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집에는 윤아만의 전용 공간이 생겼는데 그곳엔 주로 수현이 그녀에게 선물한 물건들을 보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거의 가득 차 있었다. 이번 떠날 때 그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심지어 결혼반지마저 침실에 남겨두었다.심씨 집안이 파산했을 때, 그녀는 돈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모든 물건들은 수현이마련해준 것이었다.떠날 때 당연히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어떻게 그래. 비록 그냥 물건이긴 하지만 돈을 주고 산 거잖아." 현아는 매우 안타까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말에 윤아는 쾌활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미리 알았다면 좀 값어치 있는 것들을 더 가져갈걸. 적어도 나중에 돈으로 바꿀 수 있었을 텐데."이 말을 듣자, 현아는 곧 생각을 바꿨다. "됐다, 됐어. 어쨌든 떠날 거니까 옛 물건들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너도 참, 내가 조금 아쉬워했을 뿐인데, 어떻게 내 앞에서 농담할 수 있어?"윤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며. 그런데 왜 농담할 수 없어?" "맞긴 한 데...”현아는 아직도 어제 윤아가 펑펑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부드럽게 말했다.“우리는 친구니까 내 앞에서 강한 척 안 해도 돼. 울고 싶으면 울어."현아가 말하자, 윤아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조금 사라졌다. "현아야, 나는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약하지 않아. 어제 슬픈 일들은 이미 지나갔어. 우리는 앞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해. 시간은 흐르고, 지구는 회전하며,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해. 게다가 앞으로 아기를 키워야 하니까 그렇게 많은 시간을 슬픔에 쓸 여유가 없을 거야."현아는 원래 더 물어보려 했지만 친구가 간만에 마음을 다잡았는데 상처를 더 깊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낙관적인 척해도, 이렇게 유지하다 보면 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는 진짜로 행복해질 거다. 이 생각에 현아도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철학가님, 앞으로는 당신
비록 서명한 후에 불필요한 문제가 생길게 걱정되어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지만 약속한 조건들은 최대한 이행할 것이었다. 하지만 맞은편에 있는 현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흥, 네가 이 일 꺼낼 때마다 나는 그 여자가 역겹게 느껴져. 널 도왔던 걸 빌미로 국내를 떠나라고 요구하다니. 만약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운 후 이런 역겨운 방식으로 보답을 요구한다면 처음부터 돕지 않는 편이 낫겠어."그녀의 분노에 비해 윤아는 훨씬 차분해 보였다. 그녀는 무력하게 웃으며 말했다. "할 수 없어, 빚진 걸 어떡해."현아는 아직도 욕을 하려고 했지만, 윤아가 그녀를 막았다."됐어. 내가 안타까워서 그런다는 거 알아. 그런데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상황에서 우리는 침착해야 해, 알겠어?""응." 현아는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윤아가 가려는 것을 떠올리자, 그녀는 여전히 슬펐다. "네가 해외에 가면, 우리는 자주 만날 수 없겠지?"윤아는 고민한 후에 말했다. "지금은 교통이 매우 편리하잖아. 만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어디서든 만날 수 있지 않아?""맞아, 그래도...보고 싶을 것 같아. 만나기는 해도 국내만큼 자주 못 만날 거잖아."현아가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윤아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엇을 말할지 고민하던 중, 초인종이 울렸다."이때에 누가 올까? 나한테 찾아올 사람은 거의 없는데. 윤아야, 여기서 기다려봐, 내가 확인해 볼게."현아가 문을 열러 갔을 때, 윤아는 다시 자신의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건을 정리하면서 이혼 신고서를 보고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한 번만 와보고 주소를 기억하네요.”말소리를 들은 후, 윤아는 얼른 신고서를 거두어 가방 안쪽에 넣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현아가 달려왔다."윤아야, 선우 씨 오셨어."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 선우는 신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이선우?"윤아는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일
