포기하게 만들려는 거겠지.하지만... 그녀는 그 돈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생각 끝에 윤아는 답장을 보냈다.[어디서 볼까요?]드디어 허락하는 윤아의 말에 수현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얇은 입술은 심통이 난 듯 가로로 길게 늘어졌다.그는 핸드폰을 거두고 더 말하지 않았다.앞에 있던 민재는 순간 오싹한 기운에 그를 바라봤다.“대표님. 무슨 일이세요?”“출발.”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수현의 차디찬 한마디였다.민재는 무슨 영문인진 모르지만 그의 말대로 차를 운전했다.한편, 윤아는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답장에 의아해 났지만 다그치지는 않았다. 장소가 정해지면 어련히 알아서 답장이 올테니.상대방이 급하지 않으면 윤아도 급할 일이 없었다.여기까지 생각한 윤아는 핸드폰을 내려놓더니 또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창가로 향했다.그녀는 전에 검은 차가 세워져 있던 자리에 차가 없어진 걸 확인했다. 휑한 땅에 가로등 불빛 아래 길게 늘어진 나무의 그림자만 보일 뿐이다. 마치 방금 본 검은 차는 그녀의 환각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말이다.윤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커튼을 쳤다._이튿날.윤아가 세안을 마치고 방 밖으로 나가자 거실에는 선우가 와 있었다.윤아가 나오자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윤아야, 일어났어?”오랜만에 보는 선우의 다정한 미소, 따뜻한 눈길이다.윤아는 선우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좋은 아침. 무슨 일이야?”“생각해 본다고 했잖아. 시간이 꽤 흘렀으니 지금쯤이면 생각을 마쳤을것
윤아가 바로 그 말을 꺼낼 줄은 몰랐던 선우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럼 오늘은 내가 데려다주게 해주면 안 될까?”윤아는 오늘 그와 제대로 얘기할 예정이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허락해 주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그래.”아이들이 학교로 가는 길에 윤아는 유독 말이 없었다. 반면 하윤, 서훈이는 가는 길 내내 재잘재잘 말이 끊이질 않았다.선우도 가만히 그들의 얘기를 들어줬다.학교에 도착해서는 심지어 직접 내려 두 아이를 배웅해 주기도 했다.윤아는 옆에서 그런 선우를 가만히 지켜보다 순간 어디선가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바라봤다.어제 봤던 그 검은 차.윤아는 멈칫했다. 어제 본 게 착각이었다면 오늘도 그럼 착각이란 말인가?윤아는 직감적으로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그녀는 곧바로 발걸음을 돌려 차를 향해 걸어갔다.“윤아야.”그러나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선우의 목소리에 윤아는 정신이 돌아왔다.“왜 그래?”윤아가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보고 따라온 것 같았다. 그는 윤아의 곁으로 와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검은 차를 발견한 그는 갑자기 행동을 멈추더니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다.“아무것도 아니야...”윤아는 그제야 현실을 자각하고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아직 그냥 직감일 뿐인 이 일을 경솔하게 선우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촉이 틀렸을 수도 있지 않은가?게다가 학교 문 앞에 주차된 차다. 그 말은 학교 측에서 막지 않았단 말이다. 달리 이상한 짓을 한 것도 아니니 그저 이 학교 학생의 학부모일 가능성도 크다.시선이 느껴졌던 건...윤아는 입술을 앙다물고 미간을 찌푸렸다.“회사 가봐야 하지 않아? 먼저 가. 난 회사가 여기서 멀지도 않으니까 걸어가면 금방이야.”“심윤아.”선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싫단 뜻이었다.윤아는 그래도 고집스레 그를 보며 말했다.“
