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윤아가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이튿날 아침 여덟 시였다.그녀는 새하얀 천장과 익숙한 환경을 둘러보며 아래에 있는 부드러운 침대를 진지하게 느껴보면서 드디어 집에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인지했다.잠시 멍해 있다가 이마를 부여잡고 일어났다.지금까지 잘 줄은 몰랐다. 어젯밤에 분명 차에서 잠들었는데 수현이 결국 그녀를 데려왔었다.한참 동안 앉아있다가 핸드폰 메시지를 보았다.수현은 어떤 메시지도 남기지 않았고 채팅 기록은 공백이었다.잠시 고민한 후, 윤아는 수현에게 전화를 걸며 욕실에 씻으러 들어갔다.한참 후, 수현이 전화를 받았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윤아는 칫솔에 치약을 짜서 입에 가져가려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동작을 멈추었다.“어제 한 얘기 말인데, 우리 오늘...”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수현은 서늘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지금 아주 중요한 미팅이 있어. 세 시간 정도 할 거야.”심윤아: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뒤로 미룰 수 없어? 반 시간 정도 시간 내는 건 가능하지 않아?”하지만 수현은 단칼에 거절했다.“안 돼. 아주 급한 회의거든.”진 씨 그룹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일하지 않았으면 아마 수현의 헛소리를 믿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수현은 이렇게 말했다.“미팅하러 갈 거야. 끊어.”그리고 수현은 전화를 끊었고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바쁜 음성을 들으며 윤아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어이가 없었다.역시 어제 그녀의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 이혼하기 싫은 건가? 왜?이런 의혹을 품고 그녀는 빠르게 양치하고 어제 하지 못한 샤워를 했다.그녀가 깔끔히 정리하고 아래층에 내려갔을 때 거실에 있는 선희를 보았다.윤아를 보자마자 선희는 달려갔다.“윤아야, 깼구나.”선희를 보니 윤아는 어제 그녀가 자신을 데리고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겠다는 일이 떠올랐다.원래 어젯밤 돌아갈 때 수현과 이혼 얘기를 하면서 만약 그가 동의한다면 오늘
이 말을 듣자, 윤아는 최대한 미소를 지었다.“아니에요. 그날 다리만 다쳤어요. 다른 데는 아무 문제 없어요.”다리를 다친 것도 주연이 발로 차서였다.그리고 그녀를 납치했던 최준태는 놀랍게도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준태와 주연을 떠올리니 지금 어떻게 됐을지 궁금했다.“아, 어머님. 그날 두 사람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선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난 잘 모르겠어. 하지만 선우가 자신에게 맡기라고 하더구나. 선우는 늘 일 처리가 확실하니 나도 마음이 놓여. 그리고 걱정하지 말렴. 내가 현이 보고 그 일을 제대로 알아보라고 했어. 그러니까 분명 벌을 받을 거야.”“그러니까 지금 이 일은 선우가 맡고 있다는 뜻이세요?”“그럴 거야.”여기까지 떠올린 윤아는 선우와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이제 갈까? 이미 의사 선생님하고 얘기 해뒀어. 오늘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괜찮다고 하셨거든.”말을 마치고 선희는 윤아의 손을 잡았다. 윤아는 정말 거절하고 싶었지만 선희는 이미 그녀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결국 윤아는 선희와 함께 병원 입구에 도착했다.그때부터 윤아는 오늘 정말 이대로 들키는 건 아닌지 긴장되기 시작했다.선희는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임신한 사실을 안다면 무조건 말할 것이다.“어머님, 저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데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이선희?”놀란 목소리가 두 사람 뒤에서 들려왔다.이 목소리는...윤아는 고개를 돌리고는 온 사람이 누군지 본 후 입술의 혈색이 순간 사라졌다.어떻게 저 사람이...이선희와 조씨 집안 사모님인 임진숙은 듣기 좋게 말해서 친구였다.임진숙은 선희의 아름다운 미모와 뛰어난 능력을 질투했고 선희는 진숙의 오만함과 옹졸함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늘 겉으로 친구 행세를 하였다.이 모든 건 진씨 집안과 임씨 집안의 사업 합작 때문이었다. 다들 여러 행사에 참여할 때 그래도 체면을 갖추었다.“임진숙?”진숙은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눈앞의
