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진수현의 말에 깜짝 놀란 강소영은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불찰인 걸 알면 다음부터 조심하라니? 이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그러니까 넘어진 게 다 내 탓이고 심윤아랑은 아무 관계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심윤아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도 없는 거네?’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진수현이 왜 잠깐 나갔다가 온 후로 생각이 바뀌었냐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심윤아가 옆에서 이간질한 게 틀림없다.강소영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더니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진수현의 품에 안겨 작은 소리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미안해. 방금 했던 말은 꼭 기억할게. 의사 선생님이 흉터가 남을 수도 있다고 하니까 마음이 많이 혼란스럽고 기분이 우울해. 아까 어디 갔었어? 수현 씨, 설마 이마에 흉터가 생겼다고 날 버리는 거야? 못생겨서?”갑작스럽게 품에 안긴 강소영 때문에 기분 잡친 진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밀어내려고 했다.그러나 강소영은 있는 힘껏 그를 껴안더니 작은 소리로 울먹이며 물었다.“어릴 때 내가 왜 목숨까지 걸고 수현 씨 구한 줄 알아?”어린 시절의 일은 진수현의 약점이었기에 그 말을 듣는 순간 멈칫했다.강소영은 눈물이 그렁한 채로 얼굴을 품에 파묻더니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잃고 싶지 않으니까... 수현 씨, 제발 날 떠나지 마. 응?”진수현은 고개를 숙여 눈앞에 있는 강소영을 바라봤다.강에 빠져 몸부림치며 죽어가고 있을 때 생사를 가리지 않고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강소영을 생각하면 마음이 약해졌다. 보통 사람이 낼 수 있는 용기가 아니었기에 얼마나 그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고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 나무랄 수가 없었다.그 기억이 떠오른 진수현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토닥였다.“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쉬어.”그의 말투가 부드러워진 걸 알아차린 강소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나 그녀의 유일한 비장의 무기답게 목숨 구해준
가린다고 해도 흉터가 생기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의사가 떠난 후 강소영은 진수현을 바라보며 칭얼거렸다.“수현 씨, 흉터가 남을 거라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우울하네. 나중에 흉터가 생기면 못생겨지겠지? 못생겨졌다고 날 버리면 안 돼.”고민도 없이 대답해야 할 말인데 차마 입 밖으로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다.“일단 쉬면서 치료부터 받아.”원하는 답을 듣지 못해 실망한 강소영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진수현이 심윤아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었다.뭐가 됐든 강소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를 다른 사람에게 뺏길 생각이 아예 없었고 생명의 은인이라는 카드를 잘 이용하여 진수현의 마음을 사로잡기로 다짐했다....심윤아는 잠에서 깨자마자 어지러움을 느껴 잠깐 누워있다가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어 곧장 세면대에 엎드려 한참 동안 헛구역질을 했다.마침내 온몸에 힘이 풀리는 듯 화장실 문에 기대어 앉았다.왜 요즘 따라 헛구역질이 심한지 알 수 없었다. 심윤아는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싶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배를 쓰다듬었다.그렇게 앉아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후 따뜻한 물 몇 모금 마신 뒤 절친 주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주현아는 최근에 헛구역질이 심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걱정하며 말했다.“연차쓰고 나랑 같이 병원 가자.”“응. 그럴 생각이야.”전화를 끊은 심윤아는 연차 신청 때문에 진수현에게 연락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임연수에게 문자를 보냈고 오늘 개인적인 사정으로 출근 못하니 진수현이 출근하면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같은 시각 임연수는 막 일어나서 하품하고 있었는데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윤아 님이 왜 이걸 대신 전해달라고 하는 거지? 대표님한테 직접 얘기해도 될텐데... 설마 또 강소영 그 여자 때문인가?”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임연수는 화를 내며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욕설을 퍼부었다.“대표님 진짜 바람둥이네! 윤아 님을 괴롭히다니, 절
병원에 도착한 후 주현아는 접수번호를 뽑고 비용을 지불하며 바삐 돌아다녔다.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심윤아는 구석에 있는 의자에 웅크리고 있었고 주현아가 모든 일을 마친 후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심윤아의 모습에 주현아는 걱정이 앞섰다.“괜찮아? 임신했는데 왜 몸이 더 아픈 것 같지?”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뻗어 심윤아의 이마를 만졌고 열이 없는 걸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열이 없다면 입덧으로 인한 불편함이 가능성이 컸기에 자연스레 다른 문제도 배제할 수 있다.심윤아는 초조한지 무의식적으로 손을 쓰다듬었다.“다른 건 다 괜찮은데 계속 졸려. 입덧이 심할 때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데 계속 단 게 땡겨.”“단 걸 먹고 싶다고? 단 음식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 좋을 텐데 너 같은 임산부는 아예 먹으면 안될걸? 이따가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보자.”그녀의 제안에 심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주현아는 어떤 제안을 해도 얌전하게 다 동의하는 심윤아를 보면서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그때의 심윤아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나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기쁜척했지만 외로움이 느껴졌고 말을 잘 듣는 것 같아도 숨기고만 싶은 우울함이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아이였다.원래 이런 모든 건 진수현이 해야 하는 것들인데... 