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듣자 서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무슨 뜻이에요? 나더러 꼬시라는 겁니까?”“헤헤. 새로 부임하셨으니 인재를 배양하기 위해선 큰 그림을 그려야 하잖아요.”“저리 가요. 그렇게 이상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진짜예요, 대표님. 장난이 아니에요. 심윤아 씨는 외모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능력도 있잖아요. 그분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스카우트하려는 사람보다 많을 겁니다.”서원은 윤아의 이름은 들어보았어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었다.하지만 비서가 한 말이 사실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남계를 쓰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그는 나무 한 그루 때문에 삼림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여자에게 발목이 잡히거나 평생 한 명의 여자만 사랑하는 일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요. 심윤아 씨 친구 쪽으로 손을 더 써봐야겠어요. 보수를 계속 높여봐요.”“알겠습니다, 대표님.”-려악원은 강성의 가장 좋은 구역에 위치해 있었다. 남성의 가장 큰 부동산 회사가 구매한 후 작은 다리를 놓고 흐르는 물까지 장식해 놓은 고전풍 장원이었다.려악원은 건축이든 녹화든 모두 역사에 따라 만들었다.집은 더 말할 필요 없었다. 모두 클래식한 앤티크 디자인이었다.“부동산 사장이 옛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대. 또 돈도 많았으니 사람을 시켜 이런 곳을 만들었나 봐. 원래는 꿈을 이루려고 한 건데 다 건설한 후 제법 환영을 받았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나 봐.”윤아는 차창을 내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정말 두말할 것 없이 클래식했다.만약 현대 교통을 이용한 것만 아니었으면 정말 시공간적 경계를 뛰어넘어 고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여기 지역이 되게 값지다고 하더라. 살 때 이미 엄청나게 높은 가격으로 올랐지 뭐야. 이 정도로 만든 것도 쉬운 게 아니고. 지금은 어느 정도 가격대야?”엘리스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지역은 값진데 이 집이...”이 말을 듣자 윤아는 의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왜 그래?”“사장이 팔
수현을 떠난 후, 윤아는 자신의 삶이 전보다 많이 행복해진 것을 발견했다.전엔 결혼한 것 때문에 친구들과 많이 만나지 못했다.하지만 이혼하고 나서부터 앨리스와 현아는 자주 그녀를 만나러 왔었다. 셋은 아무 걱정 없이 어린 아이처럼 수다를 떨고 별을 보며 한 침대에 누워 귓속말을 주고받았다.앨리스와 현아가 양쪽에 누워 어느 남자가 잘생겼는지 의논하는 걸 아주 많이 들었다.진 비서는 캐리어를 위층에 올려갔다.집은 두 층이었다. 위층엔 풍경을 볼 수 있는 베란다가 있었는데 꽃과 풀들도 장식되었다.푸릇푸릇한 식물들이 많은지라 집엔 방충망을 만들어 놓았고 창가에도 벌레 퇴치 약봉지를 놓았다.윤아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여기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귀국한 후 시간을 들여가며 집을 알아보는 게 걱정되었는데 앨리스가 이미 마련해 두었을 줄은 몰랐다.심지어 공을 들여 정리하지 않아도 되었다. 윤아가 돌아오기 전 앨리스가 이미 사람을 시켜 청소를 해놓았기 때문이다.그리고 방에 윤아가 좋아하는 향수와 녹색 식물도 마련해 놓았다.진 비서는 윤아의 표정을 몰래 지켜본 후 밖에 나가 선우에게 문자를 보냈다.「대표님, 보고할 일이 있습니다. 전에 윤아 님께 준비해 둔 집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공항에서 윤아 님 친구를 만났는데 그 분께서 이미 집을 마련해 놓았다고 합니다.」문자를 보낸 후, 진 비서는 또 참지 못하고 눈앞의 집을 둘러보았다.참 좋았다.선우가 준비한 것보다 더 마음을 쓴 것 같았다.비록 선우도 뭐든 다 갖추어진 집을 준비했고 또 윤아의 이름으로 구매했었다. 하지만...친구의 아이디어가 더 새롭긴 했다.여자에게 져서 다행이지 만약 그게 이성이었다면 선우의 지위는 아마 위태로울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선우가 답장을 보냈다.「앨리스?」진비서: 「네.」역시 선우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러면 됐어요. 앨리스는 되게 세심한 사람이에요. 도울 게 있는지 잘 알아봐요.」「네, 대표님.」핸드폰을 치우고 진 비서는 계속 짐 정리를 도왔다.거의 다
