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생각한 준태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넌 날 어떻게 알아봤냐?”여기까지 말한 후, 그의 얼굴엔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너 같은 재벌 집 아가씨들은 나처럼 사고만 치고 다니는 문제 학생을 제일 혐오하지 않았어? 학교에서 문제 학생이면 사회에 나와서도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게 뻔하니까.”준태의 말을 들은 윤아는 잠시 멈칫했고 대답하지 않았다.“내 말이 맞았지? 너도 그 사람들처럼 날 깔보는 거잖아.”윤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넌 어떤 게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이 물음은 준태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누구나 다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와 출세할 기회가 있는 법이야. 우린 다 같은 인간일 뿐이니 널 경멸할 것이 못 돼.”예전의 윤아였다면 아마 그에게 이렇게 많이 설명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심씨 집안이 부도난 후부터 윤아는 오히려 예전에 몰랐던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말을 마친 후, 윤아는 뭔가 떠올랐다.“난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그녀는 더 이상 준태가 자신을 친 일을 따지지 않고 빨리 자리를 떴다.준태는 혼자 그 자리에 서서 윤아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던 담배의 불을 끄고는 떠났다.-“아까 누구야? 널 치고 사과하지도 않았잖아.”“최준태.”“최준태?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현아는 그쪽에서 이 사람이 누군지 생각하는 듯했다.손에 들고 있는 케이크를 보며 입꼬리를 올린 윤아.“기억 안 나? 예전에 우리랑 같은 학교였잖아.”같은 학교라는 말에 현아는 그제야 뭔가 번쩍 떠오른 듯 소리쳤다.“아! 나 생각났어! 누군지 알 것 같아.”“응?”“강소영 좋아하던 애 중의 하나였잖아.”“그래, 맞아.”“아까 널 쳤다며?”윤아는 머리를 끄덕이고는 마침 답하려 할 때 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머머, 최준태 설마 강소영 다친 소식 듣고 너한테 복수하러 온 거 아냐?”여기
사무실에 돌아온 후 윤아는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를 책상에 올려놓았다회사에서 나가기 전에 그녀의 기분은 굉장히 좋았고 입맛도 돌았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머릿속에는 죄다 아까 케이크를 사다가 최준태를 만난 것 뿐이었다.현아의 말이 그녀를 일깨웠다.악의로 다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최준태를 만난 건 그냥 우연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회사 아래층에 있는 그 디저트 가게는 늘 장사가 잘되는 곳으로 유명했으니 다른 곳에 있던 사람들도 특별히 찾아와 케이크를 사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하지만...세상에 과연 그렇게 많은 우연이 있을까?하필 소영이 다쳤을 때 몇 년간 만나지 못했던 동창을 마주쳤고 그 동창이 또 마침 소영을 좋아했던 사람이었다.여기까지 생각한 윤아는 케이크의 포장을 뜯었다. 순간, 달콤하고 단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직원이 준비해 둔 포크를 집어 들고 작은 조각으로 잘라 입에 넣으면서 마음 먹었다.우연이 맞든 아니든 앞으로 조심해야겠다고 말이다.만약 준태가 정말 소영을 대신해 그녀에게 복수라도 하려고 한다면 마침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만약 아니라면...그저 비열한 생각 한 번만 했다고 치면 그만이었다.비록 소영이 그녀가 아이를 낳을 것을 막지 않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인간의 생각은 언제든 바뀔 수도 있었다.만약 앞으로 오늘처럼 부딪히는 일이 자주 생기기라도 하면...두려웠다. 어쨌든 아이를 위해서라도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퇴근 전.윤아는 수현을 만나러 가는 길에 마침 그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성민과 마주쳤다.그녀를 보자마자 성민은 마치 가족이라도 만난 것처럼 달갑게 인사했다.“심 비서님, 대표님 만나러 오신 겁니까?”윤아는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네. 왜요? 대표님 바쁜가요?”“아, 아닙니다.”성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대표님도 지금 퇴근 준비 중이십니다. 저는 심 비서님이 다시는 대표님 만나러 오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수현은 윤아가 자신을 찾아오리라곤 예상치 못했는지 차가운 얼굴에 별다른 정서가 묻어 있었다.