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을 본 훈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금 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그에게 다가간 뒤 우물쭈물 말하는 서훈,“고독현 밤 아저씨.”“응.”수현이 머리를 끄덕이며 조금 울적하게 훈이를 바라보았다.확실히 윤이보다 경계심이 강한 훈이는 그가 신분을 밝혔는데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수현은 아무래도 이 녀석의 믿음을 얻고 의지하게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매일 학교로 찾아오다 보니 그의 목적이 너무 적나라했다.수현은 가자미눈을 하고 속으로 대책을 생각했다.“아저씨. 아저씨는 누구 아빠예요? 오늘은 만날 수 있어요?”하윤이 어제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다.수현은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좀 그렇고, 다음에?”“음, 그래요.”수현은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동생 윤이를 노려보고 있는 훈이를 한 눈 보고는 더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두 번째인데 훈이는 어제보다 더 경계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만약 계속 밀어붙이기만 한다면 이 녀석은 마음의 벽을 더 단단히 세울 거고 그때가 되면 그 벽을 넘기 더 어려워질 것이다.생각 끝에 수현은 몸을 일으켰다.“아저씨는 오늘 할 일이 있어서 왔다가 한 번 들른 거야. 별일 없으면 아저씬 이만 다시 일하러 가볼게.”윤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였다.“아저씨 저희 보려고 일부러 온 거 아니었어요? 그럼 이따가 저희랑 수다도 안 떨어요?”“미안해.”수현이 계속 있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말했다.“아저씨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그러자 윤이는 데친 시금치처럼 풀이 죽어 버렸다.반면 옆에 있던 훈이는 그 말을 듣자, 경계가 풀린 듯 조금 마음을 놓았다.쯧.역시 아직 어린애긴 한가 보다.똘똘하긴 하지만 경험은 부족하다.수현은 더 머물지 않고 두 아이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떠났다._교장실.수현은 창틀에 걸터앉아 핸드폰으로 어젯밤 윤아가 보낸 문자를 다시 보고 있었다.아직은 만날 때가 아니다.하지만... 수현은 윤아가 다른 남자와 그를 대하
무슨 말을 할지는...수현은 곧바로 답장했다.[안 됩니다. 저도 내일 일 있습니다. 지금 급전이 필요하니 시간 조정해 주시죠.]수현의 문자를 본 윤아는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그의 말 하나하나가 모두 완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어젯밤과 마찬가지다. 그의 돈을 돌려주는 거니 그에게 맞춰야지.윤아는 뭔가 자기의 도덕적 양심에 묶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충분히 선우에게 곧장 전화를 걸어 차 고르러 같이 못 간다고 얘기할 수 있었다. 어차피 하려던 말은 그 뒤에 있으니까.하지만 지금 상대방이 너무 강하게 나오는 바람에 윤아는 반감이 들었다. 그녀의 직감이 그녀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었다.그런데 급전이 필요하다고 하니...윤아가 생각 끝에 답장했다.[정말 돈이 급하시면 그냥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큰돈을 현금으로 들고 다니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기도 하잖아요.]말을 마친 윤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상대방의 요구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마침 현아가 한가로우니 윤아는 그녀에게 이 일에 대해 간단히 얘기해줬다.윤아의 말을 들은 현아는 곧바로 그녀에게 연락했다.“이거 그린 라이트 아냐? 그 사람 혹시 널 만나고 싶은데 핑곗거리가 필요한 거 아냐?”윤아:“?”뭐라고?“그게 아니면 뭐겠어? 계좌이체면 될 일을 뭐 하러 굳이 현금으로 받는다는 건데? 그리고 전에 네가 그랬잖아, 선물만 보내고 말은 안 한다며? 돈 돌려받지도 않는다고 그러고.”“응. 그랬지.”“그럼 맞네. 그렇게 오랫동안 선물 공세를 했는데 돈이 모자라겠어? 그리고 국내에 요즘 공금을 인터넷 방송에 쓴다는 뉴스는 없었어.”공금 얘기에 윤아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걸 수도 있지. 정말 공금을 쓴 건데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지도.”“그럴 수도 있지만 가능성이 작지. 그 사람이 인터넷 방송에 쓴 금액이 어디 평범한 법인카드로 긁을 수 있는 금액이니? 그 큰돈을 막 쓰는 게 작은 일도 아니고.”“그렇긴 하지.”“그러니까 그 사람은 널 만나고 싶어 하는 거