“엎드려요!”그와 동시에 수현이 차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민재도 빠르게 반응하고 엎드렸다.윤아는 창문 앞에 바싹 붙어서 차 안을 유심히 관찰했다.유난히 강렬한 햇빛 때문에 야외에 오래 서있었던 윤아는 눈이 침침했다. 덕분에 그녀는 차에 아무리 찰싹 붙어도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깜깜하네.’하지만 쉽게 포기할 윤아가 아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버티고 서있어 보기로 했다.차 안의 두 사람은 거의 눕다시피 있었다. 수현은 몸을 눕힌 채 눈동자만 옮겨 차창 옆에 기대어 있는 윤아를 바라보았다.반면 민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숨도 못 쉬고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그는 윤아의 경각심이 이렇게까지 높을 줄은 몰랐다.별로 한 일도 없는데 고작 두 번 이곳에 왔다고 바로 들키는 건가?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윤아는 더 보이는 게 없자 어쩔 수 없이 이쯤에서 포기했다.그녀가 떠나자 민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대표님. 윤아 아가씨 진짜 무섭네요. 차 안에 사람이 있는 건 또 어떻게 아셨지?”둘은 윤아의 기습에 많이 놀란 듯 그대로 한참을 더 누워있었다. 언제 그녀가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섣불리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윤아가 정말 갔음을 확인한 후에야 둘은 몸을 일으켰다.표정이 안 좋은 수현.민재는 많이 놀랐는지 뛰는 가슴을 문지르며 말했다.“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대표님. 저희 이제 어쩌죠?”수현은 싸늘하게 민재 쪽을 한 눈 보고는 입술을 앙다물었다.잠시 후, 그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_하윤이는 오늘도 간식시간에 먹을, 먹거리들을 챙겨 왔다.하지만 학교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부터 배가 출출하기 시작한 하윤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서훈을 보며 말했다.“오빠, 나 먹고 싶어.”하윤이와 한날한시에 한배에서 태어난 서훈이 그녀의 생각을 모를 리가 없었다. 먹고 싶다는 하윤이의 말에 그는 단번에 뭘 말하는지 알아차렸다.“안 돼. 아침 먹은 지 얼마 안 됐잖아.”
수현을 본 훈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금 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그에게 다가간 뒤 우물쭈물 말하는 서훈,“고독현 밤 아저씨.”“응.”수현이 머리를 끄덕이며 조금 울적하게 훈이를 바라보았다.확실히 윤이보다 경계심이 강한 훈이는 그가 신분을 밝혔는데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수현은 아무래도 이 녀석의 믿음을 얻고 의지하게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매일 학교로 찾아오다 보니 그의 목적이 너무 적나라했다.수현은 가자미눈을 하고 속으로 대책을 생각했다.“아저씨. 아저씨는 누구 아빠예요? 오늘은 만날 수 있어요?”하윤이 어제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다.수현은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좀 그렇고, 다음에?”“음, 그래요.”수현은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동생 윤이를 노려보고 있는 훈이를 한 눈 보고는 더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두 번째인데 훈이는 어제보다 더 경계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만약 계속 밀어붙이기만 한다면 이 녀석은 마음의 벽을 더 단단히 세울 거고 그때가 되면 그 벽을 넘기 더 어려워질 것이다.생각 끝에 수현은 몸을 일으켰다.“아저씨는 오늘 할 일이 있어서 왔다가 한 번 들른 거야. 별일 없으면 아저씬 이만 다시 일하러 가볼게.”윤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였다.“아저씨 저희 보려고 일부러 온 거 아니었어요? 그럼 이따가 저희랑 수다도 안 떨어요?”“미안해.”수현이 계속 있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말했다.“아저씨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그러자 윤이는 데친 시금치처럼 풀이 죽어 버렸다.반면 옆에 있던 훈이는 그 말을 듣자, 경계가 풀린 듯 조금 마음을 놓았다.쯧.역시 아직 어린애긴 한가 보다.똘똘하긴 하지만 경험은 부족하다.수현은 더 머물지 않고 두 아이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떠났다._교장실.수현은 창틀에 걸터앉아 핸드폰으로 어젯밤 윤아가 보낸 문자를 다시 보고 있었다.아직은 만날 때가 아니다.하지만... 수현은 윤아가 다른 남자와 그를 대하
