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수줍어하던 보아는 순간 표정을 바꿨다. 입술의 혈색도 사라졌고 꽤 창백했다.“뭔, 뭔 얘기요?”보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윤아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연히 인생 얘기지.”조보아: “...”“왜, 싫어?”너무 긴장한 나머지 치마를 잡은 손을 보며 윤아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너무 무섭게 굴었나?”“아, 아니에요. 전 그냥...”“가자.”윤아는 이미 몸을 일으켰다.보아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면서 원래 자리에 앉아 머뭇거리고 있었고 윤아는 이런 보아의 모습을 보자 그녀가 아마 자신이 하려는 말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병원 밖의 거리에 국밥집 하나 있는 거 알아?”이 말에 보아는 잠시 놀라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아요.”윤아는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더니 말했다.“거기에서 반 시간 기다릴게. 만약 반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면 갈 거야. 그사이에 잘 생각해봐.”조보아: “...”윤아는 이 말을 마치고 보아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고 병원을 떠났다.보아는 윤아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꽉 쥐었는데 손톱이 피부에 박혀 들어갔다.갈까, 안 갈까?윤아는 자신을 존중하는 것 같았다. 만약 찾아가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했으니까.“보아야.”이때 진숙이 진료실에서 나와 그녀를 불렀다.보아는 정신을 차리고는 진숙에게 다가가서 물었다.“엄마, 의사 선생님께서 뭐래요?”진숙의 기분은 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별일 없대. 그저 평소에 근심거리가 너무 많지 않냐고 물었어, 그리고 약을 처방해 주면서 별문제 없다고 하더라.”이 말을 듣자, 보아는 고개를 숙였다.“설마 제 일 때문이에요?”“알면 됐다. 엄마가 요즘 네 일 때문에 입맛도 없어서 살이 많이 빠졌어. 만약 이 엄마가 걱정된다면 엄마 말 듣고 남겨두지 말렴...”여기까지 말한 후 진숙은 갑자기 말을 끊었다.“됐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
하지만 진숙은 전혀 믿지 않았다.“너 저번에도 그놈 만나러 가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결국 찾으러 갔잖아. 돌아와서 얼마나 슬퍼했니. 아니야?”이 말을 듣자 보아는 전혀 반박할 수가 없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인내심을 갖고 설명했다.“엄마, 저번에 일은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엄마를 속였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예요. 만약 안 믿으신다면 반 시간 내에 꼭 돌아올게요.”“반 시간?”이 시간을 듣자, 진숙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보아를 보았다. 만약 그 남자를 만나러 간다면 반 시간 안에 돌아오는 일은 불가능했다.설마 진짜 오해했나?“엄마, 이번엔 정말 나가봐야 할 일이 있어요.”보아는 시간을 한눈 보더니 조급한 기색을 띠었다. 늦게 갔다간 윤아가 기다리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아직도 허락하지 않을 기세를 하고 있는 진숙을 보자 보아는 급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엄마가 계속 이러면 저 집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딸이 화내는 것을 보자 진숙은 계속 이런다면 모녀 사이의 감정에 영향을 끼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엄마를 속이는 게 아니라면 당연히 널 믿지. 보아야, 그럼 가봐. 하지만 네 말대로 반 시간 안에 꼭 돌아와야 한단다.”이 말을 하고 진숙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반 시간밖에 되지 않는데 엄마는 여기서 널 기다리마.”보아는 눈을 내리깔고는 침묵했다,어떻게 말해도 엄마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요. 그러면 엄마는 여기에서 절 기다려주세요. 조금 있다 돌아올게요.”이 말을 마치고 보아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자리를 떴다.국밥집.윤아는 이곳에서 거의 반 시간을 기다리는 도중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원래 입맛이 없었지만 여기에서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반 시간 앉아있자니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였다.처음엔 사람이 꽤 많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점점 적어지면서 나중에 윤아만 남아있었다.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보아와 약속한 시간이 삼분 정도
