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그 사람 주머니에 뭘 넣은 거야?”그녀의 말에 앨리스가 잠시 멈칫하더니 급하게 눈을 피했다.“무슨 말이야?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윤아는 말없이 그녀를 주시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는 앨리스에게 압박을 주기에 충분했다.“그래그래. 메모지 한 장 남겼어. 핸드폰 비밀번호를 모르니 연락처를 알아낼 방법도 없고, 내 연락처 남기는 건 되잖아? 오늘 밤 내가 도운 게 있는데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날 은인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잖아?”앨리스의 말 중에 유난히 귀에 거슬리는 단어 하나가 윤아의 귀에 박혔다. 윤아는 순식간에 낯빛이 바뀌어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앨리스는 한참을 떠들어대다 그제야 윤아가 아무런 대꾸도 없는걸 눈치채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려보았다.언제부터인지 윤아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창문에 비친 그녀의 무표정은 뭔가 슬픈 듯 공허해 보였다.‘왜 이러는 거지? 내가 방금 말실수를 했나?’앨리스는 곧바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방금 혹시나 실수로 윤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진 않았나 곱씹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무슨 말실수를 한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별 방도가 없자 앨리스는 결국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윤아야. 내가 혹시 뭐 말실수해서 네 기분 상하게 했어?”앨리스의 가까운 목소리에 윤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그런 거 아니야.”앨리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윤아는 조금 전 자신이 딴생각에 빠져 있었던 걸 떠올렸다.“진짜?”앨리스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되물었다.“하지만 너 방금...”“응. 아까는 그냥 잠깐 딴생각하느라 정신 팔려 있었던 거야.”“정말 괜찮아? 혹시 내가 아까 한 말 때문에 기분 상한 건 아니지?”윤아는 손을 뻗어 앨리스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네가 무슨 기분 상할 말을 하겠어? 쓸데없는 생각 그만해. 우리 이제 거의 다 왔어.”윤아가 장난스레 말하자 앨리스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화난 거 아니
선우의 체온을 머금은 따뜻한 외투가 윤아의 몸에 덮이며 순식간에 온기를 전달했다.선우의 체온은 윤아보다 훨씬 높았다.그가 다가오자 따뜻한 에너지가 함께 전달되며 어느새 야심한 밤의 칼바람도 그렇게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윤아가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고마워.”선우는 그녀를 걱정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날씨가 추우니까 외출할 땐 두껍게 입어. 너 쉽게 아프잖아.”윤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앨리스가 선수를 쳤다.“아이고 이선우 씨. 윤아한테 자꾸 뭐라 하지 말아요. 적게 안 입으면 언제 선우 씨에게 잘 보일 기회가 있겠어요.”“그만해.”윤아가 서둘러 둘의 대화를 끊었다.“밖은 추우니까 들어가서 얘기하자.”셋은 그렇게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윤아는 선우의 외투를 벗어 그에게 돌려줬다.“얼른 입어. 감기 걸리겠다.”선우는 손을 뻗어 외투를 건네받았지만 입지는 않았다.앨리스는 그 둘을 보며 눈동자를 바삐 굴리더니 말했다.“난 이만 사라져줄게. 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말을 마친 앨리스는 자신의 방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하필 그때 걸어 나오던 우진과 마주쳤다.우진은 윤아가 돌아온 걸 발견하고 그녀에게 인사를 하려 했으나 소리도 못 내고 그만 앨리스에 의해 입이 틀어막혀져서 끌려갔다.“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회사 상사에게 우리 윤아랑 단둘이 있을 시간 좀 줘요.”선우는 한 손에 외투를 든 채 윤아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 가는 도중에 그는 무심결에 몇 번이고 윤아의 표정을 관찰했다.눈치를 못 채고 있던 윤아도 물을 마시겠단 선우에게 물을 따라주다 그의 시선이 오로지 자신에게 쏠려있음을 느꼈다.윤아는 물컵을 선우에게 건네주면서 눈썹을 들썩였다.“왜? 내 몸에 뭐 귀한 보석이라도 있어? 들어올 때부터 왜 그렇게 빤히 보는 거야?”선우의 금테 안경이 거실의 불빛 아래에서 반사되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그는 얇은 입꼬리를 슥 올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랜만에 봐서 보고 싶
