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군요. 그럼 사모님, 전화는 왜 안 받으셨어요? 사모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도련님이 미칠 지경이었어요.”‘미칠 지경?’심윤아의 입꼬리가 눈에 띄지 않게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눈빛엔 비아냥거림이 스쳤다. ‘단어 사용 참...’만약 박범수가 전부터 항상 진수현의 좋은 말만 하지 않았다면 심윤아는 아마 그 말이 진짜라고 믿어버렸을 것이다. ‘전화도 아마 강소영의 병실에서 한 거겠지.’“어젯밤 잠들기 전에 무음 모드로 해놨었거든요. 일어나서는 그걸 깜빡해서요.”심윤아가 나지막이 해명했다. 그 말을 들은 박범수는 그제야 이해가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범수가 손에 들린 쇼핑백을 들어주려고 하자 심윤아가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마침 올라가서 정리를 하려던 참이라, 제가 들고 올라가면 돼요.”“그럼 사모님, 제가 위층으로 가져다드릴게요.”“괜찮아요. 제가 하면 돼요.”심윤아가 완곡하게 박범수의 호의를 거절하고 직접 봉투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박범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뻘쭘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막 진수현에게 전화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도련님. 네네. 사모님께서 막 돌아오셨어요.”계단을 오르던 심윤아의 귓가로 진수현에게 보고하는 박범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정말 관심이 많네. 수시로 전화해 확인하다니. 차라리 일단 병실에서 좀 나오지 그래?’심윤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봉투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짐을 정리해야 했기에 심윤아는 샤워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봉투를 열어 할머님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먼저 드리고 돌아와 다른 걸 정리했다. 사실 쇼핑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임신하기 전 심윤아의 옷은 전부 몸매가 잘 드러나는 것들이라, 그녀는 오버사이즈의 옷을 사고 싶었다. 아직 몇 개월 되지 않아 원래 있던 옷을 입어도 티가 나지 않았지만 미리 준비해야했다. 지금부터 천천히 스타일을 바꿔야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았다. 다행히도 지금은 겨울이
“아무것도 아니야.”심윤아가 진수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난 그냥 네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뿐이야. 그러니까 네가 왜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웠는지 이해가 되더라고. 넌 소영 씨를 아끼니까 당연히 소영 씨를 이해할 수 있겠지.”심윤아가 이런 말을 할 때, 진수현은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래서?”진수현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은 독기가 서려 있었다. “내 말은, 네가 소영 씨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고.”심윤아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또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만약 내가 너라면 나도 그렇게 했을 거야.”심윤아는 누군가에 의해 목숨을 건진 적이 없었고, 진수현이 겪었던 그런 절망도 겪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해 볼 수는 있었다. 비록 진수현 마음의 10분의 1 정도밖에 공감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당장이라도 질식해 죽을 것 같은 그 순간, 누군가 당신에게 구원의 손을 뻗는다는 건 오랜 가뭄에 단비처럼, 어두운 밤에 비치는 한 줄기의 빛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진수현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도 그렇게 할 거라고? 넌 이미 내가 너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심윤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위로 예쁘게 말려 올라간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중요한 건, 심윤아는 이미 어젯밤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사실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 만약 어제까지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면, 오늘부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쇼핑한 심윤아는 마음이 편안하다고 느껴졌다. 지금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은 단 한 가지였다. 할머니가 수술을 마치면 진수현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래?”진수현이 입꼬리를 내리며 심윤아가 새로 산 옷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이 점차 어두워졌다. “중요하지 않으면, 그만하자.”‘그만하자.’‘그만하지 않으면 또 어쩔 건데?”심