그녀의 딸이 저지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임씨 집안 사업이 큰 만큼 그녀 임진숙의 딸은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남자와 결혼해야 했다.제일 처음 진숙이 선희와 가까이 한 이유는 진씨 집안의 유일한 후계자인 수현이 마음에 들어서였다.만약 임씨 집안과 진씨 집안이 사돈으로 맺어진다면 두 집안의 사업은 경쟁자를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할 것이다.진씨 집안 이 큰 배에 임 씨네도 타고 싶었다.하지만 중도에 강씨 집안이 뛰어 들어올 줄 몰랐다.진숙은 겉으로나 속으로나 강 씨네 딸을 아주 미워했었다. 그런데 수현이 윤아와 결혼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그래서 진숙은 또 그런 질투와 원한을 윤아에게 돌렸다.저번에 윤아가 그 병원에 간 것을 보았을 때 진숙은 그녀가 아마 낙태하려는 것을 눈치챘다.진 씨네 와 같은 집안은 정말 수현의 아이라면 일찍이 알려 자신의 지위를 높일 것이다.그런데 윤아는 몰래 작은 병원에 와서 낙태했다.겉으로 보기엔 도도해 보이는 윤아가 남편 몰래 바람피울 줄은 몰랐다.자기 딸이 그런 짓을 하지만 않았어도 정말 윤아의 일을 다 퍼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윤아가 자기 딸을 팔아넘길까 봐 두려웠다.여기까지 생각한 진숙은 입꼬리를 간신히 올리며 말했다.“요즘 몸이 조금 안 좋아서 검사받아보려고.”이 말이 끝나자 조보아가 이쪽으로 걸어왔다.“엄마.”딸의 목소리를 들은 진숙은 안색이 급변했다.“네 딸도 함께 왔네?”선희의 말이 끝나기 전에 진숙은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좀 바빠서 나중에 연락할게.”이 말을 마치고 진숙은 보아를 데리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선희는 원래 더 물어보려고 했으나 두 사람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한참이 지나서야 선희는 윤아에게 말했다.“윤아야, 임진숙 저 여자 조금 이상해 보이지 않니? 많이 긴장한 것 같던데.”하지만 윤아의 답을 듣지 못한 선희는 어쩔 수 없이 윤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윤아가 고개를 숙인 채 사색에 잠겨있는 모습을 발견했다.“윤아야, 윤아
”윤아야, 윤아야.”선희의 목소리가 또다시 귓가에서 울린다.윤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 선희의 앞에서 딴생각한 게 이미 세 번째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머쓱했고 또 선희에게 미안했다.“죄송해요, 어머님. 오늘은 제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요, 검사는 안 하면 안 될까요?”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선희는 잠시 멈칫하더니 잠시 고민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정 하기 싫다면 다음 날에 하자꾸나.”“고마워요, 어머님.”윤아는 미소를 지었다.“제가 오늘 다른 일이 있어서요, 지금 처리하러 가봐야겠어요. 조금 있다가 할머님 병실에 갈게요.”선희는 사리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윤아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을 때 금방 허락했다.“그래. 빨리 가봐. 계속 딴생각을 하는 걸 보니 아직 하지 못한 그 일이 마음에 걸린 것 같구나.”이 말을 마치고 선희는 윤아에게 손을 저었다.“가봐. 엄마 도움 필요할 때가 있다면 언제든 말하고.”이 말을 하고 선희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네가 할머니를 친엄마처럼 생각하잖아, 그렇다면 나도 친엄마처럼 여겨줬으면 해.”원래 자리를 떠나려고 했던 윤아는 선희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다. 그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친엄마처럼 여기라고?얼마나 가슴이 울리는 말인가.만약 더 일찍 들었더라면 좋았다. 그렇다면 더 기뻐했겠지.하지만 지금도 늦은 건 아니었다. 적어도 앞으로의 삶에서 이 말을 영원히 기억할 테니까.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갑자기 성큼성큼 나아가 선희를 힘껏 껴안았다.윤아가 이미 간 줄 알았던 선희는 그녀가 갑자기 달려와 자신을 껴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이 포옹에 깊은 감정이 폭발하듯 나오는 것을 느꼈다.왜인지 모르겠지만 선희는 이런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윤아가 분명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윤아는 선희를 한참 동안 껴안고 있다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녀의 얼굴은 너무 수줍은 나머지 빨갛게 달아올랐다.“고마워요, 어머님. 저 이제