“그래.”보아는 자리에 앉은 후 국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널 만나려고 한 게 이상하지 않아? 그런데도 여기까지 오고 말이야.”이 말을 듣자 보아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윤아를 한눈 보더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조금 이상하긴 했어요. 하지만...윤아 언니가 절 해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윤아는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그렇게 말하니 단도직입적으로 용건 말할게. 너무 늦게 돌아가면 네 어머니도 허락하지 않으실 거 같은데.”어머니란 말에 보아는 쓴웃음을 흘렸다.“네, 지금도 병원에서 절 기다리세요. 제가 반 시간 안에 돌아오겠다고 했거든요.”윤아는 이런 결과가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그럼 짧게 말할게.”“네.”“아마 당황스러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절대 널 놀리려는 생각은 없어. 그날 레스토랑 화장실에서 너랑 네 남자 친구를 봤어.”원래 자신의 배 속 아이에 대해 얘기할 줄 알았던 보아는 윤아가 그날 레스토랑 일을 꺼내니 조금 놀라웠다.“지나가던 길에 실수로 너희 대화를 들어버렸어. 미안해.”보아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아니에요. 말소리가 커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들을 수도 있었어요.”보아가 간신히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을 보자 윤아는 말을 이었다.“네가 떠난 후 레스토랑 입구에서 또 네 남자 친구와 마주쳤어. 옆에 다른 여자도 있더라.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사귀는 사이 같던데.”여기까지 말하자 보아는 갑자기 흥분하며 몸을 일으켰다. 행동이 너무 큰 나머지 뒤에 있던 의자도 뒤로 넘어갔다.윤아는 이런 보아를 보며 깜짝 놀랐고 심지어 국밥집 사장도 이곳으로 시선을 돌렸다.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걸 인식한 보아는 하얀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사과했다.“죄송해요. 죄송해요.”그녀는 한편으로 사과하며 다른 한편으로 넘어진 의자를 도로 일으키고는 자리에 앉았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탁자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얼굴에 남겨진 홍조도 깔끔히 사라졌다.“그, 그럴 리가요!”윤아는
일시에 윤아는 그녀의 물음에 말문이 막혀 멍하니 앉아있었다.보아는 훌쩍거렸다. 자신의 남자 친구가 바람피운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았다는 게 참 창피했는지 지금 눈시울이 붉어졌다.“윤아 언니, 전에는 언니를 잘 몰랐고 또 가십거리에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요, 요즘 이상한 소리를 자주 들어요. 언니 남편 곁에도 다른 사람이 있다고요. 언니는 자기 일 제대로 해결할 수 있어요?”이 말을 듣자, 윤아는 보아의 말이 무슨 뜻이 알 것 같았다.“나한테 발생한 것 때문에 너한테 이 일을 알려줄 자격이 없다는 뜻이야? 그래?”보아는 확실히 이렇게 생각했다.윤아가 자신의 감정생활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수현의 곁에 다른 사람이 있는데도 그녀는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보아도 알고 있다. 재벌 집 혼인은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님을.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윤아가 자신에게 뭐라 할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하지만 윤아가 이렇게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니 또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쨌든 자신이 모를까 봐 좋은 마음에 알려준 걸 생각하니 보아는 고개를 흔들었다.“아니,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윤아 언니, 미안해요. 저는 그냥...”그냥 어쨌는지 보아 자신도 설명하지 못했다.보아가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니 윤아는 그녀의 뜻을 알 것 같았다.“됐어. 그만 말해. 널 탓하려는 게 아니니까.”보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언니, 미안해요. 아까 그 말 언닌데 상처 줬죠?”눈앞의 여자아이를 보며 윤아는 곧 이혼할 거라는 사실을 알려줄지 말지 고민했다. 마침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한눈 보니 발신자는 선우였다.이때...“중요한 전화에요? 그러면 먼저 받으세요.”불쌍한 모습의 보아를 보니 윤아는 받고 싶지 않아도 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화 받고 올게.”윤아는 말을 마친 후 핸드폰을 가지고 밖에 나가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보아는 혼자 앉아 사색에 잠겼다.“여보세요?”윤아는 밖에