두 사람 사이는 굉장히 가까웠다. 진수현은 눈을 내리깔고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엔 심윤아의 하얀 피부와 부드러운 솜털, 그리고 연핑크의 입술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선 은은한, 과거의 진수현에겐 너무도 익숙한 향기가 풍겼다. 심윤아는 절대 향수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진수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심윤아가 사용하는 바디워시와 청량한 샴푸 향이었다. 심윤아의 향을 느끼며 진수현은 심윤아를 품에 안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전의 진수현이라면 그렇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막 손을 올리려는데, 심윤아가 물러서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다 됐어.”그녀의 차갑고 냉담한 눈빛이 순간 진수현의 가슴을 쿡 찔렀다. 말랑해졌던 마음은 그 순간, 전부 사라졌다. 진수현이 입꼬리를 올려 냉소 지었다. “수고했어. 이렇게 실감 나게 연기하다니.”그 말을 들은 심윤아가 움찔하더니 곧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수고는.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그녀의 반응은 마치 솜방망이처럼 진수현에겐 전혀 타격이 없었다. 진수현은 차갑게 비웃으며 시선을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잠깐만.”심윤아가 그를 불러세웠다. 진수현이 걸음을 멈추었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그는 다만 냉담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 그녀가 하는 말을 들을 생각이었다. 한참 후에야 심윤아는 생각을 정리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진수현을 떠보았다. “할머니 요즘 어떠신지, 의사에게 연락 온 거 있어?”진수현은 처음엔 그저 할머니를 걱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뒤이은 질문에 심윤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는 비꼬듯 입꼬리를 씩 올렸다. “급해?”진수현에게 정곡을 찔렸어도 심윤아는 전혀 화내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급한 건 아냐. 하지만 할머님 건강 말이야. 너무 오래 미루면 더 안 좋아지실 것 같은데.”진수현이 몸을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심윤아를 쳐다보며 서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대체 미루다 할머니 건강이 악화할
심윤아는 아무런 감정 없이, 전혀 힘들이지 않고 진수현이 화를 내며 자리를 피하게 했다. 방을 나서는 진수현의 얼굴은 잔뜩 어두웠다. 그는 하늘이 울리도록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어깨를 으쓱인 심윤아는 진수현이 나가자마자 손으로 자기 배를 살며시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아가, 무서워하지 마. 신경 쓰지도 말고. 나중에 크면 절대 저 인간 닮으면 안 돼. 성질이 정말 더럽거든.”배 속 아이에게 흉을 본 심윤아는 출근 준비를 했다. -막 주차장에 들어선 진수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심윤아 때문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었다. 그는 침울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냈다. 발신자 표시를 확인한 그의 얼굴이 점점 무표정하게 변해갔다. 표정을 싹 감춘 진수현이 전화를 받았다. “진 선생님.”김선월의 주치의인 진우빈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진수현 씨, 안녕하세요.”진우빈의 목소리는 본인만큼이나 부드러웠다. “저는 김선월 님 주치의인 진우빈입니다. 이런 시간에 죄송해요. 요즘 김선월 님 건강이 어떠신지 여쭤보고 싶어서 전화 드렸어요. 시간 되시면 요즘 병원으로 오셔서 검사 받으실 수 있을까요?”그 말에 진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전화를 꽉 움켜쥐었다. “오늘요?”“네.”“그러죠.”전화를 끊고 진수현이 운전석에 앉았다. 어찌나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던 건지 그의 얇은 입술이 더 얇아져 보였다. 할머니가 조금 더 요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진우빈에게서 이렇게 빨리 전화가 올 줄은 몰랐다. ‘하늘의 뜻인가?’방금 내려오기 전에 심윤아도 물었었는데, 바로 진우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하늘도 이렇게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생각하던 중, 진수현은 백미러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심윤아를 발견했다. 추운 날씨라 심윤아는 조금 큰 사이즈의 하늘색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 안엔 캐주얼한 베이지색 니트와 연한 컬러의 바지를 매치했다. 신발은 베이지색의 스니커즈였다. 언제부터인지 심윤아의 코디 스타일이 크게 바뀌었다. 심윤아가 스쳐