“날 만나러 온 거야?”이 말을 듣자, 윤아는 허공에 멈춰선 손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나 몸이 좀 안 좋아서 직접 운전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저녁에...”윤아는 뭐가 떠오른 듯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바꿨다.“며칠 동안은 수현 씨 차 타도 될까?”“어디가 안 좋은데?”수현은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병세를 물었고 심지어 예리한 시선으로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었다.윤아는 살짝 경직되었다.“어... 그게 포인트가 아닌데.”이 말이 끝나자마자 수현은 몸을 낮추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이게 포인트가 아니면 뭐가 포인트야? 너 도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전부터 이상했다. 뭔가 그에게 숨기는 게 있는 것처럼.그 진단서도 어딘가 수상했다.그때는 윤아가 아프기라도 해서 진단서를 찢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뒤에 한 말은 또 빈틈 없어 보였다.주머니에 넣은 진단서가 거센 비에 흠뻑 젖어 너덜너덜해지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그 후, 그녀가 화제를 돌리는 바람에 이 일은 이렇게 지나가 버렸다.“아픈데 없어.”이렇게 말한 후 윤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진수현,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넌 왜 믿지 않는 거야? 내가 진짜 아프길 바라는 사람처럼.”이 말에 이젠 수현이 인상을 구겼다.“헛소리하지 마. 내가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잖아.”“아니라면 자꾸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지 마. 몸이 안 좋다고 한 건 요즘 따라 운전하기 귀찮아져서 그래. 됐지?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야겠어?”윤아의 말투는 뒤로 가면 갈 수록 인내심이 바닥난 티가 팍팍 났고 심지어 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지만 수현은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은 눈동자로 윤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화 풀렸어?”심윤아: “뭐?”수현은 입술을 꾹 다물더니 평온하게 말했다.“아무 것도 아니야.”하지만 그의 눈동자엔 웃음이 담겨있었다.귀찮다는 것도
수현이 전화를 받자, 소영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들려왔다.“수현 씨, 퇴근했어? 지금이면 시간 있겠다 싶어서 전화했어.”“응.”수현은 저만치에 서 있는 윤아를 한눈 보고는 답했다.“금방 퇴근했어.”“아, 그런 다행이다. 수현 씨 일 방해할까 봐 걱정했거든. 할머님께서는 어떠셔? 실은 요 며칠 동안 많이 걱정했어. 병원에서도 편히 쉬지 못했고. 휴, 할머님께서 날 좀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할머님 계시는 병원에서 지켜드릴 수도 있고 말이야.”한마디 한마디마다 할머님을 떠나지 않는 소영의 말에 수현은 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낮아졌다.“다친 곳도 아직 다 낫지 않았는데 넌 병원에서 쉬는 게 좋을 거야. 다른 건 우선 생각하지 마.”“알겠어, 수현 씨. 난 그냥 할머님이 너무 걱정돼서 그랬어. 아니면 할머님께서 수술실 들어가신 다음 나 데리러 오는 건 어때? 그러면 할머님도 나 보지 못할 테니까 화내시는 일도 없을 거야.”수술 당일에?수현은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는 잠시 고민하다 안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은 그날이 되어야 알 수 있었다.“수술 당일에 알려줄게.”소영은 애초에 수현이 허락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생각을 수현에게 알렸을 때 그가 단칼에 거절하지 않았으니,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알겠어.”그녀는 부드럽게 대답하고는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현 씨, 지금 병원 올 시간 있어? 일부러 수현 씨 방해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조금 보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상처가... 너무 아파. 오늘 의사 선생님께서 오셨어. 회복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대.”소영의 상처를 떠올리자, 수현은 눈썹을 찌푸렸다.지금 시간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전에 병문안 가겠다고 말한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수현연 옆에 서 있는 윤아를 한눈 보고는 말했다.“다음에 갈게. 오늘 먼저 쉬어.”연속 두 번이나 거절당하자, 소영의 안색은 순간 굳어졌다.그녀는 섭섭함이
