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을 할지는...수현은 곧바로 답장했다.[안 됩니다. 저도 내일 일 있습니다. 지금 급전이 필요하니 시간 조정해 주시죠.]수현의 문자를 본 윤아는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그의 말 하나하나가 모두 완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어젯밤과 마찬가지다. 그의 돈을 돌려주는 거니 그에게 맞춰야지.윤아는 뭔가 자기의 도덕적 양심에 묶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충분히 선우에게 곧장 전화를 걸어 차 고르러 같이 못 간다고 얘기할 수 있었다. 어차피 하려던 말은 그 뒤에 있으니까.하지만 지금 상대방이 너무 강하게 나오는 바람에 윤아는 반감이 들었다. 그녀의 직감이 그녀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었다.그런데 급전이 필요하다고 하니...윤아가 생각 끝에 답장했다.[정말 돈이 급하시면 그냥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큰돈을 현금으로 들고 다니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기도 하잖아요.]말을 마친 윤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상대방의 요구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마침 현아가 한가로우니 윤아는 그녀에게 이 일에 대해 간단히 얘기해줬다.윤아의 말을 들은 현아는 곧바로 그녀에게 연락했다.“이거 그린 라이트 아냐? 그 사람 혹시 널 만나고 싶은데 핑곗거리가 필요한 거 아냐?”윤아:“?”뭐라고?“그게 아니면 뭐겠어? 계좌이체면 될 일을 뭐 하러 굳이 현금으로 받는다는 건데? 그리고 전에 네가 그랬잖아, 선물만 보내고 말은 안 한다며? 돈 돌려받지도 않는다고 그러고.”“응. 그랬지.”“그럼 맞네. 그렇게 오랫동안 선물 공세를 했는데 돈이 모자라겠어? 그리고 국내에 요즘 공금을 인터넷 방송에 쓴다는 뉴스는 없었어.”공금 얘기에 윤아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걸 수도 있지. 정말 공금을 쓴 건데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지도.”“그럴 수도 있지만 가능성이 작지. 그 사람이 인터넷 방송에 쓴 금액이 어디 평범한 법인카드로 긁을 수 있는 금액이니? 그 큰돈을 막 쓰는 게 작은 일도 아니고.”“그렇긴 하지.”“그러니까 그 사람은 널 만나고 싶어 하는 거
윤아는 현아의 말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넌 어떻게 하루 종일 내 걱정만 해?”“내가 친구가 너밖에 더 있냐. 그리고 내가 네 걱정 안 해주면 누가 해줘. 으휴, 이것도 다 네 미래의 행복이 달린 일인데 내가 당연히 신경 써야지.”가만히 듣던 윤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내 걱정 할 시간에 네 걱정이나 해. 몇 년 동안 어떻게 남자 친구 하나 없어.”“말 돌리지 마. 내 쪽으로 화제 돌릴 생각 하지 말라고. 나 지금 진지하거든?”윤아는 현아에게 뭐라 더 하고 싶었으나 마침 고독현 밤이 두 번째 문자를 보내는 바람에 얘기를 더 이어가지 못했다.“빨리 약속해. 내가 말한 대로 한다고.”윤아:“...”“빨리 윤아야. 이 좋은 기회를 날릴 셈이야? 그 사람 돈도 많고 괜찮아 보이는데.”“나 오후에 선우랑 약속 있다니까.”곧바로 말을 잇는 현아:“취소해.”“하지만...”“뭐가 하지만이야, 어차피 넌 안 좋아한다며. 실망은 시키겠지만 어쩔 수 없지. 둘 다 가질 순 없잖아. 이선우 씨가 너한테 잘해주는 것도 맞고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던 것도 맞지만 감정이란 게 강요한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 실망도 여러 번 하다 보면 마음 접겠지.”윤아는 더 말하지 않았지만, 현아의 말들을 새겨들었다.실망이 반복되면 정말 마음을 접을까?“근데 이선우 씨는 실망을 좀 많이 해야겠던데. 5년 내내 그렇게 까이고도 아직도 마음을 접지 않았잖아. 너도 좀 단호해질 필요가 있어. 진짜 아니면 아예 관계를 끊어버려. 그래야 이선우 씨한테도 피해가 안 가잖아.”“응. 알았어.”전화를 끊은 윤아는 꺼진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선우와 인연을 끊으라고?솔직히 윤아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잘못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그와 연을 끊는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하지만... 현아 말대로 그는 5년 동안 그렇게 거절을 당했는데도 단 한 번도 포기를 하지 않았다.그 정도 마음이라면...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정말 그에게 몹쓸 짓을 하는거겠지