진 비서가 간 후, 앨리스는 윤아를 데리고 이 층에 있는 베란다에 앉아 재스민차를 끓였다.재스민의 진한 향이 코를 간지럽혔고 뜨거운 열기도 함께 다가왔다.윤아는 참지 못하고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다.“술 몇 병 꺼낸 다음 베란다에서 나한테 원샷하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이 말을 듣자 앨리스는 멈칫하고는 웃었다.“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뭔 술이야. 냄새나 외관이 너무 분위기를 해치잖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나 술 끊었어. 앞으론 안 마실 거야.”“어머, 건강 챙겨? 원래 술 셌잖아.”윤아의 말에 앨리스는 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말도 마. 위병 생겼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말라더라. 죽는 게 무섭기도 하고 또 이 재스민 차향이 꽤 좋잖아.”친구가 위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자 윤아는 아주 걱정되었다.“무슨 일이야?”앨리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는데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주저하며 말했다.“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어.”심윤아: “?”“와인바에서 만났는데 엄청 잘 생겼어. 그 품위나 얼굴이 얼마나 완벽한지 이번 생에 그 사람과 결혼만 했으면 정말 완벽할 거 같아. 너도 봐야 하는데.”“잠깐만, 그게 위병과 무슨 상관이야?”“상관 있지.”앨리스는 한숨을 쉬더니 풀이 죽어 말했다.“그 사람이 너무 잘 마시더라. 나보다 더. 하지만 그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어. 그래서 주량 늘이려고 막 마시다가...”여기까지 듣자 윤아는 자초지종을 이해했다. 그녀는 순간 친구에게 어떻게 말할지 몰랐다. 앨리스가 남자 때문에 자신의 건강을 해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너 바보야?”윤아는 손을 뻗어 앨리스의 머리를 가볍게 만지며 말했다.“좋아하는 남자 때문에 주량을 늘이는 사람이 어디 있어?”이 말을 들은 앨리스는 가볍게 웃었다.“윤아야, 나 바보 같지? 하지만 그 사람이 너무 좋은 걸 어떡해. 첫눈에 반했어. 이번 생엔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아.”그 남자에 관해 말할 때
말을 마치고 앨리스는 빙그레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윤아도 입꼬리를 올리며 다가갔다.“좋아. 이 남자가 너한테 어울리는지 한번 봐볼게.”하지만 앨리스는 갤러리에 들어가 오랫동안 뒤져보아도 결국 찾지 못했다.“이상하다, 분명 몰래 한 장 찍었는데. 너무 멀리 떨어져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위기 진짜 대박이야. 윤아야, 그 사람 주위엔 평범하지 않은 포스가 있어. 정말 일반인이 아니야.”윤아는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결국 사진을 보지 못했다.“아아악, 내 사진은? 어렵게 남신님 사진을 찍었는데 왜 없는 거야 흑흑.”발광하는 앨리스의 모습을 보자 윤아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괜찮아. 찾지 못하겠으면 됐어. 나중에 사귄 다음에 마음껏 찍어도 되잖아.”이 말을 들은 앨리스는 순간 우울해졌다.“언제 나한테 호감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 사진도 내가 구석에서 몰래 찍은 거야. 혼자 앉아서 술 마셨어도 경계심이 대단하더라. 젠장, 사진 찍을 때 그 사람이 내 쪽을 보는 것 같아서 촬영 버튼을 누르지 않은 게 분명해.”그렇게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한 앨리스는 순간 너무 아쉬웠다.“그리고 그 사람 와인바에 자주 가지 않는단 말이야. 만난 횟수가 아주 적었거든.”“그렇다면 다음에 만났을 때 용기 내어 연락처 물어봐봐.”“내가 물어보지 않은 것 같아? 아예 내 말 무시해 버리던데.”심윤아: “...”여기까지 들은 윤아는 확신했다. 앨리스가 좋아하는 남자가 차도남이라는 걸.“속상한 일 있는 것 같았어. 술 마실 때 모습이 엄청 울적해 보였거든. 사람 마음 아프게.”심윤아: “...”역시 좋아하는 사람을 볼 땐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는 거였다.술 마시는 모습만 보아도 마음 아프다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윤아야, 이러면 어때?”앨리스는 갑자기 윤아의 팔을 잡더니 웃으며 말했다.“오늘 나랑 와인바에 가지 않을래? 보름 동안 기다렸는데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넌 늘 내 행운의 여신님이잖아. 오늘 함께 가주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싫어.”