선희의 훈계에 수현은 눈썹을 찌푸렸다.하마터면 사실대로 두 사람이 이혼할 거라고 말하려던 수현은 어릴 때 선희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물어볼 때 이런 말로 숨기고 있던 사실을 털어놓게 했다.그땐 선희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아마 이번에도 그럴지 몰랐다.이렇게 생각한 수현은 검은 눈동자를 빙글빙글 굴렸다. 어머니는 여전히 원래 어머니였어도 그는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었다.“속이려던 게 아니었어요. 저희 작은 갈등이 있던 거 아시잖아요.”수현은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원하려던 말을 들으려 했다.만약 선희가 정말 이혼 사실을 알았다면 이 말을 한 후 분명 노발대발할 것이다.역시 선희는 이 말을 듣자, 의혹이 담긴 말투로 물었다.“작은 갈등뿐이라고? 지금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 됐는데 작은 갈등이니? 아니면 너 윤아를 아예 마음에 두지 않고 있어서 이게 작은 갈등으로 여겨지는 거 아니야?”진수현: “...”“엄마가 널 나무란다고 너무 탓하지 마. 넌 너희들 사이의 갈등을 너무 소홀히 대하는 것 같아. 그러다간 이 작은 갈등이 돌이킬 수 없는 큰 갈등으로 될 수도 있어.”선희의 말을 들은 수현은 반박하는 대신 계속 침묵했다.“어휴, 됐다. 됐어. 정말 요즘 젊은 애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니까.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이 말을 마치고 선희는 전화를 끊었다.윤아가 검사하지 않자, 선희도 할 일이 없어 선월이 있는 병실에 갔다.-윤아는 떠난 후 임진숙와 조보아의 뒤를 밟았다.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그녀는 지금 딱 한 가지만 하고 싶었다. 조보아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것 말이다.그녀가 진실을 알고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윤아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들이 왜 이 큰 병원에 왔는지 잘 몰랐다.전에는 들키기 싫어하지 않았던가?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진숙이 보아의 귓가에서 뭐라고 한 뒤 진료실에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그리고 보아는 밖에서 기다렸다.한참이 지나도 진숙이 나오지 않는 것을 발견한 후, 윤아는 앞으로 걸
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수줍어하던 보아는 순간 표정을 바꿨다. 입술의 혈색도 사라졌고 꽤 창백했다.“뭔, 뭔 얘기요?”보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윤아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연히 인생 얘기지.”조보아: “...”“왜, 싫어?”너무 긴장한 나머지 치마를 잡은 손을 보며 윤아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너무 무섭게 굴었나?”“아, 아니에요. 전 그냥...”“가자.”윤아는 이미 몸을 일으켰다.보아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면서 원래 자리에 앉아 머뭇거리고 있었고 윤아는 이런 보아의 모습을 보자 그녀가 아마 자신이 하려는 말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병원 밖의 거리에 국밥집 하나 있는 거 알아?”이 말에 보아는 잠시 놀라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아요.”윤아는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더니 말했다.“거기에서 반 시간 기다릴게. 만약 반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면 갈 거야. 그사이에 잘 생각해봐.”조보아: “...”윤아는 이 말을 마치고 보아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고 병원을 떠났다.보아는 윤아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꽉 쥐었는데 손톱이 피부에 박혀 들어갔다.갈까, 안 갈까?윤아는 자신을 존중하는 것 같았다. 만약 찾아가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했으니까.“보아야.”이때 진숙이 진료실에서 나와 그녀를 불렀다.보아는 정신을 차리고는 진숙에게 다가가서 물었다.“엄마, 의사 선생님께서 뭐래요?”진숙의 기분은 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별일 없대. 그저 평소에 근심거리가 너무 많지 않냐고 물었어, 그리고 약을 처방해 주면서 별문제 없다고 하더라.”이 말을 듣자, 보아는 고개를 숙였다.“설마 제 일 때문이에요?”“알면 됐다. 엄마가 요즘 네 일 때문에 입맛도 없어서 살이 많이 빠졌어. 만약 이 엄마가 걱정된다면 엄마 말 듣고 남겨두지 말렴...”여기까지 말한 후 진숙은 갑자기 말을 끊었다.“됐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