“괜찮아. 시간은 네가 정해. 내일이든 모레든 다 상관없어.”심윤아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나중에 봐.”그녀는 확실히 진퇴양난의 길에 들어선 것이었다.“그래.”이선우는 흔쾌히 대답했다.통화를 마친 심윤아는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조오아는 이미 생각을 마쳤는지 심윤아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피하는 대신 그녀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더니 말했다.“언니, 언니가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고 싶어요.”이 말을 들은 심윤아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한참 후에 물었다.“놓아주기 힘들어?”조보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언니는 진 대표님을 쉽게 놓아줄 수 있어요? 제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언니라고 생각해요. 저희 둘 처지가 비슷하잖아요.”둘 다 임신한 상태에 남자가 밖에서 바람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이 말을 들은 심윤아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우리 둘 처지가 비슷해 보여?”“아니에요?”“그래,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겠지. 근데 우리 둘 나이가 다르다는 거 생각해 본 적 있어?”조보아는 멈칫하더니 생각이 많아졌는지 입술을 깨물었다.“언니.”그런 그녀를 본 심윤아는 한숨을 내쉬었다.“너는 앞날이 창창하기 때문에 너무 절망할 필요 없어. 오늘은 시간도 늦었는데 여기까지 하고, 얼른 집에 들어가. 엄마 기다리시겠다.”조보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어 일어나 이곳을 떠나려고 했지만 가게 입구까지 걸어갔을 때 무언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뒤돌아 심윤아를 보더니 침묵 끝에 황급히 걸어오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저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심윤아가 말했다.“물어봐.”“아이를 낳을 거예요?”조보아의 진지한 표정을 본 심윤아는 입술을 깨물더니 잠시 후에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응.”심윤아가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던 조보아는 의외라는 생각에 한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가장 묻고 싶었던 문제를 물었다.“그러면... 언니는 진 대표님이랑 이혼할 거에요? 아니면...”비록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이
조보아와 헤어진 심윤아는 곧장 병원으로 가 김선월의 곁을 지켰다.이선희가 모든 일을 해결했는지 묻자 다 해결되었다고 말하려다 아직 안 한 검사가 생각나 덜 마무리되었다고 말했다.그녀의 말을 들은 이선희는 이해심 넓게 빨리 검사해보라고 재촉하지는 않았다.심윤아는 김선월과 함께 있으면서 점점 회복하여 혈색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기뻤지만,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갔을 때 진수현이 회사에서 야간근무를 해야 해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고 말았다.박범수가 전한 이 소식에 이선희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회사 일이 그렇게 바쁘대요? 온종일 회사에 있느라고 얼굴도 보여주지 않더니 저녁에 야간근무까지 해야 한대요?”이선희의 질문에 박범수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화내지 마세요, 사모님. 요즘 회사 일이 정말 바쁜 것 같았어요. 아니면 집에 안 돌아올 리가 없잖아요.”그래도 이선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이 소식을 들은 심윤아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았다.아침에 연락했을 때 회의가 있다면서 연락마저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저녁에도 자신을 피할 거라는 예상을 했었지만, 자신을 피한다고 집까지 안 들어올 줄 몰랐던 것이다.심윤아는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집에는 안 들어와도, 병원에도 안 가? 할머님 아직 병원에서 회복 중이신데 하루 이틀 가보지 않아도 계속 안 가볼 수는 없을 텐데?’심윤아는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어차피 마음이 급해질 사람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쨍그랑!값비싼 화분 하나가 깨끗하게 청소한 바닥에 떨어져 그 조각이 사방에 날렸다.화분을 내던진 주인은 이렇게 해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화분 이외의 값비싼 장식품들도 모조리 바닥에 내던졌다.도우미들은 문밖에서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녀를 말릴 수가 없었다.강소영은 유지혜가 돌아와서야 동작을 멈췄지만, 여전히 기분이 안 좋은지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엄마, 저 지금 말할 기분이 아니니까 나가주세요.”유지혜는 상태가 말이 아닌 방을 둘러보더니 강
