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네 얘기를 하셨어.”수현의 말에 윤아가 고개를 올려 그를 쳐다봤다.“정말?”수현도 그런 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널 많이 그리워하셨어.”수현의 한마디에 윤아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손잡이 없는 수도꼭지처럼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그 모습에 수현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윤아를 꽉 끌어안았다.윤아는 숨을 죽이고 울었다.수현을 밀어내지도 않았는데 마치 모든 힘을 잃은 듯 그의 품에 기대어 한없이 눈물만 쏟아냈다.얼마 안 가 수현은 그의 어깨가 이미 축축해진 걸 느꼈다.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입술을 앙다문 채 윤아가 제 안의 눈물을 모조리 쏟아내는 걸 생생히 느꼈다.한참 후에야 그는 손을 올려 윤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괜찮아. 다 지난 일이야.”한 편,선우가 두 아이를 차에 태우자 타이밍 좋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급하게 운전하지 않고 먼저 전화를 받았다.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얘기에 다정하던 선우의 얼굴에 순간 살기가 돌았다.하지만 그는 차에 두 아이가 타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급하게 표정 관리를 했다.“네. 알겠어요.”통화를 끝내기 바쁘게 뒷좌석에 타고 있던 윤이가 꼬물꼬물 다가와 물었다.“선우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일 얘기야.”“네에.”윤이는 순순히 대답하더니 또다시 물었다.“우리 오늘 같이 엄마 데리러 가는 거예요?”같이 심윤아를 데리러 가?평소라면 그들 가족에 끼고 싶어 흔쾌히 수긍했을 선우였지만 오늘은…“오늘은 엄마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저씨가 데리러 왔어.”평소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기에 두 아이는 별다른 투정 없이 받아들였다.목적지까지 도착했을 땐 진 비서가 이미 집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비서 아저씨가 데리고 올라갈 테니까 돌아가면 아저씨 기다리지 말고 숙제하고 있어.”그의 말에 훈이가 고개를 올려 그를 쳐다보았다.“선우 아저씨는 같이 안 올라가요?”“아저씨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비서 아저씨가 같이 있어주
문을 열고 나온 윤아는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현과 마주쳤다.그는 혼자서 링거를 들고 나와 있었다.윤아가 나오는 모습을 보자 수현의 얼굴에 졌던 그늘이 조금을 걷혔다.윤아는 흙빛인 그의 낯빛을 한 눈 보고는 주동적으로 물었다.“몇 병 남았어?”“몰라. 알고 싶다면 가서 볼게.”그의 말에 윤아는 대답 대신 차트를 확인하러 갔다.“이게 마지막 병이네.”“응.”수현이 짧게 대꾸했다. 그의 시선은 윤아에게 머물러 있었는데 윤아는 한바탕 울고 난 사람 치고 과하게 평온해 보였다.“아참, 네 옷은…”윤아가 옆에 있는 서랍을 열며 말했다. 이윽고 안에서 새 환자복을 꺼냈다.“아까 네 옷 젖었을 것 같아서. 미안해. 이걸로 갈아입어.”그 말에 수현이 잔뜩 젖어있는 그의 옷을 한 눈 보고 이윽고 그에게 새 옷을 건네는 윤아를 한 눈 보았다.“괜찮아. 금방 말라.”“아픈 몸이잖아. 추우면 회복에 안 좋아.”수현은 윤아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말했다.“손이 불편해.”윤아는 그제야 수현이 수액을 맞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저 상태로 옷을 갈아입긴 불편하겠지.잠깐의 침묵 끝에 윤아는 수건 한 장을 꺼내 그의 어깨에 올려주었다. 효과는 미미했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수현은 윤아가 다시 그의 곁에서 이렇게 담담하게 그를 걱정해 줄 날이 올 줄 몰랐다.그는 순간 몸이 좀 아픈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뭔가 찝찝했다.윤아는 지금 너무 평온하다.한참 뒤에야 윤아는 수건을 도로 가져갔다.수건을 내려놓으며 입을 여는 윤아.“시간도 늦었으니 난 이만 가볼게.”간다는 말에 수현의 미간이 움찔했다.“어딜 돌아가?”수현은 저도 모르게 새하얀 윤아의 손목을 확 잡으며 물었다.어떻게 오게 했는데 또 간다고?윤아는 멈칫하더니 자기 팔을 잡은 그의 손을 한 눈 보고는 천천히 손목을 빼내며 말했다.“집에 가야 해.”하지만 윤아를 잡은 수현의 손에 힘이 들어가 쉽게 빼낼 수가 없었다.윤아는 하는 수 없이 말했다.“내일 다시 올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는 윤아.“왜?”“내일 올 거지?”윤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당연하지. 난 내가 한 말은 지켜.”“더 할 말 있어?”수현은 입을 꾹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그럼 가볼게.”