"생각이 없는 거야, 아니면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거야?" 선우는 손가락을 탁자에 탁탁 치면서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애 키워야 하는데 생각이 없어서야 되겠어?."이 말을 듣자 윤아는 눈을 들었다. 순간 안경을 통해 부드럽게 웃는 눈과 시선을 마주쳤다."도와줄까?”선우가 제안했다.본능적으로 윤아는 머리를 흔들었다."됐어.”"이렇게 빨리 거절해? 내가 제안한 조건이 별로라서 그래?""아니야." 윤아는 머리를 흔들었다. "너 국내에서 장기적으로 발전하려는 거 아니었어? 나는 아마 이틀 안에 떠날 거야."이 말을 듣자 선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어디로 가?" "해외." 윤아는 가볍게 말했다.선우는 손가락을 몇 초 동안 조였다가 힘을 풀었다."역시 내 생각과 같았군. 나는 네가 여기 남을 줄 알았는데.""내가 출국할 거 알았어?" "네 아버지가 해외에 있잖아. 어떻게 모를 수 있어?" 이 얘기를 하자 선우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귀국하기 전에 네 아버지를 만났어."이 소식은 윤아에게 있어서 아주 큰 서프라이즈였다."아빠를 봤어? 왜 일찍 말하지 않았어? 지금은 어떻게 어때?"선우의 손가락은 잠시 멈추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널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하셨어.""무슨 뜻이야?"윤아의 표정은 순간 진지해졌다. "아빠 어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아무 일도 없어." 선우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사업에서 생긴 작은 문제일 뿐이야. 아저씨는 굉장히 대단하신 분이니까 곧 해결할 거야.""왜 전화할 때마다 아무 얘기도 없어? 항상 원활하게 진행 중이라고 말하면서 나한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 내가 아빠 딸인데 아빠는 항상...""윤아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 아저씨는 널 사랑하기 때문에 숨기는 거야. 만약 네가 정 아저씨가 걱정된다면 나랑 함께 해외로 가는 건 어때?"이 말에 윤아는 한순간 놀랐다."너 국내에서 남을 계획 아니었어?""응."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
돌이킬 수 없다고?윤아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이 실렸는데 실내 어두운 불빛에 의해 더 부드러워 보였다. 뺨에 늘어진 검은 머리가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리고 있어 시선을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었다.목소리만 천천히 남아 있었다."나는 이미 되돌아갈 길이 없어. 그리고 돌아갈 생각도 없고."분위기는 갑자기 우울해졌다.선우는 그녀를 오랫동안 조용히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또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됐어, 슬픈 일은 생각하지 마. 어차피 이미 과거니까."윤아도 함께 탄식하며 말했다. "그래, 이미 과거니까 생각할 필요 없어."너무 많이 생각해 봐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현아가 돌아왔을 때, 윤아가 저녁에 선우와 함께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는 순간 멍해 있었다. 그런 다음 서서히 눈시울을 붉혔다.눈물을 참아내며 그녀는 간신히 웃었다. "오늘 밤에 비행기라고? 진짜 빠르네. 그럼 짐 다 쌌어?""응, 다 싸 놨어.""빠진 게 없어? 내가 도와줄게."현아는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갔다.윤아는 뒤에 따라가서 그녀가 허둥지둥 뒤적이다가 결국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모습을 지켜보았다."빠진 게 없어. 잊었어? 진씨 저택에서 나올 때 가방 하나만 가져왔다는 거. 옷도 없잖아."빠진 게 있어도 현아의 집에 없으니 정리할 필요 없다는 뜻이다."그러네. 생각이 짧았어. 그럼 맛있는 것 좀 챙겨줄게. 비행기를 꽤 오래 타고 가야잖아. 게다가 지금 임신 중이니까 쉽게 배고플 거야. 비행기에서 먹게 네가 좋아하는 음식 좀 만들어줄게.”윤아는 현아를 끌어당기며 말했다.“됐어. 비행기엔 때를 맞춰 음식을 제공하잖아. 그거 먹으면 돼.”하지만 현아는 이렇게 말했다.“비행기 안 음식이 내가 만든 것보다 맛있을 리가 있어? 어차피 나는 몇 가지 간식만 만들 거고 식으면 더 맛있어져. 다음에 네가 먹고 싶을 때 언제인지 모르겠어."윤아는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좋아, 나도 함께 만들자."그 후 현아는 몇
