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그러면 내가 비행기표 사줄게요, 여보.”“어머, 고마워요. 우리 여보.”둘은 알콩달콩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앞으로 걸어갔다.그에 비하면 뒤에서 따라가는 수현과 윤아는 아주 서먹했다. 둘 사이에 찬 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각자 갈 길을 갔다.윤아는 서로 다정하게 붙어가는 수현의 부모님을 보면서 수현과 이렇게 서먹하게 선월을 보러 가면 그다지 좋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그녀는 아예 발걸음을 멈추고는 수현에게 말했다.“차에서 기다릴게.”이 말을 듣자, 수현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윤아를 보았다. 아까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떠올라 그녀에게 하려고 했을 때 윤아는 이미 몸을 돌려 가버렸다.수현의 안색은 순간 변했다. 그는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윤아의 뒤를 쫓아갔다.이미 비행기표를 산 선희가 태범과 함께 머리를 돌려 아들과 며느리에게 말하려고 했으나 눈에 들어온 건 수현이 윤아를 쫓아가는 뒷모습뿐이었다.“어휴, 저 둘도 참...”선희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손을 휘저으며 남편에게 말했다.“됐어요. 우린 신경 쓰지 말아요. 우선 어머님께 가는 건 어때요?”“좋죠, 다 우리 여보 말을 따를게요.”태범도 실은 아들이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클 만큼 다 컸으니, 자신의 감정도 처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래서 이 부부는 빠른 걸음으로 선월을 데리러 갔다.-윤아는 수현에게 그렇게 말한 후 아예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조금이라도 걸음을 늦추었다간 수현이 뒤따라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까 봐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병원 출구에서 나와 그녀는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고 머리에는 온통 선월의 수술에 관한 생각뿐이었다.‘요며칠 수술을 진행한다면 할머님께선 계속 집에서 지내야 하나, 아니면 요양원에 계셔야 하나...’‘아니야... 할머님께선 요양원을 싫어하시잖아. 그러니까 요양원은 안될 거야. 집에 계시면서 확실한 수술 날짜가 잡힐 때까지 기다리는
수현은 사실 자신이 뭘 말하고 싶은지 잘 몰랐다.그저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제는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내 내보낼 구멍을 찾지 못한 그런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정서가 생기게 만든 사람이 바로 심윤아란 것을.이런 답답함과 분노는 수현을 불안하게 만들기까지 했다.그는 아직도 윤아의 손목을 붙잡고 있으면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마치 이렇게 쉽게 끝내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윤아는 이런 수현을 보자 다시 말을 꺼냈다.“지금 어떤 생각을 하든 할머님 수술이 끝난 후에 얘기해도 되지 않아? 별반 다를 게 없을 텐데.”수현이 그녀에게 정말 할 말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와 소영에 관한 얘기일 것이다.저번에 소영이 넘어진 일은 아직 후속이 없는 듯했다.윤아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은 것은 아마 선월의 체면을 보아서였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영이 넘어진 일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었다.비록 그날 소영이 부주의로 넘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으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대신해 해명도 하지 않았고 진실을 밝히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만약 소영이 정말 자신에게 뭔 짓이라도 하려면 그건 아마 선월이 수술한 후일 것이다.하지만 그땐 윤아는 이미 수현과 이혼을 했을 것이니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지금 윤아는 소영의 일로 수현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그저 중심을 선월에게 두고 싶었다.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다시 몸부림 쳐보았으나 뜻밖에도 수현은 아직도 그녀의 손목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심윤아: “...”이렇게 말했는데 아직도 안되는 걸까...이때 수현의 얇은 입술이 드디어 움직였다.“할머니께서 수술 받으신 후, 우리 둘 제대로 얘기할 수 있어?”이 말을 듣자 윤아는 즉시 대답했다.“당연하지.”가능하다면 좋게 만나서 좋게 끝내고 싶었다.너무 빨리 대답하는 그녀의 말을 듣자 수현