윤아는 그가 더 말을 하지 않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병실은 순식간에 다시 고요해졌다.수현은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눈 밑엔 칠흑 같은 그늘이 졌다.병실을 나선 윤아는 문 앞에 있던 이민재와 마주쳤다.자신이 한 말실수 때문에 밖으로 쫓겨났던 민재는 복잡한 심경으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윤아가 나오는 소리에 그는 서둘러 몸을 바로 세우고 그녀를 향해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머뭇거렸다.“윤아 아가씨…”윤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 같이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민재도 윤아의 얘기를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전 오늘 밤에 대표님께 드릴 음식을 사 오면 될까요?”“네. 만약 먹기 싫어하면 제가 내일 안 올 거라고 얘기하세요.”“알겠어요.”민재가 머리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고마워요. 아가씨. 제가 댁까지 바래다 드릴까요?”“괜찮아요.”윤아는 그의 호의를 거절하고 곧장 떠났다.민재는 멀어지는 윤아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윤아 아가씨가 이렇게 좋은 사람일 줄이야. 그가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도 대표님을 보러 다시 와준다니.그 말은 곧 대표님의 병세가 나아질 수 있다는 얘기 아닐까?_코너를 돈 윤아는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벽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윤아는 그렇게 벽에 기댄 채 잠시 쉬고 나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비록 의식적으로 자신을 컨트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할머님에 대한 생각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병원 출입문에 도착했을 때 윤아의 앞에는 그녀를 찾아온 선우가 서있었다.선우와 눈이 마주친 윤아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네가 왜 여기 있어?”“너 찾으러.”말을 마친 선우는 곧장 윤아의 손목을 잡고 병원을 떠났다.돌아가
“아니야.”윤아가 곧바로 부인했다.“선우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더 정확히 말하면 난 네가 아깝다고 생각해. 네 시간을 나한테 낭비하지 마.”이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윤아는 진심으로 선우가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집안에, 외모에, 인품까지 다 갖춘 데다 사생활도 깨끗한 것이 좋은 조건 믿고 여자들이나 꼬시는 다른 남자들과는 전혀 달랐다.“내가 아깝다고?”선우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윤아에게 다가갔다.“그런데 윤아야, 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한테 물어봤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더 고려해 볼 여지가 있는 거야?”윤아가 대답하지 않자, 선우가 말을 이었다.“아니면 네 마음은 이미 그 사람한테 가 있는 거야? 만약 귀국하지 않았다면 넌…”“5년.”선우가 멈칫했다.“5년이야. 네가 나한테 너무 잘해줬다는 거 알아. 나도 시도를 안 해본 게 아니야. 널 받아들이려 했지만 난 안된다는 걸 깨달았어.”윤아는 안경 너머로 보이는 선우의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내가 전에 너한테 얘기했었지, 난 네 마음을 되돌려줄 수 없으니 나한테 잘해주지 말라고.”선우는 그늘진 얼굴로 윤아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난 너한테 잘해주지 않는 건 못해. 널 보지 않는 것도 못 하고 네가 다른 남자와 함께있는 걸 보는 것도 안돼.”선우가 그녀에게 더 다가가며 말했다.순식간에 윤아의 가녀린 허리에 그의 손이 다가오더니 그에게로 훅 당겨졌다.윤아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둘 사이 거리는 어느새 상대방의 체향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좁혀져 있었다.윤아는 선우의 몸에서 나는 서늘한 향을 느꼈다.그의 목소리엔 그전의 촉촉함은 줄어들고 점유욕이 그 자리를 채웠다.“너도 5년이란 시간이 지났단 걸 알고 있잖아. 내가 그 5년 동안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도. 날 받아주기만 한다면 앞으로는 전보다 더 잘해줄 거야. 뭐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할 거야.”선우의 진지한 고백에 윤아는 미