“이리 와.”진수현은 오히려 심윤아를 불러세우고 냉담하게 말했다. “같이 가서 얘기하자. 차에 타.”‘차에 타라고?’심윤아는 그의 조수석을 한 번 쳐다보았다. 솔직히 그 자리에 앉고 싶지 않았다. 혼자 운전하는 편이 더 나았다.그녀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진수현은 눈살을 찌푸렸다.“왜? 나랑 평화롭게 지내려던 거 아니었어? 그래도 내 차에 타지 않을 거야?”그 말에 심윤아는 정신을 차리고 살며시 미소 지었다.“아냐. 할머니께 언제 가서 말씀드릴지 생각 중이었어.”심윤아는 말하며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막 자리를 잡고 안전벨트를 하기도 전에 진수현이 차를 출발했다. 깜짝 놀란 심윤아가 고개를 돌리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운전하고 있는 진수현이 보였다. ‘됐어, 심윤아. 어차피 할머님 수술만 끝나면 넌 더 이상 여기 없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진수현이 성질을 부리든 말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절대 침착해야 해. 일 만들지 마.’스스로를 달랜 심윤아는 그제야 올라오던 분노를 가라앉히며 안전벨트를 맸다. 안전벨트를 하자마자 진수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오늘 왜 이렇게 입었어?”다른 질문이라면 심윤아는 평정심을 유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심윤아의 마음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그녀는 잘생긴 진수현의 옆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심윤아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오늘 그저 조금의 변화만 줬을 뿐인데, 뜻밖에도 진수현은 한눈에 알아봤다. “내가 이렇게 입는 게 왜?”그녀는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너답지 않아.”진수현이 말했다. 심윤아는 조금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일부러 공격적으로 말했다. “뭐가 나답지 않아? 설마 난 한 가지 스타일로만 입어야 하는 거야?”“너 전엔 이런 스타일 안 입었잖아.”사실 진수현이 신경 쓰는 건, 그녀가 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스타일을 바꿨냐는 것이었다. 뭘 입든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은연중에 심윤아는 많은 것이 변하고 있었고, 자신은
각자 업무에 복귀한 후, 심윤아는 성실하게 업무에 임했다. 위층으로 올라가기 전, 두 사람은 내일 할머니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기로 약속했다. 저녁에 퇴근해서 할머니한테 말씀드리기로 했는데 이혼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입도 뻥끗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난번, 화가 난 두 사람은 아침 일찍부터 법원에 갔었지만 할머니의 수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이혼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할머니가 수술을 마치고 회복이 잘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혼할 생각이었다.의외의 일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고 진수현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점심때가 되자, 심윤아는 여느 때처럼 죽을 사러 내려갔다. 오늘은 다른 야채 죽을 한번 먹어볼 생각이다. 근데 아래층으로 내려와 주문하려는 찰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확인해 보니 이선우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고 심윤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며칠 전에 알게 된 그 주차 공간을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낯익은 차 한 대가 마침 그 자리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녀가 고개가 돌리자 차창이 서서히 내리면서 이선우의 잘생긴 옆모습이 드러났다. 그가 핸드폰을 든 채 심윤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 그를 보게 되니 심윤아는 의외였다.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를 향해 걸어갔다. “여긴 웬일이야?”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이 근처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이렇게 널 만날 줄은 몰랐네. 운이 좋은데.”“이런 우연이 다 있다고?”사실 심윤아는 그의 말에 의심을 품었다. 그가 이 부근에 볼일이 있어 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마침 이곳에 차를 주차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마침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전화를 걸 수 있겠는가?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선물한 넥타이핀을 하고 있는 그를 보고 심윤아는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이선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안 믿어?”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을 뿐 인