수현은 선월의 일을 다 처리한 후, 소영에게 선월의 수술 준비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문자를 보냈다.소영은 원래 수현이 자신을 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준태가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했지만, 수현이 곁에 없었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었다.그래서 수현의 문자를 받았을 때 정말 하늘을 날 것같이 기뻤다.만약 선월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한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었다.소영은 조심스럽게 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이번엔 아주 빨리 받았다.“수현 씨.”그의 목소리엔 피곤함이 묻어있었다.“응. 며칠 동안은 병원에서 치료 잘 받아. 시간 날 때 보러 갈게.”“수현 씨가 바쁜 거 잘 알고 있어. 시간 없으면 오지 않아도 돼.”소영은 물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와 말투로 말했다.“어르신에 비하면 내 이마에 난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우선 어르신 일을 다 처리하고 나서 얘기하자.”소영이 병문안 가지 않은 자신 때문에 기분이 상할 거라 생각했던 수현은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그럴게.”“아, 맞다. 수현 씨, 어르신께서 조만간 수술하시는 거야?”수현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이번 주 내에 수술받으실 거야.”이번 주 내...이 시간을 듣자, 소영의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훌쩍 올라갔다.“알겠어. 그러면 어르신께서 무사히 수술 잘 받으시길 기원할게.”“고마워.”전화를 끊은 후, 소영의 얼굴에 남아있던 미소는 순간 사라졌다. 그녀는 핸드폰을 꼭 쥐면서 이번만은 제발 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만약 선월이 이번 주 내에 수술받는다면 준태가 이때 윤아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다간 분명 자신에게 불똥이 튕길 것이 뻔했다.그렇게 두고 볼 수는 없었다.어떻게든 선월이 수술받게 만들어야 했다.하루라도 수술받지 않는다면 수현과 윤아는 하루 더 이혼하지 않을 테니까.윤아에게 손을 쓰려면 조금 더 기다리는 게 좋을 듯싶었다.하지만 최준태 그 양아치는 오래 기다리지 못할 것이다. 오늘 그 독기 가
“저번에 수술을 미루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린 줄 알아? 예정대로 진행됐다면 수현 씨랑 심윤아는 이미 이혼했을 거야. 그리고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겠지.”여기까지 말한 후, 소영은 주연의 손을 꼭 잡으며 부탁했다.“주연아, 나는 네가 늘 나를 생각해 주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어르신께서 순조롭게 수술을 받으시는 일이야.”“그래야만 나랑 수현 씨가 잘 될 수 있어. 계속 끌면서 이혼하지 않는 게 지금으로선 가장 위험한 일이거든.”“난 내가 준태를 설득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넌 늘 말주변이 좋잖아, 그러니까 네가 나 대신 준태 좀 말려주면 안 될까? 충동적인 일 저지르지 말라고 말이야. 이제 진씨 집안 사모님 되면 절대 너에 대한 고마움 잊지 않을게. 응?”마지막 한마디까지 들었을 때, 주연은 마치 거대한 승낙을 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소영아, 걱정하지 마. 내 힘을 다해 널 도울게.”주연의 대답에 소영은 순간 감격의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주연아, 진짜 고마워. 넌 역시 내 절친이야.”병원을 떠난 후, 주연은 준태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불러냈다.다른 여자들은 평소에 늘 그를 깔봤고 무시하기 일쑤였으므로 준태는 그들에게 따로 호감이 없었다. 만약 그들이 소영과 아는 사이만 아니었어도 그는 정말 사정없이 팼을 것이다.하지만 때리지 않는다고 하여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좋을 리가 없었다.“무슨 일인데.”소영이 없을 때 준태는 양아치 행세를 숨기지 않았다.이런 모습을 본 주연은 화가 치밀어 올라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소영이 자신에게 했던 부탁이 떠올라 어쩔 수 없이 꾹꾹 삼켰다.“소영이 대신 찾아온 거야.”“소영이? 날 왜 찾는 거야?”소영의 이름을 듣자마자 준태의 표정은 순간 변했고 처음에 심드렁한 말투도 제법 진지해졌다.“소영이가 이 말 전해주라고 했어. 충동적으로 심윤아한테 나쁜 짓 하지 말라고.”이 말을 듣자, 준태는 피식 웃고는 잠시 후 말했