“바로 연락해 보겠습니다. 그쪽에서 아이를 이곳에 보내 학교에 다니게 하는 걸 받아들일 진 모르겠지만요. 사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라 동의 안 하실 수도 있겠어요.”수현이 민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냉랭하게 말했다.“무슨 수를 쓰든 동의 받아내요.”“알겠습니다.”_조우림과 그의 아내 서가영은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둘은 같은 회사에서 근무 중이라 늘 퇴근 후 함께 집에 간다. 점심엔 두 시간 동안의 자유시간이 주어지는데 집과 회사가 가까워 집까지 충분히 걸어갈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반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 휴식을 취한 뒤 함께 회사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다.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매일이 그렇게 평화롭다.조우림은 이런 일상에 매우 만족하며 살고 있다. 이대로 쭉 별일 없이 살다가 죽어도 괜찮을 정도이니 말이다. 물론 그의 아내도 생각이 같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그의 아내는 종종 그에게 쓸모가 없다며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다른 남자들은 돈도 많고 승진도 잘하는데 그는 회사에서 몇 년을 다녔는데도 여전히 제자리니 말이다.그녀의 불만은 그렇게 조우림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 응어리가 졌다.하지만 그 정도 마음의 돌은 둘의 결혼 생활에 크게 해를 끼치진 않았다. 우림은 늘 불쾌한 마음도 자신의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고 살았다. 최근엔 그도 승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심지어 이직을 할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마땅히 들어갈 만한 회사도 자리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여보, 점심은 비빔면 어때. 오늘 좀 피곤해서 요리하기가 싫네.”가영의 말에 우림이 미간을 찌푸렸다.“어제도 비빔면 먹었잖아, 또?”“오늘 또 먹으면 어때서? 비빔면이 만들기 간단하니까 그러지. 싫으면 당신이 혼자 차려 먹든가.”“난 일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밥까지 해?”“너만 일하니? 난 놀고먹어? 근데 매일 나만 밥 하잖아. 먹기 싫으면 배달시키든지 알아서 해. 아님 주방 아줌마 한 명 쓰든가.”“배달? 주방 아줌마? 그건 돈 안 드는
우림은 이민재가 누군진 몰라도 진 씨 그룹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수현이란 이름도 그의 회사에서 꽤 유명한 이름이었다.옆에 있던 서가영도 그걸 아는지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었다.“저희를 찾아오셨어요?”부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민재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는 모습을 보았다. 곧이어 민재는 두 사람의 이름을 거듭 확인하며 말했다.“조우림 씨, 서가영 씨. 본인 맞으시죠? 여기 사진도 맞으시고?”우림과 가영은 고개를 들이밀고 서류를 확인했다. 그곳엔 그들의 개인정보와 사진이 틀림없이 박혀있었다.“네, 저희 맞는데요. 근데 무슨 일로?”“여기선 좀 그렇고, 들어가서 얘기할까요?”부부는 곧바로 민재를 집으로 들였다.민재는 집에 발을 들인 후 빠르게 집 안을 훑었다. 역시 조사한 대로 두 사람의 형편은 그냥 그래 보였다.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벌어 모은대도 매달 나가는 생활비에 부동산 대출까지 내야 하니 넉넉하진 않을 거다. 게다가 아이까지 있으니, 학비도 부담될 테고. 그러다 보니 집 안을 세심히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거지.가영은 민재를 위해 차를 한 잔 내왔다.하지만 민재는 차는 입에도 대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두 분 오후에 또 회사 나가보셔야 하죠? 시간 너무 뺏지 않고 바로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민재는 찾아온 목적을 얘기했다.둘은 민재의 말을 들은 후 얼이 빠진 듯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이 들었다.“자,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정말이에요?”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습니다. 진수현 대표님께서 두 분 자녀분을 후원하실 겁니다.”“하, 하지만... 왜요?”서가영은 이해가 안 되는 듯 물었다.“그런 건 보통 빈곤가정이나 시골에 사는 아이들한테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 집 형편이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요?”“그렇긴 하죠. 만약 후원이 목적이면 그런 아이들을 찾았겠죠. 하지만 저희 대표님은 다른 이유가 있으십니다. 두 분 형편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두 분 조상님이 저희 대표님과 아주 조금의 친