“아니요.”강소영은 답답한 와중에 회사에 찾아 가볼 겨를이 없었다.“그러면 아무 증거도 없이 오해하고 있는 거야? 할머님도 수술을 마치시고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수현 씨도 그동안 할머님을 돌보느라 회사업무 처리할 시간이 없었겠고. 지금은 여유가 생겨 회사업무를 처리하는 데 그게 뭐 이상해?”“그런데... 예전에 회사업무를 처리할 땐 이러지 않았단 말이에요.”“그건 예전이고. 지금은... 심윤아 씨랑 몇 년 동안 만났잖아.”유지혜도 자기도 모르게 위기감을 느꼈다.“전에 너 출국하는 거 내가 반대했잖아. 이렇게 괜찮은 남자를 잘 잡아두지 않았다가 다른 사람이 낚아채 가면 어떡해?”“그럴 리가요.”강소영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말했다.“저는 수현 씨 목숨을 살려줬잖아요.”“멍청하긴. 목숨을 살려줬으면 뭐해? 남자는 원래 여자가 손에 쥐고 있어야 해. 수현 씨 같은 사람을 놓치면 다신 더 나은 사람을 찾지 못할 거야.”“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분명...”“목숨을 살려줘서 고맙긴 하겠지. 그런데 그 고마운 마음이 얼마나 가겠어? 만약 너를 잊지 못하게 하고 싶다면 잡아둘 생각을 해야지.”“잡아요?”“그래.”유지혜는 자신의 딸을 위해 방법을 모색해보려고 했다.“지금 수현 씨랑 어디까지 갔어?”강소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지혜는 그녀가 부끄러워 말하지 않는 줄 알고 말했다.“엄마랑 부끄러워할 거 뭐 있어. 어디까지 간 거야?”강소영은 표정이 어두워졌다.이 생각만 하면 패배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엄마, 그만 해요. 아직은 포옹밖에 해보지 못했어요.”이 말을 들은 유지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포, 포옹? 아직 뽀뽀도 못 해봤어?”강소영은 더는 말하고 싶지 않은지 절망적인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아니, 소영아...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내면서, 너도 수현 씨 자주 보러 갔잖아. 왜 뽀뽀도 못 해봤어? 수현 씨 정상적인 남자긴 해?”강소영은 이 말에 더욱 화가 났다.심윤아를 임신시켰기
“소영아, 이래서야 되겠어?”유지혜는 진수현과 심윤아가 이혼하고 자신의 딸은 진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착각할 정도로 강소영과 진수현 사이의 관계가 확고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스킨십도 없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만약 수현 씨가 소영이를 좋아했다면 몇 년 동안 알고 지내면서 어떻게 한 번도 터치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엄마, 저도 안 된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제가 먼저 다가갈 순 없잖아요. 수현 씨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이 말은 들은 유지혜는 바로 방법을 생각해냈다.“누가 먼저 다가가래? 수현 씨가 먼저 다가오게 유혹할 순 있잖아. 소영아,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정말 너한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대?”‘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냐고?’강소영은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았지만 흔들린 마음보다 오로지 자신을 향한 존경심과 고마움뿐이었다고 생각했다.강소영은 생각할수록 위험하다고 느껴졌다.“소영아, 이대로는 안 되겠어. 뭐든지 해봐야겠어.”유지혜가 옆에서 부추겼다.강소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유지혜의 관점에 대해 동의하고 있었다.그녀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계속 고상한 척했더니 결국엔 심윤아에게 기회를 내주어 진수현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던 것이다.‘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어. 무조건... 수현 씨 아이를 가져야 해!’“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수현 씨는 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 뺏기지 않을 거예요.”-진수현은 한밤중에 집에 들어왔다.대략 새벽 한두 시에 돌아왔을 때 가족들은 이미 자고 있었다.조심스레 방으로 들어갔다가 깊이 잠든 심윤아의 모습을 보더니 눈빛이 어두워졌다.‘온종일 피했더니 내일에는 회사로 찾아올지 모르겠네. 정말 이혼을 원한다면 내일 회사에서 만나겠지.’진수현은 오랫동안 침대 옆에서 깊이 잠든 심윤아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허리 숙여 그녀의 이마에 뽀뽀했다.계속 보다 보니 결국 참지 못하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