윤아는 현아의 말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넌 어떻게 하루 종일 내 걱정만 해?”“내가 친구가 너밖에 더 있냐. 그리고 내가 네 걱정 안 해주면 누가 해줘. 으휴, 이것도 다 네 미래의 행복이 달린 일인데 내가 당연히 신경 써야지.”가만히 듣던 윤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내 걱정 할 시간에 네 걱정이나 해. 몇 년 동안 어떻게 남자 친구 하나 없어.”“말 돌리지 마. 내 쪽으로 화제 돌릴 생각 하지 말라고. 나 지금 진지하거든?”윤아는 현아에게 뭐라 더 하고 싶었으나 마침 고독현 밤이 두 번째 문자를 보내는 바람에 얘기를 더 이어가지 못했다.“빨리 약속해. 내가 말한 대로 한다고.”윤아:“...”“빨리 윤아야. 이 좋은 기회를 날릴 셈이야? 그 사람 돈도 많고 괜찮아 보이는데.”“나 오후에 선우랑 약속 있다니까.”곧바로 말을 잇는 현아:“취소해.”“하지만...”“뭐가 하지만이야, 어차피 넌 안 좋아한다며. 실망은 시키겠지만 어쩔 수 없지. 둘 다 가질 순 없잖아. 이선우 씨가 너한테 잘해주는 것도 맞고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던 것도 맞지만 감정이란 게 강요한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 실망도 여러 번 하다 보면 마음 접겠지.”윤아는 더 말하지 않았지만, 현아의 말들을 새겨들었다.실망이 반복되면 정말 마음을 접을까?“근데 이선우 씨는 실망을 좀 많이 해야겠던데. 5년 내내 그렇게 까이고도 아직도 마음을 접지 않았잖아. 너도 좀 단호해질 필요가 있어. 진짜 아니면 아예 관계를 끊어버려. 그래야 이선우 씨한테도 피해가 안 가잖아.”“응. 알았어.”전화를 끊은 윤아는 꺼진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선우와 인연을 끊으라고?솔직히 윤아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잘못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그와 연을 끊는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하지만... 현아 말대로 그는 5년 동안 그렇게 거절을 당했는데도 단 한 번도 포기를 하지 않았다.그 정도 마음이라면...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정말 그에게 몹쓸 짓을 하는거겠지
“바로 연락해 보겠습니다. 그쪽에서 아이를 이곳에 보내 학교에 다니게 하는 걸 받아들일 진 모르겠지만요. 사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라 동의 안 하실 수도 있겠어요.”수현이 민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냉랭하게 말했다.“무슨 수를 쓰든 동의 받아내요.”“알겠습니다.”_조우림과 그의 아내 서가영은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둘은 같은 회사에서 근무 중이라 늘 퇴근 후 함께 집에 간다. 점심엔 두 시간 동안의 자유시간이 주어지는데 집과 회사가 가까워 집까지 충분히 걸어갈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반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 휴식을 취한 뒤 함께 회사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다.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매일이 그렇게 평화롭다.조우림은 이런 일상에 매우 만족하며 살고 있다. 이대로 쭉 별일 없이 살다가 죽어도 괜찮을 정도이니 말이다. 물론 그의 아내도 생각이 같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그의 아내는 종종 그에게 쓸모가 없다며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다른 남자들은 돈도 많고 승진도 잘하는데 그는 회사에서 몇 년을 다녔는데도 여전히 제자리니 말이다.그녀의 불만은 그렇게 조우림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 응어리가 졌다.하지만 그 정도 마음의 돌은 둘의 결혼 생활에 크게 해를 끼치진 않았다. 우림은 늘 불쾌한 마음도 자신의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고 살았다. 최근엔 그도 승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심지어 이직을 할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마땅히 들어갈 만한 회사도 자리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여보, 점심은 비빔면 어때. 오늘 좀 피곤해서 요리하기가 싫네.”가영의 말에 우림이 미간을 찌푸렸다.“어제도 비빔면 먹었잖아, 또?”“오늘 또 먹으면 어때서? 비빔면이 만들기 간단하니까 그러지. 싫으면 당신이 혼자 차려 먹든가.”“난 일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밥까지 해?”“너만 일하니? 난 놀고먹어? 근데 매일 나만 밥 하잖아. 먹기 싫으면 배달시키든지 알아서 해. 아님 주방 아줌마 한 명 쓰든가.”“배달? 주방 아줌마? 그건 돈 안 드는