이 말을 듣자 훈이는 작은 머리를 쳐들었다.“앨리스 이모?”앨리스는 원래 윤아에게 함께 가자고 매달리려 했지만 훈이의 이런 모습을 보자 순간 아이의 귀여움 속에 푹 빠져서 자제력 조금도 없는 이상한 아줌마로 되었다.“헤헤, 이모가 뽀뽀해 줄게.”심윤아: “...”윤아가 저녁을 만들 때 앨리스는 옷을 갈아입고 주방에 가서 윤아를 도우려고 했었다.거실을 지날 때 그녀는 한 눈 둘러보았는데 무심결에 다탁 앞에 앉아있는 훈이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해가 거의 질 무렵이어서 창밖엔 이미 노을이 깔려있었다. 저녁놀의 빛이 훈이의 정교한 얼굴에 내려앉았다.어린아이는 거기에 앉아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는데 아직 애티를 벗지 않은 얼굴엔 어린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성숙함과 담담함이 곁들어 있었다.앨리스는 우뚝 멈춰 서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훈이를 보았다.너무 오랫동안 와인바에 있던 그 남자를 보지 못해서 환각이 생긴 건가?놀랍게도 훈이에게서 그 남자의 그림자가 보였다.몇 초 후, 그녀는 눈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어젯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해서 그럴 거야. 응, 피곤해서 이런 환각이 보이는 거야.”그리고 앨리스는 몸을 돌려 주방에 가서 윤아를 도왔다.하지만 주방에 들어간 다음, 그녀는 여전히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다. 아까 거실에서 본 장면이 마음에 걸렸다.옆 모습이 왜 그렇게 비슷하게 느껴지는 걸까?요리하는 것을 돕다가 앨리스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윤아야, 조금 실례되는 질문 해도 될까?”이 말을 듣자, 윤아는 멈칫하고는 고개를 돌려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앨리스를 보았다.“또 선우에 관한 거야?”앨리스는 당장 부정했다.“아니야. 내가 물어보려던 건 선우 씨랑 아무 관계도 없어.”선우와 연관이 없는 거라면...“그럼 마음대로 물어봐.”계속 그녀의 감정생활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된다.“진짜?”하지만 앨리스는 조금 걱정되었다.“정말 아무거나 다 물어봐도 되지?”“응.”선우 얘기만 꺼내지 않으면 된다
“죽었어.”이 세 글자는 갑작스럽게 앨리스에게 다가왔다.그녀는 심지어 채 묻지도 못했다.앨리스는 자라에 멍하니 서서 놀란 얼굴로 윤아를 보았다.“뭐라고?”윤아는 고개를 들고 담담하게 앨리스를 보며 여유 있게 말했다.“왜?”“죽, 죽었다고?”앨리스는 이런 답을 들을 줄 몰랐다. 그래서 한번 다시 반복한 후 순간 머쓱하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전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왜 다시 반복해서 윤아의 가슴을 찔렀는지 참 후회되었다.세상에.앨리스는 죄책감에 푹 빠져 선우 얘기를 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후회했다.윤아가 왜 과거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나 했다. 현아에게 물어봐도 그저 한숨만 내쉬며 이렇게 말했었다.“윤아에겐 아주 속상한 일이야. 그러니까 묻지 않는 게 좋겠어.”앨리슨 이제야 현아가 왜 윤아의 속상한 일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그리고 윤아가 왜 아이 둘을 혼자 키우는지에 대해서도 알 것 같았다.“미, 미안해.”정신을 차린 후, 앨리슨 윤아를 향해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윤아야, 미안해. 난 정말 몰랐어. 만약 알았다면 이렇게 물어보지는 않았을 거야.”앨리스는 윤아에게 이렇게 사과해도 미안했다. 그래서 윤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죽었다고 한 건 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을 없애기 위해서다.친구인 앨리스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일에 대해 윤아는 이미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어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아서였다.만약 앨리스를 이렇게 놀라게 할 줄 알았다면 아마 더 부드러운 방식을 택했을 거다.결국, 앨리스는 너무 자책한 나머지 더는 와인바에 가자고 조르지 않았다.하루 동안 비행기를 탄 데다가 생리까지 온 윤아는 비록 꽤 오래 자긴 했지만 몸은 여전히 피곤했다. 그래서 밤에 일찍 잠들었다.이튿날 깨어났을 때 앨리스는 생기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윤아야, 어제 와인바에 갔을 때 누굴 만났는지 알아?”이 말을 듣자,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어제 일찍 자지 않았어?”분명 서로 잘