준태는 눈앞의 여자에 대해 인상이 있었다. 전에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오관이 정교하고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여겼지만, 뜻밖에도 이렇게 사람을 해치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했었다.역시 그가 좋아하는 소영만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정직하고 마음씨 고운 사람이지 다른 여자들은 모두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됐어. 여기까지 말할게. 이제 때가 되면 연락할 테니까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둬.”주연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그녀가 떠난 후, 준태는 땅바닥에 침을 뱉었고 눈동자엔 독기가 스쳐 지나갔다.“나쁜 계집년, 소영이만 내 것으로 만든 후 너희들 하나도 가만 안 둬. 두고 봐.”-병원에서 수현과 했던 그 말 때문이었을까, 집에 돌아온 후 윤아와 수현은 모처럼 평온한 나날들을 보냈다.생각해 보면 소영이 귀국한 후 처음이었다.선월의 수술이 코앞으로 닥쳐오자, 수현은 다른 일정은 잡지 않고 이동 노선을 회사 아니면 집으로 고정했다. 이건 윤아도 마찬가지였다.그날 검진을 받은 후 진 선생은 통지를 기다리라 했다.태범은 출국하여 해외지사 업무를 처리하러 갔고 선희는 본가에 남아 매일 선월과 함께 나가 사진을 찍었다.수현의 어머니 선희는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선월은 그녀와 함께 있으면 잇달아 활기로 가득했고 매일 며느리와의 데이트를 즐겼다.그러니 선월 쪽의 일도 윤아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아침에 처리해야 할 일을 끝낸 후, 윤아는 아래층에 내려가 디저트 가게를 둘러봤다. 케이크로 자신을 위로해 줄 생각이었다.이어폰을 귀에 꽂고 케이크 진열장 앞에 서서 오늘 살 케이크를 고르면서 현아의 꾸지람을 들었다.“아침에 일 다 끝냈어? 점심은 먹었어?”“먹으려고.”“뭐? 지금이 몇 신데 인제야 점심을 먹으려는 거야. 심윤아 너 지금 엄마라는 의식이 있기는 해? 어우, 내가 못 살아. 네가 배고프지 않아도 우리 아기는 고플 거잖아.”“알아. 그래서 미리 내려와서 점심 고르고 있던 참이었어.”현아의 말
펑!윤아의 여린 몸은 유리문에 부딪히며 큰 소리를 냈다.이 장면을 목격한 직원은 기겁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어머, 아가씨, 괜찮으세요?”핸드폰 저편에 있는 현아도 이 소리를 듣고는 놀라서 물었다.“왜 그래? 어? 윤아냐, 무슨 일 있는 거야? 너 괜찮아?”부딪힌 어깨에서 전해오는 찌릿찌릿한 아픔에 윤아가 눈살을 찌푸리자, 직원도 얼른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어깨가 아픔에도 불구하고 윤아의 첫 반응은 오히려 자신의 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손을 들어 배에 살폿이 올려 어루만진 후, 그저 어깨만 아플 뿐 다른 문제는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잠시 후, 윤아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친 사람을 바라보았다.누군지는 몰라도 들어올 때 조금 조심하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었다.게다가 자신을 친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과 한마디 없다는 점이 꽤 거슬렸다.이러한 불만을 가지고 고개를 들고 보니 뜻밖으로 익숙한 얼굴이 눈에 안겨 왔다.한 삼 사초 정도 지났나.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최준태?”“뭐, 뭐?”현아는 윤아의 목소리를 듣고는 핸드폰 저편에서 의혹스럽다는 듯 물었다.“누구지? 스읍,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아, 맞다. 윤아야, 너 아까 무슨 일 있었어? 괜찮아?”윤아의 선홍빛 입술이 움직이면서 최준태라는 이름이 나올 때 최준태 본인도 잠시 놀랐다.이렇게 고결한 부자집 아가씨께서 몇 년이나 지난 지금 첫눈에 자신을 알아볼 줄 몰랐다. 게다가 그의 이름까지 아주 정확하게 불러내니 말이다.어찌 되었든 윤아가 속해 있는 재벌 사교계에서 준태 같은 양아치는 그저 하찮은 먼지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나 여기 일이 좀 있어서 그러는 데 조금 있다가 다시 연락할게.”이렇게 말한 후 윤아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현아도 그녀의 뜻을 알아듣고는 아무 말라도 하지 않으며 조용히 있었는데 윤아 쪽의 상황 발전을 들을 생각인 듯했다.