우림은 이민재가 누군진 몰라도 진 씨 그룹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수현이란 이름도 그의 회사에서 꽤 유명한 이름이었다.옆에 있던 서가영도 그걸 아는지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었다.“저희를 찾아오셨어요?”부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민재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는 모습을 보았다. 곧이어 민재는 두 사람의 이름을 거듭 확인하며 말했다.“조우림 씨, 서가영 씨. 본인 맞으시죠? 여기 사진도 맞으시고?”우림과 가영은 고개를 들이밀고 서류를 확인했다. 그곳엔 그들의 개인정보와 사진이 틀림없이 박혀있었다.“네, 저희 맞는데요. 근데 무슨 일로?”“여기선 좀 그렇고, 들어가서 얘기할까요?”부부는 곧바로 민재를 집으로 들였다.민재는 집에 발을 들인 후 빠르게 집 안을 훑었다. 역시 조사한 대로 두 사람의 형편은 그냥 그래 보였다.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벌어 모은대도 매달 나가는 생활비에 부동산 대출까지 내야 하니 넉넉하진 않을 거다. 게다가 아이까지 있으니, 학비도 부담될 테고. 그러다 보니 집 안을 세심히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거지.가영은 민재를 위해 차를 한 잔 내왔다.하지만 민재는 차는 입에도 대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두 분 오후에 또 회사 나가보셔야 하죠? 시간 너무 뺏지 않고 바로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민재는 찾아온 목적을 얘기했다.둘은 민재의 말을 들은 후 얼이 빠진 듯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이 들었다.“자,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정말이에요?”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습니다. 진수현 대표님께서 두 분 자녀분을 후원하실 겁니다.”“하, 하지만... 왜요?”서가영은 이해가 안 되는 듯 물었다.“그런 건 보통 빈곤가정이나 시골에 사는 아이들한테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 집 형편이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요?”“그렇긴 하죠. 만약 후원이 목적이면 그런 아이들을 찾았겠죠. 하지만 저희 대표님은 다른 이유가 있으십니다. 두 분 형편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두 분 조상님이 저희 대표님과 아주 조금의 친
조우림은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이거 사기 아니죠? 당신, 설마 부동산 매매 하는 사람이에요? 이런 수법으로 우리한테 비싼 집 팔아넘기려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그러자 민재는 곧바로 부동산 증명서를 두 사람 앞에 꺼내 보이며 말했다.“돈은 저희 쪽에서 전부 부담하니 두 분은 그냥 몸만 오시면 됩니다.”20분 후, 둘은 다정하게 민재를 배웅했다. 그러면서 오후에 바로 사직서를 낸 후 아이의 전학 수속을 밟고 내일 새 학교로 보내겠다고 했다.민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시간 잘 지켜주십쇼. 내일 아침엔 반드시 그곳에 계셔야 합니다.”“그럼요. 문제없죠. 잠을 안 자서라도 오늘 밤에 이사 마치겠습니다.”일을 순조롭게 마친 민재는 드디어 만족스럽게 길을 떠났다._윤아는 은행에 들러 현금 100만 원을 준비했다.아이를 키우게 된 후부터 그녀는 항상 아이들이 필요할 만한 물건들을 수시로 가지고 다녀야 했기에 들고 다니는 가방도 소싯적 즐겨 메던 미니 백이 아니라 수납공간이 큰 가방으로 바뀌었다.덕분에 현금 100만 원도 거뜬히 넣을 수 있었다.윤아는 그 사람이 필요하다는 현금이 고작 100만 원일 줄은 몰랐다.라이브 방송으로 그 많은 돈을 써대던 사람이 고작 100만 원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건지.윤아는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돈을 돌려받는 건 핑계일 뿐이고 진짜 목적은 그녀를 만나기 위함이다.왜 만나려 하는지는...윤아는 계획대로 두 자리를 예약하고 창가 자리만 상대방에게 알려줬다.그녀는 현아가 말한 대로 그 사람이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지켜볼 생각이다._한편, 수현은 오늘도 잔뜩 그늘진 얼굴로 레스토랑에 발을 들였다. 그는 가장 꼭대기 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가만히 있어도 우울한 기운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옆에 앉아 있던 민재는 덩달아 오싹한 기분이 들어 겉옷 지퍼를 올리며 수현을 봤다.“대표님. 윤아 아가씨도 온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아직도 화가 나 계십니까?”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수현의 괴이한 냉소였다