“아니.”아니란 말에 윤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진 비서가 호텔 예약하는 일 하나도 제대로 못 했을 리 없다고 말하려 했으나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내뱉진 않았다.오늘 경매장에서 바쁘게 돌아치고 돌아와서도 자기를 위해 두 아이를 돌봐줬던 우진의 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윤아는 순간 뭐라 더 말하기 미안해졌다. 이 일엔 윤아의 책임도 있으니까.여기까지 생각한 윤아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그럼 내가 대신 호텔 잡아줄게. 어디서 지낼 예정이야?”그러나 선우는 여전히 미동 없이 윤아를 바라보기만 한다.“여기도 괜찮은 것 같네.”윤아가 멈칫했다.당황해하는 그녀의 눈빛에 선우가 웃으며 답했다.“어차피 나도 꽤 오랫동안 이곳에서 지낼 텐데 진 비서 얘기 들어보니 여기도 빈집이 있다지?”“응.”“잘됐네. 집주인 전화번호 있어?”“앨리스한테는 있을 수도 있는데 지금은 시간이 늦어서 월세 알아보려는 거면 내일 어때? 새집으로 들어오려면 청소도 해야 하고 가구도 놓아야 할 텐데.”“응. 네 말이 맞아. 그래서 말인데 우리 심윤아 아가씨가 내일 시간이 날지 모르겠네? 괜찮으면 나랑 마트 가서 쇼핑이나 할래?”그런 거라면 윤아는 거절하기도 뭐하니 당연히 수락했다.“그래.”잠시 후 윤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호텔 잡아줘?”“됐어.”선우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런 일은 진 비서 시키면 돼. 나오라고 해. 시간도 늦었는데 너희 쉬는걸 방해할 순 없지.”결국 선우는 포기하기를 선택했다. 서두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그가 떠날 때 윤아가 그에게 말했다.“앨리스한테 연락처 받으면 너한테 보내줄게.”고개를 끄덕이는 선우.“그래. 부탁할게.”“아니야. 네가 나한테 준 도움이 얼만데. 이 정도 일 가지고 부탁은 무슨.”윤아는 문 앞에서 선우와 우진이 떠나는 걸 배웅했다.둘이 나간 후 앨리스가 어디서 나타난건지 윤아의 뒤에서 불쑥 말했다.“진 비서님 정말 대단해. 훈이랑 윤이 다 곤히 잠들어있더라.”그
윤아는 훈이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녀는 손을 뻗어 훈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돌아왔으니까 이제 안심하고 자.”서훈은 윤아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저 오늘 엄마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아는 널찍한 침대를 보며 마음속으로는 그러려고 했지만 입이 멋대로 귀여운 아들을 놀려주고 싶었다.“우리 훈이 이제 다섯 살인데 혼자 자야지.”그녀의 말에 서훈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어렸다. 그는 윤아가 거절한 줄 알고 고개를 푹 떨구고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 혼자 잘 수 있어요.”그냥 놀려주려던 건데 크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니 윤아는 자기가 엄청난 악당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아니야. 엄마가 농담한 거야. 오늘 밤은 추우니까 우리 같이 자자.”그녀의 말에 훈이의 눈빛에 어느새 환희가 가득 찼다.“정말요?”“그래. 먼저 침대에 가 있어. 엄마는 이불 갖고 올게.”그러나 훈이는 조금 생각하다 고분고분 침대로 돌아가는 대신 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는 이불 가지고 전 엄마를 도와 베개를 가져올래요.”“그래. 가자.”윤아도 동의했다.이윽고 윤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이불을 챙겼고 훈이도 뒤따라 베개를 챙겼다.둘이 돌아가는 길에 윤아는 어디선가 방문을 닫는 소리가 나는 걸 들었다. 그것도 밖의 현관문 쪽에서 말이다.윤아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훈이와 방으로 돌아간 뒤에야 그에게 말했다.“훈이야. 먼저 자고 있어. 엄마는 앨리스 아줌마가 잠들었는지 확인해보고 올게.”이제 윤아가 밤새 함께 있어 줄 거란 생각에 훈이도 걱정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엄마.”윤아는 훈이를 침대 중앙에 눕힌 후 두 아이의 이불을 정리해주고서야 신발을 챙겨 신고 밖으로 나갔다.먼저 앨리스의 방으로 가 노크를 했지만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앨리스?”여전히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윤아는 어쩔 수 없이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갔다.역