무슨 말을 할지는...수현은 곧바로 답장했다.[안 됩니다. 저도 내일 일 있습니다. 지금 급전이 필요하니 시간 조정해 주시죠.]수현의 문자를 본 윤아는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그의 말 하나하나가 모두 완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어젯밤과 마찬가지다. 그의 돈을 돌려주는 거니 그에게 맞춰야지.윤아는 뭔가 자기의 도덕적 양심에 묶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충분히 선우에게 곧장 전화를 걸어 차 고르러 같이 못 간다고 얘기할 수 있었다. 어차피 하려던 말은 그 뒤에 있으니까.하지만 지금 상대방이 너무 강하게 나오는 바람에 윤아는 반감이 들었다. 그녀의 직감이 그녀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었다.그런데 급전이 필요하다고 하니...윤아가 생각 끝에 답장했다.[정말 돈이 급하시면 그냥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큰돈을 현금으로 들고 다니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기도 하잖아요.]말을 마친 윤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상대방의 요구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마침 현아가 한가로우니 윤아는 그녀에게 이 일에 대해 간단히 얘기해줬다.윤아의 말을 들은 현아는 곧바로 그녀에게 연락했다.“이거 그린 라이트 아냐? 그 사람 혹시 널 만나고 싶은데 핑곗거리가 필요한 거 아냐?”윤아:“?”뭐라고?“그게 아니면 뭐겠어? 계좌이체면 될 일을 뭐 하러 굳이 현금으로 받는다는 건데? 그리고 전에 네가 그랬잖아, 선물만 보내고 말은 안 한다며? 돈 돌려받지도 않는다고 그러고.”“응. 그랬지.”“그럼 맞네. 그렇게 오랫동안 선물 공세를 했는데 돈이 모자라겠어? 그리고 국내에 요즘 공금을 인터넷 방송에 쓴다는 뉴스는 없었어.”공금 얘기에 윤아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걸 수도 있지. 정말 공금을 쓴 건데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지도.”“그럴 수도 있지만 가능성이 작지. 그 사람이 인터넷 방송에 쓴 금액이 어디 평범한 법인카드로 긁을 수 있는 금액이니? 그 큰돈을 막 쓰는 게 작은 일도 아니고.”“그렇긴 하지.”“그러니까 그 사람은 널 만나고 싶어 하는 거
윤아는 현아의 말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넌 어떻게 하루 종일 내 걱정만 해?”“내가 친구가 너밖에 더 있냐. 그리고 내가 네 걱정 안 해주면 누가 해줘. 으휴, 이것도 다 네 미래의 행복이 달린 일인데 내가 당연히 신경 써야지.”가만히 듣던 윤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내 걱정 할 시간에 네 걱정이나 해. 몇 년 동안 어떻게 남자 친구 하나 없어.”“말 돌리지 마. 내 쪽으로 화제 돌릴 생각 하지 말라고. 나 지금 진지하거든?”윤아는 현아에게 뭐라 더 하고 싶었으나 마침 고독현 밤이 두 번째 문자를 보내는 바람에 얘기를 더 이어가지 못했다.“빨리 약속해. 내가 말한 대로 한다고.”윤아:“...”“빨리 윤아야. 이 좋은 기회를 날릴 셈이야? 그 사람 돈도 많고 괜찮아 보이는데.”“나 오후에 선우랑 약속 있다니까.”곧바로 말을 잇는 현아:“취소해.”“하지만...”“뭐가 하지만이야, 어차피 넌 안 좋아한다며. 실망은 시키겠지만 어쩔 수 없지. 둘 다 가질 순 없잖아. 이선우 씨가 너한테 잘해주는 것도 맞고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던 것도 맞지만 감정이란 게 강요한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 실망도 여러 번 하다 보면 마음 접겠지.”윤아는 더 말하지 않았지만, 현아의 말들을 새겨들었다.실망이 반복되면 정말 마음을 접을까?“근데 이선우 씨는 실망을 좀 많이 해야겠던데. 5년 내내 그렇게 까이고도 아직도 마음을 접지 않았잖아. 너도 좀 단호해질 필요가 있어. 진짜 아니면 아예 관계를 끊어버려. 그래야 이선우 씨한테도 피해가 안 가잖아.”“응. 알았어.”전화를 끊은 윤아는 꺼진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선우와 인연을 끊으라고?솔직히 윤아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잘못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그와 연을 끊는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하지만... 현아 말대로 그는 5년 동안 그렇게 거절을 당했는데도 단 한 번도 포기를 하지 않았다.그 정도 마음이라면...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정말 그에게 몹쓸 짓을 하는거겠지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