분노가 머릿속을 지배할 땐 이성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이성마저 잠식되기도 한다.아무리 진수현이라도 사랑하는 여자 앞에선 예외가 아니다.하지만 이민재의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어느새 그를 지배하던 분노는 사그라들고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그래, 내가 화낼 자격이 있나?민재의 말처럼 벌써 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그녀가 미혼인 거에 감사하고 이렇게나마 만날 기회라도 있다는 거에 감사해야 하는 거였다. 무슨 신분으로든 지금 그녀를 만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이지 않은가.생각 끝에 수현은 민재를 한 눈 보고 말했다.“그러네요. 이 비서 생각보다 쓸모가 없진 않네요.”“그렇죠?”민재는 그의 칭찬에 화색이 돌았다.“그럼, 대표님. 올해 제 월급 인상은 어떻게 안 될까요?”수현이 코웃음을 쳤다.“그건 나중에 보죠.”“제가 시킨 일은 잘 진행했습니까?”“그럼요. 오늘 밤에 바로 옮겨오기로 했습니다. 내일 바로 아이를 데리러 가면 되겠어요. 그런데... 대표님은 두 아이 앞에서 그 친구가 대표님 아이라고 하실 생각입니까?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당연히 안 되죠.”수현이 서늘하게 말했다.“나더러 다른 애 아빠가 되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그렇긴 하지. 다른 애더러 그를 아빠라 부르게 하는 건 아무리 연기라 해도 대표님이 허락할 리가 없다.“그럼 달리 생각해 둔 신분이 있습니까?”“조상이 친척이라면서요? 대충 친척인 척 부르면 되죠.”민재는 곧바로 간편한 호칭을 생각해 냈다.“그럼, 아저씨는 어때요?”삼촌?수현은 두 아이도 그를 아저씨라 부르던 걸 떠올리고 머리를 끄덕였다.“그러죠.”민재는 핸드폰을 꺼내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 떠오를 때마다 수현에게 건의했다.“대표님, 건의할 사항이 있긴 한데 이걸 말씀드려도 될지...”“말해봐요.”“그게... 두 아이가 대표님께 완전히 마음을 열기 전까진 조 씨네 그 아이를 대표님 댁에서 같이 지내게 하는 게 어떨까 해
‘됐다, 침착해야지. 어쨌든 지금 그녀가 만나러 오는 남자는 나니까.’윤아는 가방을 메고 레스토랑에 들어왔다.그녀가 들어서자, 직원이 빠르게 나와 손님을 맞았다.“안녕하십니까.”“안녕하세요. 제가 예약한 자리가...”직원은 윤아를 예약한 자리로 안내했다.그리고 수현은 그 모습을 서늘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윤아가 예약한 자리는 창가다.수현은 살얼음 같은 무표정으로 직원이 윤아를 안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약된 창가 쪽이 아닌 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왜지?직원의 실수인가? 아니면 윤아가 헷갈린 건가?수현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윤아는 어느새 계단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민재는 놀라서 옆에 있는 수현에게 말했다.“헉. 저 직원분 설마 이쪽으로 데려오는 건 아니겠죠? 어떡해요 대표님?”당황한 건 민재 뿐만이 아니었다. 내내 무표정이던 수현도 낯빛이 바뀌어있었다.계단은 아주 짧고 내려가는 길은 하나 뿐이다.민재는 가마 위 개미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어떡해요? 저희 이러다 들키는 거 아니에요?”사실 오늘 그녀를 불러낸 건 만나고 싶어서라기보단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무산시키려던 것뿐인데.지금 마주쳐버리면 그의 입장만 난처해질 게 뻔했다.“뭘 그리 긴장합니까.”수현이 잔뜩 긴장한 민재를 차갑게 한 눈 보며 말했다.“침착하세요.”“대표님...”침착하라고는 해도 이 상황에 어떻게 침착할 수가 있겠는가.“그냥 계단 오르는 겁니다. 지금 우릴 발견한대도 뭐 어때요. 설마 나와 그 남자를 연관 지어 생각하지는 못하겠죠.”민재는 그의 냉랭한 목소리에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하긴. 저희가 예약된 그 자리에 있던 것도 아닌데 설마 알아보겠어요? 괜히 티 내지만 않으면 괜찮겠죠.”말을 마친 민재는 테이블에 있던 커피를 들어 크게 한 모금 마셨다.그는 입에 커피를 머금은 채 고개를 돌려 윤아를 보았다. 직원은 그녀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민재는 커피를 삼키기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