"서먹하게 대한 게 아니라, 정말..."처음에 선우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윤아가 짐을 꺼내자 그는 깨달았다. 그녀는 정말 그를 서먹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것을.그녀는 아주 작은 가방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선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잠깐 고민한 뒤, 결국 손을 내밀었다. "내가 도와줄게." 윤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굳이? 딱 이 정도로밖에 안 되는데."그러나 선우는 말없이 그녀의 손에 들고 있는 가방을 가져갔다. 윤아는 잠시 어이없어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아는 그들과 함께 차에 올라타고 공항으로 향했다.공항에 도착한 후, 현아는 하루 종일 참았던 본모습을 드러내며 윤아를 품에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흑흑. 심윤아, 내가 경고하는데 날 잊으면 안 돼. 너 정말 날 잊으면 내가 꼭 비행기 표를 사서 널 찾아갈 거야. 아주 귀찮게 해주겠어."윤아도 붉어진 눈시울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널 절대 잊지 않을게.""그럼 약속해. 내가 너의 베프야. 해외에 가서도 나보다 더 좋은 친구를 사귀면 안 돼.""좋아, 약속할게.""잘생긴 남자 친구가 생기면 혼자 두지 말고 꼭 나한테 소개해야 해.""응. 알겠어.""시간만 있으면 널 찾아갈 거야.""그래,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게."선우는 이들의 말을 들으며 입가에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선우의 비서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난 뒤 그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대표님,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이 말을 듣자 선우 입가의 미소가 약간 식어 들었고 날카로운 눈길로 비서를 쏘아보았다.비서는 순식간에 목덜미가 서늘해져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선우...는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미친놈이었으니까.하지만...그는 윤아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조금의 호기심이 들어있었다.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반쯤 미친 선우가 실제로 여자 하나 때문에 귀국했다는 것이었고
오 년 후, 인스타 태양의 라이브 방송."여러분, 작은 태양의 먹방 생방송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늘은 해산물 요리 두 가지를 만들어 볼 거예요."생방송 카메라에는 두 명의 귀여운 어린이가 애니 캐릭터가 그려진 옷을 입고 새우 껍질을 다루고 있었다.윤이는 이빨 꽂이를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새우 껍질을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새우가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윤아!"윤이는 겁에 질려 급히 몸을 숙이고 새우를 찾기 시작했다.찾은 후에는 불쌍한 표정으로 그보다 조금 키가 큰 훈이를 보았는데 검은 눈동자는 매우 무해했다. "오빠 미안해"둘 다 다섯 살이지만, 윤이는 순진하고 로맨틱하고, 훈이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둠이 있다. 아직 나이가 어리다 보나 순진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마 사이와 눈썹 사이에서는 앞으로 많은 여자아이들을 사로잡을 것 같은 느낌이 묻어 나온다."오빠." 윤이는 훈이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하얀 작은 주먹에서 두 손가락을 내밀며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애교를 부렸다."오빠, 미안해. 나 용서해 주면 안 돼? 저, 저녁에 새우 두 마리만 먹을게! 나, 나머지는 다 오빠 줄게!""그걸 말이라고 하냐? 며칠 전에 누가 새우 한 접시를 혼자 먹고 배탈이 났어? 오늘은 절대 새우 먹으면 안 돼!" 훈이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윤이는 이 말을 듣고 뾰로통해지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시청자들은 생방송에서 두 남매의 대화에 웃음을 터뜨렸다. 채팅창에는 이러한 말들이 올라와 있었다.“훈아, 우리 윤이에게 체면 좀 남겨줘. 며칠 전에 새우를 혼자 먹다가 배탈이 났는데 애가 얼마나 서러울까.”“바보 윤이는 언제쯤 오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오빠는 다 널 위해서 그런 거야. 어머나, 입이 나온 거 좀 봐. 어서 이모 품으로 와!”이 생방송을 보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두 남매가 좋아서였다. 그래서 생방송을 할 때마다 와서 댓글을 남긴다.모두가 댓글을 쓰며 웃고 있을