조우림은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이거 사기 아니죠? 당신, 설마 부동산 매매 하는 사람이에요? 이런 수법으로 우리한테 비싼 집 팔아넘기려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그러자 민재는 곧바로 부동산 증명서를 두 사람 앞에 꺼내 보이며 말했다.“돈은 저희 쪽에서 전부 부담하니 두 분은 그냥 몸만 오시면 됩니다.”20분 후, 둘은 다정하게 민재를 배웅했다. 그러면서 오후에 바로 사직서를 낸 후 아이의 전학 수속을 밟고 내일 새 학교로 보내겠다고 했다.민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시간 잘 지켜주십쇼. 내일 아침엔 반드시 그곳에 계셔야 합니다.”“그럼요. 문제없죠. 잠을 안 자서라도 오늘 밤에 이사 마치겠습니다.”일을 순조롭게 마친 민재는 드디어 만족스럽게 길을 떠났다._윤아는 은행에 들러 현금 100만 원을 준비했다.아이를 키우게 된 후부터 그녀는 항상 아이들이 필요할 만한 물건들을 수시로 가지고 다녀야 했기에 들고 다니는 가방도 소싯적 즐겨 메던 미니 백이 아니라 수납공간이 큰 가방으로 바뀌었다.덕분에 현금 100만 원도 거뜬히 넣을 수 있었다.윤아는 그 사람이 필요하다는 현금이 고작 100만 원일 줄은 몰랐다.라이브 방송으로 그 많은 돈을 써대던 사람이 고작 100만 원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건지.윤아는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돈을 돌려받는 건 핑계일 뿐이고 진짜 목적은 그녀를 만나기 위함이다.왜 만나려 하는지는...윤아는 계획대로 두 자리를 예약하고 창가 자리만 상대방에게 알려줬다.그녀는 현아가 말한 대로 그 사람이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지켜볼 생각이다._한편, 수현은 오늘도 잔뜩 그늘진 얼굴로 레스토랑에 발을 들였다. 그는 가장 꼭대기 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가만히 있어도 우울한 기운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옆에 앉아 있던 민재는 덩달아 오싹한 기분이 들어 겉옷 지퍼를 올리며 수현을 봤다.“대표님. 윤아 아가씨도 온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아직도 화가 나 계십니까?”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수현의 괴이한 냉소였다
분노가 머릿속을 지배할 땐 이성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이성마저 잠식되기도 한다.아무리 진수현이라도 사랑하는 여자 앞에선 예외가 아니다.하지만 이민재의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어느새 그를 지배하던 분노는 사그라들고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그래, 내가 화낼 자격이 있나?민재의 말처럼 벌써 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그녀가 미혼인 거에 감사하고 이렇게나마 만날 기회라도 있다는 거에 감사해야 하는 거였다. 무슨 신분으로든 지금 그녀를 만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이지 않은가.생각 끝에 수현은 민재를 한 눈 보고 말했다.“그러네요. 이 비서 생각보다 쓸모가 없진 않네요.”“그렇죠?”민재는 그의 칭찬에 화색이 돌았다.“그럼, 대표님. 올해 제 월급 인상은 어떻게 안 될까요?”수현이 코웃음을 쳤다.“그건 나중에 보죠.”“제가 시킨 일은 잘 진행했습니까?”“그럼요. 오늘 밤에 바로 옮겨오기로 했습니다. 내일 바로 아이를 데리러 가면 되겠어요. 그런데... 대표님은 두 아이 앞에서 그 친구가 대표님 아이라고 하실 생각입니까?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당연히 안 되죠.”수현이 서늘하게 말했다.“나더러 다른 애 아빠가 되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그렇긴 하지. 다른 애더러 그를 아빠라 부르게 하는 건 아무리 연기라 해도 대표님이 허락할 리가 없다.“그럼 달리 생각해 둔 신분이 있습니까?”“조상이 친척이라면서요? 대충 친척인 척 부르면 되죠.”민재는 곧바로 간편한 호칭을 생각해 냈다.“그럼, 아저씨는 어때요?”삼촌?수현은 두 아이도 그를 아저씨라 부르던 걸 떠올리고 머리를 끄덕였다.“그러죠.”민재는 핸드폰을 꺼내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 떠오를 때마다 수현에게 건의했다.“대표님, 건의할 사항이 있긴 한데 이걸 말씀드려도 될지...”“말해봐요.”“그게... 두 아이가 대표님께 완전히 마음을 열기 전까진 조 씨네 그 아이를 대표님 댁에서 같이 지내게 하는 게 어떨까 해