그들이 가자마자 이선우는 심윤아에게 차 문을 열어줬다.“타, 땅꼬맹이.”그 말에 그녀는 차에 타지 않고 이선우를 힐끗 쳐다보았다. “더 이상 그렇게 안 부르기로 했잖아.”예전에는 나이가 어렸고 친구로서 이선우가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나이에 그런 소리를 들으니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럼 공주?”심윤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것도 안 돼.”“왜? 공주라고 부르면 그 사람이 생각나는 거야?”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더 들어야지.”그녀가 계속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이선우는 그녀의 이마를 살짝 두드렸다.“안 타고 뭐 해? 타라고 할 때까지 기다릴 거야?”그제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라탔다. 차에 오른 뒤, 심윤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진짜 나 그렇게 부르지 마. 지금 내 신분에는 맞지 않는 거야.”“지금 네 신분이 뭔데?”이선우는 차에 시동을 걸며 담담하게 웃었다.“송별회 때, 다들 너랑 진수현 가짜 결혼이라고 떠벌리고 있었어.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네가 진수현의 와이프 자리를 탐내서 차지하고 있다고 하던데.”정곡을 찌른 그의 말에 심윤아는 반박조차 하지 못하였고 그저 입술만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뾰로통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이선우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화났어?”“아니, 네 말이 사실이야.”“화나지 않았으면 됐어. 지금 네 상황은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쉽게 곤경에 빠지게 될 거니까.”“알아.”사실 그녀는 전에 하마터면 곤경에 빠질 뻔했었다. 다행히 워낙 낙관적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차는 회사 입구를 떠나 차들이 빽빽이 늘어선 거리로 들어섰다. 이선우는 거리의 상황을 살피며 물었다.“소영이의 상처는 어떻게 됐어? 그날 심하게 부딪힌 것 같던데. 흉터라도 남는 거 아니야?”“그럴 거야.”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그럼 진수현은? 요 며칠 계속 병원에서 소영이를 돌보
차 안에서는 침묵이 흘렀고 이선우의 시선은 주위를 훑었지만 전에 화제를 이어가지 않았고 그녀에게 뭘 먹고 싶은지 물었다.심윤아는 고기가 별로 댕기지 않아 점심엔 죽만 먹고 싶었다.하지만 그날 밤 이미 이선우더러 자신과 함께 죽을 먹게 했다 때문에 오늘도 또 죽을 먹자고 제안하는 건 적합하지 않은 듯했다.결국 그녀가 말했다.“네가 정해.”이선우는 그녀의 결정에 의아한 듯 멈칫했다.“확실해? 난 너무 오래 동안 해외에 있었어.”심윤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괜찮아.”어쨌든 그녀는 많이 먹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상관없었다.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한 마디 보탰다.“네가 뭘 먹든 내가 살게.”“그래?”이선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럼 잘 선택해야겠네.”결국 이선우는 한 중식당을 선택했다.심윤아는 차에서 내릴 때 특별히 식당의 인테리어를 눈여겨봤는데 아주 고급스러웠다.심씨 가문이 파산하기 전에 그녀는 친구들과 이런 식당에 자주 와서 식사했었다. 그러나 심씨 가문이 파산한 후… 친구들은 더 이상 모이지 않았다.그녀의 곁에 남은 사람은 주현아밖에 없었다.예전에는 심윤아가 주현아를 데리고 음식점에 다녔었는데 파산 후에는 주현아가 심윤아를 데리고 레스토랑이나 비교적 싼 가격의 음식점에 다녔다.처음 갔을 때 주현아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쳐다보며 말했다.“심윤아, 비록 내가 지금은 너를 데리고 이런 식당밖에 올 수 없지만 걱정 마, 내가 이제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제일 먼저 너한테 거하게 한턱 쏠게.”옛 기억을 떠올리자 심윤아는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비록 나중에 그녀는 다시는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다니지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예전보다 더 따뜻했다.그리고 사람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모든 것을 더 정확히 보는 법이다.이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무슨 생각해?”이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심윤아는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별 거 아니야. 그냥 재밌는 일이 생각났어.”그 말을 듣고 이선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