이러는 윤아를 보니 수현은 마치 자신의 뒤에 작은 꼬리가 붙었던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전혀 귀찮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심지어 윤아가 원한다면 평생 이렇게 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슴 속 깊이 숨겨진 이런 생각에 수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진심을 다시 직시하였다.하지만 매번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머리속엔 다른 여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여리고 가냘프지만, 필사적으로 자신을 구한, 사사건건 그를 일 순위에 두는 여자.수현은 그녀와 약속했었다. 자신의 옆자리는 평생 그녀의 것이라고 말이다.머릿속에서 두 가지 목소리가 다투고 있는 것을 의식한 수현은 하느님이 그에게 큰 장난을 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렇지 않은 이상, 사람의 마음속에 어떻게 두 명이나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이렇게 생각한 수현은 펜을 책상에 툭 던지고는 더 이상 업무를 처리할 마음이 없었다.-나흘째 되던 날, 진 선생이 선월더러 입원하여 수술을 기다리라고 통지했다.지금 진씨 집안 사람들에겐 수중에 어느 정도로 중요한 업무가 있든 모두 내려놓고 선월이 수술하는 일에만 매진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태범도 해외 업무를 처리하고 귀국하여 선월을 돌봤다.입원 절차를 밟은 후, 선월은 휠체어에 앉아 VIP 병동으로 옮겨졌다.병실은 잘 갖추어졌고 온수, TV 그리고 난방 설비 등이 완비되어 있으며 아주 깨끗하게 청소되었다. 그래서인지 공기 속에서 소독수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아직 냄새가 나네.”병실에 들어가자마자 선희가 내린 평가였다.이 말을 하고 머리를 돌렸을 때 윤아가 이미 창문을 열고 환기한 것을 발견했다.비록 아주 작고 보잘것 없는 행동이었지만 선희는 윤아에게 장하다고 칭찬해 주고 싶었다.뛰어난 며느리의 행동력이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예쁘고 능력 있는 윤아를 아내로 둔 아들이 정말 운 좋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운 좋은 남자분께선 지금 병실 밖에서 전화를 받고 계셨다. 선희는 이런 아들을 보며 참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어머
“조만간에 수술받으신다고? 진짜?”핸드폰을 손에 들고 말하는 소영의 말투엔 기쁘고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드디어 수술하는구나.이번엔 그 어르신 다른 문제라도 생기지 않겠지?“다행이다. 수술 꼭 잘될 거야.”“고마워.”기쁜 와중에 소영이 또 물었다.“수현 씨, 우리 전에 얘기했던거 말인데... 할머님 수술하실 때 내가 가봐도 돼? 걱정하지 마,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다가 갈 테니까. 그리고 수현 씨가 데리러 오거나 배웅도 안 해도 돼. 그냥 한눈만 보고 돌아올게. 응?”이번에 수현은 침묵했다.한참이 지난 후, 그는 조용히 말했다.“소영아, 난 그 어떤 차질도 없기를 바라고 있어.”이 말에 소영은 멈칫했다.“어떤 차질?”“할머니께서 수술 마치신 다음에 안정을 취하셔야 해.”여기까지 듣자, 소영은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그녀는 달갑지 않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수현 씨, 난 내 신분을 알릴 생각이 없는걸. 그냥 친구 할머니께서 수술하신다기에 걱정돼서 병문안 간 거라고 하면 안 돼? 이것도 안 돼면 그냥 친구 사이의 정을 봐서 갔다고 하면 어때? 혹시 할머님께서 날 보면 기뻐하실 수도 있잖아.”“소영아, 이건 작은 수술이 아니야.”소영은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한참이 지나서야 감정을 정리했다.“미안해, 수현 씨. 수현 씨 말이 맞아. 내가 아까 잘못 생각했나 봐. 미안해. 난 그냥 할머님 뵈러 가려는 마음만 앞서서 그랬어. 너무 걱정됐거든. 그래서 생각이 짧았어.”소영의 말에 수현은 결국 한마디만 했다.“병원에서 몸조리 잘해.”소영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은 뒤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밖에 있던 주연을 불렀다.“좋은 소식 알려줄게.”아까 수현과 통화해야 했기 때문에 주연더러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주연은 이 점이 꽤 거슬렸다.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전화 하나 받을 때 옆에서 듣게 못 하니 불만이 가득했다.하지만 소영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참을 인' 자를 꾹꾹 씹어 삼키며 밖에 나가 기다렸다. “무슨 좋은 소식인데?”