뭐로 보나 그는 완벽한 신랑감이었다.하지만 그런 조건들은 오히려 윤아에게 독이 되었다.윤아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미안해.”선우는 한참을 그대로 윤아를 주시하다 다시 입가에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오늘 많이 힘들었지? 먼저 올라가. 할 얘기 있으면 이틀 뒤에 얘기하고.”“선우야...”“애들 기다리겠다. 얼른 올라가 봐.”선우는 윤아의 어깨를 밀며 그녀를 엘리베이터까지 데려갔다. 엘리베이터에 탄 뒤에는 손수 층수까지 눌러주고 그제야 나갔다.“올라가면 진 비서 내려오라고 해줘.”윤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는 잠시 후 스르륵 닫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윤아는 선우가 그녀를 향해 웃고 있는 걸 발견했다.“잘 자, 좋은 꿈 꿔.”이윽고 매정하게 닫히는 엘리베이터.윤아가 집에 들어서자 거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던 진우진과 당직 도우미분이 후다닥 일어나며 그녀를 맞이했다.선우의 말이 떠오른 윤아는 우진에게 말했다.“비서님, 선우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엥? 대표님 오늘은 왜 안 올라오셨대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는 의아해하면서 짧은 인사와 함께 떠났다.우진이 나간 뒤 윤아는 커튼을 치기 위해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 너머에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선우를 볼 수 있었다.차 옆에 서있는 그의 훤칠한 몸매는 비춰오는 조명 아래 더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있었는데 진우진이 내려가고서야 뭔가 얘기를 주고받더니 곧장 떠났다.올 때는 선우가 운전했지만 갈 때는 진우진이 운전석에 앉았다.윤아는 그제야 커튼을 완전히 내렸다.“엄마.”윤아의 뒤로 윤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오늘 어디 갔어요?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윤아는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엄마가 요즘 일이 좀 있어서 집에 종종 좀 늦게 올 것 같아.”두 아이는 다행히 달리 더 물어보지 않았다. 아마 나이가 어려 이런 일에 딱히 관심이 없는 걸지도.오늘 밤엔 라이브를 켜지 않았다. 집에
다음 날,윤아는 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요 며칠은 항상 선우가 데려다줬지만 어젯밤 그 일이 있고 나선 그에게 부탁할 수 없었다.“정말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다면 그동안은 내 생각에 방해가 될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말아줘.”선우는 의외로 윤아의 말대로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그가 나타나지 않자 윤아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녀는 직접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다주었는데 평소보다 일찍 떠나기도 했고 윤아의 손에 보온병까지 들려있자 두 아이가 궁금한 듯 이것저것 물었다.“응. 엄마 회사랑 합작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아프셔서 엄마가 먹을 것 좀 가져다드리려고.”윤이는 더 물어보는 대신 예쁜 말을 해줬다.“엄마는 예쁜 데다 마음씨도 착해서 진짜 짱이에요. 누가 우리 엄마랑 결혼하게 될 진 모르지만 그 아저씬 아마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남자일 거예요.”기분 좋은 말에 윤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이런 말들은 예전에 현아가 아이들한테 가르친 것들이다. 윤이는 이런 말들을 종종 사용하여 윤아를 기쁘게 해주곤 했다.매번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윤아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칭찬이 좋아서라기보단 윤이가 이런 말들을 할 때의 표정과 스스로 뿌듯해하는 그 표정이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됐어. 그만하고 얼른 들어가.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싸우지 말고 너희 둘이 항상 서로를 지켜줘야 해. 알겠어?”두 아이에게 신신당부한 뒤 윤아는 그들이 학교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차를 돌렸다.병원.“대표님,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 윤아 아가씨도 이렇게는 일찍 안 오신다고요. 어젯밤에도 얼마 못 주무셨는데 좀 더 누워계시지.”“아니면 제가 병실 앞에서 지키고 있을까요? 윤아 아가씨께서 오시면 제가 얼른 깨워드릴게요. 네?”이민재는 아침 댓바람부터 윤아를 기다리느라 안색이 말이 아닌 수현을 보며 또 잔소리 버튼이 눌렸다.하지만 그가 아무리 말해도 입만 아플 뿐 별 소용은 없어 보였다. 수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냉랭하게 한마디 내던졌다.“시끄러