남자아이 옆에 있던 소녀는 깜찍하게 카메라를 향해 윙크하고 키스를 하며 하트를 날리기도 했다."고마워요, 고독현 아저씨, 아저씨 진짜 멋져요!"어린 소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귀여웠다. 하는 행동도 약간 서툴었는데 왜인지 그의 마음속 부드러운 부분에 와닿았다.남자는 아까까지만 해도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지금은 얼음이 녹은 것처럼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렸습니다.두 아이를 비교해 봤을 때 그는 여전히 이 소녀가 더 마음에 들었다.남자 아이처럼 정색하고 선물을 주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하트를 날려주니 말이다.만약 그도 이런 딸이 있었으면...…이렇게 사색하는 사이에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비서가 문을 밀고 들어오며 말했다."대표님, 회의가 곧 시작되니 출발해야 합니다.”이민재는 수현의 올라간 입꼬리를 보자 잠시 멈칫했다. 잠시 후 수현의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아이 소리에 문득 깨달았다.대표님께서 또 그 두 아이의 생방송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조금 허무맹랑했다.1년 전 그는 수현과 함께 U국에 회의하러 갔었다. 회의가 끝난 후 수현은 어머니께 보석 선물을 사드리려고 보석 가게에 갔었다. 이 과정에서 보석 가게에 있던 두 할머니와 마주쳤는데 조금 특별해 보였다. 두 사람이 아이의 생방송을 보면서 주얼리를 고르고 있었기 때문이다.할머니들이 뭔가 특이한 일을 하면 민재는 이해할 수 있었었지만 수현이 그 아이들의 말을 들은 후 걸음을 멈추고는 두 할머니의 곁에 서서 오랫동안 듣고 지켜본 점에 대해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마지막에는 심지어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는지 물어보기까지 했다.이 변화에 민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이후에는 이 쌍둥이의 라이브를 보는 것이 거의 수현의 일상이 된 것 같다.그 두 아이가 라이브를 시작하면, 수현은 뭐를 하든 간에 잠시 제쳐두고 선물을 보낸다.회의 중이라면 그냥 들어가서 선물하고 떠난 뒤,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재방을 본다.처음에 민재는 수현이 이 두 아이가 귀엽고 재밌게 여겨
화면의 모서리에는 여자의 희미한 모습만이 비쳤고, 몇 초 만에 여자의 가녀린 몸짓이 사라졌다. 동시에 들려오는 건 여자를 향해 뛰어가는 작은 귀여운 아이들의 발소리였다."엄마.""엄마, 돌아오셨어요? 오늘 수고했어요, 엄마."두 아이들은 매우 다정하게 여자에게 다가가 관심했다. 멀리 있어서 여자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려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작은 아이들은 화면 앞으로 돌아왔다."삼촌, 이모, 여러분, 우리 엄마가 돌아왔어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방송할게요."훈이 돌아온 후 화면을 향해 한 마디 말했다. 그의 쌍둥이 여동생은 다시 화면에 하트를 비춰 보였다."여러분, 안녕!”라이브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약간 아쉬워했다. 두 아이가 일주일에 한 두 번씩만 방송하는데 오늘은 절반도 하지 않고 끝냈기 때문이었다. 비록 아쉽지만 그들은 남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화면은 검게 변하며 방송이 끝났음을 나타냈다. 수현은 휴대폰을 응시하며 멍하니 있었다.민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대표님, 지금 출발하지 않으시면 시간이 부족해요."다음 순간, 수현은 핸드폰을 끄고 침묵한 채 밖으로 걸어갔다.문밖에는 민재 외 얼마 전에 고용된 신입사원도 있었다. 회사 일이 많아서 비서도 한 명 이상 필요했다.두 사람은 수현이 나오자마자 인사를 했다."대표님.”"안녕하세요, 대표님."수현은 무표정하게 머리를 끄덕이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그의 뒤를 즉시 따라갔다. 수현은 빠르게 걸었고, 두 사람은 그의 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따라왔다. 새로 입사한 비서는 최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여자로, 민재와 함께 일하며 배우고 있었다. 두 사람이 수현의 뒤에서 약간 떨어진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민재에게 물었다."민재 님, 대표님 방금 아이들 방송 다시 보던 거예요? 맞아요?"민재는 머리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네, 맞아요. 방금 문밖에 있을 때 소리까지 들렸어요.""나도 직접 몰래 보러 간 적이 있어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