그는 지금 병원에서 다른 여자를 돌보고 있다.그 생각에 목이 메어온 주현아는 저도 모르게 심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옆에 있을게.”‘빌어먹을 자식,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주현아는 마음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진수현을 저주했다.두 사람은 병원에서 한 시간 가까이 검사를 받았고 병원에서 나오자 어느덧 점심이었다.컨디션이 안 좋은 데다가 병원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검사까지 받으니 심윤아의 안색은 말이 아니었다.주현아는 그녀의 팔을 부축하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다.“아무 문제 없어서 다행이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주현아는 그녀가 마음이 산산조각 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진수현의 곁을 떠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주현아는 식사 도중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런 질문하는 게 실례인 건 아는데... 할머님은 언제쯤 수술받으셔? 요양원이 아니라 집에 계신 거지?”“응.”심윤아는 주현아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전혀 개의치 않았고 절친에게 숨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집에서 요양 중인데 정확한 수술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 지난번 할머니가 쓰러진 일 때문에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할머니가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하셨거든. 2차 스트레스로 이어지지 않도록 시간을 주는 게 좋다고 하셨어.”그 말을 듣고 있던 주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이 일은 또 미뤄야 한다는 거네?”“응. 할머니의 병세가 중요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어.”심윤아가 아니었기에 그녀의 입장에서 고려하기보다 주현아는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친구의 입장에서는 심윤아가 제일 중요했다.주현아는 입술을 깨물며 걱정거리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강소영이 너한테 안 좋은 일 저지를까 봐 걱정돼.”어젯밤에 일어난 일만으로도 강소영이 얼마나 심윤아를 원망하고 미워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심윤아가 진수현옆에 2년이나 있었으니 원망의 감정이 생긴 걸 어느정도 이해할 수는 있으나 주현아는 이런 감정들이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심윤아가 내연녀도 아니고, 강소영과 진수현이 만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악감정을 가지고 있냐는 말이다.생각할수록 화가 점점 치밀어 오른 그녀는 행동마저 거칠어졌다.“주현아, 나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사리 분별 능력은 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네가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있을 거란 보장은 없잖아. 모든 사람이 인성 바르다면 어젯밤 같은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강소영은 지금 어때?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얼굴 망가진 거 아니야?”이 말을 꺼내자 심윤아는 저도 모르게 눈빛이 어두워졌고 말투마저 싸늘하게 변했다.“망가지는
예전에 강소영과 계약을 맺은 건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서였다.하지만 현재의 분위기로 봐서는 이번 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될 건 분명했고 심윤아가 강소영을 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실이 뭐가 됐든 강소영은 모든 걸 심윤아에게 떠넘길 테니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는 건 물 건너 간 거나 다름없다.가장 중요한 건 이번 일을 겪으면서 강소영에 대한 경계심이 생겼다는 것이다.처음에는 강소영이 연약한 척 연기하는 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욕심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상상과 너무도 다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연약한 겉모습 뒤에는 남을 모함하려는 사악한 마음이 숨어있었다.온갖 생각이 떠오른 심윤아는 주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스스로 주의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봐봐, 지금도 날 해치려다가 실패했잖아? 오히려 화를 입었으니 쌤통이지 뭐.”“하긴.”주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자신이 한 짓만큼 돌려받는 걸 보니까 속이 통쾌하긴 하네.”“맞아.”말이 끝나는 동시에 종업원이 디저트를 심윤아에게 건네줬고 그 모습을 본 주현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심윤아, 너 내가 안 보는 틈타서 몰래 디저트 하나 더 시켰지? 의사 선생님 말씀은 안중에도 없는 거야?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잖아.”“알아. 몇 입만 더 먹을게.”“안돼. 너 아까도 일 인분 다 먹었어.”“그럼 한입만.”심윤아는 흥정을 시도했다.“안돼! 절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으니까 포기해.”...점심을 먹고 나서 두 사람은 백화점으로 향해 밤늦게까지 쇼핑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하루 종일 방해금지 모드를 켰던 심윤아는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그것을 껐다. 곧바로 임연수의 카톡이 쏟아졌는데 대부분 업무와 관련된 일이라 하나씩 읽어보며 정성스레 답장을 보냈고 그 후 진수현의 카톡도 발견했다.첫 번째 카톡.「어디야?」두 번째 카톡은 30분 정도 지나서 보내온 것인데 아마도 전화를 받지 않아서 이런