“아뇨 아뇨, 전 그냥 오셨나 해서.”윤아는 병실로 들어가 들고 온 보온병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윽고 윤아가 보온병 뚜껑을 열자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왔다.뚜껑이 열림과 동시에 병실 안에는 군침을 돋우는 음식 냄새가 가득 퍼졌다.이미 아침 식사를 마친 민재도 그 냄새에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민재는 가까이서 음식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윤아가 수현을 위한 음식을 갖고 온다는 게 밖에서 사 온 음식을 말하는 줄 알았다. 설마 직접 만들어 올 줄이야.윤아는 마치 이런 일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해본 사람처럼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그런 윤아의 모습을 주시하던 수현은 점점 미간이 찌푸려졌다.윤아는 얼마 안 돼 음식을 덜어 그의 앞에 가져갔다.“먹어. 다 연식이라 먹기 편할 거야.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더니 이런 음식이 네 지금 상태에 좋다고 하더라고.”수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윽고 그릇을 받아서 들었다.맛은 생각보다 훌륭했다. 입맛이 없던 수현도 그렇게 느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수현이 윤아를 한 눈 보더니 물었다.“네가 직접 한 거야?”“안 그럼?”수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원래 하려던 말은 넌 예전에 이런 거 못 하지 않았냐는 말이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도 5년도 더 된 얘기였다.그 5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건 윤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수현이 그릇을 든 채 미동이 없자 윤아가 재촉했다.“빨리 먹어. 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좀 늦었어. 너 그렇게 계속 멍때리면 음식 다 식어.”윤아의 말에 수현도 더 머뭇거리지 않고 숟가락을 들어 크게 한 입 먹었다.그러나 윤아는 수현에게는 더는 눈길도 주지 않고 몸을 일으켜 민재에게 다가갔다.“의사 선생님이 오늘 상태에 대해서는 별말 없으셨어요?”“아침에 오셔서 진찰하셨는데 대표님께서 치료에 협조만 잘하시면 금방 나으실 거라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뭔데요?”“위병은 계속 관리해 줘야 하는 거라서요. 퇴원해서도 식사 잘
병원을 나선 후 윤아는 서둘러 회사로 갔다.길이 막힌 탓에 윤아는 조금 지각해 버렸다. 게다가 가는 길에 어제 봤던 그 남자와 또다시 마주쳤다.윤아를 보자마자 안경을 낀 그 남자는 곧바로 쑥스러운 듯 웃으며 윤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안녕하세요. 이제 저희 동료네요?”윤아도 손을 뻗어 그의 악수에 응했다.“어제는 면접 보러 오신 줄 알았어요. 이미 여기 사원일 줄은 몰랐네요. 윤아 님은 어떻게 이 작은 회사에 오게 되신 거예요? 진 씨 그룹이 여기에 투자할 거란걸 미리 아셨던 거예요?”미리 알아?윤아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게 아니더라도 전 이미 알고 있었을 거예요.”“하긴, 이미 여기 입사하셨으니 아실 수도 있겠네요. 전 그냥 입사 수첩에서만 봐서.”엘리베이터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남자를 제외하고는 다들 딱히 얘기를 나눌 의욕은 없어 보였다. 윤아도 다른 낯익은 얼굴은 발견하지 못했다.아무래도 어제 윤아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 중 이 안경남 혼자만 면접에 붙은 모양이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윤아는 곧장 나가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안경남과 엘리베이터에 탔던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레 그녀의 뒤로 함께 나왔다.한참을 걷던 윤아는 문득 다들 자기를 따라오는 걸 느끼고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하게 그들을 쳐다봤다.“왜 절 따라오죠?”안경남은 안경을 쓱 올리더니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저희가 오늘 첫 출근이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요.”윤아:“...”‘이 사람들 나를 사원으로 알고 있구나. 나 따라오면 사무실일 줄 아나 보네.’윤아를 따라가도 사무실이 나오긴 하지만 그곳은 사원용이 아닌 윤아의 개인 사무실이다.게다가 지금 보니 안경남뿐만 아니라 뒤에서 함께 걸음을 멈추고 서있는 저 사람들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그럴 수도 있지.윤아가 몸을 돌려 그들을 사무실까지 안내하려고 하던 그때, 마침 옆에서 걸어오던 오민우가 윤아를 발견했다.“대표님.”안경남과 다른 사람들:“?”대표님?누구?그들의 눈엔 물음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