호텔 룸.누군가가 암막 커튼을 걷어내자 룸은 순간 밝아졌다.눈 부신 빛이 침대에 있는 훤칠한 얼굴에 비춰졌다.원래 시체처럼 누워있던 사람이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그는 눈썹을 삐푸리며 감았던 눈을 떴다.“깼어?”맑은 남자 소리가 소파에서 들려왔다.금방 깬 수현은 몇 초 후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바로 양훈이었다.눈 부신 빛에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수현이 자신을 무시하는 걸 보았지만 양훈은 계속 말했다.“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양훈은 수현이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한 듯 그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의사 선생님께서 너한테 말했을 텐데.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말라고 말이야.”침대에 누워있는 수현은 여전히 반응을 하지 않았다.양훈은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지금 더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아니면 몸을 망가뜨려서 네 부모님이 먼저 네가 죽는 꼴을 보게 하고 싶어?”말을 마친 양훈은 계속 말을 하는 대신 거기에 앉아서 기다렸다.한참이 지나서야 침대의 남자는 몸을 일으켜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말이 통하지 않는 모습을 보자 양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오 년 전, 윤아가 선우랑 간 후, 수현은 이런 귀신 같은 몰골로 되었다.귀신 같은 몰골이라고 하긴 했지만 퇴폐해졌다는 뜻이 아니다.반대로 회사 업무를 처리하는 건 더 훌륭해졌다. 그래서 현재 진씨 그룹의 지위는 거의 경쟁사가 없을 정도로 탑이었다.하지만 이건 모두 수현이 자신을 일만 하는 로봇으로 삼았기 때문이다.그는 일이 아니면 술을 마셨다.그 어떤 오락 활동도 하지 않았고 수면 시간도 정말 적었다. 심지어 위병에 걸렸다.처음에 수현은 취할 때가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알콜도 그를 마비시키지 못했다.양훈은 수현이 뭔가 보복하려고 그러는 게 아님을 보아낼 수 있었다.그저 고통스러운 현실을 멀리하려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이렇게 생각한 양훈은 몸을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말한다 해도 수현은 전처럼 그녀가 억울함을 당한 걸 알았을 때 부드럽게 설명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그저 차갑게 자리에 서서 평온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그 시선에 온몸이 불편해질 때 소영은 어쩔 수 없이 화제를 돌렸다.“농담이야. 어떻게 내 전화가 받기 싫을 수 있어? 아, 맞다. 양훈은? 어젯밤 수현 씨한테 전화 걸었을 때 양훈이가 받았거든. 수현 씨가 취했다고 하더라. 어때? 머리 아파?”이렇게 많이 말했지만 수현은 그저 세글자로 대답했다.“괜찮아.”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침실에 들어가 셔츠를 입었다.소영은 그 자리에 서서 수현의 차가운 뒷모습을 보며 엄청 속상했다.오 년 전, 수현과 윤아가 성공적으로 이혼했고 또 윤아는 해외에 갔는데 마치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소영은 그녀가 약속을 지켰다는 점에 대해 무척 놀랐었다. 그리고 수현이 이혼한 다음 빨리 그녀와 결혼해 주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수현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기 때문이다.그는 소영에게 이렇게 말했다.“미안,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 같아.”이 말을 듣자 소영은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간신히 웃으며 물었다.“왜? 납치 사건 때문에 그래? 지금도 내가 사주한 거라고 의심하는 거야? 수현 씨, 난 윤아 씨가 수현 씨 곁에 있었던 점이 부럽긴 했어. 하지만 내가 없을 때 윤아 씨가 나 대신해서 수현 씨를 챙겨줘서 많이 고마워.”“널 대신한 게 아니야.”“뭐?”“소영아, 윤아는 널 대신해서 챙겨준 게 아니야. 우리 예전에 사귀지 않았잖아.”여기까지 듣자, 소영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몸도 휘청거렸다.“소영아, 네가 날 목숨으로 구해준 거 알아. 그래서 영원히 가슴에 새길게. 앞으로 그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난 꼭...”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영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수현 씨, 나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날 갖기 싫어졌어? 전에 우리 약속했잖아. 내가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