비록 그 별다른 얘기는 더 없었지만 앨리스가 무슨 생각인지 윤아가 모를 리가 없었다.윤아는 입술을 깨물며 핸드폰을 껐다.성인이 되어서 남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면 안 되는 건 맞지만... 수현과 소영이 사귀는 걸 알고 있는 이상 윤아는 그 사실을 친구에게 말해줄 의무가 있었다.원래는 내일 일어나서 앨리스에게 말해주려 했는데 그녀가 이 밤중에 그렇게 뛰쳐나갈 줄은 몰랐다.윤아는 고민 끝에 결국 앨리스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앨리스. 할 말이 있는데 통화 가능해?」그러나 이 문자를 끝으로 앨리스는 답장하지 않았다.윤아는 그래도 참을성 있게 2분은 기다려줬으나 여전히 답장이 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다.“상대방의 전원이 꺼져있어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차가운 기계음에 윤아는 머리를 한대 세게 맞은듯했다.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는 윤아.‘지금 전원 끈 거야?’무슨 일이라도 난건지 아니면 그냥 윤아와 상종하고 싶지 않은 건지.윤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도 사람마다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도 필요하다는 것도.하지만 어떻게 이걸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어차피 이대로 그냥 돌아가 잠을 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하지만 앨리스가 핸드폰 전원까지 꺼버린 걸 보아 지금으로선 윤아가 뭘 해도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았다.그녀와 앨리스는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이가 늘 좋았다. 윤아는 가능하면 최대한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민 끝에 윤아는 결국 충동을 자제하고 방으로 돌아가 누웠다.훈이는 여태 자지 않고 윤아를 기다리고 있었다.윤아가 돌아오자 그는 얼른 옆쪽으로 가 쪼그린 채 그 작은 손으로 옆자리를 탁탁 치며 말했다.“엄마.”윤아는 복잡한 마음으로 외투를 벗고 침대에 누웠다.윤아가 머리를 대기 바쁘게 훈이가 그녀의 품에 폭 안겨 왔다.“엄마. 무슨 일 있어요?”그의 말에 윤아가 정신이 돌아오며 미안한
선우의 열기가 손을 통해 불길 같이 전해져왔다.윤아는 짧은 순간에 따뜻함을 느꼈다.그러다 그의 말에 반응이 돌아온 윤아는 그제야 자신이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적게 입은걸 눈치챘다.“선우야. 앨리스가 지금 나갔는데 아무리 전화를 해도 안 받아서 말이야. 핸드폰을 끈건지 아니면 내 전화를 받기 싫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윤아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우는 그녀가 뭘 말하려 하는지 단번에 눈치챘다.윤아의 손과 발이 얼음장처럼 차게 얼어가는데 말을 해줘도 모르니 선우는 그저 한숨만 나왔다.“무슨 말인지 알겠어. 진 비서 불러서 같이 찾게 해줄게. 어때?”같이 사람을 찾아?“아니, 아니.”윤아가 머리를 흔들었다.“난 안가. 내가 가면...”앨리스는 분명 그녀가 참견이 심하다고 생각할 거다.윤아를 잘 아는 선우는 그녀의 말에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았다.“알았어. 사람 시켜서 안전한지 확인하라 할게.”윤아는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고마워.”“그럼 이젠 옷 좀 두껍게 입을 수 있을까? 너 계속 이러다가 감기 걸릴까 봐 무섭거든.”일이 해결되자 마음이 놓인 윤아는 그의 말대로 방에 돌아가 스웨터를 챙겨 입었다.윤아가 옷을 입을 새로 선우는 이미 통화를 마쳤다.“아 참, 진 비서가 그분 정확한 위치가 어딘지 아냐는데?”위치?윤아는 도와주는 사람들한테 숨기기도 뭐해 앨리스가 있는 호텔의 주소를 알려주었다.“이 밤에 혼자 거길 왜 간 거래?’선우는 그동안 도움이 필요로 할 때마다 그냥 그녀의 말에 따라줬지 한 번도 원인을 물은 적은 없었기에 이번엔 윤아도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을 선우에게 알려줬다.그녀의 얘기를 들은 선우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입을 뗐다.“그래서, 걜 만난 거야?”윤아:“...”둘 사이의 공기가 한순간에 어색해졌다.잠시 뒤 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만났어.”윤아의 담담한 태도를 보고 선우는 그나마 좀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또 뭔가 떠오른 듯 안경 뒤로 복잡한 눈빛을 숨기며 물었다.“진