“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이렇게 생각한 준태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넌 날 어떻게 알아봤냐?”여기까지 말한 후, 그의 얼굴엔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너 같은 재벌 집 아가씨들은 나처럼 사고만 치고 다니는 문제 학생을 제일 혐오하지 않았어? 학교에서 문제 학생이면 사회에 나와서도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게 뻔하니까.”준태의 말을 들은 윤아는 잠시 멈칫했고 대답하지 않았다.“내 말이 맞았지? 너도 그 사람들처럼 날 깔보는 거잖아.”윤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넌 어떤 게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이 물음은 준태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누구나 다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와 출세할 기회가 있는 법이야. 우린 다 같은 인간일 뿐이니 널 경멸할 것이 못 돼.”예전의 윤아였다면 아마 그에게 이렇게 많이 설명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심씨 집안이 부도난 후부터 윤아는 오히려 예전에 몰랐던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말을 마친 후, 윤아는 뭔가 떠올랐다.“난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그녀는 더 이상 준태가 자신을 친 일을 따지지 않고 빨리 자리를 떴다.준태는 혼자 그 자리에 서서 윤아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던 담배의 불을 끄고는 떠났다.-“아까 누구야? 널 치고 사과하지도 않았잖아.”“최준태.”“최준태?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현아는 그쪽에서 이 사람이 누군지 생각하는 듯했다.손에 들고 있는 케이크를 보며 입꼬리를 올린 윤아.“기억 안 나? 예전에 우리랑 같은 학교였잖아.”같은 학교라는 말에 현아는 그제야 뭔가 번쩍 떠오른 듯 소리쳤다.“아! 나 생각났어! 누군지 알 것 같아.”“응?”“강소영 좋아하던 애 중의 하나였잖아.”“그래, 맞아.”“아까 널 쳤다며?”윤아는 머리를 끄덕이고는 마침 답하려 할 때 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머머, 최준태 설마 강소영 다친 소식 듣고 너한테 복수하러 온 거 아냐?”여기
사무실에 돌아온 후 윤아는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를 책상에 올려놓았다회사에서 나가기 전에 그녀의 기분은 굉장히 좋았고 입맛도 돌았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머릿속에는 죄다 아까 케이크를 사다가 최준태를 만난 것 뿐이었다.현아의 말이 그녀를 일깨웠다.악의로 다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최준태를 만난 건 그냥 우연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회사 아래층에 있는 그 디저트 가게는 늘 장사가 잘되는 곳으로 유명했으니 다른 곳에 있던 사람들도 특별히 찾아와 케이크를 사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하지만...세상에 과연 그렇게 많은 우연이 있을까?하필 소영이 다쳤을 때 몇 년간 만나지 못했던 동창을 마주쳤고 그 동창이 또 마침 소영을 좋아했던 사람이었다.여기까지 생각한 윤아는 케이크의 포장을 뜯었다. 순간, 달콤하고 단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직원이 준비해 둔 포크를 집어 들고 작은 조각으로 잘라 입에 넣으면서 마음 먹었다.우연이 맞든 아니든 앞으로 조심해야겠다고 말이다.만약 준태가 정말 소영을 대신해 그녀에게 복수라도 하려고 한다면 마침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만약 아니라면...그저 비열한 생각 한 번만 했다고 치면 그만이었다.비록 소영이 그녀가 아이를 낳을 것을 막지 않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인간의 생각은 언제든 바뀔 수도 있었다.만약 앞으로 오늘처럼 부딪히는 일이 자주 생기기라도 하면...두려웠다. 어쨌든 아이를 위해서라도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퇴근 전.윤아는 수현을 만나러 가는 길에 마침 그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성민과 마주쳤다.그녀를 보자마자 성민은 마치 가족이라도 만난 것처럼 달갑게 인사했다.“심 비서님, 대표님 만나러 오신 겁니까?”윤아는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네. 왜요? 대표님 바쁜가요?”“아, 아닙니다.”성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대표님도 지금 퇴근 준비 중이십니다. 저는 심 비서님이 다시는 대표님 만나러 오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