하지만 진숙은 전혀 믿지 않았다.“너 저번에도 그놈 만나러 가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결국 찾으러 갔잖아. 돌아와서 얼마나 슬퍼했니. 아니야?”이 말을 듣자 보아는 전혀 반박할 수가 없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인내심을 갖고 설명했다.“엄마, 저번에 일은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엄마를 속였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예요. 만약 안 믿으신다면 반 시간 내에 꼭 돌아올게요.”“반 시간?”이 시간을 듣자, 진숙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보아를 보았다. 만약 그 남자를 만나러 간다면 반 시간 안에 돌아오는 일은 불가능했다.설마 진짜 오해했나?“엄마, 이번엔 정말 나가봐야 할 일이 있어요.”보아는 시간을 한눈 보더니 조급한 기색을 띠었다. 늦게 갔다간 윤아가 기다리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아직도 허락하지 않을 기세를 하고 있는 진숙을 보자 보아는 급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엄마가 계속 이러면 저 집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딸이 화내는 것을 보자 진숙은 계속 이런다면 모녀 사이의 감정에 영향을 끼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엄마를 속이는 게 아니라면 당연히 널 믿지. 보아야, 그럼 가봐. 하지만 네 말대로 반 시간 안에 꼭 돌아와야 한단다.”이 말을 하고 진숙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반 시간밖에 되지 않는데 엄마는 여기서 널 기다리마.”보아는 눈을 내리깔고는 침묵했다,어떻게 말해도 엄마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요. 그러면 엄마는 여기에서 절 기다려주세요. 조금 있다 돌아올게요.”이 말을 마치고 보아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자리를 떴다.국밥집.윤아는 이곳에서 거의 반 시간을 기다리는 도중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원래 입맛이 없었지만 여기에서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반 시간 앉아있자니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였다.처음엔 사람이 꽤 많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점점 적어지면서 나중에 윤아만 남아있었다.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보아와 약속한 시간이 삼분 정도
“그래.”보아는 자리에 앉은 후 국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널 만나려고 한 게 이상하지 않아? 그런데도 여기까지 오고 말이야.”이 말을 듣자 보아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윤아를 한눈 보더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조금 이상하긴 했어요. 하지만...윤아 언니가 절 해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윤아는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그렇게 말하니 단도직입적으로 용건 말할게. 너무 늦게 돌아가면 네 어머니도 허락하지 않으실 거 같은데.”어머니란 말에 보아는 쓴웃음을 흘렸다.“네, 지금도 병원에서 절 기다리세요. 제가 반 시간 안에 돌아오겠다고 했거든요.”윤아는 이런 결과가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그럼 짧게 말할게.”“네.”“아마 당황스러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절대 널 놀리려는 생각은 없어. 그날 레스토랑 화장실에서 너랑 네 남자 친구를 봤어.”원래 자신의 배 속 아이에 대해 얘기할 줄 알았던 보아는 윤아가 그날 레스토랑 일을 꺼내니 조금 놀라웠다.“지나가던 길에 실수로 너희 대화를 들어버렸어. 미안해.”보아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아니에요. 말소리가 커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들을 수도 있었어요.”보아가 간신히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을 보자 윤아는 말을 이었다.“네가 떠난 후 레스토랑 입구에서 또 네 남자 친구와 마주쳤어. 옆에 다른 여자도 있더라.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사귀는 사이 같던데.”여기까지 말하자 보아는 갑자기 흥분하며 몸을 일으켰다. 행동이 너무 큰 나머지 뒤에 있던 의자도 뒤로 넘어갔다.윤아는 이런 보아를 보며 깜짝 놀랐고 심지어 국밥집 사장도 이곳으로 시선을 돌렸다.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걸 인식한 보아는 하얀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사과했다.“죄송해요. 죄송해요.”그녀는 한편으로 사과하며 다른 한편으로 넘어진 의자를 도로 일으키고는 자리에 앉았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탁자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얼굴에 남겨진 홍조도 깔끔히 사라졌다.“그, 그럴 리가요!”윤아는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