“그렇군요. 그럼 사모님, 전화는 왜 안 받으셨어요? 사모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도련님이 미칠 지경이었어요.”‘미칠 지경?’심윤아의 입꼬리가 눈에 띄지 않게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눈빛엔 비아냥거림이 스쳤다. ‘단어 사용 참...’만약 박범수가 전부터 항상 진수현의 좋은 말만 하지 않았다면 심윤아는 아마 그 말이 진짜라고 믿어버렸을 것이다. ‘전화도 아마 강소영의 병실에서 한 거겠지.’“어젯밤 잠들기 전에 무음 모드로 해놨었거든요. 일어나서는 그걸 깜빡해서요.”심윤아가 나지막이 해명했다. 그 말을 들은 박범수는 그제야 이해가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범수가 손에 들린 쇼핑백을 들어주려고 하자 심윤아가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마침 올라가서 정리를 하려던 참이라, 제가 들고 올라가면 돼요.”“그럼 사모님, 제가 위층으로 가져다드릴게요.”“괜찮아요. 제가 하면 돼요.”심윤아가 완곡하게 박범수의 호의를 거절하고 직접 봉투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박범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뻘쭘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막 진수현에게 전화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도련님. 네네. 사모님께서 막 돌아오셨어요.”계단을 오르던 심윤아의 귓가로 진수현에게 보고하는 박범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정말 관심이 많네. 수시로 전화해 확인하다니. 차라리 일단 병실에서 좀 나오지 그래?’심윤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봉투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짐을 정리해야 했기에 심윤아는 샤워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봉투를 열어 할머님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먼저 드리고 돌아와 다른 걸 정리했다. 사실 쇼핑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임신하기 전 심윤아의 옷은 전부 몸매가 잘 드러나는 것들이라, 그녀는 오버사이즈의 옷을 사고 싶었다. 아직 몇 개월 되지 않아 원래 있던 옷을 입어도 티가 나지 않았지만 미리 준비해야했다. 지금부터 천천히 스타일을 바꿔야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았다. 다행히도 지금은 겨울이
“아무것도 아니야.”심윤아가 진수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난 그냥 네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뿐이야. 그러니까 네가 왜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웠는지 이해가 되더라고. 넌 소영 씨를 아끼니까 당연히 소영 씨를 이해할 수 있겠지.”심윤아가 이런 말을 할 때, 진수현은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래서?”진수현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은 독기가 서려 있었다. “내 말은, 네가 소영 씨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고.”심윤아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또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만약 내가 너라면 나도 그렇게 했을 거야.”심윤아는 누군가에 의해 목숨을 건진 적이 없었고, 진수현이 겪었던 그런 절망도 겪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해 볼 수는 있었다. 비록 진수현 마음의 10분의 1 정도밖에 공감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당장이라도 질식해 죽을 것 같은 그 순간, 누군가 당신에게 구원의 손을 뻗는다는 건 오랜 가뭄에 단비처럼, 어두운 밤에 비치는 한 줄기의 빛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진수현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도 그렇게 할 거라고? 넌 이미 내가 너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심윤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위로 예쁘게 말려 올라간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중요한 건, 심윤아는 이미 어젯밤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사실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 만약 어제까지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면, 오늘부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쇼핑한 심윤아는 마음이 편안하다고 느껴졌다. 지금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은 단 한 가지였다. 할머니가 수술을 마치면 진수현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래?”진수현이 입꼬리를 내리며 심윤아가 새로 산 옷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이 점차 어두워졌다. “중요하지 않으면, 그만하자.”‘그만하자.’‘그만하지 않으면 또 어쩔 건데?”심
두 사람 사이는 굉장히 가까웠다. 진수현은 눈을 내리깔고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엔 심윤아의 하얀 피부와 부드러운 솜털, 그리고 연핑크의 입술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선 은은한, 과거의 진수현에겐 너무도 익숙한 향기가 풍겼다. 심윤아는 절대 향수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진수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심윤아가 사용하는 바디워시와 청량한 샴푸 향이었다. 심윤아의 향을 느끼며 진수현은 심윤아를 품에 안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전의 진수현이라면 그렇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막 손을 올리려는데, 심윤아가 물러서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다 됐어.”그녀의 차갑고 냉담한 눈빛이 순간 진수현의 가슴을 쿡 찔렀다. 말랑해졌던 마음은 그 순간, 전부 사라졌다. 진수현이 입꼬리를 올려 냉소 지었다. “수고했어. 이렇게 실감 나게 연기하다니.”그 말을 들은 심윤아가 움찔하더니 곧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수고는.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그녀의 반응은 마치 솜방망이처럼 진수현에겐 전혀 타격이 없었다. 진수현은 차갑게 비웃으며 시선을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잠깐만.”심윤아가 그를 불러세웠다. 진수현이 걸음을 멈추었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그는 다만 냉담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 그녀가 하는 말을 들을 생각이었다. 한참 후에야 심윤아는 생각을 정리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진수현을 떠보았다. “할머니 요즘 어떠신지, 의사에게 연락 온 거 있어?”진수현은 처음엔 그저 할머니를 걱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뒤이은 질문에 심윤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는 비꼬듯 입꼬리를 씩 올렸다. “급해?”진수현에게 정곡을 찔렸어도 심윤아는 전혀 화내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급한 건 아냐. 하지만 할머님 건강 말이야. 너무 오래 미루면 더 안 좋아지실 것 같은데.”진수현이 몸을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심윤아를 쳐다보며 서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대체 미루다 할머니 건강이 악화할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