‘됐다, 침착해야지. 어쨌든 지금 그녀가 만나러 오는 남자는 나니까.’윤아는 가방을 메고 레스토랑에 들어왔다.그녀가 들어서자, 직원이 빠르게 나와 손님을 맞았다.“안녕하십니까.”“안녕하세요. 제가 예약한 자리가...”직원은 윤아를 예약한 자리로 안내했다.그리고 수현은 그 모습을 서늘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윤아가 예약한 자리는 창가다.수현은 살얼음 같은 무표정으로 직원이 윤아를 안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약된 창가 쪽이 아닌 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왜지?직원의 실수인가? 아니면 윤아가 헷갈린 건가?수현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윤아는 어느새 계단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민재는 놀라서 옆에 있는 수현에게 말했다.“헉. 저 직원분 설마 이쪽으로 데려오는 건 아니겠죠? 어떡해요 대표님?”당황한 건 민재 뿐만이 아니었다. 내내 무표정이던 수현도 낯빛이 바뀌어있었다.계단은 아주 짧고 내려가는 길은 하나 뿐이다.민재는 가마 위 개미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어떡해요? 저희 이러다 들키는 거 아니에요?”사실 오늘 그녀를 불러낸 건 만나고 싶어서라기보단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무산시키려던 것뿐인데.지금 마주쳐버리면 그의 입장만 난처해질 게 뻔했다.“뭘 그리 긴장합니까.”수현이 잔뜩 긴장한 민재를 차갑게 한 눈 보며 말했다.“침착하세요.”“대표님...”침착하라고는 해도 이 상황에 어떻게 침착할 수가 있겠는가.“그냥 계단 오르는 겁니다. 지금 우릴 발견한대도 뭐 어때요. 설마 나와 그 남자를 연관 지어 생각하지는 못하겠죠.”민재는 그의 냉랭한 목소리에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하긴. 저희가 예약된 그 자리에 있던 것도 아닌데 설마 알아보겠어요? 괜히 티 내지만 않으면 괜찮겠죠.”말을 마친 민재는 테이블에 있던 커피를 들어 크게 한 모금 마셨다.그는 입에 커피를 머금은 채 고개를 돌려 윤아를 보았다. 직원은 그녀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민재는 커피를 삼키기 어려워졌다.
윤아보다 훨씬 키가 큰 수현이 그녀의 곁에 바짝 붙자, 그의 찬 기운이 순식간에 윤아를 덮었다.차고 강한 기운이다.윤아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 그에게서 멀어졌다.하지만 운 나쁘게도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마자 발을 헛디뎌 몸이 휘청거렸다.수현은 손을 뻗어 뒤로 넘어질 뻔한 윤아의 허리를 붙잡고 끌어당겼다.윤아는 당기는 힘에 그대로 수현의 가슴팍에 부딪혔다.퍽!윤아의 향긋한 체향이 수현의 호흡을 파고들었다.수현은 나른한 몸이 그의 품으로 들어오는 걸 느꼈다. 잡고 있는 그녀의 허리도 유독 말캉하게 느껴졌다. 그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조롱하듯 말했다.“날 보는 게 그렇게 긴장될 일이야?”윤아는 몸을 바로 세우고 수현을 밀쳐냈다.“이거 놔.”하지만 오히려 더 꽉 잡는 수현. 그는 윤아가 아무리 밀어도 우뚝 선 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레스토랑 직원은 이 광경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져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어차피 아는 사인데 그냥 같이 앉아. 번거롭게 내려가지 말고.”수현은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감싼 채 그의 테이블로 데려갔다.“누가 너랑 같은 테이블에 앉는대? 이거 놔!”윤아는 계속해서 몸부림치며 수현을 노려봤다.“그리고 네가 왜 여기 있어?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나 미행해?”“미행?”수현이 냉소를 터뜨렸다.“심윤아. 네 옆에 있는 직원한테 물어봐. 우리가 언제 왔는지 말이야.”윤아는 잠시 멈칫했다. 그를 보자마자 자신을 따라와 귀찮게 하려는 거라 생각했지 그가 먼저 와있었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민재는 다급히 몸을 일으키며 윤아에게 인사했다.“윤아 아가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식사하러 오셨어요? 벌써 오후가 다 됐는데 바쁘셔서 식사도 아직 못하셨나 보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앉지 않으시겠어요?”“괜찮습니다.”단칼에 거절 하는 윤아.“같이 밥 먹을 생각 없어요.”“네 회사 투자자여도?”“...”윤아는 아직도 그녀의 허리를 놔주지 않는 수현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지금 나 협박해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