“그건 며칠 전의 얘기잖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최준태: “... 별로 안 지났는데, 차이가 큰 가?”“어쨌든 할 거야 안 할 거야? 한다면 내일 내가 문자 보낼게.”주연의 물음에 준태는 침묵했다.한참 동안 기다려도 응답이 없자 주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최준태, 너 설마 후회하는 거야? 소영을 대신해서 복수해 주겠다는 거 설마 말뿐이었어? 그럼 그렇지. 너 같은 남자들이 하는 말은 정말 믿을 게 없어요. 그냥 큰소리만 치고 행동에 옮기지 않잖아. 최준태 너 이 정도 능력밖에 안 될 줄 몰랐어.”주연에 한 말이 그를 자극했는지 준태는 불쾌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아시, 누가 후회해? 내가 후회한다고 말했냐? 어? 황주연, 넌 내가 여자 안 때릴 줄 아냐?”갑자기 폭발한 그의 분노에 주연은 깜짝 놀라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나, 나는 네가 소영이를 돕지 않겠다는 줄 알고...”“내가 소영이를 돕는 거지 널 돕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나랑 말할 때 예의 갖출 건 갖춰. 기분 더러우면 너까지 가만 놔두지 않을 거니까. 알아들었냐?”전화를 끊은 후, 주연의 마음속엔 양아치라는 단어만 남았다.최준태는 정말 양아치였다. 주연은 소영이 이런 인간을 건드리다간 결국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런 일을 하기엔 가장 적합했다.이렇게 불같은 성격이라면 어떤 일을 저지른 후 그에게 떠넘겼을 때 사람들은 그가 이 일을 했다고 여길 테니까.성격, 배경.그는 단지 거기에 서 있기만 해도 좋은 사람이 아닐 거라는 느낌을 주었다.이튿날.윤아는 밤새 잠을 못 잤다고 할 수 있었다. 결국 일찍 깨나 아래층에서 수현을 기다렸다. 차를 얻어 타야 했기 때문에.아침을 먹을 때 수현은 윤아의 안색이 어제보다 더 수척해졌음을 발견했다.그럴 뿐만 아니라 입맛도 없는 듯했다. 숟가락을 들어 입가에 갖다 대며 입을 벌려 먹으려는 찰나 또 뭔가 떠오른 듯 다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자 수현은 더는 참지
심윤아는 차량이 진씨 가문 구역을 벗어나서야 소름이 끼칠 정도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불쾌한 감정이 남아있었다.차량과 함께 떠나면서도 참지 못하고 고개 돌려 아까 그 밀림 쪽을 쳐다보았다.그쪽에 정말 사람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요즘 예민해서인지 그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최근에 진수현의 차로 출퇴근하면서 어딜 가든 늘 함께했었고, 평소에 이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까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왜 그래?”진수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심윤아는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아무것도 아니야.”심윤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할머님 수술 때문에 불안해서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 걸까?’심윤아가 집에서 나올 때와 다르게 안색이 어둡다는 것을 눈치챈 진수현은 백미러로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계속 바라보는 방향으로 몇 번이고 힐끔거렸지만 특별한 점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녀가 할머니 걱정에 이러는 줄만 알았다.그러면서 전에 있었던 일이 심윤아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진수현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점차 운행속도를 줄였다.차량이 멀어지고, 밀림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게 되었다.최준태는 손에 쥐고 있던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힘껏 짓밟더니 핸드폰을 꺼내 황주연에게 전화했다.“진수현을 저 사람한테서 떼어낼 수 있게 어떻게 좀 해봐.”황주연은 이 시각 강소연과 함께 있었고, 오후에 진수현 할머니가 수술실로 들어간 후 정지우에게 움직여도 좋다고 문자 보내려던 참이었다.하지만 자신이 연락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연락해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물었다.“무슨 일인데?”“옆에 있는 저 남자를 떼어내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움직여?”최준태의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날 부딪히는 바람에 심윤아가 자신의 계획을 알아차려서 낮에 집 밖을 나서지도 않고 될수록 혼자 있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그는 요 며칠 심윤아에게 손 좀 봐주려던 의도는 없었다. 그저 평소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