“진 비서도 날 위해 그러는 거니까 탓하지 마.”선우가 싱긋 웃었다.“아마 미래의 상사가 다른 사람이 될까 봐 그랬을 거야.”그의 말 속엔 뜻이 있었다.“그래서, 지금은 걜 보면 어떤 느낌인데?”선우의 질문은 직설적이고 날카롭다.“미안. 내가 선 넘었나? 5년이나 지났으니 이제 벗어났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만.”하긴, 5년이나 흘렀는데.그렇게 긴 시간 동안 못 털어낼 일이 뭐가 있겠는가.윤아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아냐, 괜찮아. 묻고 싶으면 물을 수도 있지. 수현 씨는 이젠 나한테 낯선 사람이나 마찬가지야.”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에게 가슴 떨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말이 안 된다.“그래?”선우는 믿는건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으로 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럼 됐어. 난 네가 아직도 그곳에 머물러있는 줄 알았어.”“그럴 리가.”윤아가 웃으며 말했다.둘은 더 말하지 않았다. 이 화제가 불편하단 걸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으니까.선우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윤아의 어깨에 손을 놓고 밀며 나아갔다.“가자. 이제 자야지. 여긴 내가 계속 있을게. 앨리스가 아무 일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제일 먼저 너한테 알릴 테니까 걱정 말고.”“하지만...”윤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네가 계속 있어 주는 것도 좀 미안하고. 아니면 역시 내가...”윤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선우에 의해 방까지 밀려갔다.윤아가 입을 열어 말을 하려 하자 선우가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쉿.”그의 중저음 보이스는 마치 유유히 흘러나오는 첼로 소리 같이 매력적이었다.“훈이랑 윤이 깨겠어. 얼른 들어가.”그의 손가락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는 마치 불꽃같이 윤아의 입술에 닿여왔다. 그녀가 정신이 돌아왔을 땐 황급히 그를 밀어내기 바빴다.하지만 그보다 빨리 손을 거둔 선우. 그의 눈빛은 맑고 청렴해 마치 조금 전 행동은 그저 순수하게 윤아를 조용히 시키려는 의도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듯했다. 윤아는 하는 수없이 침대
이런 생각을 하며 윤아는 방문을 열고 맨발로 뛰쳐나갔다.거실로 나가려 했던 윤아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대로 그녀를 찾으러 왔던 선우의 품에 폭 안겼다.선우도 놀랐는지 윤아를 안은 채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휘청거렸다.“무슨 일이야?”선우가 넘어지지 않게 윤아의 허리를 잡고 바로 서며 물었다.그러나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윤아는 바로 그에게 물었다.“앨리스는? 돌아왔어?”그녀의 말에 선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조급해하지 마. 그거 알려주려고 온 거니까.”그제야 조금 진정이 된 윤아는 그에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윤아는 옷도 어제 그대로고 신발도 신지 않았는데 얘기를 듣기 전에는 입을 것 같지 않아 선우는 하는 수 없이 될수록 짧게 추려서 말해주기로 했다.“앨리스는 안전해. 별일 없었어. 우리 쪽 사람이 호텔 입구에서 지금까지 계속 지키고 있다 금방 돌아왔대.”“호텔에서?”“응.”“어떻게 지키고 있었다는 건데? 앨리스는 호텔 어디에 있었어? 들어갔었어?”나올 때 호텔 카드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으니 방에 들어가진 못했을 텐데.선우는 윤아의 표정을 관찰하려는 듯 그녀를 빤히 주시하더니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들어갔다면, 넌 무슨 기분일 것 같은데?”윤아가 멈칫했다.곧이어 표정이 굳는 윤아.“날 시험해 보면 재밌어?”“어젯밤부터 계속 알게 모르게 날 시험해 보고 있잖아.”선우가 잠시 멈칫하더니 시선을 올려 그녀를 유심히 바라봤다.“그럼 시험하는 거라고 치자. 긴장되고 신경 쓰이고 근데 또 할 수 있는 건 없고.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라도 네가 걔한테 마음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어. 나한테 아직 기회가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어.”“...”그의 돌직구에 윤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난...”“됐어. 이 얘긴 그만하고 이제 앨리스 안전한 거 알았으니까 옷이나 입어.”윤아는 그제야 고개를 숙여 자신이 잠옷 차림인 걸 확인했다.“추워. 감기 걸리겠다.”_호텔,어느새 날이 밝았다. 앨리스는 벽에 기댄 채 졸음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